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주 미래를 창조하다
홍찬선 외 지음 | 올림
홍찬선 외 4인 지음
올림 / 2007년 10월 / 208쪽 / 11,000원
1막. 미래에셋의 성공 DNA의 비밀동남아 전체가 외환위기로 흉흉하던 1997년 초여름 동원증권에 증권업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박현주 동원증권 강남 본부장이 회사를 그만두고 투자자문사를 차릴 것이라는 얘기가 돌았기 때문이다. 당시 박현주는 동원증권 압구정지점을 전국 1등 지점으로 만들면서 스타덤에 올랐고, 최연소 임원까지 올라선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업계에선 미다스의 손으로 정평이 나 있었고, 박현주란 이름 자체만으로 너도 나도 큰손들이 몰려들었다.
박현주 회장이 일반인의 뇌리에 본격적으로 각인되기 시작한 것은 자신의 이름을 딴 박현주펀드를 내놓고 부터이다. 뮤추얼펀드라는 생소한 금융상품을 더구나 일반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회사가 내놓았기 때문에 대부분 박현주펀드의 성공에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펀드가 판매된 지 2시간 30분 만에 500억 원이 모두 동이 나버렸다. 이에 힘입어 박현주펀드 5호까지 3,500억 원이 넘게 팔리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박현주와 미래에셋의 성공스토리는 이렇게 첫 단추를 꿰었다.
박 회장의 증권업 입문시기를 돌이켜보자. 박 회장은 어린 시절 공부를 곧잘 했을 뿐더러 글짓기에 소질을 보였다. 그런데 광주일고 1학년 때 정신적 지주였던 아버지의 죽음으로 깊은 방황에 빠졌다. 공부를 등한히 해 대학 진학마저 포기했던 박 회장은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었다. 이런 가운데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나 케네디 자서전 등을 통해 조직관리 능력과 전략을 세우는 능력을 터득했다. 독서는 훗날 그가 미래에셋의 리더로서 중요한 선택의 갈림길에 외로이 섰을 때 가치판단을 하는 데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후에 방황을 끝내고 고려대 경영학과를 진학한 그는 어머니가 보내준 생활비를 종자돈 삼아 직접 주식투자에 나섰다. 그리고 처음에 몸담았던 동양증권 영업부가 약정 순위 전국 1위를 할 정도로 그의 투자 능력은 빛을 발했다. 동원증권으로 자리를 옮겨 여기서도 능력을 인정받아 33세의 나이에 최연소 지점장이란 명예도 함께 안았다. 당시 중앙지점은 실적이 좋지 못했지만 박 회장은 저돌적으로 난관을 돌파하여 2년 만에 전국 1등으로 올려놓았다. 그리고 나이 37세에 이사로 승진하였다. 이 역시 최연소 임원 승진 기록이다.
박 회장이 증권사 지점장 시절 짧은 기간 안에 성공을 거둔 데에는 타고난 승부사 기질이 크게 작용했다. 이런 성향은 훗날 미래에셋을 창업하는 과정에서도 여실히 나타났다. 박현주펀드를 운용했던 이병익 오크우드투자자문 대표의 말을 들어보자. “미래에셋이 운이 좋아서만 성공한 것은 아닙니다. 박 회장의 열정과 승부근성이 가장 큰 성공요인이라고 봅니다.” 실례로 그는 미래에셋이 한국유리빌딩을 사들였던 일을 들었다. 현재 미래에셋의 본사 건물이기도 한 이 빌딩은 1999년 215억 원에 매입했다. 다들 부동산 경기가 어렵다며 매입을 말렸지만 박 회장은 수개월을 고민한 뒤 단번에 결정을 내렸다. 현재 시세는 그때보다 3~4배 이상 올라 있는 상태다.
미래에셋 성장 동력의 한 축으로 미래의 변화를 한 수 먼저 읽어내는 박 회장의 탁월한 식견과 강한 리더십도 빼놓을 수 없다. 벤처 열풍이 불기 전에 미래에셋 캐피탈을 통해 다음 커뮤니케이션에 투자, 대박을 터뜨림으로써 미래에셋자산운용과 미래에셋증권 설립에 들어갈 종자돈을 마련한 것은 한발 앞서가는 그의 투자 감각을 아주 잘 보여주는 예다.
