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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서 인생을 배우다

김희근 지음 | 생각의나무
사막에서 인생을 배우다

김희근 지음

생각의나무 / 2009년 5월 / 400쪽 / 20,000원



내 청춘 마이애미 -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다



구름 속의 비가 아닌 구름 위의 햇빛을


2002년 1월 어느 날, 나는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모교인 마이애미 대학교 학장으로부터였다. "동창으로서 그동안 모교 발전을 위해 애쓰신 점, '희근 킴 아시아 비즈니스 프로그램(Higgin Kim Asia Business Program)'을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후원해 오신 점 등을 높이 평가해 다음 졸업식 때 우리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기로 했습니다. 틈나시는 대로 특강도 요청하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부교수(Associate professor) 대우를 해 드리겠습니다." 나에게는 너무나 과분한 축복이고 명예여서 한동안은 믿기질 않았었다.

어느 날, 나는 마이애미 대학교 경영대학 졸업식장의 단상에 가운을 입고 박사모를 쓴 채 서 있었다. 졸업식장을 가득 메운 수천 명의 학생과 학부모들의 눈길은 모두 나에게로 향해 있었다. 나는 단상에 서서 청년으로서 가져야 할 꿈과 열정, 그리고 일과 삶의 지혜에 대한, 나눔에 대한 나의 철학을 이야기했다. 16분에 걸친 긴 연설이었지만 청중은 내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 답례로 큰 박수를 보내 주었다. 그 다음날에는 전체 졸업식이 열렸다. 나는 대학 총장과 함께 단상에 올라 한 번 더 학위를 수여받았다. 수많은 박사 교수들과 함께 가운을 입고 졸업식장을 걸어간 긴 행렬은 진정 감동적이었다. 내 생에 가장 빛나던 한순간이었다.

희근 킴 아시아 비즈니스 프로그램

1996년에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부터 이 뜻밖의 사건은 시작되었다. "저는 회장님의 경기고 10년 후배인 이수언이라고 합니다. 선배님의 모교인 마이애미 대학교에서 MIS(경영 정보 시스템)를 가르치고 있죠. 한번 찾아뵙고 싶은데 시간을 좀 내주시겠습니까?" 만나 보니 그는 내게 전혀 예상치 않았던 제안을 했다. "우리 마이애미 대학 학생들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 계획입니다. 선배님이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30여 년 전 유학 갔던 마이애미 대학에서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던가. 그 배움과 깨달음이 오늘의 나를 있게 했으니, 나도 후배들에게 내가 받은 것을 돌려주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내 이름을 따서 지은 '희근 킴 프로그램(Higgin Kim Asia Business Program)'은 그렇게 탄생되었다.

희근 킴 프로그램은 시작한 지 12년 만에 한국은 물론 중국의 베이징과 상하이, 베트남의 하롱베이, 일본 도쿄, 그리고 미국 하와이를 거치는 8학점짜리 프로그램으로 발전했다. 경쟁이 치열해 평균 학점이 3.4점에 못 미치면 수강 신청이 어렵다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명실 공히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문화 및 경제를 공부하는 커리큘럼으로 굳건히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나는 학교측과 상의해 아시아 교육에만 쓰는 조건으로 장학 기금을 출연해 '회근 킴 아시아 스칼라십'을 만들었다. 수혜자인 학생들로부터 감사 편지를 받을 때면 나는 기분이 뿌듯해지곤 한다. 이제 나는 미국이 세계의 중심이며 거의 모든 것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마이애미 대학의 후배들이 희근 킴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과 아시아라는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이해하고 더 나아가 상생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한다.글로벌 그라운드 - 사막은 내 인생의 무대였다



