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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vs LG 그들의 전쟁은 계속된다

박승엽, 박원규 지음 | 미래의창
박승엽, 박원규 지음

미래의 창 / 2007년 9월 / 351쪽 / 13,000원



1. 브랜드



세계 기업을 향한 큰 발걸음 브랜드를 개편하라!


1996년 8월 신라호텔에서 열린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IOC 위원 선정 축하연. 이 자리에서 이건희 회장이 삼성 경영진에게 말문을 열었다. "21세기는 브랜드가 경쟁의 핵심이 되는 시대입니다. 사장들이 앉아서 광고 카피나 고치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브랜드나 광고는 전문 분야입니다. 전문가에게 맡겨 삼성의 이미지를 짜도록 하세요." 오늘날 삼성 브랜드가 큰 힘을 갖게 된 것은 이러한 이건희 회장의 꾸짖음에서 시작되었다.



이건회 회장 취임당시 삼성은 브랜드와 관련된 그룹 차원의 뚜렷한 전략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 회장은 그룹 CI 전면 개편부터 지시하였고, 1993년 삼성은 27년 이상 사용해 온 그룹 로고를 교체하였다. 파란색 타원형 안에 'SAMSUNG'이 새겨진 로고가 탄생한 것이다. 삼성은 개편된 브랜드를 바탕으로 국내외 홍보를 적극 추진했는데,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은 브랜드 홍보의 교두보가 되었다. 당시 삼성은 올림픽 공식 스폰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애틀란타 현지에서 '삼성 96 엑스포'를 개최하고 CNN을 통해 집중적으로 그룹 이미지를 광고하여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삼성이 기업 브랜드를 바꾼 지 2년 후인 1995년 LG 그룹 시무식. 구자경 당시 회장은 "비장한 각오로 그룹의 명칭을 바꾸는 결단을 내렸다"고 발표했다. 지난 36년 동안 온 국민의 뇌리에 박힌 LG의 옛 이름 "럭키금성"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LG그룹은 명칭 변경과 함께 로고도 원 안에 LG라는 글자체로 웃는 얼굴을 형상화한 미래의 얼굴(The face of the future)로 교체하였다. 브랜드 개편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며, 특히 미래의 얼굴 로고가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미지 광고도 좋은 반응을 얻었는데, "사랑해요, LG" 광고는 고객들에게 그룹의 따뜻한 이미지를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같은 시기 삼성은 "세상은 2등을 기억하지 않습니다"와 같은 일등주의를 강조하는 광고를 주로 내보냈다. 그러다가 "사랑해요, LG" 광고가 히트를 치자, 삼성도 친근한 광고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삼성은 "신뢰할 수 있는 친구, 삼성", "또 하나의 가족" 등의 슬로건을 사용하여 일류, 첨단, 최고 등의 이미지를 친화와 신뢰의 컨셉으로 완전히 바꾸었다.



2002년 LG그룹 시무식, 7년 전 기업 브랜드를 바꾼 LG가 이번에는 "1등 LG"라는 새로운 모토를 선보인다. 그런데 "1등 LG"는 과거 삼성이 내걸었던 세계일류 광고와 유사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두 기업 모두 각 분야에서 1위를 하자는 구호를 내걸었지만 삼성은 이를 먼저 공표했다가 친근한 이미지로 돌아온 반면, 이전에 친근한 이미지를 강조했던 LG는 여기에 강한 경쟁력까지 부각시키기를 원한 것이다. 두 그룹이 순서만 바꾸었지 비슷한 브랜드 전략을 쓴 셈이다. LG를 의식한 삼성의 광고, 삼성과 비슷한 LG의 슬로건, 이처럼 두 그룹은 서로에게 조금씩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삼성, 브랜드 경쟁에서 먼저 웃다

