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이 다다시 유니클로 이야기
가와시마 고타로 지음 | 비즈니스북스
야나이 다다시 유니클로 이야기
가와시마 고타로 지음
비즈니스북스 / 2010년 1월 / 248쪽 / 13,000원
1. 장사꾼에서 진정한 경영자로1984년 야나이 다다시는 히로시마 시의 후쿠로마치에 유니클로 1호점을 오픈했다. 여기서는 주로 캐주얼웨어를 팔았기 때문에 젊은층의 고객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대부분의 의류매장에서는 점원들이 고객을 맨투맨으로 상대한다. 그러나 유니클로 1호점에서는 손님들이 자유롭게 옷을 고르게 한 다음 계산하도록 했다. 대형 할인마트에서는 이런 방식이 일반적이지만 의류매장에서는 유니클로 1호점이 처음 시도한 방식이었다.
기존 의류매장에서는 손님이 옷을 사지 않으면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태도로 온갖 설득을 한다. 그래서 매장 내부를 화려하게 꾸미고, 손님의 시선을 사로잡는 다양한 상품을 갖춰놓고는 세련된 말투로 손님을 끌었다. 그러나 소비자들은 이런 의류매장을 부담스러워했다. 야나이 사장은 이런 방식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비즈니스는 고객이 사주어야 이루어지는 것인데, 파는 것에만 집중하는 상업주의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유니클로 1호점을 손님이 매장에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와서 즐거운 마음으로 상품을 고른 다음 계산하고 홀가분하게 돌아갈 수 있는 곳으로 만들었다.
1호점은 대히트를 기록했다. 매장 입지가 좋지 않았지만 오픈 첫날 오전 6시부터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고, 시간이 지날수록 줄은 더욱 길어졌다. 오픈 전에 대량으로 전단지를 배포하고 언론 매체에 광고를 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릴 줄은 예상치 못했다. 물론 오픈 기념 세일이어서 가격은 1천엔과 1천9백엔짜리 저가 상품이 중심을 이뤘다. 하지만 매장에 이토록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는 사실은 야나이 사장 자신이 지향하는 방향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당시 1호점은 아침 6시에 개장했다. 여기에는 야나이 사장의 사고방식이 작용했다. "10시에 오픈하면 젊은이들이 모두 학교에 가 있겠죠. 그들이 등교하기 전에 매장을 열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아침 6시에 개장한 것은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유니클로가 지속적으로 성장한 원동력에는 그의 상식을 뛰어넘는 아이디어가 큰 몫을 했다.
유니클로 1호점과 요즘 유니클로 매장과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오늘날의 매장들은 지금도 1호점이 그랬던 것처럼 의류창고와 같은 공간을 고수하고 있다. 취급하는 상품은 히트텍이나 브라톱처럼 다른 곳에서는 살 수 없는 독창적인 상품들이 많다. 공간을 강조하는 레이아웃을 유지하며 저렴한 가격의 캐주얼 의류를 판매한다. 유니클로의 또 다른 특징은 베이직 캐주얼만을 고집한다는 점이다. 플리스든 팬츠든 청바지든 티셔츠든, 이런 옷들은 사이즈만 다를 뿐 청소년부터 고령자까지 누구나 입을 수 있다. 입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는 것은 판매자가 구매자의 의도에 맞추려는 의도이다.
현재의 유니클로 매장들과 1호점의 가장 큰 차이점은 상품 조달 방식에 있다. 오늘날 유니클로는 SPA(specilty store retailer of private apparel, 제조직매전문업체) 방식으로 사업을 한다. SPA는 기획, 생산, 판매 등을 한 회사에서 담당하고, 생산된 물건을 그 회사의 자체 브랜드로 판매하는 방식으로, 좋은 품질의 제품을 저렴한 가격에 공급할 수 있도록 중간 유통 단계를 없앤 제조업과 유통업의 통합체를 말한다. SPA의 최대 관건은 판매력이다. 제조한 상품을 자체적으로 팔아야 하기 때문에 판매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유니클로는 판매력을 높이기 위해 매장 수를 늘려나갔다. 1984년 1호점 개설 이후 점차 속도를 붙여 1991년에는 29개, 1992년에는 60개, 1994년에는 116개로 매장 수를 늘렸고, 마침내 1994년 7월 히로시마 증권거래소에 상장하게 되었다.
