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차일드 신화
리룽쉬 지음 | 시그마북스
로스차일드 신화
리룽쉬 지음
시그마북스 / 2010년 1월 / 448쪽 / 18,000원
수차례 희망을 빼앗겼을 때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는 세계 최고의 유대계 부호 가문인 로스차일드 가문의 창시자인데, 1744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유대인 격리 지역의 한 허름한 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가난한 보따리장수로 1년 내내 유럽 각국의 골목을 누비며 장사를 했는데, 아들이 공부를 해서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랍비가 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하지만 로스차일드는 학자가 될 재목은 아니었다. 그리고 로스차일드가 열한 살 되던 해 전염병인 천연두가 독일 전역을 휩쓸어 부모가 모두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결국 하노버에 사는 외삼촌이 로스차일드를 데려가 현지에서 유명한 오펜하이머 은행의 사환으로 취직시켰는데, 하노버 은행은 로스차일드가 견문을 넓히는 데 큰 몫을 하였다.
열한 살부터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인고의 시간을 보낸 끝에 로스차일드는 드디어 법적 성년이 되었는데, 그때 그는 오펜하이머 은행을 떠나 프랑크푸르트로 돌아가겠다는 결정을 내려 아버지가 물려준 프랑크푸르트의 낡은 집으로 이사했다. 그런데 필요한 생활용품을 구입하고 나니 남는 돈이 거의 없어 어쩔 수 없이 일을 찾으러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당시 독일은 7년 전쟁을 치르는 중이어서 일자리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넝마주이가 되어 부잣집에서 내다버린 쓰레기 더미를 뒤져 낡은 옷가지를 주운 뒤 깨끗하게 세탁해서 도시 빈민들에게 헐값에 팔아 넘겼다. 오랫동안 헌옷 장사를 하면서 로스차일드는 프랑크푸르트 유대인 거리의 엄연한 구제옷 업자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1년 내내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여도 푼돈 벌이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로스차일드가 자신의 가게에 앉아 무료하게 손님을 기다리다가 거리의 부랑아들이 맞은편 골동품 가게들을 순회하는 모습을 발견했는데, 그들은 가게에 들어설 때마다 주머니 속에서 물건을 꺼내 카운터에 올려놓고 가격을 물었고, 가게 주인은 돋보기를 들고 물건을 꼼꼼히 살피더니 흔쾌히 물건을 사들이곤 했다. 로스차일드는 이 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 부랑아들이 쓰레기장에서 오래된 동전이나 훈장들을 주워 파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참고로 당시 유럽 귀족들은 이러한 화폐와 훈장들을 수집했다.
그래서 로스차일드는 쓰레기장에서 돌아온 후 바로 업종을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그 후 그는 낮에는 쓰레기장을 돌고, 저녁이 되면 어두운 촛불 아래서 주워온 주화를 정리하고 분류하고 광을 내는 작업을 했다. 그렇게 한 세트가 모아지면 골동품 가게에 팔았는데, 로스차일드의 물건은 종류도 다양하고 분류도 잘 되어 있어 자연히 부랑아들보다 좋은 값에 팔 수 있었다. 하지만 탐욕스런 골동품 가게 주인들은 터무니없이 값을 깎아 불렀다. 그렇다 보니 어떻게 중간상인을 거치지 않고 고관대작들에게 직접 물건을 판매할 것인가가 로스차일드의 큰 고민거리가 되었다. 로스차일드는 그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쓰레기장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문틈에 꽂혀 있는 편지 한 통을 발견했다. 시정청의 인두세 독촉장이었다. 순간, 그의 고민을 한 방에 날려버릴 좋은 아이디어가 뇌리를 스쳤다. 그것은 바로 편지를 보내 자신의 골동품을 판촉하는 것이었다.
로스차일드의 상업적 재능은 이 편지 마케팅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는 편지 판촉활동에서 두 가지 일을 했는데, 그 첫째는 모든 상품의 가격을 10퍼센트 내린 것이었고, 둘째는 첫 번째 편지 수신인을 당시 프랑크푸르트의 군사 점령자 폰 에스토르프 장군으로 한 것이었다. 2주가 채 되지 않아 프랑크푸르트의 고관대작들은 자신의 집사에게 로스차일드가 물건을 가지고 집을 방문하도록 약속을 잡으라고 명했다. 그 뒤 몇 번의 거래가 성공적으로 이뤄지면서 로스차일드는 프랑크푸르트 골동품계에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안정적인 고객층을 확보한 후, 로스차일드는 사업을 시작할 때 일부러 낮췄던 골동품 가격을 정상적인 시장가격으로 상향조정했다. 그러나 폰 에스토르프 장군에게만은 예외였고, 시간이 흐른 뒤 장군은 이 '예의 바른' 유대인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맨손으로 사업을 일으킨 부호들은 대개 사업 초반에 귀인을 만나 그 귀인의 도움으로 집안을 일으켜 세우곤 하는데, 로스차일드의 일생을 뒤바꾼 귀인은 헤센 왕국의 왕세자 윌리엄이었다.