2003년 적립식 펀드가 나온 시기는 증시가 침체기를 벗어나 회복하던 때로 펀드 열풍과 맞아 떨어졌다. 미래에셋은 대세 상승기에 수익률을 끌어올림으로써 고수익을 올렸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자금이 더욱 급속도로 몰렸다. 돈이 몰리니 미래에셋이 사는 종목의 주가가 올라 수익률이 다시 뛰는 선순환구조에 들어섰고 미래에셋은 더 많은 자금을 빨아들였다. 이 모두가 미래에셋, 즉 박현주 회장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베팅이었다. 미래에셋의 한 임원은 “박 회장은 자산운용사는 돈 벌 생각 하지 말고 수익률을 높이는 데 신경 써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면서 “돈은 미래에셋증권과 미래에셋생명이 뛰어난 운용능력을 발판삼아 펀드와 변액보험을 팔아 수익을 내면 된다는 게 미래에셋의 성장전략”이라고 전했다. 비유하면 자산운용이란 엔진에 기름(돈)이 들어오면 증권과 생명이란 두 바퀴로 움직이는(이익을 낸다) 것이 미래에셋 성장전략의 핵심이다.
2막. 미래를 창조하는 박현주의 경영비법박 회장은 천운을 타고 났다는 평가를 받는다. 박 회장이 성공가도를 달리게 해 준 중요한 변화는 바로 김정태 전 국민은행장과 적립식 펀드다. 1997년 미래에셋캐피탈을 창립한 박 회장은 다음커뮤니케이션에 24억을 투자했고 코스닥 붐이 불면서 1천억 원을 벌어들이는 대박을 터뜨렸다. 이 돈은 회사 설립을 위한 종자돈이 되었다. 이 시기는 국민 정부가 들어섰을 때였다. 호남 출신 박 회장이 사업을 추진하는 데 힘을 받았을 거란 관측도 나온다. 뮤추얼 펀드 역시 때맞추어 인가를 받았고, 박 회장과 같은 동원증권 출신 김정태씨가 국민은행장에 임명되었다. 국민은행은 은행의 펀드 판매가 허용되자 미래에셋 펀드를 집중적으로 판매했다. 미래에셋 성장에 불을 당긴 셈이다.
박 회장인 불과 10년 만에 미래에셋을 굴지의 기업으로 탈바꿈 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룹 형태의 기업이 갖는 문제점을 답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 회장은 그룹 형태의 기업이 갖는 장점과 오너 중심의 기업이 갖는 장점을 활용하고 이들이 갖고 있는 잘못된 관습은 과감히 버렸다. 가령 그룹 형태의 기업이 취하는 문어발식 사업 확장을 지양하고 오너 중심의 기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집을 버린 것이다. 물론 박 회장 1인 중심 지배구조는 단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박 회장은 자기 스타일대로 조직을 꾸리기를 희망하고 함께 근무하며 신뢰를 쌓은 인물들을 중심으로 사람을 모았다. 그는 조식을 관리하는 데 철저함을 원칙으로 한다. 동시에 책임을 맡긴 일에 대해서는 일체 간섭하지 않는다. 당시 박현주펀드를 운영한 매니저들은 박 회장이 펀드운용에 일체 간섭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름의 판단을 기초로 흔들림 없이 펀드를 운용해 높은 수익률을 올릴 수 있었다고 입을 모은다. 박 회장은 직원들에게 일을 많이 시키기로 유명하다. 창업 당시 직원들은 주말을 가리지 않고 일에 매달렸고 박 회장 본인도 주말에 출근하여 직원들을 독려했다. 물론 희생만 강요한 것은 아니다. 펀드 매니저에게는 억대가 넘는 연봉에 차와 기사까지 제공하면서 일한 만큼 대우해 주었다.
미래에셋 각 계열사(자산운용, 증권, 보험)가 성공을 거듭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박 회장의 추진력과 차별화 전략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평소 “될 만한 사업은 확실하게 밀고 가라”, “이왕 시작한 사업이면 튀게 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미래에셋은 기존 자산운용사들이 알면서도 시도하지 않았던 뮤추얼 펀드로 파란을 일으켰다. 기존 운용사들은 환매가 제한된 뮤추얼 펀드로는 고객 모으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하였지만, 박 회장은 펀드매니저의 능력으로 수익률만 올릴 수 있다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한편 생명보험업에서는 투자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확대해 수익을 극대화하였다. 기존 보험사들은 상품 판매로 연명했지만 박 회장은 생명보험사 잉여자금을 부동산 투자 또는 각종 투자처에 투자하여 부가수익을 창출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보험 상품 판매의존도를 낮추었다. 모두가 몰랐던 것도 아니고 도전하기 어려웠던 일도 아니지만 박 회장은 남들이 시도하지 않은 일들을 과감히 실행하여 미래에셋을 최고의 기업으로 육성한 것이다.
