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성공
오진권 지음 | 비전과리더십
맛있는 성공
오진권 지음
비전과리더십 / 2009년 6월 / 274쪽 / 12,000원
1부 배고픈 사람에서 밥 퍼주는 사람으로사당역 14번 출구로 출근하며 : 나의 출근 장소는 사당역 14번 출구. 이곳에서 나의 하루 일과가 시작된다. 사당역 앞에 있는 씨푸드 뷔페 '마리스꼬'에서 때맞춰 직원들이 밥차를 밀며 나오고 있다. 허름하고 남루한 차림의 노숙자들, 지팡이에 몸을 기댄 채 힘겹게 서 있는 장애인, 기력이 다해 보이는 독거노인, 중풍에 걸린 할머니를 휠체어에 앉혀 밀고 나온 할아버지…. 모두 낯익은 단골손님들이다. '마리스꼬'에서 밥과 설거지를 담당하고 '오리와 참게'에서는 국과 반찬을 맡고 있다. 아침마다 배고픈 이들에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스한 밥을 내 손으로 직접 담아주는 기쁨이란….
허기지고 지친 표정으로 배식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자 옛날 서대문 적십자 병원 앞에서 누렇게 뜬 얼굴로 피를 팔려고 차례를 기다리던 한 소년의 모습이 떠오른다. 50원짜리 팥죽도 사먹지 못해 30원짜리 '피죽'으로 하루를 버티던 시절이었다. 당시 남대문 시장에서는 팥죽을 팔았는데 50원짜리에는 팥알과 새알이 들어 있었지만, 30원짜리는 국물뿐이어서 '피죽'이라고 불렀다. 피죽조차 사먹을 돈이 없으면 나는 견디다 못해 서대문 적십자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 하루 종일 줄을 서서 기다리다 내 앞에서 차례가 끊겨 그냥 돌아와야 할 때도 많았다.
초등학교 1학년, 영화제작에 손을 댔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법원 집달관이 집으로 쳐들어오면서부터 가난과 굶주림은 나를 집요하게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모든 살림살이에 빨간딱지가 붙었다. 아버지는 빚쟁이를 피해 잠적하고 5남매가 어머니를 따라 외가로 들어갔다. 1년간 더부살이를 하다가 남의 집 지하실을 얻었다. 집에 있는 물건 중 팔 수 있는 것은 모두 팔면서 하루하루를 버텼다. 더 이상 내다 팔 것이 없자 어머니는 흔들거리는 금니를 억지로 뽑아 5남매의 한 끼 밥상을 차려주셨다. 나는 초등학교 때만 해도 전교 어린이 회장을 할 정도로 리더십이 있었지만 가난 앞에서는 그 무엇도 힘을 쓸 수 없었다. 가난은 모든 것을 진흙처럼 짓이겨 버렸다. 더 이상 집에서는 아무런 희망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16살에 가출을 했다. 가출 후 구두닦이, 라이터 노점상, 좀약 장사, 브로치 장사, 빨랫줄 장사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다. 남대문 시장 2층에 있는 하루 30원짜리 합숙소에서 앵벌이 아이들과 함께 산 적도 있다. 경상남도 삼랑진 주변에서는 한 달 동안 여관 보이를 한 적도 있었다. 하루는 일이 하도 힘들어서 물건 사오라는 돈 2천 원을 가지고 도망을 쳤다. 기찻길을 따라 밀양역까지 죽어라고 뛰어가는 중에 깜깜해서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터널도 2개나 지났다. 물이 줄줄 흐르는 깜깜한 터널 벽을 손으로 짚어 가며 가까스로 밀양역 앞에 도착했다. 하지만 겨우 자장면 곱빼기를 하나 사먹고 대합실에서 지쳐 잠들었다가 깡패들에게 남은 돈을 몽땅 빼앗겼다. 40년 전의 이야기다.
