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트레이더 리오 멜라메드
리오 멜라메드 지음 | 굿모닝북스
제1부 미래의 전령을 참수하라
조기경보1987년 초 상품선물거래위원회(Commodity Futures Trading Commision, CFTC)의 수잔 필립스 위원장이 말했다. "리오, 다른 사람도 아닌 당신이 S&P 지수선물에 일일 가격제한폭을 두자는 겁니까? 정말 내 귀를 못 믿을 지경이군요." 자유시장주의 경제학자이자, 아이오와 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를 지낸 수잔 필립스는 나를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 우리 두 사람은 시장의 미덕을 확고히 믿었고, 시장의 움직임을 인위적으로 제한하는 데 반대하는 공통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불쑥 가격의 자유로운 흐름에 인위적인 장벽을 두자는 말을 꺼내자,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식시장의 붕괴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산업을 관할하는 연방당국의 위원장에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런 대화가 오고가는 것만으로도 붕괴가 시작될지 모를 일이니 말이다.
내가 무엇보다 우려했던 것은, 최후의 심판일에 우리의 S&P 지수선물이 세계에 흉보를 알리는 1번 타자가 되는 일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이런 흉보를 가지고 오는 전령에게 어떤 짓을 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필사적으로 조만간 불어닥칠 폭풍으로부터 우리 시장을 격리시키고 싶었고 길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S&P 지수선물에 넘어설 수 없는 일일가격제한폭을 설정해 놓는다면, 어느 날 갑자기 시장이 추락한다 해도 그 한도까지만 떨어질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면 가격제한폭이 없는 주식시장에서 붕괴가 일어나도 선물시장의 가격은 현물 주식시장보다 상당히 높은 수준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아마도 우리 시장을 비난하지는 않으리라. 규정을 변경하려면 CFTC에서 변경안이 채택되기 전에 선물시장에서 거래하는 기관투자가들의 여론 수렴을 거쳐야 한다.
나는 필립스에게 곧 플로리다 주 보카레이튼에서 열리는 선물산업협회(FIA) 연례 총회에서 이 사안을 제기하겠다고 말했다. "수잔, 보카레이튼에서 반응이 좋지 않게 나타나면 당신이 부담을 떠안지 않도록 하죠." 나는 FIA의 존 댐가드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이번 연례 총회에서 주가지수선물에 대한 가격제한폭 설정을 공식의제로 다루는 일을 협의했다. 하지만 나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보카레이튼에서 개최된 FIA 연례 총회에 참석한 증권업계 대표들 앞에서 이 아이디어를 내놓았을 때 나는 거의 총알받이 신세가 됐다. 나는 수잔 필립스에게 전화해 나의 패배소식을 알렸다. 그녀는 이제 이 부담스런 일에서 벗어나게 됐다.
블랙 먼데이1987년 10월 19일 오전 6시 30분 직전, 내 차의 카폰이 울렸다. 뉴욕증권거래소(NYSE) 회장 존 펠란 2세였다. "리오, 소식 들었소? 아무래도 오늘 아주 험악한 날이 될 것 같소." 그가 알려주려 했던 소식은 이미 예상했던 것이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눈 것은 그 날 NYSE의 개장을 두 시간 앞둔 시점이었다. 예상대로 개장 한참 전부터 매도주문이 주식과 선물 두 시장에서 수북히 쌓였다. NYSE에서는 엄청난 주문의 불일치가 전문 중개업자들을 압도해버린 상황이었다. 매도주문량이 워낙 막대해서 전문중개업자들은 주문 체결을 통해 시장을 조성할 방법이 없거나 아니면 엄두를 내지 못했다. NYSE에 상장돼 있던 대다수 주식들에 가격이란 것이 실종됐다.
S&P 지수선물 시장은 미국 중앙표준시로 오전 8시 30분에 평소대로 개장했고, 매수자와 매도자 간의 가격이 순간적으로 형성됐다. 그것은 가격처럼 보이지 않는 숫자였다. 나 역시 그 가격을 보고 저게 뭘 말하는 건지 어리둥절했을 정도다. S&P 지수선물 12월 물은 전주 금요일 종가에 비해 20.75포인트 빠진 261.50을 시가로 개장했다. 누구도 이런 일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공포 그 자체였다. 그날 남은 시간 동안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었다. 일정한 흐름 없이 불쑥불쑥 벌어지는 장면들이 이어가는 섬뜩한 모습 말고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를 악몽 속에 살고 있는 느낌이었다.
