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동행이인

기타 야스토시 지음 | 21세기북스
동행이인

기타 야스토시 지음

21세기북스 / 2009년 1월 / 416쪽 / 15,000원



소나무 아랫집에서 태어나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1894년 11월 27일에 와카야마 현 가이소군 와사무라 아자센단노키의 유복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마쓰시타 집안은 오래 전부터 이 고장에서 살아왔는데, 옛날의 장부를 살펴보면 250년 전인 교호 시대에까지 그 기록이 남아 있다. 마쓰시타 집안이 보유하고 있던 논밭을 따라 걸으면 이웃 마을인 니시와사무라에까지 이를 수 있었다고 할 정도였다. 어렸을 때의 고노스케는 유모의 등에 업혀 강으로 나가 물고기를 낚는 것을 보기도 하고, 술래잡기를 하기도 하는 등 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는 날들을 보냈다. 하지만 아버지인 마사쿠스가 와카야마 시내에 설치된 미곡(米穀) 거래소에 출입하기 시작하면서 불행이 시작되었다. 고노스케가 네 살이 되었을 무렵, 마사쿠스가 쌀 투기에 크게 실패하여 마쓰시타 가의 운명은 단번에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가지고 있던 전답이 몽땅 타인의 손에 넘어갔으며, 결국에는 밥 지을 쌀마저도 떨어져 보다 못한 동네 사람이 보리밥으로 주먹밥을 만들어 주었다고 할 정도로 곤궁한 지경에 처하고 말았다. 마사쿠스는 어쩔 수 없이 저택을 팔고, 일자리를 찾아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땅인 와사무라를 떠나 와카야마 시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1899년, 고노스케가 아직 네 살이었던 때의 일이었다. 와사무라를 떠난 마쓰시타 가 사람들은 와카야마 시내의 번화가인 혼마치 1번가 '뒷골목에 자리한 집 중에서도 가장 좁은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거기서 마사쿠스는 가재도구를 팔아 남은 돈을 밑천으로 나막신 장사를 시작했다. 당시 21세였던 장남 이사부로가 가게 일을 도왔다. 하지만 마사쿠스는 와카야마로 나온 뒤에도 돈이 약간 생기면 미곡 거래소로 달려갔기에 종종 부부싸움의 원인이 되곤 했다. 고노스케가 먼 훗날까지 치를 떨 정도로 '투기'를 싫어했던 이유는 그와 같은 불행한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익숙지 못한 장사는 손에 익지 않은 법, 결국 나막신 가게도 뜻대로 풀리지 않은 채 2년도 되지 못해서 가게를 접고 말았다.

기노카와에서의 작별

나막신 장사를 그만둔 뒤, 마사쿠스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자식들이 하나하나 죽어 갔으며 의지하고 있던 장남 이사부로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마사쿠스는 자신이 가족들을 그와 같은 궁핍으로 몰아넣은 것이라는 자책감 때문에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해야 한다고 생각한 마사쿠스는 1902년 7월에 홀로 오사카로 나가야겠다고 결심, 2년 전에 창립된 사립 오사카 맹아원(盲兒院)에 일자리를 얻었다. 마사쿠스가 오사카로 나간 지 2년쯤 지났을 무렵, 가족들 앞으로 편지가 도착했다. '오사카 하츠만스지에서 화로를 팔고 있는, 미야타라고 하는 마음씨 좋은 사람의 가게에 심부름할 아이가 필요하다고 한다. 마침 잘 됐으니 고노스케를 보내도록.' 이렇게 해서 고노스케는 1904년 11월에 소학교를 중퇴하고, 아홉 살에 혼자 오사카로 길을 떠나게 되었다. 일을 하기로 한 미야타화로점은 난바 역에서 북쪽으로 5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하츠만스지에 자리하고 있었다. 미야타화로점은 근처의 고급 요정을 상대로 화로를 만들어 파는, '제작과 판매'를 겸한 상점이었다. 상가(商家)의 풍습에 따라서 고노스케는 '고깃톤'이라 불렸으며, 혹독한 고용살이가 시작됐다. 일은 오로지 아기를 돌보는 것이었지만 시간이 나면 '속새'로 화로를 닦는 것을 돕기도 했다. 보드라운 아이의 손이었기 때문에 쉽게 까지고 부어올라, 아침에 걸레질을 하기 위해 물을 만지면 쓰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휴일은 새해 첫날과 일왕의 생일과 여름 축제 때뿐. 식사도 변변치 않아서 생선이 나오는 날은 1일과 15일뿐이었지만, 와카야마에서 혹독한 생활을 했었기 때문에 그것도 그다지 괴롭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용살이를 시작한 지 단 3개월 만에 미야타화로점은 문을 닫고야 말았다. 우에마치로 옮겨 화로 제작에만 힘을 쏟기로 한 것이었다. 따라서 심부름하는 아이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

