이건희 스토리
이경식 지음 | 휴먼앤북스
이건희 스토리
이경식 지음
휴먼앤북스 / 2010년 3월 / 512쪽 / 20,000원
1장 아버지와 아들이건희는 1942년 1월 9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위로 형 맹희와 창희 그리고 누나 인희, 숙희, 순희, 덕희가 있었고, 아래로는 여동생 명희가 생겼다. 당시 아버지는 대구 서문시장 근처에서 삼성상회를 경영하고 있었고, 이 사업이 청과물과 건어물을 만주 등지로 파는 무역회사로 점차 자리를 잡아나가고 있던 터라 아버지와 어머니는 무척 바빴다. 그 바람에 어머니(박두을)는 막내아들 건희가 젖을 떼자마자 의령의 친가로 보냈다. 그래서 건희는 할머니가 어머니인 줄 알고 자랐다.
나는 가정교육을 1퍼센트도 받지 않았다: 해방 후가 되어서야, 건희는 처음으로 부모형제와 함께하는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1947년에 이병철이 사업을 확장하려고 서울로 이사를 했고, 2년 뒤인 1949년에 혜화초등학교에 입학했다.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이병철 일가는 공산 치하에서 3개월 동안 모진 어려움을 겪는다. 이병철은 타도 대상인 '자본가'였기 때문이다. 서울 수복 후에 이병철 일가는 마산으로 내려갔고, 거기에서 건희는 다시 초등학교에 다녔다. 하지만 금방 대구로 이사를 갔고, 건희는 또 다시 전학을 해야 했다. 하지만 대구 생활도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이병철이 부산의 동광동으로 자리를 옮겨 사업을 재개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초등학교 때 한국에서만 모두 다섯 번이나 전학을 한 것이다. 부산사범부속초등학교 5학년이던 1953년, 아버지는 건희에게 '선진국을 보고 배우라'며 일본 도쿄로 유학을 보낸다. 모진 아버지였다. 이제 겨우 열한 살인 아이를, 그렇지 않아도 애정에 목이 말라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어린아이를 자기 곁에서 내쫓았다.
이건희 회장은 한 인터뷰에서 '혼자 자라서 가정교육을 1퍼센트도 받지 않았다'고 밝힌 적이 있다. 와세다 대학교로 유학을 가기 전에 건희가 가족과 함께한 기간은 할머니 댁에서 돌아온 1945년부터 초등학교 5학년이던 1953년까지 8년, 그리고 중학교 2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4년, 모두 12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자랐다고 하며 가정교육을 1퍼센트도 받지 않았다고 말한 건 분명 과장이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이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을 할 때는 전혀 과장하는 어투가 아니었다. 진실로 그렇게 믿고 있다는 뜻이었다. 혼자 보내야 했던 어린 시절의 외로움이 12년 세월 동안 가족과 함께했던 시간의 기억까지 덮고 지워 버릴 만큼 컸던 것이다. 소년 건희는 외톨이였다.
사람에 대한 공부: "나는 사람에 대한 공부를 제일 열심히 한다." 고등학교 시절 홍사덕이 친구이던 당시의 건희를 회고하는 내용 가운데 한 부분이다. 사람에 대한 공부를 제일 열심히 한다……. 무서운 말이다. 더더군다나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기에 가족과 또래 집단으로부터 소외되어 놀림과 괴롭힘을 당하며 외로움에 떨었던 소년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소름이 끼치도록 무섭다.
건희에게 시련은 단련의 과정이었다. 늘 외톨이로만 살았던 환경 덕분에 장차 삼성의 핵심 전략이 될 신경영의 이른바 '인재 경영'이나 '천재 경영'의 안목을 기르고 있었던 셈이다. 이건희 회장은, 리더는 종합예술가가 되어야 한다면서 알아야 하고[知], 행동해야 하며[行], 시킬 줄 알아야 하고[用], 가르칠 수 있어야 하며[訓], 사람과 일을 평가할 줄 아는 것[評]을 리더의 덕목으로 내세운다. 그런데 건희는 이 시기에 이미 사람을 대상으로 혹은 목적으로 파악하고 공부함으로써, 그 가운데 '시킬 줄 아는 것'과 '사람과 일을 평가할 줄 아는 것'을 훈련하고 있었던 것이다.