그러던 내가 이제 매일 아침 노숙자들에게 밥을 퍼주고 있다. 배고픈 사람에서 밥 퍼주는 사람이 된 것이다. 내가 배를 곯아보지 않았다면, 내가 노숙 생활을 해본 적이 없었다면 이런 기쁨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나는 내 인생의 최고의 시간을 살고 있다.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다. '마이더스의 손'이어서가 아니라 배고픈 사람들에게 '밥을 퍼주는 손'이 되었기 때문이다.
5평짜리 실내 포장마차에서 시작된 신화 : 1987년 신림극장 뒤 후미진 골목, 무수한 상점에 가려 한참을 두리번거려야 찾을 수 있는 5평짜리 '골목집'에 초조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평생을 가도 잊을 수 없는 이날은 숱한 밤을 지새우며 개발한 보쌈을 개시하는 날이었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정말 끝장이었다. 나이 37세, 그것도 중졸 출신이 다시 무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는 이미 늦은 나이였다. 보쌈은 이제 마지막 기회이자 희망이었다. '이번에도 안 되면 어떡하나?' '과연 손님들 입맛에 맞을까?'
한때 안양에서 잘나가던 육군 상사 오 상사였다. 그러나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다 알거지가 되다시피 해서 택시 운전을 시작하게 됐다. 나는 택시 운전을 하면서 한시도 식당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작은 식당 2개를 연이어 실패하고도 머릿속으로는 여전히 하루에 열두 번씩 새로운 식당을 지었다 허물곤 했다. 돈 한 푼 없는 빈털터리였음에도 운전 중엔 식당만 눈에 들어왔고 잠꼬대도 식당 타령이었다. 오로지 '식당을 해서 성공한다'는 신념뿐이었다. 33개월간 택시운전을 하는 동안 가까스로 300만 원이 모아졌다. 그러나 300만 원을 가지고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장소를 물색하던 중 신림동의 후미진 골목의 5평짜리 가게가 눈에 띄었다. 미장원을 하다 망하고 나간 자리였는데 보증금 230만원, 월세 23만원에 임대를 얻은 것만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5평짜리 가게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당시 신림 사거리 주변은 먹거리촌이 형성되고 있어 저녁이면 사람들로 붐볐다.
'실내 포장마차를 하기로 하자.' 메뉴를 곰장어 구이로 결정하고 닭똥집, 삼겹살, 해장국, 도토리묵 등도 욕심껏 곁들였다. 그러나 곰장어와 닭똥집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를 몰랐다. 궁리 끝에 부산행 야간열차를 타고 자갈치 시장으로 갔다. 매서운 새벽바람을 맞으면서 공급처를 찾고 자문을 받아 매콤하면서도 감칠맛 나는 메뉴를 접시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 드디어 새로운 미래가 열리는 듯 들뜬 마음으로 실내 포장마차의 문을 열었다. 그런데 하루 종일 손님이 한 명도 없는 날도 있었고, 한 번 찾아온 손님들도 그 한 번을 끝으로 더 이상 찾지 않았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하루 종일 빈 가게를 지키며 앉아서 내린 결론은 '메뉴의 허점'이었다. 좁은 공간이라 환기를 시킬 수 없어 곰장어를 그냥 삼겹살 판에 구워 판 것이 실수였다. 곰장어는 연탄불이든 장작불이든 직접 구워야 맛이 있는데 판에 올려 구웠으니 맛이 없는 건 당연했다. 또 입지도 맞지 않았다. 신림극장 뒷골목을 다니는 사람은 주로 신림시장에서 순대를 사먹으려는 학생들이었다.