집행위원회의 긴급회의가 지정된 시각인 오전 10시 30분에 소집됐다. 회의실은 거래소 직원을 포함해 26명이 전선에서 날아든 소식을 들고 큰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는 전쟁터 같았다. 각 시장이 서로 단절된 상태였지만 CME와 NYSE, 그리고 워싱턴 사이의 전화선은 각각 자기 시장에 대한 간헐적인 정보를 주고받느라 어지럽게 가동됐다. 그 후 네 시간 동안 우리는 시장의 힘과 싸웠다. 정부 및 거래소 책임자들과의 대화 내용이 계속 전달됐고, 정산 내역의 변동에 대응하는 증거금 요청도 계속됐다. 그리고 청산회원사들과 장내 트레이더들로부터의 상황보고도 이어졌다.
그때쯤 워싱턴의 고위관료들은 레이건 대통령과 긴급회의 중이었다. 시장은 급전직하로 추락하고 있었고 전 세계에서 경보음이 울려오고 있었다. 워싱턴에서는 금융시장을 폐쇄해야 할 것인가를 놓고 토의가 진행됐다. 베릴 스프링클이 목소리를 높였다. "대통령 각하, 시장 폐쇄는 미친 짓입니다. 시장을 폐쇄하면 시장이 말하고 있는 것을 알아들을 능력을 잃게 됩니다. 시장은 계속 열어두어야 합니다. 그날 자신의 연설 일정을 취소하고 워싱턴으로 복귀 중이던 그린스펀은 무선전화 연락을 받고 자신은 스프링클과 같은 생각임을 강조했다. 이 긴급회의에서는 두 가지 목표를 정하고 끝났다. 시장을 열어두자는 것, 그리고 시스템에 자금을 공급한다는 것이었다.
10월의 그날 아침 전문중개업자에 의존하는 NYSE의 거래시스템은 밀려드는 주문의 쇄도로 압도되어 주도 종목들 중 아예 거래가 실종돼 버린 종목들이 다수였다. 때문에 선물시장의 지수선물 가격의 지표가 되는 현물 주식시장의 다우 평균주가나 S&P 500 지수의 정확한 시세가 도대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선물시장은 돌아가고 있었고, 장 초반의 날카로운 매도 바람을 정면으로 맞았다. 어느 모로 보나 기술적인 면에서 앞선 우리 선물시장은 밀려드는 주문을 장내 브로커들에게 전달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현물주식에 비해 지수선물의 시세가 크게 떨어져버린 상태에서 투자자들은 선물의 매도를 멈추고 현물주식의 매도를 택했다.
1987년 10월 19일, 주식시장과 지수선물시장은 역사상 1일 하락폭으로는 최악의 폭락을 거듭했다. 다우 지수는 508포인트 폭락해 22.6%나 떨어졌다. 프랑스의 국민총생산 규모와 맞먹는 5000억 달러 이상의 시가총액이 6억 800만 주라는 기록적인 거래량을 동반한 채 사라졌다. 세계의 주력 시장 가운데 미국이 최대의 1일 하락폭을 겪었지만, 일본도 거의 15% 하락했고, 영국은 그날 11% 하락한 뒤 며칠 동안 12%의 추가 하락을 겪었다. 시드니증권거래소의 주가는 25%에 육박하는 대폭락을 경험했고, 싱가포르에서는 유동성이 말라붙는 최악의 순간에 닛케이 지수선물은 바닥 없는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10월 19일 홍콩의 항셍지수는 420포인트나 떨어져 역사상 최대의 1일 하락폭인 11.3%를 기록했고, 대대적인 채무불이행을 우려한 홍콩증권거래소는 그 주의 남은 기간 동안 시장을 폐쇄했다.
이 붕괴를 설명하는 이론들은 이론가들의 수만큼이나 많았다. 그러나 어느 요인이 붕괴를 악화시켰든 간에, 최초의 패닉 사태를 불러온 조건을 형성한 것은 이런 요인들이 아니었다. 주식시장이 여러 해 동안 상승세를 이어왔으며, 어느 것도 계속 상승만 할 수는 없다는 지적으로 충분하다. 이 사실을 간과한 채 미국은 수조 달러의 과감한 신용을 풀었고, 시장은 고평가와 과매수 상태로 과도한 흥분을 지속했던 것이다. 그리고 시장의 붕괴가 적나라하게 이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시장은 쉽게 차 올랐던 것처럼 쉽게 꺼졌고, 붕괴의 막강한 위력은 투자 마인드를 일거에 뒤집어 놓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시장은 빈털터리가 됐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앨런 그린스펀 의장은 나중에 1987년의 붕괴는 "언제고 터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사건"이었다고 의회에서 증언했다.
