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육일약국 갑시다

김성오 지음 | 21세기북스
1장 고객을 영업부장으로 만들어라



육일약국 갑시다

경상남도 마산의 한 변두리에 있는 4.5평 규모의 이름 없는 약국. 주변에 변변한 건물마저 없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작은 약국 '육일약국'으로 가자고 필자는 택시를 탈 때마다 주문을 했다. 1년 6개월간을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 친구, 주변에 아는 모든 사람을 총동원해 '육일약국'을 택시 포인트로 알려나가는 데 주력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어서 3년 만에 창원하고도 마산에서 가장 먼 상남동에서 택시를 타고 "육일약국 가자"고 하자 기사는 "마산, 창원에서 택시 기사 한 달하고 육일약국 모르면 간첩이라 안 합니꺼"라고 답했다. 대한민국의 가장 작은 약국을 서울 보령약국 다음으로 큰 약사 13명의 기업형 약국으로 키운 육일약국의 랜드마크는 이렇게 시작됐다.



정성이 대단한 사람

1983년 필자가 처음 개업할 당시 대부분의 약국은 1년 365일 문을 열었다. 기독교인인 필자는 평일인 육일 동안은 손님에게 충성하고 일요일은 하나님께 충성하고자 '6일만 영업한다'는 뜻으로 육일약국이라고 이름지었다. 필자의 사생활로 손님들에게 불편을 주는 게 싫었고 일요일에 약국을 찾는 사람들의 헛걸음을 줄이기 위함이었다. 비록 경쟁 업소에 비해 영업일은 하루 적었지만 '정직과 친절'이라는 서비스로 경쟁 약국들보다 훨씬 많은 손님을 끌었고 더 높은 매출을 올릴 수 있었다.



개업 당시 하루 평균 손님은 20~30명 안팎이었다. 그때는 약사의 임의 조제가 가능한 시절이었다. 약국마다 조제 차트가 있었고 손님이 돌아간 다음 차트를 들여다보며 40~50번씩 손님의 이름을 외웠다. 손님이 너무 없어서 단골을 만들기 위해 필자는 약국을 찾는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외우기 위해 노력했고 손님이 다시 오면 조제 차트를 꺼내와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했다. 이름을 불러주면 손님들의 반응은 대단해서 바로 약국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흔히 말하는 '고객 감동'을 변두리 영세 약국에서 정성과 노력으로 실천한 셈이다.



또 단골손님의 딸 이름을 바꾸는 일을 도와주기도 했다. 당시 개명 절차는 무척 까다로워 일반인들은 엄두도 못내었다. 단골 고객의 딸은 '은정'이란 본명이 있음에도 할머니께서 '천한 이름을 지어줘야 오래 산다'는 속설에 따라 '맹순'이란 이름을 호적에 올린 것이었다. 그 딸은 대학교에 합격했는데 이름 때문에 등록을 포기하겠다는 하소연을 필자에게 해왔다. 그래서 변호사를 하는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개명 신청에 필요한 서류 및 절차를 알아봐 주었다. 수익과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고객 만족을 위해 노력한 것이다. 작은 정성으로 고객을 만족시키니 고객들은 꾸준히 약국을 찾아주는 방식으로 보답했다. 물건을 팔기보다는 신뢰를 쌓는 데 집중한 결과다.



손님들의 이름을 외우다보면 자연스럽게 동네 대소사에 관심이 많아진다. 그러다보니 동네 지리에 밝았다. 길을 묻는 사람이 약국을 찾아오면 최대한 상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그래도 못 알아들으면 조제 차트를 찾아와 전화를 걸어주었다. 부재중이거나 전화를 안 받으면 지체 없이 약사가운을 벗고 집을 직접 찾아주러 약국을 나섰다. '내 집에 온 사람에게 기쁨을'이 필자의 경영철학이었기에 비록 약을 사러 온 사람은 아니었지만 정성을 다했다. 공중전화도 많지 않은 시절이었기에 약국전화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무료로 내주었다. 집을 직접 찾아준 사람의 가족이나 전화를 쓴 사람들은 단골손님이 되어주었다. 영세약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객관적 경쟁력이 없으면 이처럼 주관적 경쟁력이라도 만들어야 했다.