매장이 늘어감에 따라 야나이 사장은 유니클로의 미래를 생각해보았다. 지금까지 그는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했다. 모든 업무를 파악하고 있고 매장의 매출을 일일이 확인하면서 장사의 재미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매장 수가 늘어나면서 모든 것을 혼자 관리할 수 없게 되었다. "회사의 매출이 20~30억 엔을 넘으면서 갑자기 개인회사 차원에서 경영하다간 언젠가는 잘못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사업을 계속하려면 경영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야나이 사장은 먼
저 자신의 인식부터 바꾸었다. 그런 다음 회사의 조직을 개혁했다. 동시에 상품 정보 및 판매 정보를 파악하기 위한 컴퓨터 시스템도 새롭게 구축했다. 그리고 1991년부터 본격적으로 체인 사업을 전개했다. 회사명도 패스트 리테일링으로 변경했다.
2. 플리스의 대히트, SPA 방식의 확립유니클로가 전국적으로 알려진 것은 플리스 재킷(이하 플리스)의 대히트 때문이다. 1998년 200만 장 판매, 1999년 850만 장 판매, 2000년 2,600만 장 판매. 플리스는 이렇게 폭발적인 판매를 기록했다. 시즌 상품이 단품으로 이만큼 팔린 것은 의류업계를 통틀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플리스가 이렇게 많이 팔린 요인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상품력. 플리스 소재는 가볍고 얇고 보온성이 좋아 방한복 소재로 널리 이용된다. 다만 지금까지는 등산용이나 방한용 등 특수 용도로 한정되어 있었고, 색상이나 디자인이 다양하지 않아 기능성만을 중시한 겨울옷에 불과했다. 하지만 유니클로는 플리스 재킷을 만들면서 염색과 봉제를 깔끔하게 하고, 다양한 색상의 제품을 출시함으로써 '플리스 재킷은 촌티패션'이라는 이미지를 불식시켰다.
둘째, 저렴한 가격.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저렴한 가격도 소비자를 불러모은 이유 중 하나이다. 당시 5천엔 하던 플리스 재킷을 1천9백엔이라는 초저가에 팔았다. 이 때문에 유니클로라는 브랜드를 모르던 사람이나 플리스의 기능성을 모르던 사람도 한 벌 사보려는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3년 동안 플리스 붐이 지속되자 대형 마트나 전문점도 플리스를 팔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아무리 해도 3천엔 이하로는 팔 수 없었기 때문이다.
셋째 ,공급력. 아무리 상품의 질이 좋고 매장에 사람이 몰려도 상품이 없으면, 애써 매장을 찾은 사람은 빈손으로 돌아간다. 유니클로는 소비자들이 얼마나 매장을 방문할지 짐작할 수 없는 상태에서 필요한 수량을 준비해야 했다. 800만~2600백만 장의 상품을 준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유니클로에는 1999년까지 출시된 모든 컬러, 모든 사이즈의 플리스가 항상 매장에 구비되어 있었다. 언제 어느 매장을 찾아도 품절은 없었다. 고객은 원하는 색상의 플리스를 언제든지 구매할 수 있었고, 없는 경우 주문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고객은 안심하고 매장을 찾아 플리스를 구입해 갔다.
1998년 6월 야나이 사장은 전사적 개혁을 선언했다. 소비자의 요구를 신속히 파악할 수 있도록 매장과 현장의 권한을 강화하고, 매장 주도형 경영으로 이행하기 위한 근본적인 개혁방침이었다. 그중에는 공급망 관리의 재구축이라는 목표도 제시되었다. 공급망이란 상류의 생산에서 하류의 소비자까지를 일관되게 하나로 묶는 체인화 시스템이다. 이는 기획, 소재조달, 생산, 물류, 재고, 판매라는 상품의 전반적인 흐름을 유기적으로 묶는 것이었다. 이때 컴퓨터와 인터넷을 활용하여 정보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 공급망 완성에 크게 기여했다. 공급망이 정교하게 구축되면 소비자의 요구를 파악하여 소비자 요구에 부합하는 소재를 찾고, 어느 공장에서 봉제할 것인지를 조사한 다음, 신속히 소비자 요구에 맞는 상품을 제공할 수 있다.
유니클로가 목표로 한 것은 대량의 발주를 기반으로 생산을 조절하는 것이었다. 각 공정마다 일정량의 재고를 확보해 둔 다음, 갈색의 플리스가 부족하다면 염색 단계에서 매출이 저조한 색상의 플리스 생산량을 줄이고 갈색 플리스 생산으로 바꾸는 것이다. 또한 한 디자인의 매출이 좋으면 그 전 공정단계의 재고를 라인에 올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라인을 일일이 변경하지 않고 소비자 요구에 부합하는 상품을 생산할 수 있다.
