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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처럼 생각하라

김영한 지음 | 새빛에듀넷
스티브 잡스처럼 생각하라

김영한 지음

새빛에듀넷 / 2009년 2월 / 238쪽 / 11,000원



1부 문제아에서 문제해결사가 되기까지



Part 1. 벼락 성공과 실패가 함께 오다


1975년 잡스가 샌프란시스코 남부에 살고 있을 때, 휴렛팩커드(HP)에 근무하던 동네친구 스티브 위즈니악이 취미 삼아 인쇄회로기판(PCB)을 개발했는데, 잡스는 이것을 개인용 컴퓨터로 제작하면 상품화하여 판매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래서 위즈니악에게 자신과 함께 사업을 하자고 권유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6년에 자신이 몰고 다니던 폴크스바겐 자동차를 처분하여 1,300달러의 자금을 마련한 그들은 차고에서 '애플컴퓨터(Apple Computer)'라는 회사를 출범시킨다. 위즈니악은 기술 개발을 맡고, 잡스는 경영과 마케팅을 맡았다.

새 제품을 개발하는 데는 새로운 인력이 필요하고 자금이 필요했다. 그래서 잡스는 사업계획서를 만들어서 투자자를 찾아 나섰다. 운 좋게 당시 반도체 회사인 인텔에서 마케팅을 담당하던 마이클 마쿨라를 만나 1천 달러를 투자받았고, 은행에서도 추가로 25만 달러를 대출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1977년 1월에 잡스와 위즈니악, 마쿨라가 3분의 1씩 주식을 소유한 애플컴퓨터 주식회사가 탄생하였고, 1977년 '애플 Ⅱ'는 세계 최초의 퍼스널 컴퓨터로 세상에 첫선을 보였다.

'애플 Ⅱ'가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스티브 잡스는 자신이 직접 개발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자신이 개발한 퍼스널 컴퓨터를 만들고 싶었다. 그리하여 1978년부터 새로운 퍼스널 컴퓨터인 '리사(Lisa)' 프로젝트가 시작되었고, 3년이라는 기간 동안 5천만 달러를 투자하여, 드디어 1981년에 '리사'가 발표되었다. 그런데 리사가 발표될 때에는 이미 IBM이 마이크로소프트사의 MS-DOS를 이용한 PC를 내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잡스는 제품만 좋으면 잘 팔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리사를 9,995달러라는 높은 가격에 출시했다. 하지만 이렇게 높은 가격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능은 약했다. 그리고 리사가 출시되고 2개월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 가격이 싼 IBM PC의 호환성 PC가 출시되었다. 또 컴팩이라는 회사에서도 무게가 훨씬 가벼운 PC를 3,590달러라는 싼 가격에 출시했다. 결국 리사는 판매 개시 1년 반 만에 8만 대의 판매 기록을 남기고 생산이 중단되었다.

그 후 잡스는 리사의 실패를 만회할 만한 새로운 프로젝트를 찾았고, 여러 개의 개발 프로젝트를 검토하던 중, 강력한 PC를 개발했다는 매킨토시 팀의 설계 개념과 개발팀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제프레스킨과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팀이 개발하고 있던 프로젝트를 자신이 직접 지휘하기로 결정한다. 매킨토시는 기술적으로 뛰어난 점이 몇 가지(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 채택, 한 화면에 두 개의 창이 뜨는 윈도우 기능 등)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하드웨어 상으로 뛰어난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고객 입장에서 이것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고려하지 않으면 결코 좋은 제품이라 할 수 없다. 예로 제작된 초기의 매킨토시는 화면 사이즈가 9인치였고 그나마 흑백 모니터였다. 게다가 확장 슬롯이 없었다. 또한 MS-DOS와 호환성을 갖추지도 못했다. 결국 자신의 기술력만을 과신한 채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생각하지 않았고, 경쟁사의 전략을 간과한 매킨토시는 세상에서 버림을 받았다.

