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희망 미래
스티브 김 지음 | 21세기북스
스티브 김 지음
21세기북스 / 2009년 7월 / 272쪽 / 12,000원
돈보다 값진 유산
가난이 에너지다나는 1949년 11월 서울 장교동에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이 몹시 어려워지면서 우리 가족은 내가 11살 되던 해에 북한산 자락 밑 세검정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 당시 세검정 일대는 지금과는 딴판인 가난한 동네였다. 당시 우리 가족이 살던 집에는 수도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물지게를 지고 멀리 떨어진 우물까지 가서 물을 길어오는 게 일과의 시작이었다. 2남 3녀 중 장남인 내게는 위로 누나들만 3명 있었고 남동생은 아직 어렸다. 하기에 물지게 일은 늘 내 차지였다. 11살밖에 안 된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매일 같이 가냘픈 어깨에 무거운 물지게를 지고 물을 날라야 했다.
가난 속에서도 나는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렇게 공부해서 경복중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 내가 부모님에게 가장 본받고 싶은 부분은 남에게 베푸는 모습이었다. 두 분 모두 어려운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고, 자식들에게도 언제나 남에게 베풀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그런 가르침을 받으며 자라다보니 어느새 나도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긍정적으로 보는 마음이 점점 커졌다. 역설로 받아들이겠지만 나는 ‘가난했기 때문에 성공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만약 나에게 부유함이 주어졌다면 나는 밤을 새가며 공부해서 좋은 학교에 가겠다는 의지도 없었을 것이다. 가난과 싸워 이겨본 사람은, 그 과정에서 강한 정신력을 몸에 익히게 된다. 그런 헝그리 정신이 있다면 공부를 하든 일을 하든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 어려운 환경을 타고나는 건 자신의 선택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 환경을 어떻게 이겨내고 극복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자신의 의지와 선택에 달려 있다.
졸업장보다 더 귀한 것고등학교 3학년 때, 나는 대학 진학 문제로 고민이 많았다. 그러나 어이없게 육사 시험에 떨어진 뒤 나는 재수를 했다. 그래도 영어와 수학, 물리 과목을 좋아했던지라 다음해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에 합격했다. 유신정권 시절의 대학은 혼란했다. 시국 때문에 학교는 수시로 휴교와 폐교가 이어졌다. 공부에 흥미를 잃은 나는 친구들과 카드놀이를 하고 테니스 치는 일에 재미를 붙였다. 졸업이 다가왔지만 내게는 구체적인 비전도 마땅한 꿈도 없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지금과 같은 대기업이 한국에는 거의 없었다. 나 같이 전자공학을 전공한 졸업자들이 갈 만한 중소기업도 마땅치 않았다. 나의 대학시절은 방황으로 점철되었지만 어쩌면 그 방황이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공부란 학교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생 전체가 공부이고, 우리의 삶 자체가 학교다. 나는 방황을 통해 인생을 고민했고, 그 고민은 내게 세상을 보는 안목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젊은 친구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그것에 몰입할 수 있기를 바란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경영인으로 꼽히는 GE의 전 회장 잭 웰치(Jack Welch)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열정을 꼽았다. "만약 한 가지만 남겨야 한다면 그것은 열정이다. 열정은 천재의 재능보다 낫다"라고. 인생은 짧다. 자신이 하는 일에 열정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결국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서이다. 행복하기 위해 학창시절동안 좋아하는 일을 찾기를 바란다.
