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신화의 베일

이동엽 지음 | 역사넷
이동엽 지음

역사넷 / 2007년 8월 / 173쪽 / 10,000원

1. 넬슨 펠을 재연하라


영국의《더 타임즈》는 2006년 9월 말 금주의 인물에 창간 이후 최초로 한국인을 선정했다. 그는 런던 증시에서 1조 원(5억 2천 7백만 파운드) 어치의 주식을 팔아 거금을 움켜줘 화제의 인물로 뽑힌 것이다. 그 한국인의 이름은 차용규. 그에게 일생일대의 큰 전환점이 된 결단의 순간은 1995년에 찾아 왔다. 삼성물산 독일 프랑크푸르트 지사에서 과장으로 근무하던 그에게 카자흐스탄 구리광산과 제련소를 위탁 경영하라는 임무가 떨어진 것이다. 그는 인수팀 16명과 함께 카자흐스탄 제1의 도시 알마티로 날아갔다. 이는 그에게 엄청난 기회와 부를 안겨준 드라마틱한 '성공 스토리'의 시작이었다.

겉으로는 황무지에 불과하지만 땅속은 지하광물의 보고인 이곳에 차용규보다 앞서 100년 전 이미 한 이방인이 발자취를 남겨놓고 거쳐 갔었다. 영국인 넬슨 펠이라는 사나이였다. 1903년 펠은 영국 런던으로 돌아와 기회의 나라 카자흐스탄에 노다지가 널려 있음을 곳곳에 알렸다. 그는 다시 러시아로 돌아간 후 영국에서 조달한 자금으로 '스파스키 구리광산' 매입을 주도했다. 이번에는 미국에 있던 가족 모두를 불러들였다. 이들 영국인은 자금을 투자하여 제련소 공장을 짓고 수많은 석탄과 구리광을 매입하여 회사를 수직 계열화했다.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방법을 알았다고 할까. 이들은 거대 기업집단을 구축하고, 광부, 노동자, 기술자, 회계사를 고용하여 이를 현대화된 기업으로 가꾸어 나갔다. 거대한 카자흐스탄 구리 제련 기업집단을 세운 펠은 1906년 스파스키 구리 광산을 런던 증권거래소에 상장시키고 자신은 일약 백만장자가 됐다. 상장된 당시 시가총액은 30만 파운드에 달했다. 넬슨 펠은 타작 초원에서 5년을 지낸 뒤 1909년 미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물론 엄청난 부를 손에 쥐고서…. 스파스키 구리 광산은 넬슨 펠이 카자흐스탄을 떠난 몇 년 후인 1916년에 러시아 갑부들에게 넘어갔다. 그들은 회사의 상장을 폐지했고, 그 후 카자흐스탄은 런던 투자가들의 시야에서 사라졌고, 광산은 러시아혁명 이후 소련 정부가 장악했다.



2. 카자스흐탄 삼성

카자흐스탄은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은 구리 매장량을 보유한 나라인데, 제즈카즈간 구리 지대는 단일 지역으로는 세계최대 규모이다. 소련의 붕괴와 카자흐스탄 독립 이후 1991년부터 1994년까지 카자흐스탄은 러시아의 지원을 더 이상 받지 못함으로써 구리 생산에 치명적 타격을 받았다. 기술적 곤란을 극복하고, 생산을 회복하여 회사를 살려내기 위하여 카자흐스탄은 1994년 말부터 국내 외 자본을 대상으로 여러 기업을 공개하고 민영화하기 시작했다. 삼성물산은 일찍부터 자원 개발에 큰 관심을 기울여,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자원 개발에 직접 참여해 왔다. 1991년 소련이 붕괴되기 직전에 이미 소련 내 법인을 설립하고 영업을 시작한 삼성물산은 중앙아시아 지역 광업 분야에 일찍부터 발을 들여놓으면서, 이 지역에서 오랜 시일에 걸쳐 상당한 비즈니스 경험을 축적했다. 삼성은 당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공화국에 많은 관심을 두고 정보를 수집하면서 나름대로 연구를 해왔다. 한번은 한국의 종합상사들이 조사차 카자흐스탄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삼성은 카자흐스탄 정부 당국자를 만난 자리에서, "카자흐스탄 정부가 구리, 철강, 석유를 삼성에게 주면, 전세계에 이를 팔아 주고, 카자흐스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제공해 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그리고 "한소 경협차관에 의한 플랜 20억 달러 가운데 카자흐스탄에 2~3천만 달러가 배당될 것"이라는 정보와 함께 "그걸로 프로젝트를 만들어 보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카자흐스탄 정계를 철저히 파고들던 삼성은 나자르바예프 대통령과의 면담을 통해 적극 지원을 약속받았다. 정부 부처 관계자들과의 관계도 돈독히 구축하였다. 고려인들의 도움도 컸다. 당시 대통령 비서실 부실장이었던 '미스터 리'도 적극 지원했다. 그는 삼성을 적극적으로 도와 많은 현지 고려인들을 삼성과의 사업에 동참시켰다. 1991년 삼성은 중앙아시아 진출을 위해 카자흐스탄 정부에 비철금속 합작공장 설립을 제안하였다.