고노스케는 고다이자전거상회라는 곳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 곳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이 갖춰야 할 여러 가지 것들을, 인사를 하는 법에서부터 하나하나 배워 나갔는데 때로는 뺨을 맞아야 할 정도로 혹독한 것이었다. 여름에는 5시, 겨울에도 5시 반에는 일어나 가게 안팎을 청소해야 했다. 그러고 난 다음에는 하루 종일 진열된 상품의 손질이나 수리를 배워야 하고, 그리고 저녁 7시쯤이 되면 가게 앞을 정리하고 길에 물을 뿌린 다음 지배인부터 차례대로 몸을 씻었다. 고노스케는 고용살이 경험을 통해서 많은 것들을 배웠는데, 그것들은 후에 그가 상업에 뛰어들었을 때의 기본자세가 돼 주었다. 가까이서 그를 따르던 이와이 겐이 한번은 고노스케에게 '상도'에 대해서 물었더니 중요한 것은 세 가지라고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하나는 '장사의 의의를 알 것', 다음으로는 '손님의 마음을 읽을 것', 그리고 '상대방보다 더 겸손할 것'.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고노스케의 인사는 언제나 정중했다. 그것은 단지 머리를 숙이는 데만 그친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얼굴이 무릎에 닿을 정도로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뿐만이 아니었다. 손님이 돌아갈 때는 손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손님의 모습이 사라지기 직전에 다시 한 번 마음을 담아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손님을 대할 때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다. 기자들의 취재에 응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고용살이 시절에 익힌 이와 같은 습관을 평생에 걸쳐서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실천했다.

전기와의 만남

가게를 쉬는 날, 한번은 우연히 전차를 탈 기회가 생겼다. 요즘에는 '노면전차'라 부르는 것이다. 전차에 탄 고노스케는 그 속도에 깜짝 놀랐다. '이렇게 편리한 전차가 있으니 자전거 수요는 틀림없이 줄어들 것이다. 앞으로는 전기의 시대다!' 고노스케의 마음에 동요가 일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그는 직업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매형인 가메야마 조노스케에게, 교섭을 해서 전등회사에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1910년 10월, 드디어 오사카전등주식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내선 담당 수습공으로 배속받았다. 일당 37센.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약 1만 3,000엔 정도다. 내선 담당은 송전선에서 가정이나 사무소까지의 배선공사를 담당하는 자리였다. 그리고 그 수습공이었던 고노스케는 내선 담당자들과 함께 공구를 실은, '뎃치구루마'라 불리는 손수레를 끌고 시내를 돌아다녀야 했다. 고노스케는 원래 빠릿빠릿하지 못한 편이었지만, 센바에서 고용살이를 하는 동안 남보다 더 빠릿빠릿하고 야무진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됐다. 배선에 관한 일도 1, 2개월 만에 전부 배워서 조그만 공사는 혼자서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채용된 지 겨우 3개월만에 수습을 마치고 담당자로 승격되어 미나미구 가와라야마치에 신설된 고즈 영업소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내선 담당자가 되어 자신감도 얻은 고노스케였지만, 더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학문과 학력이 필요했다. 한번은 상사가 고노스케를 사무원으로 추천한 적이 있었는데, 괴발개발 지렁이가 기어가는 것 같은 글씨밖에 쓰지 못했기 때문에, 그대로 기술자로 남겠다며 스스로 사양했던 쓰린 경험이 있었다. 1913년 4월, 고노스케는 간사이 상공학교 야간부 예과(豫科)에 입학했다. 18세가 되던 해의 봄이었다. 1년 동안 열심히 해서 간사이 상공학교 야간부 예과를 500명 중에서 175등이라는 성적으로 수료했다. 기초학력이 부족한 상태였으니 잘한 편이었지만, 예과에서 본과인 전기과에 들어가자 역시 수업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책상에 앉아서 하는 공부는 여기서 끝나 버렸다. 하지만 그가 '학력을 장식하기 위한 학문'을 계속하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다행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만큼 공부했으면 만족', '유명 대학에 들어가면 목표달성'이라는 등의, 낮은 차원의 목표를 위해 노력하지도 않았으며 학교에서 배운 지식에 대한 과도한 신뢰도 갖고 있지 않았으니 오히려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이치'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가 추구했던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였다. '나는 배운 게 없다'는 콤플렉스가 '순수하게'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했으며, 끊임없이 배우고 그것을 흡수해야 한다는 강한 집착을 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장년이 되었을 때는 세상에서 말하는 '엘리트'라는 사람들을 어느 틈엔가 뛰어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으며, 만년에 이르러서는 '나는 배운 게 없기 때문에 모르는 게 없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무모한 도박

