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 네트워크 세상의 행복한 리더
송은숙 지음 | 한스컨텐츠
서문| 당신의 이름으로 산다는 것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2002년 늦가을이었다. 10시간이 넘는 대수술을 마치고 나와서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해서 일을 하던 남편이 쓰러졌다. 구급차 안에서 나는 울부짖었고, 남편은 대답이 없었다. 계속 남편 이름을 불렀고, 남편은 꿈결처럼 살며시 눈을 뜨고 나에게 말했다. "은숙아 난 괜찮아."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나의 이름 석자와 괜찮다는 그 말이 그대로 유언이 되었다. 그 뒤로 나는 죽으려는 마음까지 먹었지만, 세 딸 때문에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대전 시내를 미친 여자처럼 쏘다니다 아무 교회에나 들어가서 기도인지 원망인지 모를 말을 하면서 울었다. 그렇게 몇 달을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냈다. 그 뒤로도 먼저 보낸 아픔보다 더한 괴로움들이 나를 덮쳤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하나님께 빌었다. "하나님, 제발 오늘 하루만 버틸 힘을 주세요." 잠을 자려고 누우면 온몸이 오한이 든 것처럼 떨려왔다. 몸과 마음이 성한 곳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결국 그 모든 일을 수습하고 일어났다. 당시에는 정말로 불가능하게 느껴졌던 일을 해낸 것이다. 사업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던 내가 사업을 이어받아 지금껏 꾸려오고 있다. 내 삶과 회사가 기적처럼 부활한 것이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에너지 덕분이며, 남편이 남기고 간 사람들과 가족 덕분이다. 남편은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따뜻한 바람을 불게 해준 다정다감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다.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는 연구원 생활과 겸하느라 시간이 없어서 졸음을 쫓기 위해 코 밑을 찔러가며 공부할 정도였다. 그리고 운동이라면 못하는 것이 없는 만능 스포츠맨이기도 했다. 나는 그런 남편을 정말로 굳게 믿었다. 그 사람이 이렇게 나만 남겨두고 저 세상으로 먼저, 그것도 이렇게 일찍 떠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다. 하나는 나처럼 벼랑 끝에 몰린 사람도 자신의 의지를 접지 않는다면, 반드시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과, 또 하나는 인적 네트워크의 중요성과 인적 네트워크를 어떻게 구축하고 관리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다,
Ⅰ 청춘의 푸른꿈
꿈꾸는 사람들의 징검다리
1993년 9월 내 남편 고(故) 이인동 박사는 연구원에서 사업가로 극적인 변화를 시도했다. 평소 대학과 연구원 생활을 거치면서 체득한 기술을 바탕으로 당시에는 혁신적인 소프트웨어 벤처기업을 만들게 된 것이다. 남편은 주위 사람들의 우려와는 달리 늘 밝고 긍정적인 마인드로 사업을 진행시켜 나갔는데 그것은 아마도 원천기술에 대한 자신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편과 박사과정을 지도해주신 김태균 교수님은 동경대에서 공부를 하신 분으로 전공 분야는 문자인식과 패턴인식이었는데, 그 분은 남편을 통해 고국인 한국에 자신이 연구한 결과물을 고스란히 전수하기를 원했다. 그런 분과 같이 먹고 자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분의 노하우를 배웠고, 해당 학문의 전 부분을 꿰뚫게 되었다. 그러한 심도 있는 원천지식과 기술이 있었기 때문에 남편은 어려운 와중에서도 장밋빛 미래를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주)한국인식기술의 창업자인 남편은 1983년 한국전자 통신(당시 KIST/현 SERI) 패턴인식 연구실의 선임 연구원으로 근무하면서 10년 이상을 연구에만 매진했다. 당시 이 분야의 많은 연구원들이 연구 결과를 과대 포장하여 보고한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자 정부에서는 예전처럼 충분한 연구비를 지원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연구에 전념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남편은 김태균 교수님께 배운 것과 자신의 연구 결과가 세상 밖으로 나와 많은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편리함과 유용성을 가져다줄 수 있길 기대했다. 그런 실학자의 마인드가 남편을 더 큰 사업, 더 큰 세상 속으로 이끈 것이다. 하지만 기술자인지라 주위의 친구나 선배들에게 남편이 나중에 사업을 하겠노라고 하면 주위에서는 우려의 시선을 보내는 경우도 많았다.