3. 인수와 합병

카자흐스탄 정부는 1995년 상반기에 부도 직전에 몰린 카자흐스탄 최대 구리 채광, 제련 업체인 '제즈카즈간 구리 콤비나트'의 위탁 경영을 삼성물산에게 요청하였다. 차용규를 비롯한 16명의 삼성맨 인수팀 특공대는 곧바로 회사 재생 작업에 착수했는데, 무엇보다 생산량 증대에 초점을 맞췄다. 이를 위해 3만여 명의 근로자에게 6개월간 밀린 임금을 일시에 지급하는 대신 당분간 임금 인상을 동결하였다. 목표 의식이 약한 종업원들의 의식구조를 개혁하기 위해 생산량 증대에 따른 성과급을 도입했다. 동기 부여 및 생산성 향상을 위해 단위 공장별, 분임조별로 독립채산제를 실시하여 절감되는 예산을 종업원들에게 현금 또는 현물로 지급하는 방식을 실시하였다. 종업원의 복지 제도도 대폭 확대하였다. 사회주의 체제에 익숙한 종업원들에게 저본주의와 시장경제 체제 가치관에 입각한 경영 방식을 도입한 것이다.



차용규 인수팀은 시설 현대화에도 착수했다. 인수 직후 제즈카즈간 광산에 첨단 기술과 장비를 도입하는 데 1억 2천만 달러를 투자하였다. 이후 몇 년에 걸쳐 총 2억 5천만 달러를 들여 노후화된 설비를 새로운 생산 설비로 완전히 교체하고 생산, 자재조달, 회계 시스템을 전산화했다. 삼성물산은 업무 전산화를 위해 PC를 1천 대나 투입하는 등 과감한 투자를 단행해 업계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삼성 독일은 제즈카즈간을 매입하면서 향후 15년에 걸쳐 10억 달러 투자를 약속했다. 광석 분쇄 처리 설비를 현대화하여, 광석 처리 능력을 연간 2천 4백만 톤으로 늘려, 구리 생산량을 크게 끌어 올릴 수 있었다. 또한 1천 4백만 달러를 투자하여 과거 20여 년 동안 지지부진하던 아넨스키 광산 개발도 서둘러 마무리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제즈카즈간은 1996년 8월 주주총회에서 제즈카즈간 창립 이래 사상 처음으로 배당을 실시하여 우선주 주주들에게 주당 9센트에 해당하는 배당금을 내놓을 수 있었다. 회사를 인수한 차용규 팀은 체불임금을 해소하고, 임금 인상을 물가 상승에 연동시키며, 종업원들의 의료 서비스와 보험 등 각종 복지 혜택 제공을 약속했다.



4. 카작무스의 탄생

인수와 합병을 통해 카작무스 수직 계열화를 사실상 완성한 1997년은 삼성물산과 차용규 개인에게 매우 중요한 해였다. 1995년부터 1997년까지 차용규와 삼성 팀은 생산성 향상을 위해 무엇보다 공장 설비를 전면적으로 갈아 치웠다. 구리제련소를 대폭 개보수하고 제련소 구식 장비를 교체했다. 생산량 증대를 위한 1단계 프로그램을 마치자 광석 생산량은 연간 2백만 톤으로 증가했다. 차용규와 삼성 팀은 1996년 8개 회사를 인수, 합병하여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었는데, 1997년 들어서면서 새로운 기업의 인수, 합병을 계속하여 카자흐스탄 구리 시장을 독점하는 동시에 이들 회사를 수직 계열화하기 시작했다.