고노스케가 오사카전등을 그만둔 것은 22세. 독립한 직후에 부인 무메노의 동생 이우에 도시오가 가세를 하게 됐다. 그리고 1917년 10월에 드디어 첫 번째 상품인 개량 소켓(마쓰시타식 소켓)이 완성되었다. 종전의 것은 소켓의 나사 부분에 배선코드를 감은 다음 납땜질을 해서 고정시켜야 했지만 마쓰시타식은 코드와 금속판 사이에 굽이 높은 나막신 같은 모양을 한 고정 장치를 끼워 넣기만 하면 서로 접촉되도록 해 놓았기 때문에 따로 납땜을 할 필요가 없는 간편한 것이었다. 열흘간 오사카 전력을 돌아다니며 판매에 나섰다. 그랬는데도 소켓은 100개 정도밖에 팔지 못했다. 매출액은 겨우 10엔 정도, 초등학교 교원의 초봉이 20엔 정도였을 무렵의 일이었다. 분명하게 알 수 있었던 것은 '이 소켓은 팔리지 않는다'는 엄연한 사실이었다. 고노스케는 소켓에 더욱 개량을 가하고 싶었지만 자금이 없었다. 그 상태에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대로 고사하고 말았을 테지만, 마침 가뭄에 단비가 내렸다. 한 해도 저물어 가려 하는 12월, 소켓을 판매하기 위해 거래를 텄던 도매상을 통해서, 가와키타전기기업사라는 회사가 선풍기의 애반(碍盤, 선풍기를 지지하는 절연체의 부품)을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해온 것이었다. 아무리 영업을 해도 전혀 팔리지 않아 궁지에 몰리게 됐지만, 노력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내게는 운(運)이 있다!' 그는 그렇게 확신했다. 훗날 그는 "나는 실패한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소켓 때문에도 참패를 맛보지 않았는가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는 뒤이어 이렇게 말했다. "성공할 때까지 계속한다면 실패란 존재하지 않는다. 성공만이 있을 뿐이다. 실패를 하는 이유는 실패한 채로 중단해 버리기 때문이다."

1918년 3월 7일, 고노스케는 무메노, 이우에 도시오와 함께 지금의 한신전차 노다역에서 서쪽으로 약 6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기타 구 시니노다 오히라키초 844번지의 2층 건물을 빌려 그곳으로 이사했다. 오히라키초로 옮기면서부터 고노스케의 힘찬 진격이 시작됐다. 소켓을 대신한 신제품 어태치먼트플러그가 뜻밖에도 히트 상품이 되었다. 어태치먼트플러그란, 전구를 끼워 넣도록 되어 있는 배선구에 코드를 끼워 넣어 다른 가전제품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기구를 말한다. 일반 가정이나 소규모 사업장에는 전등용 전기밖에 배전되지 않았는데 선풍기나 다리미 등과 같은 전자제품이 점차 보급되고 있었기 때문에 어태치먼트플러그의 수요는 상당히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못 쓰게 된 전구의 베이스를 재사용해서 가격을 시가보다 30퍼센트나 낮췄기 때문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배달이 늦으면 거래처에서 물건을 가지러 올 정도였다.