아버지는 왜 아들의 첫 수주에 "No!"를 했을까

"말레이시아로 가겠습니다. 해외 공사를 꼭 따오겠습니다." 회장실에서 아버지와 마주한 나는 그렇게 큰소리를 쳤다. 당시 나는 제대와 거의 동시에 벽산건설의 전신인 한국건업에 입사해 외국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주한 미군 관련 FED(Far East District) 공사를 주로 맡아 하던 팀이었는데, 스물일곱 혈기 왕성한 나이에 50대의 관료적인 임원들과 같이 일하기가 무척 힘들고 답답했다. 변화와 혁신이 필요한 때였다. 그러려면 우선 내가 직접 해외에 나가 견문을 넓히고 현장에서 실무 감각을 키워야 할 것 같았다. 그때만 해도 국내 건설사들의 해외 진출은 걸음마 단계였다. KDC(고려개발)가 말레이시아에서 기반을 닦고 있었고, 현대건설이 괌과 태국에서 소규모 도로 공사를 하고 있는 정도였다. 나는 말레이시아를 내 꿈과 비전을 펼치기 위한 교육장으로 정하고 말레이사아로 떠났다. 현지 한국 대사관에 근무하던 이상열 참사관의 도움으로 비즈니스 파트너를 소개받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동부 말레이시아 쿠칭의 지방의회 의사당 건축 공사. 그것이 내가 9개월이나 전력을 기울여 가까스로 따낸 나의 첫 수주 작품이었다. 처음엔 국내 기술자들이 출장 나와 공사비 견적을 냈지만 입찰서도 이해 못하는데다가 의사소통이 안 돼 시장 조사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러니 가격이 상승할 수밖에, 결국 내가 나서서 물밑 작업도 하고 역산을 통한 공사비 조정도 해가며 가장 합리적인 적정가를 산정해 입찰에 응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치열하게 로비전과 눈치 경쟁을 벌인 기업은 일본의 미쓰이(Mitsui) 건설이었다. 그리하여 어렵사리 공사를 낙찰받은 나는 자세한 보고와 구체적인 사업 추진을 위해 귀국했다. 내 딴에는 어깨가 으쓱했고, 아버지께서도 당연히 칭찬해 주실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웬걸, 아버지는 별다른 이유도 설명해 주지 않은 채 내가 공들여 따낸 3,000만 달러 규모의 큰 공사를 무조건 포기하라고 지시하시는 게 아닌가.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어 떼를 쓰고 반항도 해 보았지만 헛일이었다. 앞뒤 설명 없이 아직 우리가 준비가 안 된 것 같다는 말씀뿐이셨다.

눈앞이 캄캄했다. 이미 공사에 필요한 자재까지 주문을 마친 상태였다. 입찰 보증금도 꼼짝없이 허공에 날릴 판이었다. 게다가 그 작업을 위해 애쓴 파트너와 내 부탁을 들어 준 수많은 관계자들은 무슨 낯으로 본단 말인가. 하지만 어쩌랴.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새내기 사원에 불과했던 나는 모든 걸 받아들이고 당면한 위기를 수습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는 곧장 현지로 날아가 미쓰이 측과 분초를 다투는 협상을 벌였고, 막후 접촉을 통해 우리 입찰 보증금은 협상을 통해 변상받기로 하고, 미쓰이는 원래 그들이 입찰했던 금액에 계약할 수 있도록 절충안을 마련해 합의를 이끌어냈다. 후일담이지만, 미쓰이 건설은 예상보다 공사비가 많이 들어가는데다가 나중에 철근 파동까지 겹쳐 엄청난 손해를 보고 철수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아버지의 본능적인 감각과 예지력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이론을 앞지르는 경험과 연륜의 힘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 바로 이곳이야!

말레이시아 지방의회 의사당 건축 공사 무산 사건은 나에게 현지 파트너를 따라서 중동 지역에 진출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첫 사우디 출장은 말레이시아 파트너를 따라서 레바논의 수도인 베이루트를 통해 비자를 발급받아 들어갔다. 듣던 대로 사우디는 첫 인상부터가 메마르고 미개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런 척박한 환경이 나의 야망과 도전 의지에 오히려 불을 질렀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곧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과 동의어가 아니던가. 그래 바로, 이곳이야! 나는 어떻게든 이 사막을 나의 오아시스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강렬한 투지를 심장에 말뚝처럼 깊게 박아 놓았다. 한 달 남짓 사우디에 머물면서 '탐색전'을 마치고 귀국한 나는 우리나라가 사우디와 국교를 수립해 제다에 곧 한국 대사관이 생긴다는 소식을 들었다. 초대 대사는 윤경도 씨. 마침 한국건업 강민구 부사장이 윤 대사와 친분 관계가 있어 나는 소개 편지를 지참하고 두 사람의 건축 엔지니어와 함께 다시 사우디로 갔다. 당시 사우디는 공항과 도로 건설 등이 시급한 실정이었지만, 국내에서 조달할 수 있는 자재라고는 모래와 골재밖에 없는 열악한 상황이었다. 몇 안 되는 건재상에서는 부르는 게 값이었다. 간단한 입찰 정보 하나 알아보려 해도 담당 공무원의 환심을 사야 했다. 그나마 에이전트를 통하지 않으면 법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구조여서 자칫 에이전트 농간에 놀아나기 일쑤였다.