또한 유니클로는 중국의 제휴공장과 일본 본사를 온라인으로 연결하여 본사에서 생산 데이터를 파악할 수 있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판매 데이터에 기초해서 즉시 공장으로 발주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2006년 플리스 2600만 장을 판매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 본사와 중국 협력공장 사이의 공급망 관리가 잘 구축되어 있었기에 가능했다.
플리스의 대히트는 소매업 역사의 최대 성과였고 2000년은 소매업이 크게 변화한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즉 소매업의 역사는 플리스 이전과 플리스 이후로 구분할 수 있다. 일본에서 소매업의 기반이 내려앉은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버블경제가 무너진 직후부터 대형 할인마트나 백화점은 장기침체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이때 소매업자들은 '소비자의 욕구를 알 수 없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러나 유니클로의 플리스 붐 이후에는 더욱 심각해졌다. '소비자의 욕구를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을 소비자들이 알아차려 버렸기 때문이다. 즉 백화점이나 할인마트를 가도 자신들이 원하는 상품이 없다는 것을 소비자들이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유니클로에 가면 원하는 색상의 플리스가 반드시 있었다. 게다가 가볍고 따뜻하며 가격도 싸다. 그곳에 쇼핑의 의외성은 없을지 몰라도 적어도 소비자가 원하는 상품은 반드시 있다. 이것이 바로 소비자의 눈으로 본 플리스 붐이다. 그로부터 10년에 걸쳐 소비자들의 의식도 변했다. 그런 영향을 대형 할인마트나 백화점이 받기 시작했고, 때마침 세계 불황 속에서 소비자들이 일제히 등을 돌려버린 원인이 되었다. 플리스 붐이 결국 소비자를 바꾸고 소매업계를 바꾼 것이다.
3. 실패가 유니클로의 가장 큰 힘유니클로의 지주회사인 패스트 리테일링의 야나이 다다시 회장은 요즘 가장 주목받는 경영자이다. 2008년 일본에서 가장 뛰어난 경영자로 뽑혔으며, 미국 경제지 포브스 지에서 발행하는 일본 자산가 랭킹 1위에도 올랐다. 패스트 리테일링은 2008년 매출 5,846억엔, 경상이익 856억엔이라는 뛰어난 실적을 올렸다. 전년도에 비해 매출은 11.7%, 경상이익은 32.5% 증가한 수치이다. 2008년은 소매업계 전체에 불황의 한파가 세차게 불어왔던 해라는 점을 감안하면 놀랄 만한 성장을 이룬 것이다.
물론 야나이 회장이 순조롭게 현재에 이른 것은 아니다. 1990년대까지 패스트 리테일링의 비즈니스는 여러 번의 큰 실패를 반복했다. 보통의 경영자라면 실패한 상황에서 쉽게 궤도를 수정하지 못한다. 하지만 야나이 회장은 실패할 경우 그것을 단칼에 도려낸다. 실패라는 판단이 서면 단번에 손을 빼고 방향을 전환한다. 이것이 가능했기 때문에 경쟁이 심한 의류 소매업계에서 정상에 설 수 있었다.
일본인에게는 '실패는 곧 수치'라는 정서가 깔려 있다. 하지만 야나이 회장은 실패를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 그의 첫 번째 저서 제목도 『1승 9패』이다. 실패하고 그것을 신속히 수습하는 것이 그의 자랑거리이다. "실패하더라도 회사가 망하지 않으면 됩니다. 비즈니스는 이론대로,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빨리 실패하고, 빨리 깨닫고, 빨리 수습하는 것이 제 성공비결입니다."