치열한 브랜드 경쟁에서 먼저 웃은 쪽은 삼성이었다. 외환위기 이후 효과적인 브랜드 전략을 구사해 온 삼성은 2001년부터 세계 브랜드 순위에서 꾸준히 50위 안에 이름을 올렸고 2006년에는 브랜드 가치 162억불로 세계 20위를 기록하였다. 1996년까지만 해도 이건희 회장에게 무참히 두드려 맞았던 삼성이 10년 만에 세계적 브랜드로 거듭 태어난 비결은 무엇일까? 첫째, 삼성 제품이 잘 팔렸기 때문이다. 1993년 이후 꾸준히 추진된 월드베스트 전략이 자연스럽게 브랜드 가치를 제고한 것이다.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는 삼성제품은 반도체부터 석유시추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 모든 제품이 브랜드를 홍보한 일등 공신이었다. 둘째, 브랜드 파워를 높이기 위한 다양한 후방 지원을 펼쳤기 때문이다. 삼성이라는 브랜드가 함부로 사용되지 않도록 철저히 통제하는 한편, 브랜드 홍보에는 아낌없이 투자를 한 것이 주효한 것이다.



삼성이 승승장구하고 있을 때 LG가 뒷짐만 지고 있던 것은 아니다. 2006년 LG는 세계 100대 브랜드 안에 이름(94위)을 올렸다. 그러나 여전히 삼성보다 브랜드 가치나 인지도가 현저히 낮은 상태이다. 그래서일까? LG는 브랜드 전략에서 삼성을 따라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고 있다. 영국 프리미어 리그 축구팀 후원, 프리미엄 브랜드 휴대폰 육성, 개별 제품 브랜드를 통한 가전제품 경쟁전략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LG가 브랜드 경쟁에서 밀린 이유는 규모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외환위기 이후 두 그룹의 실적차이가 홍보 및 브랜드 투자 차이로 이루어지면서 격차가 벌어졌다는 것이다. 브랜드 전쟁에서는 일단 삼성이 판정승을 거둔 셈이다.



2. 전자



LG전자와 삼성전자의 탄생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삼성상회를 세운 것이 1938년, 구인회 LG그룹 창업주가 락희화학공업을 세운 것이 1947년이니 그룹 나이로 따지면 삼성이 9년 선배다. 하지만 전자 회사 연배로만 따지면 LG가 오히려 10년 위다. 구인회 회장이 LG전자를 세운 해가 1959년이고, 이병철 회장이 삼성전자를 세운 해가 1969년이니 말이다. LG가 먹고 살기조차 힘든 시절에 망하기 십상인 전자 사업을 삼성보다 10년 일찍 시작한 것은 대단한 벤처 정신이 아닐 수 없다.



1959년 설립된 LG전자는 국내 최초 라디오 "A-501"을 생산하였다. 그러나 밀수 라디오가 판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LG전자는 창립 1년 만에 돈을 고스란히 까먹는다. 회사 문을 닫으려고 할 때 기적이 일어났다. 1960년 5.16 군사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LG전자의 건의를 받아들여 밀수품 단속을 지시했고, 라디오들이 하나 둘 팔려나가기 시작하면서 LG전자는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여기에 정부의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이 시작되면서 국내에서 유일하게 라디오를 생산하고 있던 LG전자는 엄청난 호황을 맞게 되었다.



한편 50년대 말부터 이미 국내 최대 재벌로 군림하고 있던 삼성그룹은 박정희 대통령과 그리 좋은 인연을 만들지 못했다. 박대통령은 이병철 회장을 "호사스럽게 자라서 사치스럽게 사는 사람"으로 보았고, 이 회장은 박대통령을 "일본사관학교를 나온 천박한 군인"으로 생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회장은 박대통령 시절에 장차 삼성그룹을 이끌게 될 삼성전자를 세웠다. 이는 전자산업에 대한 박 대통령의 유별난 관심과 애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박대통령은 1968년 전자공업진흥법을 제정하고, 전자공업 육성 8개년 계획안을 발표하였다. 전자공업 육성 8개년 계획안이 나오자 가장 발 빠른 움직임을 보인 회사가 바로 삼성이었다. 1969년 3월 삼성전자는 일본 산요와 합작투자 계약을 체결하고 정부에 사업인가 신청을 낸다. 그러자 기존 전자업체들은 삼성의 전자 사업 진출을 극렬하게 반대하였다. 명분은 "합작투자 사업이 전자산업의 개발이 아니라 조립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합작을 허용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후발업체인 삼성의 도전장에 선발업체인 LG가 제동을 거는 것이었다. 결국 이병철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전자산업을 국가적 사업으로 육성해야 한다는 것을 설득하였고, 전량 수출을 조건으로 전자산업 인가를 받는 데 성공하였다.



