퀄컴이야기
데이브 목 지음 | 굿모닝북스
퀄컴이야기
데이브 목 지음
굿모닝북스 / 2007년 12월 / 399쪽 / 14,800원
무명기업에서 세계 최강의 기업으로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비즈니스계에서 퀄컴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더욱이 도시 전체가 잠에 빠져 있는 듯한 샌디에고에 위치한 한 기업이 하이 테크놀러지 분야에서 전 세계에 위협적인 존재가 될 거라고 상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최고의 인재들이 모두 실리콘밸리로 몰려들어 끊임없이 놀라운 성공의 역사를 펼쳐나가는 동안 샌디에고에서도 놀라운 역사가 펼쳐지고 있었다. 1990년대 초반 퀄컴이 무명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앞이 뻔히 내다보이는 그렇고 그런 회사가 하나 나타났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퀄컴은 장래가 유망한 통신 기술을 구현하기 위해 최고의 팀을 구축했고 머지않아 퀄컴과 창업주 어윈 제이콥스(Irwin Jacobs)의 이름이 모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퀄컴이 일반인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99년부터다. 이 한 해 동안 퀄컴의 주가는 7달러에서 176달러로 25배나 급등했고 언론은 퀄컴이 어떻게 어메리칸 드림을 실현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백만장자(심지어 억만장자)들이 탄생했는지 앞을 다투어 보도하기 시작했다. 1999년에 퀄컴이 이토록 각광을 받은 것은 이 회사가 모바일 통신의 미래를 좌우할 열쇠를 쥐고 있고 앞으로 퀄컴은 자신이 개척한 이 신기술에 대한 로열티 형태로 안정된 수익 흐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999년 후반 월스트리트는 퀄컴은 장차 사실상 전 세계에서 팔리는 모바일 폰 하나 하나마다 로열티를 받게 될 거라고 결론지었다.
퀄컴이 이룩한 놀라운 성과는 바로 당시의 최신 통신 기술 중 하나를 상업화하는 데 성공한 데 있다. 퀄컴의 CDMA 기술은 퀄컴이 상업화하기 전까지만 해도 군사적 목적으로 비밀리에 사용되어왔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퀄컴을 CDMA의 발명자로 오해하고 있는데 엄밀히 말해 퀄컴은 CDMA의 발명자가 아니라 선구적으로 활용한 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퀄컴이 모든 공식적 발표에 사용하는 다음과 같은 문구는 이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퀄컴, CDMA(Code Division Multiple Access : 코드분할다중접속) 디지털 무선 통신의 개척자이자 세계적 리더 기업…."
이상에서도 알 수 있듯이 퀄컴의 성공은 CDMA 기술을 금세기에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시장 중 하나인 모바일 통신 시장에 성공적으로 적용시킨 데서 기인한다. 모바일 폰 산업에서 확산 대역 (spread-spectrum) 통신의 선구적 응용을 위한 노력으로 인해 타 기업들을 젖히고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이다. 퀄컴은 결국 많은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이루어낸 것이다.
※확산 대역(spread-spectrum)은 말 그대로 특정 신호의 주파수 대역(spectrum)을 넓히는 기술이다. CDMA는 spread-spectrum 이라는 통신암호화 기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spread-spectrum은 원래 군사용으로 개발된 비화통신의 일종으로서, 특정한 암호가 없으면 신호를 수신할 수 없게 되어 있는 보안통신 시스템이다. CDMA는 이러한 spread-spectrum의 원리를 이용하여 각 개인마다 고유의 암호(code)를 가지고 서로 간섭 없이 통신을 하게 만든다.
제1부 혁신적인 기술 솔루션
엑스터시, 피아노, 어뢰 - 시장, 제 2차 세계대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산업은 하나의 단순한 아이디어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냅킨 위에 그린 낙서 하나 또는 단순한 취미가 예기치 않게 일생을 걸고 전력을 투구하는 노력으로 바뀔 수도 있다. 차고를 개조한 임시공장에서 빌 휴렛과 데이브 패커드가 전자기계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고, 빌 게이츠는 하버드를 중퇴하고 컴퓨터에 일생을 걸었다. 그리고 이들처럼 열정을 가진 사람들의 노력으로 실리콘 밸리가 탄생되었다.