1983년 말 매킨토시 개발이 끝나갈 무렵 잡스는 대규모의 광고 계획을 세우고, 11월에 〈에이리언〉의 영화감독 리들리 스콧에게 광고 제작을 의뢰했고, 드디어 매킨토시의 첫 TV광고가 나갔다. 그리고 그의 바람대로 광고는 단숨에 시청자의 눈을 사로잡았다. 다음 날부터 사람들은 애플 매장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결과는 기대했던 것보다 초라했다. 매킨토시를 보러 매장에 온 사람들은 이내 IBM으로 눈길을 돌렸다. 아무리 광고가 잘 되었다고 하더라도, 고객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품이 고객의 마음을 잡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개발자의 기술에 대한 만족이 아니라, 컴퓨터 사용자를 얼마나 만족시키느냐 하는 점이다. 바로 이 점에서 애플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Part 2. 계속되는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는다

IBM이 PC 시장에 뛰어들자 그동안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던 애플의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애플의 공동 투자자인 마쿨라는 새로운 CEO로 친구인 마이크 스콧을 영입했다. 하지만 얼마 뒤 마쿨라는 스콧을 해임하고 스스로 임시 CEO가 된다. 그 뒤 스티브 잡스는 CEO 자리를 원했지만 이사회에서는 CEO로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인물을 물색했고, 잡스는 자신이 CEO가 될 수 없다면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차선이라 생각하고 존 스컬리를 영입했다. 그러나 스컬리는 2년 뒤 잡스를 애플에서 쫓아내는 데에 앞장서게 된다. 잡스는 1986년 초에 달랑 한 주만을 남기고 애플의 모든 주식을 처분해 떠났다.

애플에서 축출된 후 잡스는 그가 말한 멋진 제품을 만들기 위해 새로운 컴퓨터 회사 넥스트(NeXT)를 창립했고, 1988년 10월, 넥스트큐브(NeXTCube)를 출시했는데, 이것은 혁신적인 디자인을 갖춘 강력한 컴퓨터였다. 그러나 상황은 잡스가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결국 1993년, 잡스는 넥스트의 하드웨어 생산을 중단하고 소프트웨어에 전념하기로 결정한다.

스티브 잡스는 우연한 아이디어 하나가 세상을 바꾸어 가는 과정에서 자신이 최고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실패를 거듭하게 만든 오만과 편견을 낳게 된다. 즉 그는 퍼스널 컴퓨터에 관해서는 자신의 아이디어가 최고라는 생각을 절대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이것을 입증하고자 노력했다. 그래서 그는 회사 내의 개별 프로젝트를 자신이 주도하고 모든 의사결정을 자신의 뜻대로 하려 했다. 반면 고객이 원하는 소프트웨어를 어떻게 할 것인지, 경쟁자인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는 어떤 정책을 쓰고 있는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또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잡스는 엄청난 광고비를 쏟아 부었다. 하지만 고객들은 광고만 보고 제품은 사가지 않았다.

아울러 잡스는 모든 기술개발을 애플 내부에서만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오픈 방식과는 반대되는 정책인데, 회사 입장에서는 기술을 보호하려고 했을지라도, 고객 입장에서는 유용한 소프트웨어에 한계를 느끼게 되고 협력자의 접근을 차단하는 역작용을 낳게 된다. 그리고 결국 이러한 잡스의 폐쇄적인 점과 기술신봉주의가 매킨토시의 실패를 몰고 왔고, 결국 그는 자신이 영입해 온 CEO에 의해 축출되는 최악의 수모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Part 3. 솔직하게 피드백하는 환경을 만들다(픽사의 문제해결)

스티브 잡스가 애플을 떠나 넥스트컴퓨터를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아서〈스타워즈〉를 제작한 영화감독 조지 루카스가 재정난으로 루카스 필름을 매각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 소식에 잡스는 루카스 필름을 방문했고, 그때 그가 본 것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잡스에게 믿을 수 없을 만큼 선명한 디지털 사진과 3D 영상물을 보여준 그들은 그야말로 컴퓨터 그래픽의 천재들이었고, 그들의 컴퓨터 시스템과 소프트웨어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그래서 잡스는 사람과 컴퓨터와 소프트웨어를 모두 사고 싶었다. 오랜 협상 끝에 결국 잡스는 1천만 달러에 루카스 필름을 인수할 수 있었고, 잡스는 이 회사의 이름을 픽셀(Pixel)과 비슷한 느낌이 드는 픽사(Pixar)로 정했다.

