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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멍거 자네가 옳아!

재닛 로우 지음 | 이콘
찰리 멍거 자네가 옳아!

재닛 로우 지음

이콘 / 2009년 5월 / 520쪽 / 16,000원



특이한 콤비


워런 버핏과 찰리 멍거는 1959년 처음 만났다. "1959년 찰리의 아버님이 돌아가신 다음 그는 집안일을 정리하기 위해 오마하로 왔습니다. 데이비스 집안에서 저녁식사에 초대를 했습니다. 우리 둘은 만나자마자 죽이 맞았지요"라고 버핏은 회상했다. 이전에 멍거는 사람들이 워런 얘기를 하는 것을 들었지만 딱히 그를 만나고 싶다는 기대 같은 것은 없었다. 더욱이 남에 대한 판단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집하는 그였지만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워런이 얼마나 비범한 사람인지 단박에 알아봤던 겁니다." 두 사람이 만난 시점은 절묘했다. 찰리는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은 참이었고, 버핏은 멘토였던 벤저민 그레이엄이 투자 사업에서 은퇴하고 뉴욕을 떠나 로스앤젤레스로 옮겨간 참이었다. 그레이엄이 투자에 점점 흥미를 잃자 워런은 상실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에게는 새로운 파트너가 필요했다. 첫 만남부터 멍거가 버핏의 주목을 끈 이유는, 정직하고 현실적이며 호기심 많고 진부한 생각에 얽매이지 않는 그의 사고방식이 그레이엄과 매우 흡사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피델 카스트로가 쿠바의 실권을 장악하고 젊은 존 F. 케네디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즈음, 버핏과 멍거는 이미 "정신적인 파트너"가 되어 있었다. 둘의 관계는 어떤 계약서나 직책도 끼어들 수 없는 것이었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랬다. 사업상의 결합이라기보다는 버핏은 "형제간의 행동"에 가까웠다고 말했다. 상호 신뢰와 확신을 바탕으로 한 두 사람의 관계는 토론을 하고 회의를 열고 거래를 성사시킬 때마다 점점 자라났다.

새로운 인생 짜 맞추기

찰리는 주로 법률회사인 뮤직 필러 앤드 개릿에서 남보다 앞서기 위해서 모든 재능을 동원해서 변호사 일에 임했다. 찰리는 조부에게 배운 원칙대로 살았다. 첫째, 비즈니스를 구축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현재 책상 위에 놓인 일에 집중하는 것이고 둘째, 수입을 초과하여 지출하지 않고 현금을 모아서 미래의 부를 마련하는 데 투자하는 것이다. 버핏이 말했다. "멍거는 변호사 일을 하면서 비즈니스에 대해 많이 배웠습니다. 이 친구는 인터내셔널 하베스터의 배급업자인 20세기폭스에 관련된 업무를 봤습니다. 늘 비즈니스의 현장에 있었던 겁니다. 거기서 비즈니스를 둘러싼 문제에 대해 늘 생각해야 했죠." 물론 몇 가지 실수도 있었지만 멍거의 경력은 순조롭게 성장했다. 하지만 멍거는 법의 맹점이 무엇인지를 잘 알았다. 그가 함께 일하기를 선호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법적으로 큰 어려움에 처하는 일이 거의 없지만, 그를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어딘가 문제점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1950~60년대에 변호사라는 직업은 확실하게 부를 거머쥘 수 있는 길은 아니었다. 결국 변호사 일로 서서히 돈을 모은 멍거는 증권 투자를 시작했고, 친구나 의뢰인들의 사업에도 합류하기 시작했다.