많은 발명품들이 상용화되기 전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리고 어떤 발명품들은 끝까지 빛을 보지 못한 채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퀄컴의 창업자들과 그의 팀은 혁신적인 통신 기술을 상용화하는데 그러한 문제는 없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자신들이 나아가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비록 자신들이 얼마나 성공을 거두게 될지 또는 자신들의 아이디어가 시장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알 수는 없었지만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퀄컴이 보다 발전된 통신 기술에서 틈새를 발견한 것은 소위 spread-spectrum 기술의 원천에서 시작된다. 퀄컴의 뛰어난 엔지니어들은 이 혁신적인 신기술 개념을 전세계 모든 일상적 통신 제품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냈던 것이다. 이들의 작업의 근저에 깔려 있는 이론은 통신이 전장에서 점차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했던 2차 세계대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퀄컴의 CDMA 기술의 기반인 spread-spectrum 통신은 놀랍게도 아름답고 통찰력이 뛰어난 여배우 헤디 라마(Hedy Lamarr)의 발견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미 <삼손과 데릴라>, <백색 화물> 등에 출연한 바 있던 그녀는 1933년 누드로 출연하여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엑스터시Ecstasy>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 해 그녀는 여섯 명의 남편 중 첫 번째 남편인 오스트리아의 재벌 프리드리히 맨들과 결혼했다.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녀가 단지 맨들의 전시품으로 생각했지만 훗날 첨단기술 및 전쟁 과학 기술에 대한 그녀의 관심과 재능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의 남편 맨들은 군수품 제조업자로 주로 나치와 많은 거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자연스럽게 당대의 최신 전쟁 기술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접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그녀의 관심을 끈 것은 어뢰의 무선 조종 기술이었다. 당시에 함정들은 전파 방해를 통해 적의 어뢰 공격 명중률 저하시키곤 했다. 초기 통신은 한 번에 단일 주파수 채널을 통해 신호를 전달했기 때문에 적들은 그 채널을 간파하고 전자자기장을 이용한 잡음을 발생시켜 어뢰를 조종하는 신호를 방해했다. 따라서 이러한 전파 방해를 차단할 수 있는 수단을 개발하는 것은 함정의 전투력을 강화하는데 필수적이었지만 그 해법을 찾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나치 체재에 혐오감을 느꼈던 그녀는 남편이 나치와 결탁하는 것을 참지 못해 결국 1937년 오스트리아를 떠나 헐리우드로 탈출했다. 그녀는 그곳에서 유명 작곡가 앤자일을 만나 그와 함께 미국의 전쟁을 지원하기로 결심했다. 첨단 기술에 대한 그녀의 관심에 앤자일의 악기 관련 지식이 더해졌다. 두 사람은 나치의 전파 방해 공격을 받는 미군 어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앤자일은 라마가 음악을 이용해 당대의 전파 방해 기술을 극복할 수 있는 통신 방법의 열쇠를 발견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은 오늘날 '주파수 도약(frequency hopping)'이라는 용어로 알려진 새로운 개념을 발견했다. 이것의 핵심 개념은 전파 방해를 피하기 위해 주파수를 점핑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음악의 오케스트라에서처럼 신호를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도약을 동시화 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개념을 현실에 적용하여 88가지(피아노 건반의 숫자)의 가능한 단계를 독특하게 연결함으로써 보내는 물체(높은 고도를 유지하고 있는 비행기)와 신호를 받는 물체(움직이고 있는 어뢰)가 사용하는 주파수를 동시에 변화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이렇게 하여 각 주파수에 전체 메시지의 일부만을 보냄으로써 설령 한 채널이 전파 방해를 받는다 하더라도 방해받지 않은 다른 채널들의 정보를 통해 어뢰는 목표물에 정확하게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라마와 앤자일이 미군과 훗날 전 세계에 제공한 것이 바로 이 주파수 도약이라는 개념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1942년 8월 11일 '비밀 통신 시스템'이라는 명칭으로 미국 내에서 특허를 받았으며 두 사람은 애국심의 발로에서 이 특허를 미국의 전쟁 노력에 기증하기로 결심했다. 미 군당국은 이 특허를 기밀로 분류하고 수십 년 동안 엄격하게 보안을 유지했다. (spread-spectrum 기술은 주파수 도약의 개념으로부터 시작되어 보다 진보된 형태로 발전된 기술로 이것 역시 1981년까지 미 군당국에 의해 기밀로 유지되어 왔다).
