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아름다운 부자 척 피니

코너 오클리어리 지음 | 물푸레
아름다운 부자 척 피니

코너 오클리어리 지음

물푸레 / 2008년 2월 / 450쪽 / 15,000원



1부 성공하기까지




1931년 4월 23일 찰스 피니는 뉴저지주 엘리자베스 타운십 엘모라 마을의 아일랜드계 미국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레오는 보험회사에서 일했고, 어머니 메들린은 간호사였다. 피니에게는 누나 알린과 여동생 우르술라가 있었다. 피니의 부모는 가난했지만 다른 이들을 돕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피니는 그런 부모님을 보면서 자랐다. 열 살이 되면서부터 피니는 벌써 돈 버는 일에 재능을 나타냈다. 그는 크리스마스카드를 집집마다 다니면서 파는 것으로 첫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집배원을 도와 편지를 부치거나, 이웃 사람들의 눈을 치우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골프장 캐디를 하거나 해변 산책로에서 파라솔을 빌려주면서 용돈을 벌었다.



1948년 6월 학교를 졸업한 그는 17세의 나이에 미국 공군에 지원했다. 일본에 배치된 그는 이때 처음으로 미국을 벗어나 보았다. 군대에서 사람들은 그를 척이라고 불렀다. 피니는 1952년 공군을 제대하고 군인장학금으로 코넬 대학교 호텔경영학과에 진학했다. 여기서 그는 자신과 성향이 비슷한 친구들과 어울렸다. 모두 뭔가를 배우고 세계를 탐험하고 돈을 벌려는 욕망이 강했다. 그는 학교에서도 기업가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샌드위치를 만들어 기숙사 주변에서 팔기 시작한 것이었다. 얼마 후 피니는 친구들 사이에 샌드위치맨으로 통했다.



1956년 코넬을 졸업한 피니는 세상을 구경하고 싶었다. 1959년 프랑스 남부 그로노블 대학에 입학했다가 돈을 벌 기회를 찾아 남쪽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지중해 연안 빌프랑슈에서 미 해군장교들의 자녀를 위한 여름캠프를 시작했다. 그곳에서 피니는 휴가를 맞아 빌프랑슈로 왔던 프랑스계 알제리 의사 나니노스를 만났다. 당시 파리 소르본 대학생이었던 나니노스의 딸 다니엘은 잘생긴 미국인 지도교사가 친절하면서도 엄격하게 아이들을 대하는 것을 보고 꽤나 놀랐다. 발랄한 프랑스계 알제리 여학생과 26세의 아일랜드계 미국인 청년은 이렇게 만나 사랑을 싹틔웠다.



여름캠프가 끝나갈 즈음 피니는 밥 에드몬즈라는 영국남자를 만났다. 그는 지중해 주변 항구에서 미 해군을 상대로 면세 주류 사업을 시작할 참이었다. 에드몬즈는 피니에게 자신을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지중해의 미 6함대에는 50척의 배가 있었고 해군은 1년에 3번 교대되었다. 사병들의 저축액은 많았기 때문에 미국으로 돌아갈 때 술을 5팩까지 살 여유가 있었다. 유럽에서 면세로 구입하면 배송료까지 해도 미국의 1/3 가격이었다. 피니와 에드몬즈는 배로 가서 병사들에게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앤트워프에 있는 도매점에서 미국 항구로 가는 배에 술을 싣도록 조처했다. 물건 값을 미리 지불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자본도 필요 없었다.



미 6함대가 바르셀로나로 떠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스페인에 도착한 피니는 코넬 동문인 밥 밀러가 바르셀로나의 리츠 호텔에서 일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를 찾아갔다. 이 만남으로 전 세계 기업 역사에 엄청난 수익을 기록한 동업이 시작되었다. 피니와 밀러는 빌프랑슈를 근거지로 삼고 미국 해병들에게 술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차를 몰고 함대가 정박해 있는 지중해 연안의 항구 도시들을 찾아다녔다. 주류 사업의 경쟁이 치열해지자 두 사람은 품목을 확대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유럽 각지에서 온 상인들과 경쟁하면서 향수, 카메라, 라디오, 옷 등 온갖 물건을 팔았다. 주문과 돈이 쌓여갔고 두 사람은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현금과 수표를 주머니에 꽉꽉 채웠다.