하루 종일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면서 약사를 어려워하는 손님의 마음을 열기 위해 상담용 테이블을 바꿨다. 항상 서 있는 상태에서 대화해야 하는 높은 테이블을 낮은 책상으로 교체해 누구나 편하게 앉을 수 있게 했다. 의자도 약사용 좌석과 손님용 좌석을 똑같은 것으로 바꾸었다. 손님위에 있는 권위적인 약사가 아니라 평범한 이웃사람으로 대화를 하겠다는 의미였다. 상담용 테이블을 바꿨다고 해서 하루에 10명 오던 손님이 100명으로 늘어나지 않았다. 손님이 없을 때는 약국 직원을 손님 좌석에 앉혀 놓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손님이 끊이지 않는 약국'이란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특히 약사와 환자 사이의 장벽을 허물고 같은 눈높이, 같은 의자에 앉아서 상담을 하는 것이 환자들에게는 '고객으로서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약국의 신뢰도가 높아지니 자연스럽게 매출도 증가했다.



'손님이 기대하는 것보다 1.5배 이상 친절하라'고 필자는 강조한다. 누구나 베풀 수 있는 정도의 친절, 즉 경쟁업체가 베푸는 친절과 같은 양으로는 절대로 상대를 감동시킬 수 없다. 고객은 기대치에 못 미치거나 기대와 비슷할 때는 절대로 감동을 느끼지 않는다. 생각지 못한, 기대치보다 확연히 다른 서비스가 이루어질 때에야 비로소 고객은 감동하게 된다. 친절이 1.2배면 상대방이 어느 정도 느끼게 되고, 1.5배를 넘기면 고객은 감동한다.



분수에 맞게, 힘닿는 만큼

1983년 7월 스물여섯에 군대를 제대한 필자에겐 서울대 약대 졸업장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무일푼이었다. 고향인 마산으로 내려와 월2부 이자를 주고 6백만 원의 빚을 내었다. 그 돈으로 약국 자리는 물론 약품까지 준비해야 했다. 시내 번화가는 꿈도 못 꾸고 몇 날 며칠 자전거를 끌고 형편에 맞는 자리를 찾아 다녔다. 그렇게 찾아낸 곳이 구멍가게보다 좁은 교방동 4.5평짜리 자리였다. 당시 약국은 4.5평 이상의 규모를 갖춰야 허가가 났으므로 최소 규정을 지킨 것이다. 보증금 넣을 형편이 안돼 월세 80만 원에 2백만 원으로 약장을 짜고 3백만 원으로 약을 채워 넣고 나머지 1백만 원은 비상금으로 남겨두었다. 3백만 원으로는 약장의 절반도 못채워 의약품 도매상과 제약회사의 도움으로 빈 약통을 얻어 나머지 공간을 채웠다. 가뜩이나 볼품없는 영세 약국에 약장까지 비어 있으면 손님이 올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약국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6백만 원의 빚을 청산할 수 있었다. 빈 약통을 진짜 약통으로 바꿔 채우는 데는 꼬박 1년 6개월이 걸렸다.



약국 개업 1년 후 더 이상 빚쟁이는 아니지만 딱히 재산이라고 부를 것도 없는 자산 제로 상태였다. 그러나 홀가분하게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매달 십만 원씩의 장학금을 주기로 결심했다. 형편이 넉넉할 때 더 큰 돈으로 남을 도울 수 있다면 좋겠지만 오히려 가진 것이 없을 때 '나누는 습관'을 들이면 큰돈이 생겨도 욕심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분수에 맞게 힘닿는 만큼만 하겠다'는 거듭된 부탁 끝에 교방초등학교 학생들을 추천받을 수 있었다. 교방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은 매달 보낸 장학금을 1년 치 모아놓고 졸업식 당일 직접 전달하라는 연락을 했다. 졸업식장은 "와! 육일약국 아저씨다"는 환호성으로 떠나갔고 몸 둘 바를 모르며 정신없이 장학금을 전달하고 큰 기쁨을 맛보았다. 사람들은 항상 나눈 것보다 더 큰 사랑을 돌려주었다.