'메뉴를 바꾸자.' 경험상 바꾸려면 빨리 바꾸어야 했다. 새로운 메뉴를 찾아서 다시 서울의 식당을 헤매기 시작했다. 이자 낼 날은 다가오고 돈은 벌지도 못하면서 비싼 음식을 사 먹어야 하는 고통은 참담함 그 자체였다. 우연히 보쌈을 발견한 것은 청계천에서였다. 갓 담근 김치와 삶은 돼지고기를 함께 내놓는 보쌈은 가격도 부담이 없고 양도 푸짐해서 서민층에게 적격인 메뉴였다. 나는 요리책을 사다가 고기에 대한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고기를 어떻게 해야 맛있게 삶나.' 부드러우면서도 냄새나지 않게 돼지고기를 삶는 것은 엉킨 실타래를 풀어내는 것만큼이나 인내심을 필요로 했다. 드디어 퍽퍽하지 않고 쫀득하면서도 냄새가 나지 않게 돼지고기 삶는 방법을 찾아냈다.
똑같은 자리에서 단지 메뉴가 바뀌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손바닥 뒤집듯 가게가 터져 나가고, 그것도 모자라 골목까지 손님이 길게 줄지어 서는 것을 보며 차별화된 맛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달았다. '아, 아무리 구멍가게 장사라 하더라도 역시 남과 다른 뭔가를 해야만 하는구나!' 맛을 차별화해야 한다는 것을 체득한 나는 손님들의 다양한 입맛과 보이지 않는 싸움을 벌여 나갔다. 좀 더 색다른, 좀 더 맛있는 보쌈을 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보쌈을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밀려드는 손님을 감당하지 못해 가게를 넓혀야 했다. 가게를 넓히면서 아예 보쌈 전문점으로 전환하기로 했다. 보쌈 전문점으로 정하고 나니 상호를 계속 '골목집'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처는 상호를 무엇으로 할까 고심하던 중 우연히 중년의 손님이 김치에 돼지고기를 싸서 양쪽 볼이 미어터지도록 먹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꼭 심술이 퉁퉁한 놀부같군." "그래, 놀부야, 놀부. 상호를 놀부로 하자!" 상호는 한 번 들으면 누구에게나 잊혀지지 않은 것이 좋다. 이렇게 해서 '놀부보쌈'이 탄생했다.
'놀부보쌈'은 라디오와 여성지 등 매스컴을 타자 유명한 식당이 되어 갔다. 체인점에 대한 문의도 서서히 높아졌고 나도 1989년 초부터 구체적으로 구상을 하기 시작했다. 프랜차이즈를 하기 어려운 한식이라고들 했지만 승부를 걸어보고 싶었다. 철저한 교육과 중앙 공급 시스템으로 운영한다면 불가능할 것도 없었다. 나는 제조방법을 표준화시키기 위한 실험을 계속해서 대량생산은 물론 체인 사업까지 성공시킬 수 있었다. 한 달에 신규 가맹점이 6~7개씩 늘었다. 내가 대표이사를 그만둘 시점인 2003년 2월에는 20개의 직영점과 360여 개의 체인점이 형성되어 있었다. 놀부보쌈은 1996년에는 외식산업 부분 경영대상, 한국프랜차이즈 종합대상을 받아 한국 최고의 프랜차이즈 회사로 인정을 받았다. 이후 나는 부대찌개를 비롯한 솥뚜껑 삼겹살, 시골상차림, 유황오리, 순대국밥 등의 새로운 체인 아이템을 속속 개발했다.