사막에서 길을 잃다

몇 군데 공항 공사의 입찰서를 구했지만 우리 엔지니어들 능력으로는 견적이 거의 불가능했다. 실무 경험이 부족한 나는 그 과정에서 엔지니어들과 마찰이 생겨 언쟁을 빚는 일도 많았다. 결국 에이전트의 도움으로 금액을 산정해 입찰을 해보았지만, 역시 로컬 업체인 빈 라덴(Bin Laden,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이 아니다)에게 공사가 돌아갔다. 우왕좌왕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사우디는 우리와 사업 환경이 맞지 않으니 철수하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지만, 나는 그 반대의 길을 택했다.

대사관을 통해 지사를 설립한 다음 수입 자재 의존도가 낮은 도로 공사 입찰 건들을 취합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본사에서는 내 설명을 듣고 난 뒤, 리스크도 현재로서는 크지 않고 무엇보다도 미래에 나올 물량을 감안하면 일찍 기반을 잡아 놓는 편이 유리하겠다는 판단 아래 사우디 진출을 확정지었다. 그 과정에서 최고 경영자인 아버지가 내 어깨에 힘을 실어 주셨음은 물론이다. 나는 열악한 토목 공사 노하우를 보강하기 위해 그 분야의 쟁쟁한 인재들을 영입해 나름대로 '드림 팀'을 구성했다. 그리고는 팀원들과 사우디로 날아가 본격적인 정착 활동을 시도했다. 모험과 도전의 날들이 이어졌다.

내 인생의 네 잎 클로버, 아드난 카쇼기

트리아드(Triad Holding Company)사의 아드난 카쇼기 회장. 아버지가 "나도 개인적으로는 잘 모르는 사람이다. 그러나 네가 중동을 무대로 사업을 하려면 혹시 도움이 될지 모르니 받아 두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건네주신 명함 한 장이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뭐랄까, 내 인생의 네 잎 클로버, 그러니까 행운의 장에 이름을 올려도 손색이 없는 사람이랄까. 나는 카쇼기 회장 밑에서 일하며 내 인생 첫 밀리언 달러를 달성했다. 경력 2년차에 접어들며 이룬 수익이었다. 그러면서 돈을 주고도 배울 수 없는 비즈니스 레슨을 받았다. 나는 트리아드에서 주로 사우디에 진출한 동남아 건설 회사들을 상대로 에이전트 혹은 브로커로 일했다. 한국건업을 비롯한 대다수 우리나라 건설업체들이 공사를 수주할 때도 내가 에이전트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나는 카쇼기 회장을 통해 브로커리지(중개업)야 말로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예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나의 거래가 이루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과 물밑 작업과 조율을 거쳐야 하는지를, 그 과정에서 발주자와 수주자가 둘 다 만족할 만한 접점을 찾아 연결해 주는 에이전트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실감했다. 물론 긍정적인 면만 보고 배운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트리아드라는 공룡 기업은 대주주가 카쇼기 회장 본인이었는데, 지구촌 곳곳에 산재한 그 수많은 계열사들과 지사들을 그룹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컨트롤하고 관리할 조직, 우리로 치면 기획조정실과 유사한 부서가 없었다. 그게 맹점이었다. 감시의 눈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임직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업의 확장도 통제 가능한 범위 내에서 해야 한다는 걸 절감했다.

위기의 해결사, 사우디 타북 병영 공사

한국건업이 120킬로미터 도로 공사를 맡고 있던 사우디 북부의 고속도로 15AC 공사 현장. 일본 근무를 마치자마자 곧장 현장으로 달려간 나는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쯤에서 혹시나 물이 나오지 않을까 하고 장비를 동원해 파내려가 보면 역시나, 물은 씨가 말라 있었다. 할 수 없이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차로 물을 운반해 와야 했는데, 그 비용과 시간과 인력이 엄청났다. 그렇게 실어온 물마저 사막의 열기에 증발해 버려 부대비용을 포함하면 예상되는 손실액만 무려 1,000만 달러가 넘었다. 3,200만 달러짜리 공사에 손해가 1,000만 달러라니! 우여곡절 끝에 공사는 겨우 마무리되었지만 그 데미지는 만만찮았다. 후폭풍으로 한국건업이 곧 부도날 거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다행히 아버지가 쌓아놓으신 신용으로 한 고비를 넘기게 되었다.