남편의 내면에는 사업에 대한 자신감과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늘 충만한 상태였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기도 했거니와 앞서 이야기 했던 것처럼 대학원 시절부터 매일 경제지를 서너 부씩 보면서 꾸준히 준비를 해왔기 때문이다. 그러고 처음에 사업을 시작하고 3~4개월 더 연구한 끝에 결과물이 나왔다. 하지만 그 당시에 나는 그 기술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지 못했다. 지금은 그런 기술을 모방하는 업체도 하나둘 생겼지만 당시에는 획기적이며 얼리 어답터들에게 상당히 이슈가 되는 상품이었다. 물론 이와 비슷한 기술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은 당시의 '글눈'이라는 제품과 그 제품에 들어간 기술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절감하고 있다, 이제는 많은 유사 기술들이 나와서 그 기능이 평가절하될지 모르지만, 당시로서는 대단한 기술이었고, 지금의 패턴인식이나 문자인식과 관련된 첨단기술들이 모두 이인동 박사의 기술을 기반으로 발전한 것이다.
남편은 사업이 커지면서 조직관리와 사내 커뮤니케이션에도 신경을 기울였다. 2001년 여름에는 장기근속 직원들에게 보약을 지어주기도 했다. 또한 회사 홈페이지의 CEO메뉴에다 경영에 관련된 자신의 생각을 담은 CEO마인드, 신문에 기고한 칼럼을 모아놓은 CEO칼럼이라는 코너를 만들기도 했다. 사장의 임무라는 제목의 칼럼에 'CEO는 책임감과 신의가 있어야 하고 조력자이면서 조율사여야 한다'라고 썼던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이러한 책임감과 신의의 대상은 고객과 주주와 직원들일 것이다. 그리고 남편은 벤처기업의 네트워크 구축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백마벤처클럽을 만들었는데 반도체 장비 업체인 블루 코드테크놀러지의 임채환 사장, 지란지교소프트의 오치영 사장 두리 정보통신의 김현섭 사장 등 벤처기업인과 교수, 금융인, 언론인 등이 회원으로 다수 참여하고 있는 이 클럽에서 남편은 부회장을 맡았다. 남편은 이 클럽이 단순한 벤처기업인, 동문 모임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협력을 주고받을 수 있는 모임으로 발전시키는 데 한몫을 했다. 그렇게 남편과 나는 현실과 이상을 조화시키면서 조금씩 우리의 꿈을 이루기 위해 징검다리를 하나씩 만들어나갔다. 이 징검다리를 모두 만들면 우리 가족을 비롯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편리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흐뭇해하면서 말이다. 새로운 세계를 개척해나가는 개척자의 심정으로 징검다리를 만들어나가고 있을 때, 운명이 전혀 뜻하지 못한 일을 준비하고 있음을 우리는 전혀 알지 못했다.
남편을 만나기까지
여기서 잠깐 내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나는 내 자신이 크게 성공한 사업가도 아니고, 보란 듯이 내세울 만한 인생스토리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독자 분들이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원활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배경지식이 필요할 것 같아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간단하게나마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한다. 나는 그다지 부유하지 못한 집안의 장녀로 태어났다. 내 고향은 충북 옥천이다. 고향마을에서는 너나 할 것 없이 밥보다는 고구마를 더 많이 먹어야 했다. 여름에 홍수가 나서 강물이라도 넘치면 가난한 살림에 동네 주민들의 이마에는 주름만 늘어갔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는 테니스를 잘 치셨다. 짧은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코트를 누비시는 모습이 굉장히 멋있게 보이는 분이었다. 여러 가지 취미 생활을 즐기시는 선생님은 테니스뿐만 아니라 낚시도 곧잘 하셨는데 어느 날 금강에서 낚시를 하시다가 근방에 우리 집이 있는 걸 아시고는 찾아오셨다. 나는 가난한 집을 보여주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인지라 선생님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런 상황에서도 밝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내가 대견해보였는지 그 뒤로는 가끔 나를 불러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셨다.