벤츠 타고 검정고시 보러 가던 날 : 1998년 MBC 프로그램 '성공시대'에 놀부 오진권 편이 방송되자 사람들은 나의 성공에 놀라는 것이 아니라 '중졸 출신'이라는 사실에 더 크게 놀라는 것 같았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조차 "그래도 나는 고등학교는 나온 줄 알았다"며 마치 큰 비밀이라도 알아낸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그전과는 다르게 대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안 되겠다. 공부를 해야지.' 결심한 즉시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서 검정고시에 필요한 과목별 문제집을 샀다. 그리고 새벽에 일어나 독학으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내 나이 49세 때였다. 드디어 시험 당일 아침, 가방을 들고나서는데 아들이 뒤따라 나와 인사했다. "아버지, 시험 잘 보세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이 나이에 자식으로부터 시험 잘 보라는 인사를 듣다니….' 문밖으로 나오니 운전기사가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가방을 받으며 허리 숙여 인사했다. 기사가 운전하는 신형 벤츠 420 뒷좌석에 앉아 시험장인 봉천 중학교로 향했다. 검정고시를 합격하고 50세의 나이에 우송대학교 관광경영학과에 입학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꼽으라고 한다면 가난도 배고픔도 아니었다. 바로 이혼이라는 아픔, 그리고 '놀부'와의 결별이었다. 부부가 신림동의 작은 골목집에서 함께 고생하며 일궈냈던 시간들이 '성격 차이'를 이유로 서류 한 장으로 막을 내렸다. 동시에 놀부를 창업하고 100년 기업을 이루고자 했던 나의 꿈도 여기서 접어야 했다. 한동안 이혼의 충격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런 나를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 준 것은 식당에 대한 열정이었다. "그래, 다시 시작하자. 나의 천직인 식당에 다시 미쳐 보자." 모든 것을 잊고자 식당 창업에 매진했다. '놀부' 창업자라는 기존의 고정관념을 벗어 버리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아이템이 필요했다. 2003년 8월, 나를 믿고 따라 나온 13명의 직원들과 주식회사 '이야기가 있는 외식 공간'을 창립했다. 첫 작품으로 압구정동에 '사월에 보리밥'을 개업했다. 그리고 이후 갖고 있던 '놀부' 체인점들을 하나하나 정리하여 2006년 4월에 놀부 체인점을 모두 정리했다. 그러면서 '노랑저고리', 씨푸드 뷔페 '마리스꼬', '이찌멘', '웃기는 짬뽕' 등을 연속적으로 오픈해 나가고 있다.
2부 고객을 행복하게 만드는 오진권의 식당 이야기외식업은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다 - 삼겹살의 재발견, '솥뚜껑 삽겹살' : 주변 사람들은 내게 어떻게 그렇게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템을 개발하느냐고 하지만, 나는 새로운 아이템을 개발한 것이 아니라 발견한 것이라고 말한다. 아이디어는 어디서 새롭게 튀어나오는 게 아니라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발견하지 못했던 것을 문득 발견하고 내가 늘 생각하던 것에 조화롭게 덧입힐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1994년도에 개발한 '솥뚜껑 삼겹살'도 이런 경우다. 어느 날 갑자기 예전에 맛있게 먹었던 고추장 목살구이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대문 합숙소 등을 전전하던 시절, 특별한 날 먹었던 음식이 회현동에서 파는 고추장 목살구이였는데 1994년에는 거의 없어지고 북창동에 몇 집만 남아 있었다. 그렇다고 북창동처럼 연탄불에 구울 수는 없었다. 실내에서 연탄불을 피우는 것은 여러 가지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던 중 제주도에 있는 한 목살구이집이 유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직원들과 함께 그 식당을 찾아갔다. 연예인들이 단골로 가는 집이라고 했다. 목살을 장어구이용 로스터로 구워 내는데 막상 가보니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서울로 올라오기 위해 공항으로 가던 도중 우연히 재래식 시설의 도축장에 들르게 되었다. 그곳을 한 바퀴 둘러보며 일꾼들의 작업과정을 구경하고 있는데 희한한 광경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일꾼들이 작업 도중 간간히 돼지고기의 살점을 칼로 뚝 떼어 한쪽 구석에 있는 식용유 통으로 던져 넣는 것이었다. '왜 저럴까?' 호기심이 생겨 자리를 뜨지 않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일을 마친 일꾼들이 뒷문을 통해 우르르 나갔다. 나도 뒤쫓아 갔다. 작업장 뒷마당에 큼지막한 무쇠 솥뚜껑이 있었다. 그 주위로 일꾼들이 빙 둘러앉더니 아까 모아 두었던 돼지고기를 솥뚜껑 위에 올려 구워 먹기 시작했다. "그래, 바로 이거다!"