건희는 서울사대부고를 졸업하고 1961년에 연세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다시 건희를 곧장 일본으로 유학시켰다. 자기가 졸업한 와세다대학교 상학부였다. 선진국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게 아버지의 신념이었다. 사람에 대한 공부를 제일 열심히 하는, 바로 그 자세로 주변 사람을 대하는 건희의 태도는 와세다 대학에 다닐 때에도 변함이 없었고, 사람에 대한 공부는 자연스럽게 해당 분야의 일인자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영화감독을 꿈꾸던 소년 이건희: 다시 일본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이건희로 돌아가 보자. 소년 건희는 메기에게 쫓기는 미꾸라지처럼 절박하게, 외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바쁘게' 영화를 보았다. 아니, 영화에 몰입했다. 소년 건희가 일본에서 초등학교 2년과 중학교 1년, 총 3년 동안 보았던 영화를 합산하면 1,200~1,300편이 된다고 한다. 하지만 소년 건희가 영화를 보면서 얻은 것은 영화에 대한 사랑이나 외로움으로부터의 탈출만이 아니었다. 이때의 경험은 그에게 소중한 훈련이었기 때문이다. 발상을 한층 입체적으로 고도화하는 훈련. 이는 앞서 살펴보았던 '사람 공부'의 연장선이기도 했다. 주연뿐 아니라 등장인물 각자의 처지에서 보면 영화에 나오는 모든 사람의 인생까지 느끼게 된다. 거기에 또 감독, 카메라맨의 자리에서까지 두루 생각하면서 보면 또 다른 감동을 맛볼 수 있으며, 이것이 습관으로 굳어지면 입체적으로 보고 입체적으로 생각하는 '사고의 틀'이 만들어진다는 게 이건희 회장의 생각이다. 이건희 회장은 회의를 주재하거나 강연할 때 혹은 계약을 할 때, 영화를 볼 때와 마찬가지로 상대방의 입장과 관점에서 생각하고 예측한다는 말이다.
아버지 이병철: 1961년 초, 연세대학교에 합격한 막내아들에게 아버지는 다시 일본 유학을 권유했다. 유학을 가기 이틀 전, 아버지는 건희를 불렀다. "네 성격엔 기업이 안 맞는 것 같다." 아버지가 말한 '기업'이란 제조업을 뜻하는 것이었다. "매스컴이 어떠냐?", "좋습니다.", "그래, 경영학을 하면서 매스컴에도 신경을 써서 공부해라." 부자 사이의 대화는 그게 다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건희에게 삼성의 주력인 '기업' 즉 제조업을 맡길 생각은 없었던 듯하다. 건희에게 매스컴에 신경을 쓰라고 한 것은 삼성이라는 가업의 중심을 맡기기보다는 매스컴 관련 사업을 한두 개 맡길 생각이었다.
오타쿠의 세상 속에서: '오타쿠'는 일본말로 무언가에 광적으로 매달리는 사람을 뜻한다. 건희는 어릴 적부터 오타쿠였다. 그의 몰두 대상은 숱하게 많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기계였다. 이건희가 기계광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서가엔 경영학 서적보다 전자, 우주, 항공, 자동차, 엔진공학, 미래공학 등의 전문서적이 더 많다. 전자 제품이나 각종 기계를 분해하고 조립하면서 기능과 성능을 공부했으며, 아예 기술자를 집으로 불러 직접 설명을 듣기도 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그는 전자 부품의 소소한 기능까지도 두루 꿰고 있다. 웬만한 전자제품은 전문 기술자보다 해체 조립을 능숙하게 더 잘한다. 이런 집착과 몰두 행위가 이건희의 사고 특성으로 자리 잡으면서, 이제는 어떤 대상을 보든 '속을 봐야' 직성이 풀리게 되었다. 집착과 몰두에 '목적'이라는 방향성이 결합하자 그것은 집념이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나중에 삼성 개혁의 핵심적인 전략이자 철학인, 이른바 '본질주의'로 나타난다. 또 이런 유형의 인재를 찾는 '천재 경영'을 추구한다.
부인 홍라희를 만나다: 1965년에 와세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가서 조지워싱턴 대학교의 경영대학원에서 공부하다 일본 동경으로 돌아왔다. 스물넷이었던 1966년 가을 건희는 평생의 동반자가 될 여성을 만났다. 여자의 이름은 홍라희였고, 덕수초등학교와 경기여중고를 거쳐 서울대학교 응용미술학과에 재학 중이던 대학생이었으며, 나이는 건희보다 세 살 아래였다. 라희는 선을 보러 어머니와 함께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고 건희가 두 사람을 마중했다. 라희는 1945년 7월생으로 아버지 홍진기가 전주에서 판사로 있을 때 태어난 맏딸이었다. 이 딸은 홍진기에게는 '전라도에서 얻은 기쁨'이었다. 그래서 이름을 '라희(羅喜)'로 지었다. 홍진기는 1964년 삼성이 세운 서울중앙라디오방송 사장으로 취임했고 1966년에는 역시 삼성이 세운 중앙일보에서 이병철의 뒤를 이어 대표이사 사장이 되었다. 1967년 1월 두 사람은 약혼을 하고, 라희가 대학교를 졸업한 뒤인 4월 30일에 결혼했다.