5. 나자르바예프 대통령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은 신세기 선언을 발표해 카자흐스탄 사회의 전면적 변화를 추구하고, 그 일환으로 1997년 수도를 알마티에서 아스타나로 옮겼다. 그는 싱가포르의 경제 기적을 이룩한 리콴유 수상을 존경하고 공개적으로 흠모하곤 했는데, 카자흐스탄을 싱가포르처럼 강국으로 만드는 작업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다. 카자흐스탄 대통령은 민영화 성공의 구체적인 예로 삼성물산이 소유한 카작무스사를 들었다. "구리 산업계에 영향력 있는 삼성이 많은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카작무스의 경영실적이 아주 좋다"며 "석유, 가스 부문의 국영기업들도 민영화해야 한다. 민간 기업만이 생산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고, 일자리를 많이 창출하고 임금과 세금을 더 많이 낼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다만 철도, 전력 송배전, 석유와 가스 파이프라인은 국가가 계속 소유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지속적 개혁을 위해 토지의 민간 소유를 위한 법령을 내년에 시행하겠다"면서 농업 분야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새로운 농업 및 소유 제도에 대한 미래의 청사진도 피력했다.



카자흐스탄 대통령 선거에 카작무스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나자르바예프 후보를 강력히 지지했다. 1998년 12월 11일, 블라디미르 김 대표이사가 직접 나서 "카작무스는 카자흐스탄에 진출한 외국기업 투자자들을 대표하여, 1999년 1월 10일 예정인 카자흐스탄 대통령 선거에서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을 지지할 것"이라고 공식 선언했다. 1999년 1월 10일 대통령 선거 투표 결과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무난히 재선에 성공했다. 그의 당선은 삼성물산 차용규 상무가 카자흐스탄에 대해 '국제통화기금등 국제 경제 기구와 서방 국가의 조언을 충실히 이행한 시장 개혁 모범국'이라고 평가한 것처럼, 카자흐스탄이 지속적으로 개혁을 추진한다는 의미였다.



6. 경제 위기

카자흐스탄의 경제상황은 1999년에 들어서도 좋지 않았다. 국영기업 민영화 작업은 정부가 의도한 것만큼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카자흐스탄 정부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타개하고자 차용규와 삼성팀에 손을 내밀었다. 1999년 12월 3일 카작무스는 "카자흐스탄 정부의 지분 전량을 인수, 위탁운영하고, 그 대가로 1억 달러를 정부에 대여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차용규와 삼성 팀은 카작무스 업체 간부들을 한국 삼성물산 본사로 파견하여 벤치마킹을 시키는 등 인력 개발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차용규와 카작무스는 1999년 11월 크레릿 리요네를 비롯해 '도이체방크', '로스차일드 은행', 헝가리의 '라이파이젠 뱅크' 등을 통해 국제금융시장에서 1억 1천 7백만 달러의 자금을 조달했다.



7. 차용규 공동 대표

광업은 위험한 산업이다. 사고나 기술적 어려움으로 인해 언제든지 조업이 중단될 수도 있다. 산재는 무시할 수 없는 생산 차질 요인이다. 카작무스에서는 연간 30여 명이 산재로 사망했다. 산재에 따른 보상, 치료 비용 그리고 사회적 비난 여론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2002년 5월 2일 카자흐스탄 중부 카라간다 지역에 위치한 카작무스 사트파예프 공장에서 건물 지붕 일부가 붕괴하는 사고가 발생하여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으로 입원했다. 4명은 현장에서 즉사하고 2명은 병원으로 후송 후 치료 과정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카작무스사와 카자흐스탄 정부와의 관계는 산재에도 불구하고 크게 악화되지는 않았다. 카작무스는 21세기 들어 카자흐스탄의 상장기업 가운데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업체였다. 광산, 발전소, 공작소 인수 등에 따른 시너지 효과가 제대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직 계열화한 기업집단은 회사의 재정 안정과 생산비 절감에 큰 기여를 했다.



8. 뇌물 수수

2001년 8월 20일은 블라디미르 김, 차용규, 카작무스, 삼성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하루였다. 장소는 아스나나 대법원 법정. 전직 총리 아케칸 카제겔딘이 대법정에 피고인으로 섰다. "카제겔딘 총리에게 뇌물을 준 사실이 있다"고 블라디미르 김은 검찰의 공소 사실을 인정했다. 블라디미르 김은 "그 후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이러한 사실을 국가 안전위원회에 보고했다"며 법정증언을 마쳤다. 이 블라디미르 김은 1992년부터 1995년까지 카자흐스탄과 삼성의 합작 법인에 근무했고 이때부터 그와 삼성과의 인연이 이어졌다. 블라디미르 김은 삼성물산이 5년간 카작무스를 위탁 경영하도록 주선한 사람으로 그 자신도 1995년 카작무스에 발을 들여놓았다. 2002년 11월 이후 블라디미르 김은 집권 오탄당의 정치 위원회 주요 간부로 활동했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을 가진 블라디미르 김은 현 집권 세력 실력자의 강력한 후원을 배경으로 이후 삼성으로부터 카작무스 지분을 인수하고 차용규와 함께 자신들의 회사를 런던 주식 시장에 무사히 상장시킬 수 있었다.