잡스는 픽사에서도 처음에는 대용량의 이미지를 저장할 수 있는 그래픽 컴퓨터를 개발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개발된 픽사 이미지 컴퓨터는 일반 기업에서 쓰기에는 너무 대용량이었고 가격도 비쌌다. 그래서 이번에는 의료계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나 병원 역시 픽사 이미지 컴퓨터가 너무 비싸서 외면했다. 결국 개발비만 많이 들어간 픽사 컴퓨터의 판매가 부진하였고, 경영 상태는 날로 악화되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픽사를 먹여 살린 것은 소프트웨어였다. 루카스 필름 시절에 소프트웨어 기술자였던 애드 캐트멀이 개발한 '랜더맨(Randerman)'이 판매에 호조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랜더맨 소프트웨어의 판매만으로 픽사를 운영하기에는 힘이 들었다. 이때 나타난 구세주가 바로 3D 애니메이션 전문가인 존 래스터였다. 5분짜리 단편 3D 애니메이션으로 아카데미상을 받은 래스터는 전 직장인 디즈니 스튜디오를 찾아갔고, 크리스마스 특집물로 30분짜리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고 싶다며, 디즈니가 자금을 대서 공동 제작을 하자고 제안했는데, 이 제안이 디즈니의 아이스너 회장에게 보고되었고, 디즈니는 "90분짜리 3D 애니메이션 영화를 픽사가 만들면, 디즈니가 자금, 홍보, 배급을 맡겠다"라고 역제안을 했다. 이 소식에 잡스는 새로운 기회임을 직감했다.

결국 존 래스터가 감독 겸 수석작가가 되어 〈토이 스토리(Toy Story)〉제작에 착수했다. 참고로 3D 애니메이션 영화는 대략 2백 명 이상의 인원이 투입되어 4~5년 이상을 매달려야 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2백 명 정도의 기술자와 스텝들이 마치 한 사람의 작가가 스토리를 쓰고 그림을 그리듯이 되려면, 서로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어야 하고 기본 기술을 공유해야 한다. 이에 잡스는 픽사 내의 모든 직원들이 항시 공부할 수 있도록 사무실과 붙어 있는 곳에 픽사 대학(Pixar University)을 설립했다. 이런 노력이 이어지면서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디즈니 경영진이 〈토이 스토리〉의 중간 리뷰를 해본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1993년 11월 17일, 월트 디즈니사는 픽사에 〈토이 스토리〉의 제작 중단을 공식적으로 통보하게 된다.

과거의 잡스라면 디즈니에 쳐들어가서 따지고 법정 소송을 하였겠지만, 이번에는 차분히 대응했다. 그는 헐리우드에서 제작 중단이 종종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디즈니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에 맞게 수정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픽사팀은 수정된 해결안을 가지고 디즈니의 경영진을 찾아갔다. 새로운 안을 본 디즈니의 경영진들은 제작 중단을 취소하고 〈토이 스토리〉의 재작업을 허용했다. 그 후 〈토이 스토리〉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잡스는 디즈니와 함께 〈토이 스토리〉를 공동 제작하는 4년 동안 많은 것을 배웠다. 우선 히트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누구를 목표 고객으로 하여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 것인가라는 컨셉 기획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또한, 어린이와 여성 고객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기술보다 감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잡스에게는 4년 동안 디자인과 그래픽의 세계 속에 살면서 디자인이 기술을 표현하는 또 다른 언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성과였다. 〈토이 스토리〉가 개봉된 지 일주일 만인 1995년 11월에 픽사의 주식이 공개되었는데, 주가는 한 주당 39달러에 마감되었고, 잡스는 다시 억만장자가 되었다.

Part 4. 다르게 생각하면 길이 보인다 (애플의 문제해결)

1995년, 애플의 상황은 실로 절망적이었다. 비즈니스 세계는 성능이 훨씬 향상된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를 운영체계로 채택한 최신형 IBM PC가 장악했고, 애플은 추락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 애플의 새로운 구원투수로 등장한 인물은 마이클 스핀들러였는데, 이것 역시 잘못된 결정이었다. 애플 이사회는 다시 새로운 CEO를 물색하여 길 아멜리오를 영입했다. 하지만 아멜리오 역시 직원들의 신뢰를 얻지 못했고, 고위 간부진은 누구랄 것도 없이 새로운 CEO에 대한 충성심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길 아멜리오는 새로운 소프트웨어의 개발 없이는 애플의 회생이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외부에서 새로운 운영체제를 찾아보기로 하고, 선마이크로시스템스와 마이크로소프트를 접촉했다. 그런데 새로운 운영체제(OS)를 외부에서 도입하는 것을 검토한다는 소식이 스티브 잡스에게도 전해졌고, 잡스는 만반의 준비를 갖춘 후 길 아멜리오를 만나서 넥스트가 훌륭한 운영체제임을 제안했다. 아멜리오는 사내 전문가를 불러 토론을 했고, 기술팀이 고안한 점수 계산법에 따라 넥스트가 최고 점수를 얻었다. 곧이어 넥스트 인수를 위한 협상이 벌어졌다. 1주일 안에 이사회는 현금 3억7,750만 달러와 애플 주식 150만 주로 넥스트 인수를 승인했다. 현금은 넥스트의 투자자들에게 배분되었고, 주식은 모두 잡스가 가져갔다. 이로써 잡스는 자신을 내쳤던 애플로 당당히 복귀하게 된다.