멍거의 첫 번째 공식적인 사업 파트너는 에드 호스킨스(Ed Hoskins)였다. "우리는 대규모 신용대출을 이용해서 에드가 회사를 매입할 수 있게 했습니다. 차입매수(LBO)의 초기형태인 셈이었습니다." 그 회사는 호스킨스가 설계한 고도로 특화된 군사 로켓용 변압기를 만드는 주문생산업체(job shop)였다. 당시 회사는 한국전쟁에 따른 전쟁 특수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기업 매수로 인해 진 빚을 갚기 위해 사세를 신속하게 확장해야 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자명한 이치였다. 그렇지만 그와 동시에 경쟁사도 전쟁 특수를 포착하고 발 빠르게 사업을 확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장은 공급 과잉 상태였다. 그들의 사업적인 상황은 비참하기 그지없었고 이로 인해 당시 이혼 수속 중이었던 멍거 역시 재정적으로 상당한 압박을 받았다. 멍거는 호스킨스와의 동업을 1950년대에 시작해서 1961년까지 유지했다. 호스킨스와 함께한 기간 동안 멍거는 경영에 대한 초급 교육을 제대로 받은 셈이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하이테크 산업에는 다시는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한번 해보니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더군요." 또한 찰리는 고품질 사업을 인수하는 것이 훨씬 이점이 높은 일임을 깨닫게 되었다. "약간의 이윤을 남기고 정리해야 하는 망하기 직전의 회사를 매입하는 것은 전혀 재미있는 일이 아니더군요." 또 그는 좋은 사업이란 무엇인지도 배웠다. "좋은 사업과 나쁜 사업의 차이점은, 좋은 사업은 결정을 내리기 쉬운 상황이 계속 이어진다는 겁니다. 반면에 나쁜 사업의 특징은 연달아서 고통스러운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겁니다."

위대한 아이디어의 결합

1960년대부터 20세기가 끝날 때까지 멍거와 버핏은 일주일에 수십 번씩 전화 통화로 사업 기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협상이 끝날 시간이 다가오면 두 사람은 만났다. 둘 중 한 사람에게 연락이 되지 않으면 다른 한 사람이 권한을 행사했다. 버핏은 "서로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으니까 둘 중 한 사람이 없어도 거래를 상당 부분 진행할 수 있는 것이지요"라고 설명한다. 멍거를 만났을 때 버핏의 나이는 불과 스물 아홉이었지만 그는 이미 투자 분야에 관한 한 상당한 자격을 갖춘 상태였다. 여기에 멍거는 상법 전문가의 안목을 보태주었으며, 이미 상업의 세계에 독립적으로 진출한 경험이 있었기에 비즈니스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버핏은 이렇게 말했다. "찰리는 현존하는 그 어떤 사람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거래를 분석하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는 어떤 약점이든 60초 안에 간파해냅니다. 완벽한 파트너죠." 멍거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상적인 파트너는 혼자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에 따라 이끄는 파트너가 되기도 하고 따르는 파트너가 되기도 하고, 항상 동등한 입장에서 협조하는 파트너가 되기도 합니다. 저는 세 가지를 다해봤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갑자기 워런을 따르는 파트너가 된 사실을 믿기 힘들어 하더군요. 그러나 파트너가 되어 따르고 싶은 사람들이 있지요. 그러지 못한다고 고집 피울 정도로 오만한 자존심은 제게 없었습니다. 자기 자신보다 어떤 일에 더 뛰어난 사람은 언제나 있기 마련입니다. 이끄는 사람이 되기 전에 우선은 따르는 사람이 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배역을 연기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야 여러 사람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어울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포천》지의 편집자이자 작가인 캐럴 루미스의 설명에 따르면, 버핏이 그레이엄의 사상에 대한 존경심을 유지하면서도 영역을 확장하여 다음번의 위대한 일보 전진을 하는 데 있어서 멍거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버핏을 만났을 때 멍거는 이미 좋은 기업과 나쁜 기업의 차이에 대한 견해를 확실하게 정립해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는 캘리포니아 주 베이커스필드에 소재한 인터내셔널 하베스터 딜러십 책임자였고, 본질적으로 형편없는 기업을 뜯어고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확실히 목격했었습니다. 멍거의 머릿속에는 '염가주식(bargains)'에 대한 신념은 있지도 않았고 거기에 대해 배울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서 수년 동안 버핏과 대화를 나누면서 언제나 '좋은 기업'의 장점을 강조했습니다." 버핏은 루미스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인다. "벤 그레이엄의 가르침과 달리 찰리는 염가주식만을 찾아다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이 점이 그가 내게 미친 가장 큰 영향입니다. 그레이엄의 제한된 관점에서 벗어나는 데에는 아주 강력한 힘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찰리의 마인드가 지닌 힘입니다. 그는 내 사고의 지평을 넓혀 주었습니다."