9. 정부 지분 인수

차용규와 블라디미르 김의 카작무스는 정부 지분을 추가 인수할 의사를 밝혔다. 정부가 2001년 매각하지 못한 지분 4.65%를 포함한 정부 소유 지분 24.65%를 회사에서 인수할 의사를 발표했다. 카작무스는 정부로부터 자사주 10%를 이미 2001년 11월 매입했다. 블라디미르 김과 차용규는 이번에도 나머지 정부 지분을 매입하기를 희망했다. 매입 가격은 추후 결정하기로 했다. 2002년 12월 초 현재 주요 주주는 삼성물산, 카자흐스탄 정부, 'ABND 암로 뱅크 카자흐스탄' 등이었다. 카자흐스탄 정부는 카작무스 지분 20%, 보통주 98만 2,307주를 12월 27일 1억 8천 4백만 달러에 카자흐스탄 증시를 통해 경매 방식으로 일괄 매각했다. 이번 경매에는 3명이 참가했다. 주식은 주당 187달러에 매각됐는데, 매입자 신분은 즉각 확인되지 않았다.



10. 2002년 위기

카작무스를 일약 세계 구리 업계의 거인으로 성장시킨 차용규와 블라디미르 김은 2002년 카작무스 경영에서 여러 악재를 만나 위기에 직면한다. 기업이 종업원들에게 높은 임금을 지불할 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다시 느껴야 했다. 그리고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환경을 소홀히 한 대가를 외자 기업이 어떻게 지불해야 하는가 하는 경험을 겪어야 했다. 국제 금융계가 카자흐스탄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과거와 달리 카자흐스탄의 정치는 안정되었다. 카작무스는 광산 개발과 작업장 안전시설 개선을 위해 3년 기간의 1억 달러 신디케이트론(여러 금융관이 하나의 조건으로 돈을 빌려주는 방식) 유치에 성공했다. 주간사는 시티은행과 'SSB증권'이었다.



2002년 9월 러시아에서 갑자기 불길한 소식이 날아왔다. 러시아 하원 의회 보안 위원회는 카작무스에서 반출된 핵물질이 무분별하게 확산되고 있다고 경고했는데, 이러한 위험은 제즈카즈간 인근의 카작무스 공장이 불법적으로 오스뮴-187이라는 물질을 유출시키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대통령의 외자기업에 대한 공개적인 환경 문제 제기 이후 카자흐스탄 정부는 외자기업에 대하여 관련 법규를 매우 엄격하게 적용했다. 카작무스도 환경오염을 이유로 3백만 5천 텡게의 벌금을 카자흐스탄 정부로부터 부과 받았다. 차용규와 블라디미르 김이 예측하지 못한 가장 큰 시련은 바로 카작무스 내부에서 터져 나왔다. 2002년 12월 6일 카자흐스탄 동부지역 그루보코예에 소재한 카작무스의 '아일타스 구리 제련소' 공장 노동자 600명이 12월 9일부터 회사의 공장 폐쇄에 항의하기 위해 대규모 단식 투쟁에 돌입하기로 결정했다. 노동자들은 또한 자녀들을 12월 9일부터 19일까지 학교에 보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2002년 12월 10일부터 계속된 아일타스 구리 제련소 노동자들의 단식 투쟁은 마침내 12월 27일에 종료됐다. 카작무스가 공장을 에카테린부르크에 소재한 러시아의 '우랄 광업제련'에게 매각하는 데 동의하고 러시아 기업은 고용 승계를 약속하면서 사태는 해결됐다.



11. 카자흐스탄 코리안

카작무스는 소위 '코리안 그룹'의 주요한 경제적, 물적 기반이다. 블라디미르 김, 블라디미르 니, 루슬란 윤 등 활발히 움직이는 고려인 3세들이 중심이 된 기업이다. 그 중요성으로 인해 카작무스는 코리안 그룹을 위한 중요한 정치적 역할까지도 한다. 코리안 그룹은 '카진크', '우스트 카메노고르스크 티타늄 마그네슘 콤비나트', '망기스타우무나이가즈' 석유 회사 등의 기업도 장악했다. 이들 고려인 후손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