야나이 회장의 진면목은 멈추지 않는 벤처정신이다. 대기업이 된 패스트 리테일링도 단번에 파괴할 만큼의 혁신능력을 갖고 있다. 그는 왁자지껄하게 시작한 비즈니스라도 성공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면 주저하지 않고 싹둑 잘라내 버린다. 1996년 인수한 반미니(VANMINI)가 그랬다. 당시 그는 아동복 기획 판매회사였던 반미니의 지분 85%를 매수하여 자회사로 만들었다. 질이 좋은 오리지널 아동복을 손에 넣고 비즈니스를 확장할 의도였다. 하지만 매수 직후 반미니의 이전 본사와 상표권 분쟁이 일어났다. 그러자 그는 8개월 만에 반미니의 모든 매장을 폐쇄하고 회사를 청산해 버렸다. 어쩔수 없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의 결단의 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1997년 야나이 회장은 스포크로, 패미크로라는 새로운 브랜드를 팔기 위한 매장을 개설했다. 유니클로는 남녀노소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캐주얼 브랜드 상품이다. 반면 패미크로는 20~30대 주부를 겨냥한 부인복과 아동복이 중심이 되었고, 거기에 신사복과 유니섹스 의류 등을 갖춘 브랜드였다. 스포크로는 10~30대 남성 고객을 타깃으로 한 트레이닝복 등 스포츠 관련 상품을 갖추고 있었다. 패미크로와 스포크로의 비즈니스 전개는 나쁘지 않았지만, 두 가지 측면에서 소비자의 호평을 받지 못했다.
먼저 유니클로와의 차별화가 부족했다. 상품 구성과 매장 외관이 비슷하다 보니 소비자들은 헷갈리게 된다. 또한 차별화를 강조하기에는 패스트 리테일링의 실력이 부족했다. 세 브랜드 매장을 동시 운영하다 보니 하나의 유니클로 매장보다 3배의 상품 항목이 필요했고, 각각의 매장 콘셉트에 맞는 상품을 갖춰야 했지만 물품 지원을 소홀히 하여 브랜드에 적합한 상품을 들여오지 못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유니클로 경영에까지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판단한 그는 패미크로와 스포크로 사업의 전면 중단을 결정했다. 신규 매장을 개설하기 시작한 1년도 지나지 않아 2개의 비즈니스는 유니클로로 통폐합되었다.
유니클로는 유행에 좌우되지 않는 베이직 캐주얼 의류가 중심이다. 그런데 플리스의 대성공으로 2001년 매출 4,186억엔, 경상이익 1,032억엔의 뛰어난 성과를 올렸다. 매출은 2년 동안 4배, 경상이익은 8배 늘었다. 그러나 플리스 붐이 끝난 2002년 이후 매출은 30%, 경상이익은 60% 감소했다. "산이 높으면 골짜기도 깊다"는 속담처럼 유니클로의 경우가 그러했다. 결과적으로 이 시기에 야나이 회장은 다음 단계를 위한 전략을 마련하지 못했다. 플리스의 성공 경험에 빠져 자신이 대기업병이라고 부르던 상황에 빠진 것이다. 그는 고민 끝에 2002년 11월 다마쓰카 겐이치 사장에게 경영을 맡기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은 그의 큰 실수였다. 다마쓰카 겐이치가 사장을 역임한 3년 동안 회사는 계속 정체기에 빠졌기 때문이다.
4. 대기업병을 치료하다
2005년 9월 야나이 다다시는 전격적으로 사장직에 복귀했다. 회장으로 물러나 화려하게 은퇴를 하겠다던 그가 다시 최전선에 복귀한 것이다. 몹시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전부터 그는 유통업계의 구태의연한 비즈니스 관행을 비판하며 경영자는 50대가 되면 물러나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던 그가 다시 복귀한 것이다.
그가 복귀할 당시 표면적으로 유니클로의 경영 현황은 괜찮았다. 이익률도 높았고 매출도 플리스 붐 이후 최고였다. 그를 제외하면 사내외의 누구도 유니클로가 엉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매우 강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은 긴급사태이며, 누군가에게 권한이 집중되어야 합니다. 조직이 변화에 강하게 저항하고 있습니다. 오직 나만이 조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는 회사가 대기업병으로 경직되어 있기 때문에 창업자인 자신이 직접 나서서 개혁해야 한다고 말했다.
야나이 회장이 사장으로 복귀하여 착수한 일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대기업병 일소. 야나이 회장이 가장 시급히 해결하려 한 문제는 회사에 만연한 대기업병이었다. 그가 복귀한 것만으로도 대기업병은 어느 정도 치유되는 효과가 있었다. 다마쓰카 겐이치 사장은 평소 사원들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이에 비해 창업자이자 소유주인 야나이 회장은 워낙 원칙에 충실했고 사원들에게도 이를 강조했다.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가차 없이 질책했다. 이런 그가 사장으로 복귀하자 긴장감이 사원들에게 생긴 것이다. 그는 상대가 자신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면 즉시 일을 거두어버렸다. 거래처라면 거래를 중단하고 사원이라면 회사를 나가도록 했다. 이처럼 그는 "헤엄치지 못하는 자는 가라앉아야 마땅하다"라는 지론을 철저히 실천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