당시 삼겹살집에서는 돌판이 유행이었는데, 예열을 20~30분 전부터 해야 해서 시간이 많이 걸렸다. 게다가 돌판이 작다 보니, 4명 정도 식사를 할 때는 고기 굽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서, 수요를 맞출 수 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그 문제를 고민하던 찰나에 해결책을 발견한 것이다. 기름이 솥뚜껑 가장자리로 흘러내려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울 뿐만 아니라 또 솥뚜껑이 넓적하고 크다 보니 인원이 많아도 수요를 채울 수 있었다. 오히려 익은 고기가 남아 가운데 솥뚜껑 손잡이 위에 올려 가며 먹고 있지 않은가! 서울로 돌아와 곧바로 적당한 크기의 솥뚜껑 개발에 착수했다. "솥뚜껑을 어떻게 손님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고…." 처음에는 주위 사람들도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솥뚜껑에 삼겹살을 구워 먹는 재미와 맛에 푹 빠져들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의장등록 특허, 실용신안 특허를 따내게 되었다. 솥뚜껑에서 나온 기름은 따로 모아 비누를 만들어 고객들에게 석장에 1,000원씩 받고 팔아 양로원에 기부했다.
외식업은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다. 나는 1년에 600끼를 절대 허투루 먹지 않는다. 내게는 한 끼의 식사가 귀중한 수업시간이다. 학습할 만한 곳을 찾아가 식사를 하고, 심지어 한 끼에 두세 군데의 식당을 돌아다니며 연구할 때도 있다. 특이하고 맛있는 식당이라면 남쪽 끝자락에 있는 섬도 멀다 않고 단숨에 찾아간다. 내가 경험하고 발견한 만큼 새로운 아이디어도 찾아지기 때문이다.
흔한 음식 깔아놓으면 1년도 못 간다 - 새로운 음식 맛보는 신개념 뷔페, '마리스꼬' : 대학로 '놀부집 시골상차림'을 오픈한 지 6년 정도 지나자 일반 손님들보다는 단체 관광객들의 단골 코스가 되었다. 특히 대장금 드라마 열풍으로 하루에도 수백 명의 중국 관광객들로 북적거렸다, 무언가 새로운 변화가 필요했다. '이제 시골상차림을 접고 새로운 것으로 바꿔야겠다.' 그러나 딱히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2006년 4월의 어느 날 새벽, 곤히 자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머리를 꽝 때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대학로 씨푸드 뷔페!' 분명 꿈을 꾼 것은 아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릴까?' 벽의 전자시계를 보니 새벽 4시 9분이었다. '대학로 씨푸드 뷔페라니….' 그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대학로 '시골상차림'이야말로 씨푸드 뷔페 장소로 최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맞아 그거야! 대학로에다 씨푸드 뷔페를 해야 되겠다!' 그때 그 음성은 하나님이 주신 음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부터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시켜 나갔다. 즉시 '놀부집 시골상차림'을 정리하고 공사를 시작했다.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미국, 홍콩, 마카오 등 유명한 씨푸드 뷔페를 돌아다녔다. 우리나라 최초의 씨푸드 뷔페인 '무스쿠스'와 삼성동의 '토다이' 등 국내외의 씨푸드 뷔페들도 가서 보았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내 식대로 하자!' 나는 그동안 보고 다녔던 씨푸드 뷔페를 무시하고 대신 나만의 개성 있는 컨셉으로 밀고 나가기로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음식이다.' '뷔페는 배를 채우러 오는 곳이 아니라 새로운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이라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렇게 해서 총 130여 가지의 음식이 준비되었다. 단지 가짓수를 채우기 위한 음식은 단 한 가지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