나는 살아남고 싶었다제대한 후 나는 미국으로 떠날 결심을 굳혔다. 한국에서 취직을 한다면 한없이 정체되고 무기력해질 것 같았다. 나는 뭔가 변화를 원했다. 좀 더 역동적이고 진취적인, 나를 시험하는 도전이 필요했다. 당시 부모님과 누나 등 우리 가족 모두가 LA(Los Angeles)에 살고 있었던 것도 그 결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미국 LA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내 전 재산은 2,000달러였다. 일을 하고 학교에 다니려면 차부터 사야 했다. 대중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미국에서는 차가 없으면 사회 활동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1,000달러로 값싼 차를 산 후 부모님이 사시던 방 두 개짜리 작은 아파트에 신세를 지기로 했다. 오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야간대학원에 진학해서 빨리 학교를 졸업하고 엔지니어로 취직하는 것뿐이었다. 생사가 달린 문제라고 생각하니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즈음부터 나는 ‘김윤종’이란 한국 이름 대신 ‘브루스(Bruce)’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누나가 이렇게 말했다. "얘, 브루스란 이름 좀 촌스럽지 않니?" "응? 그래? 그럼 뭐 괜찮은 이름이 있어?" "글쎄…, 제임스는 너무 옛날 이름 같지? 성을 붙여서 불러가며 생각해봐야해. 크리스 김? 스티브 김? 앤디 김? 얘, 아무래도 스티브 김이 괜찮다. 어감도 나쁘지 않고 너랑도 잘 어울려." 그렇게 나는 ‘스티브 김(Steve Kim)’이라는 이름을 하나 더 얻었다. 새로운 이름으로 미국에서의 새로운 생활을 펼치게 된 것이다.
첫 번째 아메리칸 드림1980년 대학원을 졸업한 후 별 어려움 없이 대기업에 입사했다. 리튼 데이터 시스템(Litton Data System)이란 회사였다. 회사의 주 업무는 군 방위 통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 회사에서는 개인이 업무를 완성해도 그에 대한 평가가 주어지지 않았다. 나는 미국에서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더 빨리 성공하고 싶었다. 그런 만큼 더 열심히 일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원했던 대기업의 엔지니어가 되고 보니 내가 커다란 기계의 하찮은 부속품같이 느껴졌다. 1981년 여름, 입사한 지 겨우 1년 반이 지난 시점이었지만 나는 이직을 결심했다. 나 자신이 중요한 사람임을 인정받고 싶었고 스스로의 가능성을 증명하고 싶었다. 꿈과 희망,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나를 너무나도 힘들게 했다. 구인란에서 내가 찾아낸 회사는 페일로 옵티컬 시스템(Phalo Optical System Inc.)이라는 통신 시스템 개발회사였다. 새 회사에서 내게 주어진 업무는 광섬유 통신 시스템 개발이었다. 우리 회사의 거래처는 록히드(Lockheed) 같은 항공기 회사나 NASA(미 우주항공국) 같은 대기업들이었는데, 우리와 비슷한 경쟁 회사가 대여섯 곳 정도 경합하고 있었다. 이런 시점에서 제품 개발을 책임지는 엔지니어가 되었으니 어깨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부담감과 책임감이야말로 내가 그동안 간절히 바라던 것이었다.
끝없는 도전
만족하면 열정도 없다만족할 줄 알아야 행복하다고 했던가. 그러나 성공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항상 허기와 갈증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나는 더 이상 나의 생각과 아이디어를 꽃피울 수 없음을 깨닫고 창업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내 생각을 말했다. "나한테 신제품 개발 아이디어가 있는데…." "어떤 아이디어인데?" "지금 우리 회사나 다른 경쟁사들보다 훨씬 더 크고 다양한 데이터를 한 번에 보낼 수 있는 제품이야." "그런 제품이 나온다면야 당연히 성공할 수 있지." "그래서 회사를 새로 창업하는 건 어떨까 고민 중이야." "그래? 한번 해봐. 스티브가 한다면 나도 도와줄게."친구의 호의적인 반응에 나는 힘이 났다. 친분이 있던 다른 회사 출신 엔지니어 세 명이 ‘스티브가 한다면 믿을 수 있다’며 각각 3만 달러씩 모았고 내가 1만 달러를 냈다. 도합 10만 달러. 첫 번째 창업은 그렇게 시작됐다.
회사 사무실은 차고였다. 본격적으로 제품 개발이 시작되자 1인 10역으로도 힘에 부쳤다. 제품 개념을 세워 설계를 하고, 설계가 끝난 후엔 프로토타입(prototype)을 만들었다. 밥 먹고 자는 시간 말고는 오로지 일만했다. 하지만 나는 힘든 줄도 몰랐다. ‘이 제품에 내 미래가 걸려 있다’고 생각하면 저절로 힘이 났다. 그렇게 1년의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시장에 내보여도 부끄럽지 않은 두 종류의 시제품이 완성되었다. 현실에 만족하면서 행복을 찾으라는 말이 꼭 성공하려는 야망을 버리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행복을 위해 도전하고, 성공을 통해 만족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아직도 나는 배고프다’라고 말한 히딩크 감독을 이해할 수 있다.