자초지종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에스토르프 장군이 어느 날 윌리엄에게 현재 옛 주화의 가격상승이 빠르니 이 분야에 투자해 볼 것을 제안하면서 로스차일드를 소개했고, 윌리엄은 그 즉시 장군에게 로스차일드와 만날 수 있도록 약속을 잡아 달라 부탁했다. 로스차일드는 윌리엄과의 첫 만남에서 절판된 15세기 튀링겐의 은화를 대가없이 바쳤고, 윌리엄은 그 주화 세트를 뷔르템베르크 국왕에게 6만 2천 굴덴에 전매했다. 그리고 그렇게 로스차일드가 선물하면 윌리엄이 되파는 식의 거래가 거의 달마다 한 번씩 장장 2년 동안 지속되었고, 이를 계기로 윌리엄은 '왕실 공급상'이라는 직함을 로스차일드에게 하사했는데, '왕실 공급상' 메달을 자신의 가게 문 앞에 단 그 순간부터 로스차일드의 사회적 지위는 180도 변화했다. 한편 사업에 성공한 로스차일드는 구틀과 1770년 가정을 꾸렸다.
부로 통하는 무간도윌리엄은 아버지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은 후, 헤센 왕국의 수도를 하나우에서 카셀로 이전했고, 로스차일드는 그 뒤를 따라 시도 때도 없이 카셀을 들락거렸다. 로스차일드는 돈을 벌려면 권력자에게 접근해야 하고, 권력자에게 접근하고 싶다면 먼저 그 권력자의 측근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이치를 깨달았다. 그래서 로스차일드는 부데루스를 목표로 삼았다. 부데루스는 헤센 왕국의 수석 재정관이었지만 자신만의 고충을 가지고 있었는데, 연공서열을 중시하는 헤센 궁정에서 고속승진을 한 덕분에 모두의 질투를 받아 외톨이였다. 또 윌리엄은 부하들에게도 아주 인색한 편이라 헤센의 공무원들이 받는 월급은 쥐꼬리만 했다. 즉 권력은 있지만 돈이 없는 것이 부데루스의 가장 큰 고민이었는데, 이는 로스차일드가 그를 눈여겨보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궁정 대집사의 도움으로 부데루스와 로스차일드의 만남이 이루어졌고, 처음 만남에서 의기투합했다. 그리고 한두 번 왕래를 하면서 협의를 맺었는데, 부데루스는 로스차일드를 대신해 윌리엄 4세에게서 투자금을 끌어오고, 로스차일드는 이 돈을 굴려 얻은 이윤을 부데루스에게 한몫 떼어주는 식이었다. 로스차일드는 돈과 권력의 이러한 거래에 '생활규칙'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 규칙은 가문 대대로 전해져 훗날 로스차일드 가문이 귀족들과 정경관계를 구축하는 데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처음으로 큰돈을 벌게 된 계기는 덴마크 왕국의 재정파산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보다 자세히 살펴보자. 1802년 나폴레옹은 러시아, 프로이센, 스웨덴, 덴마크와 강제 무장중립 동맹을 맺어 해상운송 금지를 통해 영국을 경제적으로 봉쇄하려고 했다. 이에 영국의 넬슨 장군은 막강한 함대를 이끌고 덴마크를 기습해 덴마크 해군을 섬멸시켰다. 그러자 코펜하겐 주식 거래소에서 투자자들은 덴마크의 주식과 채권을 미친 듯이 투매했고, 결국 덴마크의 국채 가격은 바닥을 쳐 덴마크 왕국은 파산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덴마크 왕국의 국왕은 윌리엄 4세의 친숙부였는데, 덴마크 국왕은 황급히 부유한 조카인 윌리엄에게 재정대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윌리엄은 자신의 친숙부에게 돈을 빌려주면 안면몰수하고 빚 독촉을 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 부데루스와 이런저런 방법을 모색하던 끝에 정부차관 형식이 아닌 상업차관으로 빌려주기로 했다. 그런데 상업차관으로 할 경우 윌리엄이 직접 나설 수 없고, 또 윌리엄과 대대로 거래를 해온 황실상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로스차일드는 순조롭게 윌리엄의 대리인이 되었고, 덴마크 재정대신과 협상을 체결했다. 이 후 1802년에서 1806년까지 로스차일드는 헤센 왕국의 대외 대출업무에 열한 차례 참여했고, 매번 100만에서 400만 굴덴 정도의 거래가 이루어졌는데, 매 거래마다 10퍼센트의 커미션을 받으면서 그는 엄청난 이윤을 남겼다. 물론 부데루스도 마땅히 받아야 할 대가를 챙겼다.