자전거 램프

1923년, 마쓰시타전기는 커다란 비약을 이루어 낸다. 자전거 램프의 제조, 판매 덕이었다. 고노스케는 자전거 상점에서 오랫동안 일을 했기 때문에 자전거 부품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당연한 얘기였지만,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의 불만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중 가장 커다란 불만은 야간 운전이 불편하다는 점이었다.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는 전지 램프를 만들 수는 없을까…….' 매일 밤늦게까지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다. 전구와 전지를 조합한 여러 가지 시제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6개월쯤 지난 1923년 3월, 드디어 야심작이 완성되었다. 종전 제품보다 약 10배나 더 오래 사용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제작비도 얼마 들지 않았다. '이건 잘 팔릴 거다. 틀림없이 잘 팔릴 거다.' 확신할 수 있었다. 모양은 보기 좋은 포탄형으로 했다. 하지만 고노스케의 훌륭한 점은 빨리 팔고 싶다는 마음을 억누른 채 손님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내구성을 신중하게 반복해서 시험했다는 점에 있다. 그는 고토 세이이치와 같은 젊은 사원들에게 명해서 2개월 정도 매일 밤일을 마친 뒤에 전지 램프를 자전거에 달고 요도카와 제방을 달리게 했다. 그것도 일부러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게 했다. 그리고 밤늦게까지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그들이 돌아오면 "어땠어?"라고 물었다. "괜찮아요. 아무 이상 없어요." "그래? 수고했네. 안에 우동 준비해 놨으니 먹고 가도록 해." 우동을 먹고 난 젊은이들이 돌아가는 길에 공장 안을 들여다보면, 고노스케는 언제나 혼자 남아서 전지 램프를 떼어내 여기저기를 점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제품이 완성되었지만, 재고만 자꾸 쌓여 갈 뿐 한번 팔아 보겠다고 나서는 도매상이 한 군데도 없었다. 진퇴양난이었다. 여기서 고노스케는 전설이 되어 버린 묘책을 낸다. 바로 무료 샘플 배포였다. 자전거 램프를 두어 개 맡기고 그 중 하나를 무료 샘플로 삼아 점등을 해 놓도록 했다. 램프가 진짜 30시간 이상 점등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였다. 확인을 한 뒤에 점등하지 않은 제품을 판매하고 팔린 만큼만 돈을 받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모든 램프가 30시간 이상 점등되었으며, 1개월쯤 지나자 매출액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처음 각 도매상에 배포했던 4,000개가 전부 팔려 나갔고, 심지어는 소매상에서 직접 전화나 우편으로 주문을 해오기도 했으며, 결국에는 전에 취급을 거절했던 도매상에서까지 주문이 들어오기에 이르렀다. 버리는 것이 있어야 얻는 것도 있는 법. 그는 커다란 도박에서 승리를 거뒀다. 마쓰시타전기기구제작소의 '포탄형 전지식 자전거 램프'는 순식간에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며, 물량을 대지 못할 만큼 주문이 밀려들었다. 그는 판매가 제품 개발의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훗날 그가 주장한 '제조와 판매는 일체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이와 같은 체험을 통해서 얻은 것이었다.

생각하는 사람

1929년 5월, 제2차 본점공장이 준공되었다. 그리고 융자받은 돈을 하루라도 빨리 갚기 위해 공장을 풀가동해서 생산에 전념해야겠다고 의욕을 불태우려는 순간, 뜻밖에도 커다란 불황이 찾아왔다. 1929년 10월 24일 뉴욕 월가에서 일어난 주식시장의 대폭락은 '검은 목요일'로 불리고 있으며, 역사적인 '세계 공황'의 도화선이 되었다. 지금까지 마쓰시타전기는 '대중이 필요로 하는 물건은 경기를 타지 않는다'는 신념 하에 불황과는 상관없이 거침없는 진격을 계속해 왔다. 하지만 이번 경제 공황에 따른 디플레이션은 매우 심각한 것이었기 때문에 매출에 급브레이크가 걸리고 말았다. 1929년 11월 12월에는 매출이 절반으로 줄어 버렸다. 재고가 급증하여 창고에 넣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손에 남은 것은 현금이 아니라 빚뿐이었다. 이때 마침 병 때문에 자리에 누워 있었던 고노스케 대신 지휘를 맡았던 이우에 도시오는 그에게 직원들을 해고할 것을 권했다. 며칠간 고심한 끝에 고노스케는 다음과 같이 지시한다. "이렇게 해보는 건 어떻겠나? 내일부터 전원 반일 근무. 그리고 오후에는 점원 모두가 힘을 합쳐서 하나라도 좋으니 최선을 다해 재고를 팔아보기로 하세. 그 대신 임시직까지 포함해서 종업원은 한 명도 줄이지 않기로. 이래도 안 된다면 그때는 깨끗이 포기하기로 하세." 이로써 사내에 드리워져 있던 암운이 단번에 날아가 버리고, 전전긍긍하던 종업원들은 은혜에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했다. 힘이, 그리고 생각이 하나가 되어 그로부터 단 3개월 정도 만에 창고 가득 넘쳐나던 재고를 하나도 남김없이 팔아 치웠다. 곧 반일 조업을 중단하고 풀 생산 체제에 돌입, 램프 판매량이 늘어난 덕분에 업적도 가파른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번 일로 경영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종업원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 고노스케에 대한 불타오르는 충성심을 심어 주는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었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