사업을 하느라 정신없었지만 피니는 빌프랑슈 해변에서 다니엘을 처음 만난 이후 1년 만에 다시 만났다. 1959년 10월 파리에서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은 리히텐슈타인의 호텔에 머물면서 투어리스츠 인터내셔널이라는 회사 간판을 내걸었다. 얼마 후 피니는 두 사람의 코넬 졸업생을 사업에 끌어들였다. 독일에서 군 복무를 하고 제대한 리 스털링과 제7함대에서 중위로 근무하던 제프 말스테드였다. 스털링은 유럽에서, 말스테드는 아시아에서 피니를 도와 미군들을 상대로 자동차와 술을 면세로 팔았다.

어느 날 피니는 듀티 프리 쇼퍼즈(Duty Free Shoppers)라는 회사를 알게 되었다. 미국인 관광객에게 면세 물건을 파는 회사였는데 경영이 어려워 폐업 직전이었다. 1961년 피니는 듀티 프리 쇼퍼즈를 인수하고 홍콩과 호놀롤루 공항에서 면세 사업을 시작하였다. 1964년 중반까지 투어리스츠 인터내셔널은 27개국에서 운영되었고 직원도 200명에 이르렀다. 그 해 9월 피니를 비롯한 네 명의 코넬대 동창생이 모였다. 여기서 피니는 회사를 능률적으로 조직하기 위해 동업자 각각에게 임무를 할당했다. 밀러는 극동, 말스테드는 북아메리카, 스털링은 유럽을 맡기로 하였다. 피니는 세 사람의 보고를 통합, 조정하고 방침을 결정하는 일을 맡았다.



공동 설립자인 피니와 밀러는 회사 지분을 어떤 식으로 배분해야 할지도 결정했다. 두 사람이 각각 38.75%씩 갖고, 말스테드는 12.5%, 스털링은 10%를 받았다. 그들은 영국 회계원인 데스먼드 번을 고용하여 회계를 맡기고, 세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변호사인 하비 데일과 토니 필라로에게 자문을 구했다. 하비 데일은 네 명의 코넬 졸업생들이 직면한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이 회사를 운영하는 방식은 법 위반의 소지가 다분해서 어쩌면 구속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또 다른 인물이 회사로 들어왔다. 알란 파커라는 회계사였다.



1965년 여름 피니와 밀러는 거센 폭풍우를 만났다. 캐나다 국경에서의 주류 면세사업을 제한하는 미국 정부의 조치, 아시아에서의 자동차 독점 판매의 종말, 지중해와 캐나다 국경에서의 무자비한 경쟁자들, 모든 것들이 잘못된 회계와 과도한 낭비와 합쳐져 환상을 쫓는 지도자를 가진 기업이 어떻게 침몰하는지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 회사가 파산 위기에 몰리자 말스테드와 스털링이 지분 22.5%를 남기고 회사를 떠났다. 피니와 밀러는 알란 파커에게 지분의 20%를 주고 토니 필라로에게 2.5%를 주기로 하였다. 자동차 사업과 주류 사업이 무너지면서 피니와 밀러는 투어리스cm 인터내셔널의 이름도 내렸다. 이젠 홍콩과 호놀룰루 공항의 소매사업으로 규모가 축소되었으므로 파산한 회사에서 구입한 이름을 쓰기로 하였다. 이후로 그들은 듀티 프리 쇼퍼즈, 즉 DFS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1966년 하와이에 일본인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호놀룰루 면세점 사업은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회사를 파산으로 몰고 갔던 위기가 해결된 것이다. 자신감을 얻은 피니는 1967년 면세점 허가를 3년 더 연장하기 위해 100만 달러를 입찰가로 지불했다. 그리고 1969년 호놀룰루 시내에 면세점을 열었다. 피니는 일본인 관광객을 시내 면세점으로 끌어들이는 데 탁월한 솜씨를 발휘했다. 그는 프랑스 카뮈사와 장기 외상거래를 하면서 꼬냑을 팔고, 니나리치의 향수를 저가에 공급받아 팔면서 막대한 마진을 남겼다. 1980년대 회사가 절정기를 맞으면서 네 명의 주주는 1년에 평균 5천만 달러의 배당금을 받을 수 있었다. 세계적 규모로 봤을 때 이는 소매업의 혁명이었다. "우리는 전 세계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격을 결정하고 독점 판매를 했죠." 피니는 말했다.