블루칩 스탬프스

1950년대 및 60년대에 그린스탬프스(Green Stamps), 블루앤드골드(Blue and Gold), 블루칩 등이 발행한 트레이딩 스탬프는 일종의 마일리지 제도의 전신으로서, 상점들이 고객 인센티브의 일환으로 나눠주는 쿠폰이었다. 소매점은 블루칩에 돈을 예치하고서 스탬프를 교환해갔고, 스탬프 회사는 그 예치금을 관리하면서 상환 요청이 들어왔을 때에는 그 돈으로 상품을 구입했다. 상점 이용 고객은 구매 금액과 비례해서 받은 스탬프를 수첩 같은 곳에 모았다가 스탬프 회사에 보내면 유아용 장난감, 토스터기, 그릇, 손목시계 같은 상품으로 교환받을 수 있었다. 상품으로 교환할 수 있을 정도로 스탬프를 모으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고, 거기다 일부 고객은 서랍 안에 스탬프를 넣어두고는 보상을 받지 않았기에 부동자금은 계속 쌓였다. 1970년대 초반까지 블루칩의 매출액은 연간 약 1억 2천만 달러에 달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하면 약 4억 달러에 가깝다. 당시 부동자금 규모는 1억 달러였다. 버핏과 멍거는 블루칩 주식을 공격적으로 매입하기 시작했고, 1970년대 초반이 되자 버핏이 소유한 여러 기업체가 블루칩의 대주주가 되었고, 멍거는 2대 주주가 되었다. 버핏과 멍거는 이사회 일원이 되고 나서 투자위원회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시기 동안 트레이딩 스탬프의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하자 투자위원회는 블루칩 부동자금의 가치를 구축하는 데 주력했다. 블루칩의 부동자금을 이용해 기업 인수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블루칩이 인수한 웨스코 파이낸셜과 관련해서 불미스런 사건이 발생했다. 1972년 여름에 한 브로커가 버핏과 멍거에게 파사데나에 위치한 뮤추얼 세이빙스 앤드 론 어소시에이션(Mutual Savings and Loan Association)의 모회사인 웨스코 파이낸셜 주식에 대한 대량 매수를 제안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당시 웨스코 주식은 장부가치의 절반도 안 되는 10달러 초반 수준에서 거래되고 있었다. 저렴한 가격이라고 생각한 버핏과 멍거는 블루칩을 통해 웨스코 주식 8%를 매수하기로 결정했다. 이윽고 1973년 1월에 웨스코 경영진은 또 다른 저축대부 회사인 샌타바버라 소재의 파이낸셜 코퍼레이션과의 합병을 발표했다. 버핏과 멍거는 웨스코 자체가 재고 처분 가격으로 팔려나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계약 조건은 웨스코 주주들이 자신들의 저평가된 주식을 고평가된 파이낸셜 주식과 맞교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멍거와 버핏이 볼 때 웨스코 측 주주에게는 유리한 계약 조건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웨스코 측 주주들을 설득하여 합병을 무산시켰다. 그 후 블루칩은 웨스코 지분을 늘려갔고 1974년 중반 무렵이 되자 웨스코 주식 대부분을 소유하게 되었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에서 이 거래와 관련해서 버핏과 멍거의 활동을 계속 추적하고 있었던 SEC는 웨스코 거래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었다. SEC는 블루칩이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웨스코 주가를 조작했는지의 여부에 관심을 모았다. SEC는 멍거와 버핏이 필요 이상으로 높은 가격에 주식을 매입했고, 이런 행동은 일종의 선의라기보다는 주식 선점을 위한 동기로 의심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블루칩은 SEC가 이번 행위로 손해를 입었다고 판단한 웨스코 주주들에게 11만 5천 달러가 넘는 금액을 보상해주어야 했다. 스트레스가 심했던 시기였지만 그 결과 버크셔 해서웨이는 더 크고 더 단순한 구조의 회사로 탈바꿈했다. 조세 목적을 위해 웨스코를 블루칩 스탬프스와 합쳤고 이로써 소유지분은 80%가 되었다. 디버시파이드 리테일링과 블루칩이 둘 다 버크셔로 합병되면서 마침내 멍거는 버크셔에서 공식적인 자리를 얻게 되었다. 멍거는 버크셔 주식 2%를 받으면서 부회장에 취임했고, 연봉은 종전대로 5만 달러였다.