하지만 공부를 월등하게 잘했던 것도 아니고, 집이 공부만 하면서 살 정도로 넉넉하지 않았던 터라, 내 미래를 내 손으로 결정할 수 없었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선생님께서는 야간대학을 가라고 하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가 장녀이므로 어머니의 주변에 계시길 원했다. 그래서인지 오빠를 시켜서 어느 날 저녁 그 당시 2년제였던 교대에 원서를 집어넣었고, 크게 원하지도 않았지만, 굳이 반항할 이유도 없어서 자연스럽게 나는 교대생이 되었고, 교사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어렸을 때 동생들을 돌보듯이 어린 학생들을 교육하는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물론 나는 그 직업에 불만을 갖지 않았다. 대학생 시절 연애를 할 기회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마음에 썩 드는 사람을 만나지도 못했다. 내가 눈이 높았던 것은 아니지만. 내가 경제적인 면에서 한이 맺혀서 그런지 좀 여유가 있는 집 사람을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2년제를 나왔기 때문에 공부를 좀 많이 한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다른 사람은 학사, 석사라고 하는데 나는 그런 근사한 호칭을 들어보지 못한 것이 다소 마음에 앙금이 남아있던 터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송은숙 선생님이시죠?" "네. 그런데 누구시죠?" 때는 추운 겨울이었다. 나는 학교로 출근하기 위해서 황간 고속버스 터미널 앞에서 차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167cm의 큰 키에 긴 생머리를 뒤로 넘기고 추위에 정장을 단단히 여민 내 앞으로 정장에 점퍼를 걸친, 눈빛이 반짝거리는 한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나에겐 별스러울 것도 없는 이 남자,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그 사람에게는 오랜 시간 기다려온 인연이었다. 매주 월요일 그와 나는 그 자리에서 만났지만 나는 그 사람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남자는 가을에 약하고, 여자는 봄에 들뜬다고 하던가? 그렇게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오면서 새로운 변화가 왔다. 나는 그 사람을 만난 덕분으로 이전에 내가 가지고 있는 조그마한 세상에서 벗어나 그의 눈을 통해서 더 큰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남편은 경제나 경영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자신이 지금 공부하고 있는 기술이나 사업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다른 이야기보다 더욱 열성을 가지며 이야기했다. 남편이 자신의 논문을 보여주면서 자신이 하는 일을 설명해주고, 세상이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이고 그 속에서 자신의 역할은 어떠한 것이 될 것인지를 선지자적인 관점에서 역설할 때 내 가슴속에서는 남편에 대한 애정을 넘어 존경심마저 일었다.
Ⅱ 목숨으로 일군 회사
혼돈의 나날
너무 추웠다. 모든 것이 낯설고 당황스러웠고,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당혹스러움과 두려움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상의하고 같이 이야기하던 남편이 없으니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이 나질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저절로 눈물이 났다. 한두 방울의 눈물이 통곡이 되기도 했다. 다른 가족들이 집에 오거나 방학이 되어서 딸들이 집에 있을 때면, 점잔을 떨면서 사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그런지 집에서 울지도 못하고 무조건 밖으로 나갔다. 어떻게 옷을 챙겨 입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냥 점퍼 하나만 걸치고 밖으로 나가서 쏘다녔다. 대전 시내를 쏘다니다 보니 남편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연애하던 시절에 남편과 지나갔던 곳 중의 하나였다. 대전에는 인동이라는 동이 있는데 그 곳에는 인동이라는 이름이 붙은 상점이 많이 있다. 인동식당, 인동 금은방, 인동 부동산 등등, 우리는 함께 그곳을 걸어 다니면서 저것들이 다 우리 것이라는 농담을 하며 함께 웃기도 했다.