피니가 호놀룰루 공항에서 큰돈을 벌고 있을 때 홍콩 공항 터미널의 면세점 관리는 지역 사정에 밝은 회계사 존 몬테이로가 맡았다. 하와이와 마찬가지로 홍콩 공항에도 1964년 이후로 일본인 관광객들이 밀려들었다. 몬테이로는 늘어가는 수요를 처리하기 위해 시내에 큰 매장을 열었다. 홍콩에서 DFS는 술과 담배뿐 아니라 모든 물건이 면세라고 생각하는 관광객들에게 온갖 종류의 고가 사치품들을 팔았다. 몬테이로와 피니는 여행사들과의 긴밀한 제휴관계와 일본인 관광객의 쇼핑 행태를 연구함으로써 면세 매장에서 엄청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1969년 피니는 DFS가 앵커리지 공항에서 면세 상품을 팔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현금이 많은 일본인 관광객들은 하와이와 홍콩뿐 아니라 유럽과 미국 본토로도 향하고 있었다. 비행기가 중간 기착하는 알래스카 매장은 문을 열자마자 호황을 누렸다. 또한 피니는 1970년 6900만 달러의 입찰가에 하와이 매장의 허가 기한을 연장하는 데 성공했다. 다음 3년 동안 하와이를 방문한 일본인 해외 여행객들의 숫자는 320만 명에 달했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피니는 앞으로 일본인들이 갈만한 여행지로 괌과 사이판에 주목하고 이곳에 여러 개의 매장을 열었다. 대형 호텔들이 괌과 사이판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일본인 관광객의 숫자는 점점 늘어갔다.



이처럼 급격하게 확장을 하던 시기에 DFS는 캐나다의 토론토 공항, 캘리포니아의 샌프란시스코 공항과 오클랜드 공항에 면세점을 열었고, 샌프란시스코와 LA 시내에 외국인 여행객을 위한 상점을 열었다. 1968~1974년 월스트리트의 평균 주식은 70% 하락했지만, 같은 기간 DFS의 배당금은 1년에 몇 백 %씩 올라갔다. 피니, 밀러, 파커, 필라로는 모두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었다.



2부 익명 뒤로 숨다



동업자들과의 관계에서 피니는 필라로를 근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파커를 유능한 회계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밀러와는 관계가 좋지 않았다. 홍콩을 벗어나서 사업을 한 지 4년쯤 지나자 피니는 DFS와 별도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만큼의 자금을 모았다. 그리고 동업자들에게 회사를 관리하는 일에서 물러나겠다고 말했다. 1971년 임원 회의에서 피니는 필라로에게 최고경영자 자리를 제안했다. 대신 자신은 전체적인 전략을 마련하는 일에 회사 소유주로서 여전히 관여하고, 매장 입찰 때도 함께하기로 하였다.



피니는 독자적으로 투자할 기회를 찾기 위해 남태평양 타히티에 바이마 센터라는 주상복합 시설을 세웠다. 바이마 센터는 프랑스 향수를 취급하는 면세점 운영 허가를 받았다. 그리고 1976년 하와이에서 34개의 종합 소매상을 가진 회사를 인수했다. 다음 해 피니는 자신이 투자한 사업들을 하나의 지주회사로 모으기 위해 조지 파커를 끌어들였다. 두 사람은 세금이 없는 버뮤다에 제너럴 애틀랜틱 그룹 유한회사(GAGL: General Atlantic Group Limited)를 설립했다. GAGL은 빠르게 성장했다. 1~2년이 지나자 전 세계에 걸쳐 투자한 회사가 20여 곳이 넘었다. 그러던 중에도 DFS에서 나오는 배당금은 점점 많아졌다. 개별 사업체에서도 현금이 들어왔으므로, 피니는 1980년 뉴욕에 자본투자회사를 만들고 제너럴 애틀랜틱사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이곳을 통해 전 세계의 부동산, 소프트웨어, 석유와 가스 같은 사업에 투자했다.