2장 메기와 미꾸라지사카린 밀수 사건의 여파로 경영 일선에서 은퇴한다고 선언한 뒤 일을 점차 장남인 맹희에게 넘기고 있던 이병철은 1967년 7월 첫 월요일, 이맹희를 처음으로 삼성의 총수로 정하고, 삼성을 이끌어 갈 권리를 부여한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직 후계자를 최종적으로 결정한 게 아니었다. 이런 사실은 나중에야 드러난다. 아버지의 후계자 지명은 여전히 진행형이었던 것이다. 단지 이때는 맹희를 후계자로 삼아야겠다는 쪽으로 조금 더 기울어져 있을 뿐이었다. 이병철은 아들에게 이런 질문을 가끔 던지곤 했다. "맹희야, 니는 내가 죽기 전에 삼성을 100배로 늘릴 자신이 있나?", "맹희야, 니, 삼성을 세계의 삼성으로 만들 자신이 있나?" 뜨거운 피가 끓던 서른여섯 살의 청년 황제 이맹희는 우선 한국비료 사건으로 나락에 빠진 삼성을 살리려고 정력적으로 뛰었다.
그러나 이병철이 없는 삼성의 조직은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었다. 이병철이 이 같은 사실을 정식으로 보고받은 것은 1968년 새해 아침이었다. 이병철 회장이 30년 가까이 가꾸어 온 삼성이라는 조직은 30대 청년의 의욕만으로는 쉽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창업 공신들이 반발을 했고 여기저기에서 불평이 터져 나왔다. 이러다가는 삼성이 망하겠다는 말들도 나왔다. 하지만 이병철은 일단 아들을 믿고 맡긴 이상 아들에게 힘을 실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했다. '메기를 풀어서 미꾸라지를 긴장하게 만들어야겠군!'
아버지의 의중과 세 아들: 1968년 말, 아버지는 미국에 나가 있던 막내 건희를 불렀다. 아버지는 이 막내아들을 중앙매스컴(나중의 동양방송과 중앙일보) 이사로 임명했다. 이건희가 공식적으로 처음 삼성이라는 조직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그것도 장인인 홍진기가 이끌고 있는 중앙매스컴이었다. 1966년 9월 22일에 은퇴를 선언한 뒤로 이병철은 후계자로 이맹희를 일단 선택했다. 당시는 '사카린 밀수 사건'과 삼성에 대한 비난을 잠재워야 했기 때문에 서둘러 은퇴를 선언했던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충격이 진정되자 이병철은 예전의 냉철함을 되찾았고, 후계자 문제를 원점에 놓고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맹희는 아버지의 뒤를 이을 사람이 자기라는 사실을 기정사실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아버지의 태도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하는 걸 감지했다. 어느새 아버지는 예전의 그 냉철한 회장으로 돌아와 있었다. 건희가 자기 장인이 사장으로 있는 중앙매스컴에 들어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맹희는 충분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창업공신들은 자신의 개혁 조치에 반발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아버지 이병철이 '고락을 함께한 동지'라고 여기던 홍진기는 사위에게 집중적으로 경영수업을 시키고 있었다.
왕자의 난: 이런 상황에서, 맹희보다는 오히려 차남인 창희가 더 큰 위기의식을 느꼈다. 밀수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1967년 3월에 병보석으로 풀려나온 창희는 아버지의 마음이 차츰 동생 건희에게로 옮겨가는 걸 알아차렸다. 창희는 건희를 앞세운 홍진기의 역성혁명을 막아야 한다고 주변 사람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맹희는 물론이고 맹희와 창희를 따르던 삼성의 간부들도 인륜을 어기는 일이라면서 이 일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러나 창희는 끝내, 이병철이 부정한 짓을 저질렀으니 기업에서 영원히 손을 떼게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의 탄원서를 박정희 대통령 앞으로 보냈다. 당시 창희는 아버지와 건희뿐만 아니라 맹희까지 몰아낼 생각을 했다. 창희 입장에서는 삼성의 총수가 되는 데 방해가 되는 사람은 누구든 몰아내야만 했다. 결국 창희는 한국을 떠나라는 아버지의 말이 떨어지고 한 주가 채 지나기도 전에 짐을 싸서 출국했다.