자유 낙하10월 20일 화요일 오전 8시 30분에 S&P 지수선물 시장은 예정대로 개장했다. 검은 월요일의 다음 날인 이 날은 내가 시카고상업거래소(CME)에서 일한 세월 동안 가장 힘겨운 날이 될 것임이 분명했다. CME에서는 개장 후 1시간이 채 지나기 전부터 매도압력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려하던 움직임이 그대로 나타나며 시장은 맹렬하게 추락하기 시작했다. 매도 주문이 CME와 NYSE에 쏟아지며 시장을 강타하더니 우량주들까지 매도세에 밀려 내려갔다. 비우량주 가운데는 아예 매수자를 만나지도 못한 종목들이 허다했다. 오전 11시 직전 나는 NYSE에서 시가총액이 큰 종목들이 매도주문의 물결에 휩쓸리고 있으며 전문중개업자들이 시장을 조성할 수 없는 지경에 처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NYSE의 140개 주도 종목들의 주문 불균형이 너무 벌어져 거래가 중단된 상태라고 했다. 이들 종목 대부분은 S&P 500지수를 구성하는 종목들이었다.
오전 11시가 막 지난 시점에는 상황이 정말로 위태로워졌다. 빌 브로드스키가 전화를 걸어와 시카고옵션거래소(CBOE)와 아메리칸증권거래소(AMEX) 둘 다 공식적으로 시장을 폐쇄했다고 내게 확인해 주었다. 다른 선물시장들 모두 완전히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 결국 실제적으로 장이 열렸다고 할 만한 시장은 NYSE와 CME 두 거래소뿐이었다. 엄밀히 보면 NYSE에서는 수많은 종목들의 거래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태였으므로 그렇다고 할 수도 없었다. 바로 그 때,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사태를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가 전해왔다: NYSE가 거래소 폐쇄를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NYSE가 폐쇄된다면 CME가 유일한 시장으로 남아 온 세상이 우리에게 투매물량을 퍼부을 것이 뻔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일만은 막아야 했다. 나는 스피커폰으로 존 펠란 NYSE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실입니까? 거래소 폐쇄를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 침중하게 가라앉은 펠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문제로 인해 회의에 들어갈 참이요, 시장 폐쇄를 결정하기가 쉽소." 우리 측에서는 모두가 서로의 얼굴만 쳐다봤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어 수단은 단 하나밖에 없었고 빨리 행동해야 했다. 우리는 NYSE가 결정을 내릴 때까지 일시적인 거래정지를 취해야 했다. 샌드너와 브로드스키도 동의했고, 집행위원회는 만장일치로 이 조치를 승인했다. 브로드스키는 CFTC에 이 사실을 전했고, 나는 백악관의 베릴 스프링클과 CBOT의 톰 도노반에게 전화했다. 거래정지 공지가 나감과 동시에 나는 거래장으로 들어가 트레이더들에게 상황설명을 해 주었다. 그 때가 오전 11시 30분 경이었다.
15분 뒤 우리는 뉴욕에 다시 전화를 넣었다. 이번에는 펠란의 목소리에 훨씬 더 힘이 들어있었다. 그의 목소리에 내가 알아야 할 것이 전부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거래정지를 풀기로 판단했다. 약 35분간의 거래정지가 지나고 S&P 지수선물은 다시 거래를 시작했다. 펠란의 입에서는 아무런 결정적인 단어도 나오지 않았지만, 그 목소리에서 내가 오전 내내 바라던 기업들의 자사주 매수 프로그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워싱턴 고위 관료들의 공격적인 제안에 힘입어 10여 개 기업이 자사주 매수를 발표했다. 이 매수 여력이 화요일 장에서 우량주의 회복세를 이끈 결정적인 요인이었고 선물시장에도 매수자들이 들어오도록 유인했다. 이 움직임은 나중에 화요일 마지막 30분을 남겨두고 SEC가 기업의 자사주 매수를 금지하는 규정의 효력을 정지시키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마녀사냥금융과 거래소들은 붕괴 주간을 거의 다치지 않고 통과했지만, 혼란스러운 와중에 거의 방향 감각이 실종된 분위기가 맴돌았다. 우리는 정부와 언론이 그냥 지나칠 리 없는 푸짐한 사냥감이었다. 붕괴의 원인을 두고 뉴욕증권거래소(NYSE)는 서쪽의 시카고를 지목했고 신문과 방송은 이 비난을 인정했다. 그리하여 CME가 그 전능한 NYSE와 함께 언론의 머리기사에 등장하는 일이 벌어졌다. 시장의 패닉은 아주 복합적인 상황이었지만, 단순한 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항상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주식시장에 판돈을 거는 투기꾼 패거리들로 간주되고 있었다.