시즈캔디에서 얻은 교훈

"품질을 두고 타협하지 않는다"는 모토를 철저히 따르는 시즈캔디는 멍거에게는 식후 디저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시즈캔디는 그와 워런 버핏이 가장 초기에 매수했던 회사 중 하나이며, 회사 전체를 매수한 것은 시즈캔디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즈캔디에서 얻은 교훈을 토대로 찰리와 워런은 투자 방식을 대대적으로 개선할 수 있었다. 1972년 블루칩 스탬프스의 부동자금을 이용해서 버핏과 멍거는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작은 회사인 시즈캔디를 2,500만 달러에 인수했다. 인수 과정과 그 이후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멍거와 버핏은 이를 잘 해결해 나갔고, 시즈캔디는 지속적으로 사세를 확장해나갔다. 1999년에 시즈캔디는 미국 전역에 약 250개 매장을 세웠고 그 가운데 3분의 2가 캘리포니아에 있었다. 이 회사는 한 해 1,500만 킬로그램의 초콜릿을 판매한다. 시즈캔디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판매된 초콜릿만도 3만 4,000킬로그램이 넘는데, 이 사이트의 경쟁사는 자사의 수신자부담 주문 서비스이다. 1999년 시즈캔디의 매출액은 3억 6,000만 달러였으며 세전 영업이익(pretax operating profits)은 7,300만 달러였다.

"시즈캔디……." 멍거가 회상에 젖는다. "장부가치보다 3배나 높은 가격을 주고 인수했는데도 성공이었습니다. 호크쉴드 콘(Hochschild Kohn) 백화점 체인은 장부가치에서 할인한 청산가치로 매수했음에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이 두 사건을 통해 우리는 더 훌륭한 기업에는 더 높은 가격을 지불해야 한다는 쪽으로 사고를 전환할 수 있었습니다." 찰리와 워런이 시즈캔디를 샀을 때에만 해도 둘은 최저가를 노리는 투자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시즈캔디가 대단히 훌륭한 계속기업(ongoing business)임이 드러나자, 멍거와 버핏은 곤경에 처한 회사를 헐값에 매입해서 시간과 에너지와 때로는 더 많은 자본을 쏟아 붓는 것보다는 훌륭한 기업을 인수해서 그대로 굴러가게 하는 것이 훨씬 쉽고 훨씬 유쾌한 경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버핏이 말했다. "시즈캔디를 사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코카콜라도 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코카콜라에서 거둔 120억 달러의 가치는 시즈캔디에게 그 공을 돌려야 합니다. 운 좋게도 회사 전체를 인수한 덕택에 우리는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멍거는 버크셔 주주에게 미국에는 현금은 많이 창출하면서도 사업은 크게 확장하지 못하는 기업들이 많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 기업이 사업 확장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없다고 그는 말했다. 그런 회사들은 대다수 기업들에게는 인수 욕구를 불러일으키지 못하지만 버크셔에서라면 환영이다. 멍거와 버핏은 남아도는 자본을 회수해서 더 높은 이익을 낼 수 있는 다른 곳에 투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멍거는 이렇게 말했다. "시즈캔디를 통해 우리는 기업의 사고방식과 운영방식에는 시간의 풍상을 이겨낸 가치가 포함돼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런 교훈 덕에 우리는 다른 인수거래에서도 더 현명하게 행동해서 훨씬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시즈캔디를 보유함으로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주 커다란 무언가를 얻었습니다."

만개하는 버크셔 해서웨이

1976년부터 86년까지 수많은 사건이 일어났다. 멍거와 버핏은 모두 자신들의 파트너십 사업을 접었고, 블루칩 스탬프스와 이곳의 자회사들은 버크셔에 병합되었으며, 삶은 더 단순해졌다. 보험회사 및 기타 자회사들의 지주회사로 탈바꿈한 버크셔는 다른 연기금이나 뮤추얼펀드와 달리 감독기관의 압박에 못 이겨서 자산을 다각화하지 않아도 된다. 버크셔는 현금이 풍부한 회사들의 지분을 100% 보유하고 있으며, 주식 포트폴리오도 엄선한 몇몇 기업에 주로 집중돼 있다. 멍거와 버핏이 기반을 닦으면서 버크셔 해서웨이는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발전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물론 버핏과 멍거가 시도한 여러 아이디어 중에는 실패한 것도 많았다. 기록을 살펴보면 사업적인 실패나 불발된 인수 거래가 어느 정도 눈에 띈다. 버핏은 1977년 버크셔 연차보고서에 이렇게 적었다. "근 10년 동안 우리는 제품에서나 사람을 다루는 일에 있어서나 몇 가지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몇 가지 실수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상당히 만족스러운 성과를 달성하는 기업에 속해 있는 것이 대단히 마음이 놓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훌륭한 경영진을 두었는데도 평균 실적밖에 내지 못하는 우리의 섬유사업과는 정반대인 셈입니다. 우리 경영진은 역풍보다는 순풍을 맞이하는 사업에 속해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그리고 불행히도 앞으로도 똑같은 교훈을 배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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