혁신의 가장 큰 장애물, 고정관념

손님 없는 작디작은 약국은 어둠이 내리면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어두워서 눈에 안 띈다면 밝게 만들어야 했다. 당시 약국은 40와트 형광등 6개면 충분했다. 그런데 일부러 25개의 형광등을 설치하라고 주문했다. "약사님요. 이 콧구멍만한 약국에 뭐 볼게 있다고 이리 많은 전구를 설치하시는교? 여기 25개가 다 들어갈 수나 있을까 모르겠슴더. 전기세 억수로 나올 텐데예." 형광등 설치 기사는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25개의 형광등이 그 좁은 천장에 간신히 들어섰지만 그날 저녁 약국은 눈이 부셨다. 형광등 설치 한 달 후, 전기세가 전달보다 무려 20만 원이나 더 나왔지만 아깝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밤이 깊을수록 약국은 더욱 눈에 띄었고, 캄캄한 골목길에 훌륭한 가로등 역할을 해주어 손님들도 만족했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월 매출액이 100만 원 정도 증가했다. 20만 원 투자로 다섯 배의 이득을 본 것이다. 당시만 해도 가게 문을 닫는 동시에 간판의 불도 모두 껐으나 육일약국의 불은 밤새 켜져 있었다. 한 사람이라도 불이 켜진 간판을 보고 약국을 인식하면 그것으로 족했다. 4~5년 후 일부 은행 간판들이 밤새도록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며 남보다 앞서 간다는 자부심이 생겼다.



약국을 경영하면서 6개월 이상 똑같은 전략을 지속한 적이 없다. 끊임없이 변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형광등을 단 후에는 약국을 조금이라도 커 보이게 하려고 벽을 터서 유리문을 달았다. 약국 공간을 넓히기 위해 약국 내의 숙식 공간을 절반으로 줄였다. 공사에 대해 사람들의 반대도 심했고 약국 공간도 별로 늘어나지 않았지만 현 상태를 유지하기보다 끊임없이 새롭게 변신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가 점점 늘어나는 손님을 감당하기 어려워 결국 건물주와 건물 전체를 3층으로 신축하기로 협의했다. 육일약국 면적이 10년 동안 3배 이상 성장한 것이다. 혁신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고정관념이다.



1986년 마산 롯데 크리스털 호텔을 찾았다. 약속 장소로 가기 위해 호텔에 들어서는 데 현관에 설치된 자동문이 눈에 띄었다. 자동문을 바라보니 어르신이나 짐이 많은 손님들에게 편리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전화번호부와 114안내까지 총동원해 자동문 설치 업체를 알아냈다. 설치비용은 200만 원으로 상당히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앞서가는 약국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과감한 투자를 결정했다. 아마도 크리스털 호텔에 이어 마산에서 두 번째로 설치되는 자동문이었을 것이다. 곧바로 자동문은 동네의 명물이 되었다. 매일 아이들이 자동문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삼삼오오 몰려들어 '열려라 참깨'를 목청껏 외쳐댔다. 가끔 지나친 장난을 친 아이들도 있었지만 황희 정승의 일화를 떠올렸다. 결국 자동문은 두고두고 육일약국에 엄청난 홍보효과를 가져다주었다.



1980년대만 해도 동네에서 경제 신문을 보는 사람이 드물었다. 하지만 변두리 조그만 약국을 경영하더라도 경제의 흐름을 보는 눈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경제 신문을 신청했다. 구독자가 너무 적어 신문은 하루 뒤에 배달되었지만 유통 업체의 대명사라 불리는 월마트 기사를 보게 되었다. 마이카 시대를 맞이하여 시내가 아닌 도시 외곽에 창고형 마트를 지어 성공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필자도 번화가에서 큰 약국을 경영하는 게 꿈이었다. 그러나 월마트 기사를 보는 순간 '굳이 시내가 아니라 외곽에 있는 대형약국도 성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마산역 앞에 5개의 점포를 가지고 있는 약사 선배와 동업할 기회가 생겼다. 지금의 마산역이야 우수 상권에 속하지만, 1994년 마산역은 열차 이용객도 그리 많지 않은 한산한 역이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마산역 앞에 약국을 내면 어떻겠느냐'고 물어보았다. 사람들은 인적이 드문 역 앞에 대형 약국을 오픈하면 본전도 못 건질 것이라고 만류했다. 하지만 대한민국도 마이카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자동차 시대가 열릴 경우 마산역은 더없이 좋은 교통의 요지였다. 한적한 기차역을 공영주차장으로 이용할 수도 있었다. 시장조사 결과, 최악의 경우를 감안하더라도 최저 생존은 가능하다는 확신을 내렸다. 인테리어 공사에 들어가기 전 간판부터 주문해 설치했다. 오픈 한 달 전부터 조명을 최대한 밝게 설치하고 날이 저물면 간판에 밤새도록 불을 켜 약국 오픈을 알렸다. 오픈 당일 한적한 마산역 주차장에 손님들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마산은 물론 창원, 거제, 함안, 진해, 고성 등에서도 자동차를 타고 약을 사러왔다. 대성공이었다. 육일 약국을 경영한 지 꼭 11년만이었다.