증권거래위원회(SEC)를 관할하는 하원정보통신금융위원회산하 소위에서 활동하던 민주당 의원인 에드워드 J. 마키는 즉시 청문회를 소집했고, 붕괴가 일어난 주간에 그것도 시체가 식기도 전인 난리통에 CME를 방문했다. 마키가 주도한 첫 번째 청문회는 붕괴 후 10일도 채 지나기 전에 열렸다. 나는 사실을 입증할 자료를 손에 들고 증언에 나섰다. 그러는 사이, 환자의 내적 자아를 분석해내려는 정신과 의사들이 온갖 수단을 동원하는 것처럼, 우리 시장을 바늘로 찔러보고 쥐어뜯고 쑤시고 나서 정밀검사에 들어간 분석용 실험 용기들로부터 일련의 보고서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CME에 현미경을 들이댔고, 우리에게 무슨 흠이라도 있었다면 분명히 찾아냈을 것이다.
NYSE의 말대로라면, 우리가 이른바 지수 차익거래라는 것을 통해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붕괴가 시카고 선물시장에서 거대한 매도와 함께 시작됐고 이로 인해 S&P 지수선물이 현물주식에 비해 엄청나게 낮은 가격으로 떨어졌으며 그 다음에는 지수 차익거래를 통해 뉴욕의 주식시장으로 하락세가 파급됐다는 그럴싸한 가정이 등장했다. 이러한 가정이 터무니없는 것임은 월요일에 지수 차익거래로 매수된 물량이 2만 건-현물주식으로 보면 5,000만 주에 해당하는- 정도에 불과했다는 사실로도 확연히 드러났다. 즉, 월요일 당일 NYSE의 기록적인 거래량이었던 6억 500만 주 가운데 S&P 지수선물과 연계된 차익거래로 NYSE에서 매도된 주식은 10%에도 미치지 않았다. 오히려 CME는 주식시장의 총 거래량에서 25%에 해당하는 1억 5,000만 주가량을 흡수했던 것으로 나타나 결과적으로 기관투자가들의 매도 압력을 상당히 경감해주었다.
이 내용은 나중에 진행된 CFTC와 SEC의 조사 결과와도 일치했다. 선물시장은 월요일의 붕괴를 일으킨 요인이 아니라, 오히려 화요일에 시장이 반전할 수 있는 에너지를 제공했다. 패닉심리가 사라진 것은 CBOT의 MMI 지수 거래장 덕분도 아니었고, NYSE가 프로그램 매매를 정지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시장을 향한 FRB의 유동성 공급과 기업의 자사주 매입에다 패닉에 휘둘린 매도 물량이 전부 나왔다는 점이 겹치면서 화요일 시장 상황을 반전시켰던 것이다. 10월 붕괴 후에 나온 보고서와 연구논문은 통틀어 77편에 달했다. 이 결과물들은 심리적 불안이 시장을 장악했던 짧은 기간의 역사적 정황을 정리해준다. 1988년 1월 29일 CFTC의 최종보고서가 발표됐다. 그리고 2월에 SEC가 최종보고서를 냈다. 각각의 보고서는 서로 달랐지만, 붕괴의 원인으로 선물시장을 지목한 보고서는 전혀 없었다.
CFTC의 보고서는 붕괴 기간 내내 CME의 의사결정과 시장운영에 대해 찬사를 보내며 지수 차익거래와 포트폴리오 보험 간의 상호작용으로 붕괴가 초래됐다는 주장을 폐기했다. SEC 보고서도 이 사실을 보강해주었고, 기관투자가들의 주식매도가 10월 19일 개장 초반의 하락을 일으킨 직접적인 요인이었다고 결론지었다. 논란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CME는 전국적인 조명을 받았다. 선물시장이 중요하고 귀중한 시장으로 인정받았고, 미국의 금융서비스 부문에 당당히 낄 수 있는 동등한 파트너가 됐다. 우리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순간이었으며 가장 격렬했던 전환점이었다.
제2부 시베리아 특급
전쟁과 평화
나는 이삭 멜람도비치와 그의 아내 파이글 멜람도비치의 외아들이었다. 두 분은 이디시어로 수
업하는 유대인 학교의 교사였다. 아버지는 고학년 수학 교사였고, 교재 세 권을 직접 만들어 가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