성실과 노력 앞에선 불신과 편견도 무너진다1980년대 중반만 해도 아직 IT산업이 활성화되지 않은 시기였다. 벤처 사업에 대한 개념도 별로 없었고 벤처자금을 대주는 창업투자회사(Venture Capitalist)도 많지 않았다. 새로운 투자자를 구하지 못하면 시장 개척도 못해 보고 여태까지의 노력이 허사가 될 판이었다. 궁여지책으로 떠오른 인물이 딕 배스였다. 내가 다니던 회사의 고용사장으로 있던 그는 당시 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미국인이었다. 일말의 희망을 품고 연락을 했더니, 딕은 깜짝 놀라며 나를 만나러 왔다. 나는 그에게 시제품을 하나하나 설명해나갔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제안했다. "딕, 15%의 지분을 줄 테니 영업과 마케팅을 맡아줘요." "좋아요, 스티브. 한번 해봅시다." 딕은 내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마침내 두 달에 걸쳐 30명의 투자자들로부터 30만 달러의 자본금이 확보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기업이 나의 첫 번째 회사인 파이버먹스(Fibermux)였다.
미국 사회 특히 미국 기업은 오직 성과로만 말하는 곳이다. 그 사람이 인격적으로 어떻든 실적이 나쁘면 가차 없이 자리에서 쫓겨난다. 창업자라해도 예외가 아니다. 회사를 키울 것, 이익을 올릴 것, 내게 주어진 목표였다. 해내지 못하면 내겐 미래가 없었다. 분기별 목표를 세우고, 어떻게 해서든 목표를 달성해야 했다. 파이버먹스가 받은 첫 주문은 의외로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들어왔다. 나는 예전 직장에서 출장을 다닐 때 안면을 익혔던 NASA의 구매 담당자를 직접 만나 우리 제품을 보여주었다. "프랭크(Frank). 우리 제품이 현재 시장에 나와 있는 어떤 제품보다 훨씬 좋아요." "뭐가 어떻게 좋은데요?" "여덟 줄의 광섬유를 하나로 줄일 수 있어요." "그래요? 알았어요. 테스트 해 볼 테니 장비를 두고 가봐요." 그쪽에서 여러 가지 평가 실험을 해보고는 곧바로 주문을 해왔다. 무려 10만 달러였다. 데뷔전에 나선 타자가 첫 타석에서 홈런을 친 격이라고나 할까. 당시 우리 파이버먹스의 한 달 매출이 3만 달러 규모였으니 10만 달러 주문이라면 엄청난 액수였다. 더구나 우리 제품은 생산 마진이 90%였다. 그렇게 뚫어낸 첫 거래 이후 우리 회사는 단 한 번도 손실을 내거나 성장을 멈춘 적이 없었다.
미국에서 통한 한국식 경영미국에서 기업을 창업해 성공했다는 경력 때문인지 "미국에서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그때마다 나는 최대한 친절하게 대답하고자 노력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세계화에 대해 약간 열등감을 갖는 경향이 있다. 그중에는 무조건 외국식으로 따라가야 한다고 믿는 사람도 가끔 본다. 물론 미국에서 한국 기업이 성공하려면 한국이라는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진정한 의미의 세계화를 이뤄야 한다. 그러자면 미국의 문화와 미국인의 정서를 고려한 미국식 기업 운영이 중요하고, 현지화도 필요하다. 하지만 나는 경영이나 조직 운영, 특히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한국적인 특성을 유지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성공에는 ‘한국적인 마인드’가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성장 목표를 계속 달성해내고 이윤이 올라가니 이사회에선 날 좋아하고 인정했지만 직원들은 불만이 많았다. 더구나 나는 미국 사회에서 보자면 동양인에, 이민 1세대였다. 회사에서 스톡옵션(stock option)도 주고 대우도 나쁘지 않게 해주니 겉으론 내가 하자는 방향대로 따라왔지만 속으론 불만을 품은 직원들도 있었다. 나 역시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럴 때 내가 선택한 방법은 ‘설득’이었다. 나는 일 때문에 사람들에게 큰소리를 친 적이 한 번도 없다. 대신 내가 생각하는 업무 방향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또 직원들보다 더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썼다. 시간이 지나면서 직원들은 점점 내 진심을 알아주었다. 이런 내 모습은 아마 미국의 보통 CEO와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나는 한국인으로 태어나 자랐고, 내가 가지고 있는 상식에 준해서 경영을 했다. 그리고 가정교육을 통해 아버지께 배웠던 ‘솔선수범’이라는 덕목을 꾸준히 실천했다. 항상 돌아다니며 고객을 직접 만나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으면 받아들였다. 말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행동과 결과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 내 스타일이었다.