그가 처음 동원증권 지점장으로 발령받아 일하기 시작할 무렵 증시는 폭락세로 돌아섰고 지점의 실적순위는 전국에서 300등까지 떨어져 있었다. 박 회장은 이래로는 안 되겠다 싶어 조직을 혁신하기 시작했다. 직원 수를 절반으로 줄이고 30세 전후의 의욕 넘치는 젊은이들로 영업 진용을 새롭게 짰다. 결과는 박 회장의 예상대로였다. 전국 300등에서 단숨에 전국 1위로 올라섰다. 그의 능력이 증권업계의 신화로 퍼져나가자 외국계에서 거액의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업가의 꿈을 꾸던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1977년 사표를 제출한 그는 곧바로 미래에셋캐피탈을 창업했다. 그리고 다음 커뮤니케이션에 투자해 1천억 원 가까이 벌어들이며 미래에셋자산운용의 창업자금을 마련했다. 자산운용사 설립 이후 선보인 상품이 뮤추얼 펀드이다. 여기서 대박을 터뜨린 그는 미래에셋증권을 설립하여 성장에 날개를 달았다. 이후에도 미래에셋은 박 회장의 시대를 앞서가는 판단능력으로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미래에셋의 성공단계를 살펴볼 때 박 회장의 경영기법은 다른 CEO들과 차별화 된다. 천수답식 영업에 얽매이지 않고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며 이를 현실로 일구어 내기 때문이다.
박 회장은 공격 경영에 남달랐다. 자산운용이라는 개념도 한국에서 처음 도입했고 하는 일마다 업계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고 살았다. 박 회장은 자신의 이름을 건 뮤추얼펀드를 시장에 내놓을 때부터 강렬한 이미지로 승부를 걸었다. 박현주펀드 1호는 1998년 12월 발매 2시간 30분 만에 동이 났다. 2호와 3호도 발매 하루 만에 매진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모 아니면 도” 식의 베팅이 있었다. 당시 펀드를 운영한 이병익 대표의 회고를 들어보자. “펀드가 나오기 전 집중 광고를 실시했죠. 펀드가 성공할지도 모르는 불투명한 상황에서 일단 광고부터 집행한 것이죠. 광고의 집중포화는 생각지 않은 효과를 가져왔죠. 자금이 물밀듯이 몰려온 것입니다.”
미래에셋의 간판인 오렌지색도 박 회장의 아이디어라고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멀리서도 잘 보이는 튀는 색깔을 고르다 보니 오렌지색이 가장 적합했다는 것이다. 또한 초창기 미래에셋 증권지점에는 시세 전광판이 없었다. 박 회장은 전광판을 설치하지 않은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왜 고객들이 생업을 포기하고 하루 종일 전광판 앞에 일희일비해야 하는가? 투자는 전문가가 하면 된다.” 한 펀드매니저는 초창기 미래에셋의 지점 전략은 박 회장의 철저한 계산이 깔려 있다고 한다. “초창기 미래에셋이 지점을 낼 때 지점 수가 많았던 동원증권이나 대투증권의 옆에 세웠다. 인지도가 없던 터라 이들 증권사에 들른 사람들이 발걸음을 바꿔 한번이라도 들르면 성공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예상은 적중했다. 이들 대형 증권사가 분주해 일처리가 늦어진 투자자들이 미래에셋 지점에 들르기도 했고, 강렬한 오렌지색의 간판을 보면서 무의식중에 이름을 익히게 되었다. 미래에셋이 자산운용업계의 블랙홀이 된 배경에는 이 같은 초창기 고객응대 전략도 한몫한 것으로 판단된다.
3막. 타고난 승부사 박현주의 투자비법박 회장의 성공 요인 중 하나는 남보다 한발 앞서 생각하고 행동에 옮긴다는 점이다. 1997년 미래에셋캐피탈과 미래에셋투자자문을 설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외환위기를 맞은 박 회장은 이것이 기회임을 직감했다. 증시가 폭락하고 금리 및 채권가격이 급등할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1998년 박 회장은 시중금리가 연 30%까지 치솟을 때 운용자금 200억 원을 채권에 투자하여 상당한 이익을 남겼다. 이후 설립한 미래에셋자산운용 역시 그의 탁월한 직관력으로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우리나라 자본시장의 한 단계 도약을 가져온 뮤추얼펀드를 도입한 것이다. 그는 뮤추얼 펀드를 판매하면서 환금성이 떨어진다는 단점보다 투명성이라는 장점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결과 펀드투자의 투명성에 목말라 있던 고객들의 관심을 끌면서 대박을 터뜨릴 수 있었다.