개업식 날 비싼 선물은 서로에게 부담이 될 것 같아 지인들에게 '다른 선물은 일체 받지 않으니 만 원짜리 화환 하나만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오픈 당일 아침에 화환이 도착하기 시작해 1백여 개의 화환이 줄지어 늘어섰다. 무관심하게 지나가던 사람들도 어마어마한 양의 화환을 보고 약국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개업 선물로는 고급 타월을 준비했다. 드링크제나 소화제같이 저렴한 약을 사도 타월을 나누어주었다. 표면적으론 손해보는 장사였지만 구매 가격에 상관없이 한 명 한 명에게 마음을 담아 90도로 절하며 개업 선물을 전했다. 오전에 방문한 사람이 몇 시간 후에 다시 오고 온 가족이 연달아 약국을 방문했지만 처음 온 사람과 똑같이 대했다. 전단지라도 만들어 약국의 존재를 알려야 하는데, 입소문을 내주니 하루에 몇 번을 찾아와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이후 '마산역 육일약국'은 13명의 약사를 둔 기업형 약국이 되었다. 약사 숫자로 보면 19명의 약사가 있다는 종로의 보령약국 다음으로 큰 규모였으며, 진해, 창원, 거제 등에서 오는 고객이 몇 십만 명은 족히 되었다. 의료보험의 확대와 약사와 의사의 과잉 배출로 동종업계가 사양길로 접어들던 환경을 생각하면 매우 놀라운 성장이었다.



가장 효율적이고 지속적인 경쟁력, 마음경영

고객을 다시 찾게 만들려면, 먼저 고객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화를 통해 상대방의 욕구를 정확히 탐색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상대방의 성격, 마음, 경제적 능력, 교육 수준, 인간성, 인격 등을 관심있게 살펴보아야 한다. 고객의 정보를 정확하게 파악하면, 눈높이식의 맞춤 상담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를 알아주는 가게와 많은 손님 중의 하나일 뿐인 가게…. 어느 곳을 찾을 지는 자명한 일이다. 약품을 예로 들면 가격을 중시하는 사람이 있고, 제조회사 즉 메이커나 약품의 성분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메이커를 먼저 생각하는 손님에게 무조건 저렴한 약을 내놓으면 거래도 성사되지 않을뿐더러 언짢아지게 마련이다.



영원한 단골은 없다. 상품은 하자가 있을 경우 교환해주면 되지만 서비스에 불만을 품고 돌아선 고객은 다시 붙잡을 수 없다. 새로운 고객을 만족시키는 것보다 기존 고객을 만족시키는 게 훨씬 수월하다. 서비스는 또 하나의 상품이다. 상품에도 품질이 있듯이 서비스 역시 차이가 있다. 손님의 숫자도 빈익빈 부익부다. 하루에 한 명씩 늘어가기만 해도 어느 순간 손님이 엄청나게 증가하지만, 반대로 줄어들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계속 '빈貧'할 것인지, '부富'할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은 나의 노력 여하에 달려있다. 요즘 감동경영이란 말을 많이 한다. 감동경영은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손님을 향한 마음에 혼을 담을 때만 가능하다. 모든 곳에 내 마음을 녹여 넣고, 상대방의 마음이 내게로 움직이게 하는 것, 필자는 이를 '마음경영'이라 부른다. 돈만 추구하면 돈과 사람을 모두 잃지만, 마음을 잡으면 사람은 물론, 그 외의 모든 것이 따라온다.



Give & Take

사업의 성공은 '사람의 마음 방향'에 달려있다. 사람의 마음이 나를 향하고 있는지, 반대로 나를 떠나고 있는지에 사업의 성패가 달린 것이다. 감동을 주는 요소의 핵심은 바로 '주는 것'이다. 주는 것이 꼭 금전이거나 물질일 필요는 없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정성과 시간, 노력을 주면 된다. 힘들어 보이는 사람에겐 하다못해 위로의 말이라도 해주었다. 육일약국에서 2백 미터 떨어진 곳에 양로원이 하나 있었다. 자식에게 버림받은 분들, 자식이 있어도 갈 곳이 없는 어른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분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병원이나 약이 아닌 '사람'이었다. 그런 분들이 꼬깃꼬깃 모아둔 용돈을 들고 약국을 찾으셨다. 약을 먹어서 나을 병이 아니었기에 그분들의 '하소연'을 들어주었다. 당신들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고, 여기저기 아픈 곳을 물어보며 자식들이 해야 할 위로를 대신 해주면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