1957년 10월 소련의 스프트니크 1호의 발사는 우주비행시대의 개막을 알렸고 이에 자극을 받은 미국은 통신 기술에 관한 연구에도 박차를 가했다. 1957년 MIT 대학원을 졸업한 앤드류 비터비(Andrew Viterbi)는 제트분사실험실의 통신기술연구 분야에서 일하게 된다. 이곳에서 근무하는 동안 비터비는 많은 연구원들을 만났고 1964년 후반에는 같은 MIT 출신이자 NASA 연구원인 어윈 제이콥스(Irwin Jacobs)를 만나게 된다. 이 만남은 두 사람이 장차 퀄컴의 공동창업자로 세계 통신 기술을 영원히 변화시키는 길고도 유익한 관계의 시작이었다. 그 후 제이콥스는 통신기술 연구 분야에 있어서 새로운 국면을 연 클라우드 샤논(Claude Shannon)을 만나게 된다. 샤논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정보를 비트-단순히 '1'과 '0'-로 전환하는 개념을 도입한 것이었다. 비트 개념은 소리든 그림이든 어떤 형태의 내용이라도 이를 전달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방법이었다. 샤논의 정보 이론에 제이콥스는 완전히 매혹되었고 그후 제이콥스는 학문적 탐구보다는 실질적인 문제 해결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1968년 어윈 제이콥스, 앤드류 비터비, 렌 클라인록(Len Kleinrock) 세 사람은 자신들의 통신기술 관련 컨설턴트 경력을 살려 링카비트Linkabit를 설립했다. 링카비트는 앤디 코헨, 클라인 질하우센 등 주요 핵심 인력들을 확보하여 샌디에고 주둔 미 해군과 첨단 통신 장비 납품 계약을 기반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링카비트는 신과학인 디지털 정보이론의 응용 분야에 있어서 탁월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어 많은 정부기관 및 군으로부터 계약을 따내고 디지털 위성통신 분야까지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링카비트가 이처럼 빠르게 성장하자 1972년 제이콥스는 마침내 학계를 떠나 링카비트에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링카비트는 10여 년 만에 종업원 3명에서 6백명으로 급성장했고, 1980년 동부해안의 거대기업 M/A-COM이 링카비트를 인수했다. 제이콥스는 양사의 합병을 이상적인 결합으로 생각했다. 링카비트는 시스템 엔지니어링에 강점을 가지고 있었고 M/A-COM은 이 시스템에 사용되는 많은 부품들을 생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합병 회사에서 별개의 사업부를 책임지고 있던 제이콥스는 거대기업의 관료주의에 실망과 좌절을 느꼈다. 1985년 4월 제이콥스는 종업원 1,400 명 이상으로 성장한 링카비트 사업부를 떠났고 그로부터 몇 주일 후 비터비와 다른 핵심 멤버들도 링카비트를 떠났다.