박 회장의 성장과정을 살펴보면 누구보다 직관력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변화의 흐름을 읽어내고(은행예금에서 간접투자 상품으로 이동), 경쟁력 있는 상품(적립식 펀드, 해외펀드)과 전략(자산운용을 축으로 한 증권, 생명사의 동반 성장)을 먼저 선보이면서 경쟁사보다 항상 앞서나갔다.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자본시장 발전에 큰 획을 그은 입지전적 인물”이라고 하는 반면, “로비스트”라고 폄훼하기도 한다. 바라보는 시각은 제각각이지만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부분은 동물적 감각이다. 그는 어린 시절 글짓기에 솜씨를 보였고 문학에도 관심을 보였다. 감수성이 뛰어났다는 것이다. 증권처럼 시황이 급변하고 각종 예측이 난무하는 곳에서는 이러한 균형감 있는 사고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는 시황을 객관적으로 보는데 탁월했으며, 투자에 있어 소수의 편에 서려고 했다. 그가 선택의 갈림길에서 승부수를 띄워 크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능력 덕분이다.
대학원생 시절인 1980년대 중반 박 회장은 일면식도 없는 명동 사채시장의 큰손 백 할머니를 불쑥 찾아가서 좀 가르쳐 달라고 쫓아다녔다. 할머니 사무실로 출근하고 증권사나 기업체 탐방 때도 동행했다. 당시 그가 깨달은 투자관은 이렇다. “할머니는 답답할 정도로 정석투자에만 전념했고 원칙을 고수했다. 튼실한 기업의 주식만 사들여 2년이고 3년이고 기다려 시장이 폭등할 때 파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그것을 보면서 우량주에 대한 가치관을 세웠다.” 명동 큰 손을 무작정 찾아간 일은 그의 배포와 과단성을 잘 보여준다. 젊은 시절 체득한 과단성은 훗날 “일개 증권사 지점장”에서 “자산 수조원의 최고경영자”로 거듭나는 촉매제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박 회장의 과단성을 옆에서 경험했던 이병익 오크우드 투자자문 대표이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자산운용 설립 후 박현주펀드 자금을 모으는 시기부터 그의 베팅에 감탄했다. 이어 미래에셋증권을 설립할 때는 판매사가 있어야 한다는 구상을 행동으로 직접 옮겼다. 생명보험사 인수 때도 마찬가지였다. 무모한 일이라고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았지만 결국 박 회장의 과감함이 옳다고 느꼈다.”
박 회장의 남다른 감각은 미래에셋의 성공만을 가져온 것은 아니다. 다음과 같이 자본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업적이 즐비하다. 첫째, 펀드매니저의 상품화를 이끌었다. 그는 뮤추얼 펀드를 선보일 무렵 펀드매니저를 전면에 내세웠다. 고객 자금을 운용하는 매니저의 책임의식을 고취시키는 한편 고객에게 신뢰를 주기 위해 펀드 매니저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펀드매니저들을 전면에 부각시킴으로써 이들은 단숨에 스타급으로 부상했고 자금은 물밀듯 들어왔다. 둘째, 운용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았다. 박현주펀드는 2년차에 쓴 맛을 보았다. 주식시장 침체로 펀드가 손실을 기록하자 펀드매니저들은 고객들의 항의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그는 다시 한 번 펀드 운용 체계를 바꾸었다. 주식운용팀, 채권운용팀 등 팀제를 마련해 펀드를 운용하기 시작했고, 이 또한 여타 자산운용사들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었다.
셋째는 해외시장을 개척했다. 그는 2003년 12월 미래에셋홍콩자산운용을 설립했다. 국내에서는 인정받는 자산운용사이지만 해외에서 바라보는 시선은 냉담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이듬해 미래에셋싱가포르자산운용을 설립하여 동남아시장 공략의 전진기지로 삼았다. 이어 부동산펀드를 운용하는 미래에셋맵스자산운용의 베트남 사무소를 설립했고, 2006년에는 미래에셋인도자산운용을 설립하여 인도시장 공략에 나섰다. 최근에는 미래에셋증권도 해외진출에 나서고 있다. 운용사가 자리를 잡아가는 시점에서 판매사인 증권사를 붙여 일거양득의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기업금융 시장을 공략하겠다는 야심찬 포부도 포함되어 있다. 해외시장에서 미래에셋의 출발은 자산운용업이지만 결과적으로 투자금융회사로 발전시켜 골드만삭스와 같이 세계 유수의 투자금융회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는 전략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