남편에게 의존하여 우물 안 개구리처럼 하늘같은 남편만 바라보다가 세상 밖으로 나와 보니 세상은 너무나 험하고 거칠었다. 5월이 되면서 다시 일을 시작했다. 막상 정신을 차리고 나니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 먼저 코스닥 상장과 관련해서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코스닥 위원회와 관련 위원회에서 원하는 게 많았고, 무엇보다도 대주주였기 때문에 상속에 관해서 처리해야할 큰 문제가 남아 있었다. 장외에서 거래되는 주식이 있었기 때문에 상속세가 30억이 넘게 나왔다. 코스닥 등록이 임박한 상태여서 장외거래를 통해 이미 주가가 높게 형성되었기 때문에 거액의 상속세가 부과되었다. 상속과 관련된 모든 일을 6개월 이내에 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집을 담보로 상속세, 가산세를 모두 납부한 것이 12월 31일 정도였고 1년을 그 일에 매달려야 했다. 사업이나 법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1년 동안을 여기저기 쫓아다녔으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계속해서 잠을 못 잤고, 잠을 자려고 누우면 사지가 떨려왔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 날부터 아침에 일어나면 나는 하나님에게 기도했다. 제발 나에게 하루만 버틸 힘을 달라고, 한 달도 아니고 일 년도 아니고 내일 당장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오늘 하루를 버텨서 일을 처리할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살집이 없어지면서 온 몸이 휘청거리고, 어지럽게 몸이 떨리고, 피부가 거무죽죽하게 타들어갔지만 그렇게 힘들어도 버티지 않으면 그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정말 무서웠다. 그러는 동안 회사는 엉망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시간은 흘렀고,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고독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남편이 남겨놓고 간 선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선물은 남편이 남겨놓고 간 수첩이었는데, 그 안에는 바로 '사람'이 있었다. 사람은 가장 큰 절망을 안겨주는 존재인 동시에 가장 큰 희망이었다.
사람이라는 이름의 희망
남편이 먼저 가고 나서 겪어야 했던 일들은 결국 남편이 남기고간 사람들을 통해 해결했다. 남편은 살아생전에 아는 사람들과 식당에 가면 항상 자신이 식사 대접을 하곤 했다. 매번 자기 돈으로만 계산하는 남편에게 "당신 사람들에게 잘못 보인 것 있어요? 왜 매번 당신이 사요?"라고 물어보면 그냥 웃으면서 "사주는 게 좋으니까?"라고 했는데, 나는 그저 이 사람이 착해서 그러려니 생각하고 말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런 것도 있겠지만 결국은 남편이 현명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남편이 먼저 가고 나서 지금까지 내 삶을 이끌어준 것은 남편이 생전에 그렇게 챙겨주었던 사람들이니까 말이다. 남편은 좋은 사람들과 참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남편의 장례식을 치르던 날, 당시 대덕이업종교류회 박희원 회장님께서 나에게 명함을 건네면서 힘든 일이 있으면 찾아오라고 하셨다. 한참 후 내가 세금 문제로 정신이 없을 때였다. 어느 날 지갑에서 뭘 꺼내려는데 그분의 명함이 딸려 나왔다. 그때서야 정신이 들어서 그분에게 연락했다. "회장님 이러저러한데 어떻게 하나요?"라고 물어보니, 자신이 알고 있는 세무사를 소개시켜주겠다면서 한번 들르라고 하셨다. 그래서 약속날짜를 잡고 방문 했더니 그, 세무사의 연락처를 알려주셨다. 제가 잘 모르니 함께 가주시면 안 되겠냐고 부탁을 드리니 그러자고 하면서 당장 차를 몰아서 세무사 사무실로 같이 가주셨다. 그리고 세무사를 소개받았다. 한때 나에게 죽음까지 생각하게 만들었던 30여억 원의 상속세를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쓰러질지언정 드러눕지는 않겠다
이듬해 5월 나는 교사를 그만두어야 했다. 남편 때문에 낸 간병 휴직도 거의 남질 않았고 복잡한 상속 문제와 연일 터지는 회사 문제로 교사 생활을 이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교직을 그만 둔 후 삶은 더욱 더 피폐해져만 갔다. 잠을 자고 싶었으나 지금 닥쳐 있는 현실이 너무나 무서워 잠이 오지 않았다. 거기에 남편을 먼저 보낸 죄인이라는 생각은 날 점점 수렁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결국 나는 신경안정제에 의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밤마다 많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더 이상 남편은 내 옆에 없다. 우리 가족과 회사. 내가 과연 우리 아이들에게 아빠의 몫까지 해줄 수 있을까? 기술이나 경영에 무지한 내가 과연 회사를 잘 운영할 수 있을까?' 나는 두려웠다. 남편이 내 옆에 없다는 상상은 결혼 후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