그리고 마침내 1985년 7월 7명의 전 링카비트 주요 멤버들 -어윈 제이콥스, 앤드류 비터비, 아델리아 코프만, 하비 화이트, 앤드류 코헨, 클라인 질하우센, 프랭클린 안토니오- 이 퀄컴을 공동 창업했다. 퀄컴의 창업은 여러 면에서 독특했다. 이들 공동창업자들은 서로 매우 친밀한 사이였고 오랜 세월 동안 밤늦게까지 함께 일해왔었다. 퀄컴의 핵심 멤버들인 이 혁신가들은 기술적으로 탁월한 팀을 이루었고 링카비트 시절의 명성을 토대로 정부와 많은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고 위성통신 프로젝트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퀄컴은 창업 후 수 주일도 안 되어 옴니넷Omninet으로부터 트럭 운송사업을 위한 위성 송신 메시지 시스템 개발 관련 25만 달러 상당의 계약을 의뢰받았다. 최초에 설계한 시스템은 위성 연결을 통해 송신 센터에서 움직이는(mobile) 트럭에 메시지를 보내는 일방적인 통신 시스템이었지만 그후 퀄컴과 옴니넷은 쌍방향 위성 모바일 시스템을 개발에 착수했다. 1988년 8월 퀄컴은 옴니넷과 합병했고 옴니넷 측에 이사회 의석 3자리를 배정했다. 그리고 퀄컴은 쌍방향 위성 모바일 시스템인 OmniTRACKs 의 개발에 성공했고 당시 미국에서 가장 많은 트럭을 보유하고 있는 내셔널 쉬나이더National Schneider에 최초로 OmniTRACKs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이 계약을 통해 퀄컴은 상당한 현금을 확보할 수 있었고 계속해서 신기술 개발에 주력할 수 있었다.
셀룰러 붐의 시작 - 새로운 상업용 기술의 필요
OmniTRACKs의 상업화에 성공한 후 퀄컴은 다시 모바일 환경에서 spread-spectrum 기술을 활용한다는 개념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위성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제이콥스와 질하우센은 위성 시험 프로젝트에 사용된 spread-spectrum 기술이 지상에서의 모바일 네트워크에 응용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러나 이러한 응용을 위해서는 극복해야 할 몇가지 문제가 있었다. 이제 퀄컴을 창업한지 3년쯤 되어 어느 정도 자금의 여유도 생기자 제이콥스는 이것을 적극 추진하고 싶었다. 그 무렵 모바일 통신은 다양한 형태로 시장이 태동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가장 유망한 기회는 한창 성장하고 있는 셀룰러(구획) 방식의 휴대폰 산업이었다.
링카비트 시절부터 제이콥스와 그의 동료들은 실제로 초기 모델의 모바일 폰을 개발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성장하고 있는 셀룰러 폰 산업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었다. 이제 미국의 주요 통신사업자들은 새로운 형태의 지상 모바일 서비스의 새로운 형태인 셀룰러 폰 시장을 열기 시작했고, 1980년대는 새롭게 펼쳐진 셀룰러 네트워크의 고속 성장기였다. 퀄컴은 셀룰러 네트워크가 막대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고 엄청난 미래를 약속할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셀룰러 개념은 1940년대 후반 벨 연구소(Bell Labs)에서 최초 개발되었다. 셀룰러 시스템에서 모바일 기기는 매우 낮은 동력으로도 신호를 전송했다. 그러나 이 신호들은 멀리는 전달되지 않았다.(신호의 강도가 거리가 멀어질수록 급격하게 약해졌다.) 이것은 한 주파수 채널로 말하는 사람이 도시 전체를 대상으로 말하려 하지 않고 단지 좁은 특정 지역을 향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통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도시 전체에 수많은 수신탑을 세워야만 했다. 결국 이 시스템은 엄청난 비용이 들고 매우 복잡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서 최초로 아날로그 셀룰러 네트워크가 상용화 서비스된 것은 1983년부터였다. 셀룰러 서비스가 이처럼 수십 년이 지난 뒤에야 상용화된 것은 그 기술이 어려웠기 때문이 아니라 통신산업 분야에서 AT&T의 독점을 제한하려는 역학과 정부 규제 때문이었다. 셀룰러 네트워크가 이처럼 지연되고 있는 동안 1980년대까지 미국의 모바일 통신은 소위 모바일 텔레폰 시스템(MTS)라는, 기술적으로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는 비셀룰러 시스템에 의존해왔다.
그러나 셀룰러 시스템은 통화자들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주파수 채널을 다시 사용하도록 함으로써 통화를 가능케 하는 무선 모바일 능력을 고려할 때 폭발적인 붐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983년 마침내 미국에서 최초로 AMPS(advanced mobile phone system)라는 아날로그 셀룰러 표준이 상용화 서비스되었다. 이때만 해도 미국에서 셀룰러 모바일 폰이 그렇게 대단한 성공을 거둘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