당시 LG 구인회 회장은 삼성 이병철 회장이 전자 사업을 시작한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동향, 동창에 사돈 관계인 이 회장이 자신의 텃밭인 전자산업에 뛰어들겠다고 하니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한때 영원한 우정을 과시할 것처럼 보였던 두 사람은 삼성의 전자 사업 진출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갈등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브라운관에서 PDP까지 - 디스플레이

LG전자가 TV 시장에서 독점에 가까운 지배력을 보이던 1969년 삼성은 우여곡절 끝에 정부로부터 전자 사업 허가권을 따낸다. 후발주자였던 삼성은 기술면에서 LG를 따라잡기 쉽지 않다고 판단, 일부 품목에 집중 투자를 했다. 이 중 TV는 삼성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분야였다. 그러나 70년대 초반까지 삼성전자의 TV 점유율은 형편없었다. 여기에 석유파동이 터지면서 삼성전자는 더욱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삼성은 "이코노 TV"라는 걸출한 스타를 내놓았다. 이것은 TV를 켜면 빨리 화면이 나오게 하는 TV였다. 기존 TV는 스위치를 넣고 20초가 지나야 화면이 나오지만 이코노 TV는 이를 5초 이내로 단축했다. 1975년 선보인 이코노 TV는 시장에 거센 돌풍을 일으키며 위기상황에 놓인 삼성을 구원하였다. 하지만 이코노 TV만으로는 LG의 벽을 넘을 수는 없었다. LG전자는 70년대에 무려 111종의 흑백 TV를 내놓으며 물량공세를 펼쳤고, 고급 기술 적용에도 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LG전자 대표기술 중 하나가 황금 튜너이다. 당시 TV 채널은 로터리 방식이어서 자주 돌리다 보면 튜브가 닳아 고장이 잦았다. LG전자는 튜너를 순금으로 하여 내구성을 강화하고 접속도 원활하게 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 마케팅에서도 LG는 탁월했는데 1976년 LG의 샛별 텔레비전은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라는 광고와 함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70년대 LG전자는 컬러TV 개발에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았다. 반면 삼성전자는 컬러 TV를 역전의 발판으로 생각하고 독자적인 기술 개발에 성공하게 된다. 이에 놀란 LG전자는 삼성이 컬러 TV를 선점할지 모른다는 걱정에 무조건 컬러 TV 방영 금지를 외치고 다녔다. 반면 삼성전자는 컬러 TV 방영을 앞당겨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했다. 이처럼 컬러 TV 방영 논란이 벌어지던 1975년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전자전람회에서 "컬러 TV는 1981년 이후 방영 여부를 결정한다"라고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삼성전자는 울분을 삼켰고 LG전자는 박 대통령 덕분에 컬러 TV 개발시간을 벌 수 있게 되었다.

삼성과 LG는 80년대 들어서 컬러 TV 시장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1981년 삼성전자는 초절전 프리볼트 TV '이코노빅'을 내놓았다. 이코노빅은 전력난이라는 당시 상황과 맞물려 높은 인기를 얻었고, 이에 삼성전자는 1984년 사상 최초로 시장점유율 1위의 영광을 맛보았다. 당시 LG전자는 "프리볼트 회로는 특허를 냈으나 이미 알려진 기술이다"라고 삼성을 평가절하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삼성전자는 이코노빅의 출현으로 TV 시장에서 막강 파워를 갖게 되었고, LG전자도 얼마 지나지 않아 '오토볼트'라는 이름의 유사 제품을 내놓게 된다.



이후에도 두 회사는 TV 시장을 놓고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제품을 내놓으며 공격을 주고받았다. 1992년 삼성전자가 위성수신 컬러 TV를 선보이자 며칠 지나지 않아 LG가 같은 기능의 제품을 내놓았고, 1993년 삼성이 원적외선 바이오 TV를 내놓자, 한 달 뒤 LG는 원적외선에 음이온까지 발생시키는 TV로 맞불을 놓았다. 대형 TV가 유행하던 1995년 삼성전자는 명품, LG전자는 아트비전이라는 이름의 대형 TV를 출시하기도 하였다.