어디에 있든 피니는 조깅하는 것을 좋아했다. 1979년 피니는 하와이에서 열린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다. 피니가 꽤 건강하긴 했어도 경사가 심한 코스와 높은 기온은 힘에 부쳤다. 결국 결승선 근처까지 와서 쓰러지고 말았다. 병원에서 의사는 피니가 심장마비로 목숨을 잃을 뻔했다고 말했다. 그 후로 피니는 그 일에 대해 가능하면 이야기하지 않으려 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어렴풋이 죽음을 경험한 그날의 사건으로 피니는 막연하게나마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그동안 모아 놓은 재산을 어떻게 써야 할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부자가 되어가면서 피니는 돈의 일부를 기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재산이 2억 5천만 달러에 이르던 1970년대에 변호사 하비 데일과 함께 제대로 된 자선사업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데일은 피니가 사업적 성공을 즐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돈이 자선사업에 쓰이는 일에 대한 책임도 지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데일은 피니에게 기부에 관한 책을 소개하였다. 피니는 카네기의 에세이 『부(wealth)』를 몇 번이나 읽었다. 부를 사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대학이나 도서관처럼 '꿈을 가진 사람들이 딛고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카네기는 결론지었다. 또한 카네기는 "부자는 과시나 허영을 멀리하고 검소하고 소박한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충고하였다. 이러한 카네기의 주장은 피니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피니는 무슨 일이든 익명으로 하기로 하였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자신의 기부를 떠벌이고 싶지 않았다. 둘째는 자신과 같은 곳에 기부하려는 다른 기부자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거액을 기부하려면 신중하게 장소를 선택해 재단을 설립해야 했다. 데일은 여러 군데를 고려한 끝에 버뮤다로 결정했다. 세금이 없었고 재단 공개를 요구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피니는 데일에게 DFS의 지분, 사업체, 투자금 등 모든 것을 재단에 넣겠다는 의견을 분명히 밝혔다. "많은 돈을 쓰면서 살아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내게는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 겁니다."



이로써 애틀랜틱 재단은 500만 달러의 최초 자금을 가지고 1982년 3월 설립되었다. 재단은 전 세계의 가난과 고통을 줄이고, 교육을 증진하며, 건강과 같은 대의를 위해 활동하고, 어린이와 젊은이와 노인을 돕고, 국제적인 정의 실현을 위해 노력한다는 목표를 선언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보여준 본보기와 뉴저지 노동자 가정에서 자라며 배운 나눔의 문화, 어린 시절의 이웃과 친구에게서 멀어지지 않고자 하는 소망, 타인에 대한 친절함과 배려, 이 모든 것이 합쳐져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성향으로 인해 피니의 결정이 이루어졌다.



애틀랜틱 재단은 1982년 설립된 이후 순조롭게 운영되었다. 피니는 재단을 통해 1500만 달러를 기부했고, 그중 1400만 달러는 코넬 대학으로 갔다. 코넬은 피니에게 최고 대학의 교육과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과 진실한 친구들을 준 곳이었다. 1984년 11월 피니는 전 재산을 재단에 양도했다. 바하마의 법률 사무실에서 몇 번 펜을 휘두르는 것으로 53세의 척 피니는 억만장자의 자리에서 내려와 500만 달러의 순자산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나중에 그는 이런 농담을 하였다. "어떻게 백만장자가 되냐고요? 먼저 억만장자가 되세요!" 피니의 기부는 단일 기부로는 엄청난 액수인 5~10억 달러 정도로 추산되는데 이는 모건 스탠리 같은 대규모 투자은행의 자본과 맞먹는 액수였다.



애틀랜틱 재단의 회장 임무를 맡은 데일은 피니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재단 활동에 관한 엄격한 규칙을 만들었다. 기부는 익명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기부를 받은 사람은 그 돈이 어디에서 왔는지 몰라야 했다. 기부를 받는 사람들은 비밀 엄수 합의문에 서명해야 했다. 만약 그들이 애틀랜틱 재단이나 피니에 대해 뭔가를 알게 되고 그 내용을 공개한다면 더 이상 기부를 받을 수 없었다. 애틀랜틱 재단은 세계에서 가장 큰 비밀을 간직한 재단이 되었다.



아일랜드계 미국인인 피니는 조상의 땅인 아일랜드에 도움을 주고 싶어했다. 피니는 당시 기부 문화라는 것이 없었던 아일랜드 대학들의 상황을 살폈다. 모두 얼마 안 되는 정부 지원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시설확장이나 최신 시설 설비가 여의치 않았다. 피니는 이들 대학에 기숙사 건립과 도서관 수리 그리고 중요한 사업과 연구 프로그램을 위한 기금을 내 놓았다. 아일랜드에 있는 7개 대학과 북아일랜드에 있는 2개 대학이 애틀랜틱 재단의 기부를 받았는데, 그 총액은 수억 달러에 이르렀다. 덕분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