아버지의 복귀와 삼성전자: 이병철은 1966년 8월의 은퇴 선언 이후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위기를 맞은 삼성이 재도약할 수 있는 방안을 전자산업에서 찾았다. 장남인 맹희와 함께 자동차산업과 전자산업을 놓고 고심하다가 전자산업을 택한 것이다. 1968년 초여름인 6월 12일, 이병철은 일본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경영 일선 복귀와 전자산업 진출을 선언했다. 그리고 1969년에 삼성전자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1973년, 1월부터 기분 좋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삼성전자에서 만든 텔레비전의 미국과 캐나다 처녀 수출이 1월 21일에 무사히 이루어졌다는 내용이었다. 그즈음 이병철은 총수 자리로의 복귀 수순을 차근차근 밟아나갔다. 승부수로 띄운 삼성전자가 무사히 뿌리를 내렸다. 이제 도약을 시켜야 했다. 그러려면 일사불란하고 강력한 지도력이 필요했다.
마침내 맹희는 총수의 역할을 아버지에게 돌려주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6개월 동안 별로 하는 일도 없이 보내다가 일본으로 갔다. 할 일이 있어서 간 게 아니라 '쉬러' 갔다. 하지만 이 휴가가 영원한 휴가가 될지 맹희는 알지 못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버지의 후계자는 자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보다도 아버지를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아버지의 호수가 얼마나 넓은지 그리고 아버지의 바위가 얼마나 단단하게 흔들리지 않는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아버지의 유언: 1971년에 1월, 삼성 본관의 회장 집무실에서 이병철 회장은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유언장을 적어나갔다. "장남 맹희는 경영에 뜻이 없고, 차남 창희는 많은 기업을 하기 싫어한다. 이러한 뜻을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다. 삼남 건희도 당초에는 본인이 사양했으나 마지막에는 '역량은 부족하나 맡아보겠다'는 뜻을 가져주었다. 이러한 경위로 삼성그룹의 후계자는 건희로 정한 만큼, 건희를 중심으로 삼성을 이끌어 갈 것이며 홍진기 중앙일보 회장이 뒷받침해서 승계해주기 바란다."
이병철 회장은 1976년 9월에 위암 판정을 받았다. 이병철은 수술을 받기 위해 일본으로 떠나기 전에 가족들을 불러 놓고 말했다. "앞으로 삼성은 건희가 이끌어 가도록 하겠다." 그러나 위 절제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바뀐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병철 회장은 다시 삼성그룹의 총수로 일선에서 지휘를 했다. 그리고 1977년 8월, 이병철 회장은 《닛케이 비즈니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삼남 이건희가 삼성의 후계자임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3장 목계가 되어라중국의 주나라 선왕은 닭싸움을 좋아했다. 그 나라에는 닭을 잘 훈련시키기로 소문이 난 기성자라는 사람이 있었다. 선왕은 기성자를 불러서 닭 한 마리를 내주며 싸움을 잘하는 닭으로 훈련시키라고 명했다. 오랫동안 닭을 훈련시킨 뒤 기성자는 선왕에게 닭을 바치며 말했다. "이제는 상대 닭이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덤벼도 동요하지 않습니다. 마치 나무를 깎아서 만든 닭과 같습니다. 덕이 충만하여 그 모습만 보아도 상대 닭은 등을 돌리고 도망을 칩니다." 『장자』의 '달생편'에 나오는 우화이다. 이 우화에 등장하는 나무를 깎아서 만든 닭, 즉 목계를 아버지 이병철은 거실에 걸어놓고 늘 자신을 경계했다. 그리고 어린 건희에게 이 우화를 들려주며 말했다. "말을 많이 하지 마라. 말을 많이 하면 허점이 저절로 드러난다. 표정을 바깥으로 드러내 보이지 마라. 표정을 드러내면 무게가 없어진다."
경청: 1979년 2월 28일 아침, 삼성 본관 28층 부회장 집무실. 아버지 이병철 회장 집무실과 나란히 붙어 있는 방이었다. 이건희는 부회장으로서 아버지를 모시고 첫 출근을 한 다음 자기 자리에 앉았다. 이때 노크 소리가 났다. 회장님이 부르신다고 했다. 이병철은 붓을 들고 한 획씩 그어나갔다. 숙연한 얼굴이었다. 傾聽. 경청, 아버지가 후계자로 내정한 아들에게 맨 처음 준 교훈이었다. "이게 무슨 뜻인지는 알제?" 잘 알았다. 남의 말을 잘 들으라는 뜻이었다. 총수 자리를 물려줘도 되겠다고 자기가 인정하기 전까지는 잠자코 듣기만 하지 나서지 말라는 말이었다. 자기를 넘어서는 능력을 갖추기 전까지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자기가 하는 말이나 잘 들으라는 뜻이었다. 되지도 않게 나서다가는 맹희와 창희를 내칠 때처럼 가차 없이 내치고 말 테니, 그리 알라는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