TV에서 시작된 삼성과 LG의 전쟁은 1990년대 이후 LCD, PDP, 디지털 TV 등 디스플레이 전 영역으로 확산되면서 지금까지 혈전이 벌어지고 있다. LCD 패널 세대 경쟁에서 TV 판촉전에 이르기까지 양사는 상호 일말의 양보도 용납하지 않으면서 숱한 경쟁 스토리를 양산하였다. 이러한 경쟁의 결과 삼성전자와 LG전자는 2006년 세계 TV 시장에서 나란히 1, 2위를 차지하면서 세계적인 디스플레이 업체로서의 명성을 공고히 하게 된다.



3. 통신



PCS 사업권을 잡아라


90년대 초반까지 이동통신 사업은 삼성과 LG에게 그림의 떡이었다. 전기통신사업법 때문에 휴대폰 제조업체의 이동통신 사업 진출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PCS 서비스가 확대되면서 정부는 1995년 7월 PCS 사업자 3개사를 새로 허가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삼성과 LG는 쾌재를 불렀지만, 문제가 생겼다. 정부에서 PCS 사업권을 삼성, LG, 현대, 대우 등 통신설비를 만드는 기업에는 한 개만 배정하도록 규정을 변경한 것이다.



규정 변경에도 불구하고 LG는 강한 열의로 사업을 추진했다. 자본금 5천억 원의 LG텔레콤을 설립하고 PCS 사업진출을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삼성은 PCS 사업진출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LG와의 경쟁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삼성은 경쟁보다 제휴를 모색하기로 하고 1996년 현대와 PCS 사업 공동 진출을 위한 연합 컨소시엄 에버넷을 설립하였다. 원래 삼성은 LG측에 먼저 제휴를 타진했다고 한다. 그러나 LG는 삼성의 제의를 악마의 유혹으로 간주하고 거절해 버렸고, 이에 삼성도 현대와의 제휴라는 초강수로 앙갚음한 것이다. 이후 사업자 선정을 위한 양 그룹의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고, 1996년 6월 정보통신부는 PCS 사업자로 LG를 최종 선정하였다. LG가 삼성-현대 연합이라는 거함을 침몰시키며 통신 기업으로 자리매김한 순간이었다.



수면위로 다시 떠오른 데이콤

PCS 경쟁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펼친 LG와 삼성의 대결은 일단 LG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둘의 대결은 끝나지 않았다. 데이콤이라는 새로운 이슈로 넘어가 다시 전쟁을 치른 것이다. LG는 PCS 사업권을 획득하면서 무선통신(PCS)과 유선통신(데이콤) 사업을 병행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데이콤 인수를 통해 통신그룹으로 성장하려 했던 것이다. 물론 삼성은 이를 수수방관하지 않았다.



당시 LG는 데이콤의 최대주주였지만 지분율이 20%가 되지 않아 위태로운 형상이었다. 데이콤 주식을 꾸준히 사들이는 삼성(데이콤 2대 주주)의 행보에 긴장한 LG는 주식을 매집하여 지분율을 27%까지 끌어올렸다. 그런데 삼성은 이때부터 LG의 데이콤 편법 지배를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LG가 계열사와 협력사를 동원하여 데이콤 주식을 매입하는 등 전기통신사업법을 어겼을 뿐 아니라, PCS 사업까지 가져가는 양다리 걸치기를 자행한다고 비난했다. LG의 데이콤 지배에 대한 비난 여론이 비등하자 정부는 PCS 사업권을 주면서 "데이콤 지분을 5% 이하로 낮추고, 경영권 지배를 포기하라"는 조건을 내건다. LG는 일단 정부의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데이콤 포기각서를 쓰게 된다.



그런데 포기각서를 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기통신사업법이 개정되었다. 이에 따라 기업들은 무제한으로 통신회사 지분을 사들일 수 있게 되었다. 다른 기업들이 합법적으로 데이콤에 접근할 수 있게 된 반면 LG는 손발이 묶이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렇게 LG의 손을 떠나는 듯 했던 데이콤은 IMF를 계기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IMF가 한창이던 1998년 5대 그룹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반도체를 포기하는 대신 데이콤을 인수하라는 정부의 제안을 LG가 받아들인 것이다.



당시 데이콤 인수와 관련하여 LG가 걱정한 것은 삼성과 동양의 연합이었다. LG가 40%의 지분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삼성과 동양이 연합할 경우 35%의 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1999년 초 삼성은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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