문제는 또 있었다. 한국건업의 중동 진출 첫 작품이었던 15AC 공사를 간신히 끝냈지만, 막상 후속 공사가 전혀 없는 상태였다. 일이 그리 된 데는 총수이신 아버지의 책임도 없지 않았다. 아버지는 원래가 원리원칙주의자인 데다가 크리스천으로서의 양심까지 가세해 적자를 보아도 좋으니 오로지 15AC 공사를 무사히 끝내야 한다는 일념이 강하셨다. 그래서 직원들도 모두 15AC 공사에만 매달릴 뿐, 그 다음 할 일에 대해서는 누구도 아무런 준비를 못하고 있었다. 그런 수직적인 사고만으로는 절대로 일의, 사업의 효율성을 살릴 수가 없다. 수평적이고 전방위적인 사고를 겸해야 한다는 교훈을 나는 그 일을 계기삼아 새삼 얻게 되었다.

그 무렵 우리가 접촉하게 된 회사가 바로 필립 홀츠만이라는 독일 기업이었다. 우리는 그 회사의 하청 업체로 타북 병영 공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계약을 하러 간 날, 필립 홀츠만 측은 타북 병영 공사의 난점을 설명해 준 뒤 나에게 물었다. "쉽지 않은 공사인데, 그래도 할 수 있겠습니까?"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트리아드에 근무하며 익힌 경험을 십분 발휘해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계약 금액은 1억 달러. 그중 7~8퍼센트만 남아도 성공이라는 것이 그때 나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역시 세계 정상의 회사는 뭐가 달라도 달랐다. 필립 홀츠만은 사소한 것 하나라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모든 공사 상황을 실시간 보고하도록 했고, 원리원칙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조목조목 짚어가며 하나하나 챙겼다. 나는 우선 공사를 진행하는 현장 간부 직원들을 대부분 교체해 진용을 새로 짠 다음 차근차근 원리원칙대로 일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공사비 절감보다는 돈이 조금 더 들더라도 실수 없이, 그들이 요구하는 수준과 기간에 맞추어 일을 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자재 조달 방식도 획기적으로 바꾸었다. 당시 국내 건설사들은 현지에 사무실을 내고 직접 자재를 들여왔는데, 나는 아예 자재 공급 자체를 필립 홀츠만에 위임해 버렸다. 그 대가로 수수료 2퍼센트를 지급하고 현장에는 우리 직원 한 명만 내보냈다. 그러면 자재 확보 및 운반에 소요되는 시간과 인력을 아낄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내 판단은 적중했다. 한국건업 창사이래 가장 큰 단일 공사였던 타북 프로젝트가 끝나던 날, 나는 직원들과 함께 축배를 들었다. 7~8퍼센트의 수익을 기대했던 공사는 13퍼센트라는 큰 수익을 우리에게 안겨 주었다.

도전과 시련 그리고 성취의 시간들

트리아드 그룹 아드난 카쇼기 회장은 나로 하여금 도전과 그로 인한 성취의 기쁨을 알게 해준 사람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시련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앞으로 나아가는 배가 풍랑을 만나는 법이다'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고 과감하게 맞서 싸웠다. 트리아드에 있을 때 나는 참 많은 일들을 했다. 대한방직과 손잡고 발족시킨 한국 최초의 종합금융회사인 '아세아 종금', 대만과의 무기 조달 사업, 말레이시아의 코코넛 농장, 일본에 납품한 록히드 마틴 항공기……. 그런 프로젝트들을 성사시키기 위해 나는 자주 해외 출장을 다녔고, 각 나라의 대통령과 수상, 재벌 총수들과 미팅할 기회도 가졌으며, 아랍의 왕과 왕자들 그리고 왕족들과 폭넓게 교류할 기회도 가졌다.

그들과의 인연으로 나는 한국건업 사우디 지사로 복귀한 후에 킹 파헤드 왕궁 리모델링, 파이살 왕자의 집짓기 등 로열패밀리 관련 공사를 몇 건 맡았다. 이윤을 기대하기 힘든 공사였지만, 미래를 위한 일종의 투자 혹은 보험 들기라고 생각했다. 역시나! 왕권 국가인 사우디에서는 로열패밀리들의 입김이 미치지 않는 데가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들의 주선으로 청소년 복지청 일을 비롯해 축구 경기장 및 스타디움 다섯 개를 순차적으로 계약했다. 그 공사들은 모두 이익이 나 한국건업은 초창기 도로 공사에서 입었던 손해를 만회할 수 있었다. 사우디 진출 6년째인 1981년에는 공사 현장이 9개에 이르렀고, 매출액 2,000억을 돌파해 도급 순위 상위권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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