한편 나폴레옹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발전에 두 번째 발판 역할을 했다. 19세기 초, 10년 동안 나폴레옹의 군대는 맹위를 떨치며 전성기를 누렸다. 반면 영국이 조직한 반프랑스 동맹은 연이어 실패를 겪었다. 그런데 프랑스와 겨루어본 적이 없는 프로이센이 주제 파악을 못하고 반프랑스 전쟁에 가담해야 한다고 부르짖으며, 헤센 왕국과 프로이센의 전통적인 동맹관계를 언급하며 함께 나폴레옹에게 맞서길 요구했다. 윌리엄은 고민이 컸고, 국경 부근에 '중립국'이라는 팻말을 세우도록 명하고 교전국 양측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했는데, 우선 그는 프랑스와 접촉해 프로이센과 프랑스 전쟁에서 헤센이 중립을 지키는 대가로 프랑크푸르트를 헤센에 귀속시켜 줄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프로이센 왕에게는 반프랑스 동맹에 가담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25만 파운드에 헤센의 2만 군대를 빌려 줄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윌리엄의 운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곧 발발한 예나 전투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프로이센-헤센 연합군을 격파했고, 프로이센을 접수한 나폴레옹은 헤센으로 눈길을 돌려 모르티에 총사령관에게 "윌리엄 4세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고, 라그랑주 장군을 헤센 총독으로 임명하라"라고 명하며 헤센을 공격하게 했다. 그런데 그 당시 헤센 군대의 주력군은 이미 예나 전투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대부분 목숨을 잃은 터라 프랑스 군대를 대적하기 힘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윌리엄의 살길은 오직 하나, 도망뿐이었다. 하지만 헤센 왕실이 몇 백년 동안 백성의 혈세를 짜내 모은 재산이 너무나도 많아 전 재산을 옮겨가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500여 상자의 보석과 은그릇, 골동품 등을 빌헬름궁의 비밀 벽과 지하실에 숨겨 놓고, 부데루스가 헤센에 남아 뒤처리를 하게 했다. 하지만 라그랑주 장군은 이틀 만에 숨겨놓은 보석, 유가증권, 장부 상자들을 찾아내어 몰수했다. 그러자 부데루스는 라그랑주 장군을 찾아가 두 시간 여의 비밀 회담을 나눈 뒤, 장군의 책상 위에 26만 프랑을 남기고 재빠르게 자리를 떴다. 그러자 라그랑주 장군은 수하의 병사들을 시켜 42개의 상자를 부데루스에게 돌려주고, 은그릇과 골동 주화가 담긴 여덟 상자만을 파리로 가져가 보고했다. 한편 부데루스는 라그랑주 장군이 파리를 속일 수 있는 시간은 잠깐뿐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서둘러 42개 상자 중에서 특히 중요한 대출 장부가 있는 네 상자를 로스차일드에게 맡겼다.
예상대로 나폴레옹은 서찰을 보내 라그랑주 장군을 호되게 꾸짖고, 경무대신 푸셰에게 윌리엄의 재산을 낱낱이 조사하도록 명했고, 푸셰는 유능한 조수인 털록을 파견했다. 털록은 부데루스와 로스차일드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라그랑주 장군의 부관이 이 사실을 급히 부데루스에게 알렸고, 부데루스는 즉시 노부인으로 변장하여 빠져나가 몸을 숨겼다. 그리고 부데루스가 부하를 보내 로스차일드도 몸을 피하라 전했지만, 로스차일드는 이를 거절했다. 왜냐하면 특수공작원들이 이미 프랑크푸르트와 각 출입구를 철저히 감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부피 큰 장부 상자들을 옮길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로스차일드는 프랑크푸르트에 남아 직접 윌리엄의 장부를 지키겠다고 결심했고,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부데루스가 맡긴 것을 지켜내었다. 그 후 부데루스는 윌리엄에게 로스차일드가 필사적으로 장부를 지켜낸 일을 생생하게 전했고, 이에 윌리엄은 눈시울을 붉히며 "로스차일드가 목숨을 걸고 내 재산의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다면 거지 국왕이 될 뻔했어! 그에게 제대로 보답을 해야겠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부데루스는 이에 적극 동의하며 "헤센의 대외차관 장부도 모두 건재하고, 프랑스 측의 감시도 느슨해졌으니 이제 유럽 각국으로부터 수금을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임무를 맡아 하기엔 로스차일드만 한 적임자가 없다고 생각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윌리엄은 바로 동의하며 헤센 왕국의 대출업무를 로스차일드에게 위임하고, 그에게 두 배의 커미션을 지급한다는 문서에 서명했다. 그 후 로스차일드는 수금차 유럽 각국을 돌아다녔고,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바빠서 자신의 다섯 아들들을 총동원하기에 이르렀다.