잡스는 복귀 후 매킨토시를 다시 살려내어 회사가 흑자로 돌아서자 새로운 사업을 찾기 위해, 음악 시장 전반을 찬찬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당시 디지털 음악 시장은 이미 형성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소비자들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잡스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보았다. "기존의 MP3 업체들은 어째서 MP3를 음악기기로만 생각할까?" 순간 그의 머릿속에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MP3는 음악기기이기도 하지만, 디지털 IT기기이기도 하다. 지금까지의 MP3와는 다른 디지털 뮤직 시스템을 만들자." 그리고 잡스는 또 이렇게 생각했다. '음반가게에 직접 찾아가서 CD를 사지 않고도 인터넷을 이용하여 고음질의 음악을 구입할 수 있고 그것을 직접 저장하여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이렇게 하여 아이팟(iPod)이 탄생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2001년 봄에 토니 파델이 이끄는 개발팀은 아이팟의 컨셉과 디자인은 내부에서 하되, 기술 개발은 외주를 맡기는 방법을 택했는데, 이를 통해 애플은 많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애플은 음질을 높이고 인터넷과의 연결을 쉽게 하는 기능은 강화했지만, 작고 얇은 디자인을 위해 제거한 것도 많았다. 우선 선택된 것이 건전지였다. 음악을 다운 받는 동안 충전을 하게 해서 건전지를 없애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다음으로 제거한 것은 FM 라디오 기능인데,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은 FM 라디오보다는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많이 저장하기를 원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또 하나 제거한 기능은 녹음인데, 실제로 MP3를 이용해서 녹음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것에 착안한 것이었다.

잡스가 픽사를 거쳐서 다시 애플에 복귀했을 때는 생각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모든 혁신의 중심을 디자인에 둔 그는 "디자인은 디자이너에게 맡기고, 엔지니어는 그 디자인에 맞게 제품을 만든다."는 처방을 제시했다. 즉 고질적인 기술 집착에서 벗어나 시장 대응 관점에서 디자인이 애플 혁신의 중심점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었다.

Part 5. 고객을 먼저 생각하다(마케팅 문제해결)

제일 처음 MP3 플레이어를 만든 회사가 애플은 아니다. 그러나 애플은 순식간에 MP3 플레이어와 음반 시장에서 리더가 되었다. 이는 컴퓨터와 MP3, 그리고 음반이 서로 연결되는 새로운 가치 사슬(Value chain)의 파이프라인을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즉 음반회사와 온라인 판매계약을 맺어서 음원을 확보하고 뮤직스토어를 만들었으며, 음악 애호가의 PC에는 MP3 파일을 다운받고 편집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인 아이튠즈(iTunes)를 깔았다. 또 하나의 파이프라인은 팟캐스팅(Podcasting)인데, 이는 아이팟을 이용하여 개인방송국을 만들 수 있도록 소프트웨어를 지원한 것이다.

애플은 광고보다 홍보의 효과에 더 신경을 쓰는 기업이다. 소비자들은 광고보다는 뉴스나 기사를 더 신뢰하기 때문에, 잡스는 이 점을 노리고 자신이 직접 소비자에게 말하는 프레젠테이션 방법을 주요 홍보 수단으로 이용하곤 한다. 물론 그는 뉴스감이 되어야만 언론기관에서 관심을 가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신제품 개발을 철저히 베일 속에 감추었다가 갑작스레 깜짝 공개하는 것을 즐긴다. 또 잡스는 프레젠테이션의 첫 부분을 중요시한다. 왜냐하면 사람과 사람 간의 만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인상이듯이, 프레젠테이션 때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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