소통의 힘기업이든 사회든 한 조직을 발전시키는 힘은 과연 어디에서 나올까. 나는 그것이 소통, 즉 ‘커뮤니케이션’의 힘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소통은 한 기업의 운명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부분이다. 경영자가 아무리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고, 객관적인 지표와 현황을 통해 합리적인 목표를 제시한다 해도 이를 직원들이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기업은 삐걱거릴 수밖에 없다. 전쟁터와 같은 비즈니스 세계에서 회사의 구성원들이 하나의 생각과 목소리를 갖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 힘은 바로 커뮤니케이션에서 나온다. 커뮤니케이션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정직해야 한다. 속이기 위한 의도가 아니라도 체면 때문에 또는 남의 얼굴을 세워주기 위해서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본질을 파악하는 데 많은 시간을 소요하게 하여 시간낭비를 가져오게 된다. 내가 회사를 경영할 때 실제로 그랬다. 계획한 실적을 못 맞출 것 같으면 미리 이야기해줘야 대비책을 마련할 텐데 그 사실을 분기 마감이 코앞에 닥쳐서야 보고하는 직원들이 있었다. 어떤 일이든 나쁜 일일수록 감추지 않고 미리 이야기해야 한다. 그래야 신뢰가 생긴다.
위기의 갈림길에서 성공을 부른 선택과 집중
경험이야말로 성공의 자산이다파이버먹스를 매각한 후 나는 계약조건에 따라 2년간 계속해서 CEO로 일하고 있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나는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면 좋을까’를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 직원인 유리 피코버가 내게 말을 걸었다. "스티브, 회사를 그만두게 되면 앞으로 어떤 일을 할 건가요?" "글쎄, 아직까지는 이런저런 생각만 하는 중이야." "스티브, 혹시 사업을 한 번 더 할 생각은 없나요?" "사업? 창업을 또 하란 말이야?" "그럼요. 스티브에게는 파이버먹스를 해오면서 쌓아온 지식과 경험이 있잖아요. 그 경험을 그대로 묵히는 건 너무 아까워요." 유리의 제안은 나에게 새로운 의욕을 일깨워주었다. 나는 유리에게 "그래, 한번 해보자"라고 대답했다.
마침 그 때 랜의 등장으로 미국 IT업계에 또 한 번의 패러다임 전환기가 왔다. 나는 랜의 공유방식이 반드시 스위칭 랜(switching LAN)으로 바뀔 것이라고 생각했다. 몇 대가 연결되든 간에 어느 연결에서든 일정한 속도를 유지할 수 있는 스위칭 시스템 시대가 도래할 것이고, 그 시장을 먼저 선점한다면 성공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보았다. 멀리 떨어진 빌딩과 빌딩 사이에도 새로운 ATM 방식(asynchronous transfer mode, 비동기식 전송방식)으로 랜과 랜을 연결할 수 있게 해주면 어떨까. 또 프로토콜(protocol)이 다른 단말기들끼리 통신할 수 있게 만든다면 어떨까. 아예 이러한 수많은 네트워크를 다 통합할 수 있는 스위칭 시스템을 만든다면 어떨까. 이는 당시 앞서나가는 기업보다 훨씬 앞선 테크놀로지였고, 차별화가 가능한 아이디어였다. 이렇게 해서 나와 유리는 1993년 7월 자일랜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