워털루 - 열려라 참깨! / 산에서 내려온 다섯 호랑이1798년, 로스차일드는 넷째 아들 네이선에게 영국으로 가 사업을 개척하라 하였는데, 이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다국적 금융부호가 되는 첫걸음이 되었다. 네이선은 달랑 로스차일드가 써준 소개장과 사업자금 2만 파운드만을 가지고 영국으로 건너갔는데, 로스차일드는 다섯 아들 중 네이선이 가장 총명하며, 그 누구보다도 물건을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사업수완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사소한 것에 무관심하고 성미가 급하긴 하지만,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포기할 줄 아는 전략적인 안목을 지녔기에 한몫을 해내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영국 진출 후, 네이선은 잠재되어 있던 능력을 한껏 발휘하기 시작했다. 완제품 무역에 1~2년 종사한 후, 네이선은 소위 '3단계 이익법'이라는 사업을 시작했는데, 이는 방직공장이 밀집해 있는 영국 남부의 마을로 가서 가공하지 않은 천을 대량 구매해, 이를 북부의 제조업자에게 보내 염색을 하고 무늬를 넣어 포목으로 만든 후, 의류와 식탁보, 커튼 등으로 가공하여 직접 유럽에 수출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네이선의 재산 불리는 재주는 로스차일드의 칭찬을 받았을 뿐 아니라, 당시 영국 유대인 가운데 최고의 부호였던 코엔의 관심을 사, 그의 딸 한나를 신부로 맞이하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1806년 11월,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을 내려 영국의 통상을 전면 중단시켰는데, 이는 영국의 경제적인 숨통을 끊어놓으려는 의도였다. 나폴레옹의 봉쇄령은 유럽의 생필품 대란을 야기했고, 반대로 영국은 수출을 하려던 많은 생활용품들이 쌓이면서 처치 곤란에 이르렀다. 이렇게 대조적인 양상 속에서 네이선은 거액의 이윤을 남길 수 있는 사업기회를 엿보고, 밀수를 제안했다. 나폴레옹 제국의 총검 아래에서 밀수를 하려면 강력한 함대와 효과적인 판매 루트, 정치적 연출,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것은 로스차일드 가문에겐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밀수의 보호막이 되어 준 사람은 나폴레옹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프랑스 기병 총사령관 뮤라트였는데, 로스차일드는 달베르크를 통해 뮤라트에게 적잖은 뇌물을 바쳤고, 뮤라트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보호막이 되어 주었다. 네이선의 밀수사업은 날이 갈수록 번창했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가지고 있는 밑천이 적다 보니 자본증식 속도가 빠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로스차일드는 부데루스에게 네이선이 현재 영국에서 생활하고 있음을 밝히며, 극심한 물자부족으로 유럽의 물가가 치솟고 있는 상황에서 윌리엄에게서 보다 많은 자금을 끌어다 네이선에게 보내주기만 하면 2~3배의 이익을 남길 수 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아니겠냐고 말했다. 그러자 부데루스는 일단 로스차일드가 윌리엄을 대신해 수금하는 대출이자의 3퍼센트를 횡령하여 네이선에게 건네주는 것을 허락했다. 하지만 부족했다. 다급해진 네이선은 아예 프랑크푸르트로 건너와 직접 로스차일드, 부데루스와 면담을 가졌다. 날이 밝아올 무렵, 네이선이 드디어 최선의 방책을 생각해 냈다. 영국의 국채를 매입하도록 윌리엄을 부추겨 자금이 영국으로 건너오면, 네이선이 이를 몇 달간 밀수사업 자금으로 유용하는 방법이었다. 즉시 부데루스는 윌리엄에게로 가서 영국 공채 투자를 제안했고, 윌리엄은 승낙하고 로스차일드를 통해 런던으로 영국 공채를 매입할 15만 파운드를 송금했다.
네이선은 전시라 교통이 불편해 제때 영수증을 보낼 수 없을 뿐 아니라, 영국 공채가 단기간에 하락할 낌새가 있다고 핑계를 대고 이 돈을 3개월 동안 융통해 무명천을 사들였다. 그리고 이를 유럽에 밀수 판매해 15만 파운드의 원금을 40만 파운드로 불렸다. 그리고 3개월 뒤, 네이선은 영국을 방문한 동생 칼에게 15만 파운드의 공채 구매 증명서를 건네주며 윌리엄에게 전하라고 했다. 이러한 돈 놀이는 꼬리의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 네이선은 1809년, 정식으로 귀화하여 영국 국적을 획득했고, 런던에서 자신의 회사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영국 로스차일드 은행의 시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