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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빛

성완종 지음 | 따뜻한손
제1부 새벽어둠이 걷히면 해가 솟는다



제1장 하늘이 내게 준 선물, 가난

서산에서 인천까지의 뱃길은 당시 육로 이상으로 주요한 운송통로였다. 아버지는 서산에서 인천까지 배로 곡식을 내다 팔고 생필품을 사오는 장사를 시작했다. 뱃길을 따라 장사를 벌인 뒤부터 살림은 불었지만,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지방을 옮겨 다니며 장사를 하다 보니 점점 바깥일에만 흥미를 기울일 뿐, 집에는 얼굴도 제대로 내비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차츰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나와 내 동생들 곁에는 늘 어머니뿐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 대신 엄격한 가정교육을 우리에게 시켰다. 그래서인지 어릴 때의 어머니를 떠올리면 깐깐한 서당 훈장의 인상이 남아 있다. 내가 아는 아버지는 늘 외출이나 외박 중이어서, 나와 동생들에게는 마치 손님 같은 존재였다.



불행은 불현듯 찾아왔다. 초등학교 5학년 가을,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동생들을 돌보고 있는데, 한 아줌마가 우리 집 마당에 기세 등등한 모습을 드러냈다. 아줌마 옆에는 아버지가 호위병처럼 우뚝 서 있었다. "인사디려라, 새엄니다." 이번에는 아버지도 노골적으로 나왔다. 마침 그때 어머니가 대문으로 들어섰다. 어머니는 잠시 넋이 나간 듯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더니, 아버지가 눈길을 피하자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 내 인생에 있어서 와서는 안 되었을 날은 그렇게 다가왔다. 아줌마는 며칠 건넌방에서 기거하더니 이내 아버지의 힘을 빌려 안방으로 차고 들어왔다. 어머니는 어린 자식들을 끌고 사랑채의 뒷방으로 쫓겨나는 수밖에 없었다. 웅크리고 있던 불행이 우리의 맨몸을 칭칭 동여매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마당에서 벌어진 어머니와 아줌마의 싸움은 좀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동생들을 데리고 골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제발 아버지가 돌아오기 전에 싸움이 마무리되기를 빌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아버지는 이번에도 단박에 아줌마의 역성을 들었다. 아버지는 아예 사리를 따지려 들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머니한테 달려가더니 그 큰 손으로 사정없이 휘둘렀다. 어머니는 그것쯤은 이미 각오했다는 듯, 손찌검 앞에서도 넋두리를 멈추지 않았다. 그때마다 아버지의 손이 바람을 갈랐다. 소리를 지르며 주먹질을 해대기도 했다. 나는 어머니에게로 슬금슬금 한 발짝씩 내디뎠다.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어깨를 어루만졌다. 그때 아버지의 불같은 눈길이 나를 쏘아보며 몽둥이가 날아왔다. 몽둥이는 몇 번인가 등짝에도 떨어졌다. 나는 뛰다 뒹굴다 하며 동생들이 자고 있는 방으로 달아났다. 어머니는 기진맥진하여 냉골에 그대로 누워 있다가 아버지가 "당장 나가라"고 다시 호통을 치자 보따리를 싸기 시작했다. 섣달 초닷새, 결국 우리 식구는 아버지와 아줌마에 의해 집에서 쫓겨났다. 어머니는 옷가지 몇 점과 막내를 업을 포대기만 달랑 들었고, 나와 둘째는 겨우 챙긴 책보를 어깨에 질끈 동여맸다. 아버지는 우리를 쫓아내는 마지막 순간까지 손에서 몽둥이를 놓지 않았다.



어머니는 우리를 끌고 각별한 친분이 있는 집을 찾아가 사랑방을 빌렸다. 난생처음 남의 집살이였다. 그곳이 우리의 새로운 거처였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단지 내 오랜 인생유전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밖으로 나가 당장 먹을 것이며 일자리를 알아보러 다녔다. 그 당시 시골에는 파출부나 가정부 같은 단순한 자리도 없었다. 겨울이라 품을 팔 곳도 여의치 않았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작은 도움이라도 청할 수 있는 곳은 다 돌아다닌 듯했다. 어머니는 말없이 혼자 오랜 생각을 거듭하더니, 드디어 맏아들인 내게 입을 열었다. "완종아, 어미가 그동안 이리저리 알아보며 우리 식구들 살아갈 궁리를 해왔는데, 모두 다 여의치 않구나. 이렇게 남의 집 신세만 지고 있을 수도 없고 말이다. 아무래도 이 어미가 너희들을 위해 일을 하러 떠나야 할 것 같다. 그러니 넌 동생들 데리고 아버지한테 돌아가라. 설마 자기가 낳은 자식인데 다시 내쫓기야 하겠니? 엄마는…… 돈 많이 벌어서 다시 올 거야, 너희들 데리러…… 그때까지만 네가 동생들을 돌봐 줘, 알겠지? 미안하다…… 엄마가…… 정말 미안하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 견딜 수 없는 슬픔이 북받쳐 올라왔다.

날이 밝자 나는 동생들을 데리고 새엄마가 차지하고 있는 집을 찾아갔다. 집에는 새엄마뿐이었다. 새엄마는 우리를 보더니 인상부터 찌푸리며 왜 오냐고 악을 썼다. 아버지는 우리를 내치지도 반기지도 않았다. 무관심, 그 자체였던 것 같다. 그날부터 새엄마의 구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주막에 손님이 없어 장사가 안 되는 날은 손찌검이 더욱 심해졌다. 집에서 쫓겨나는 일도 허다했다. 그날도 발단은 간단했다. 새엄마가 나무가 적다는 이유로 지게를 마당에 내팽개치며 작대기를 들어 내 등짝을 후려쳤다. 다른 날과 크게 다를 바도 없었다. 나는 새엄마를 마주 보고 쏘아붙였다. "아줌마는 진짜 나쁜 사람이여! 내가 이거 하느라고 얼매나 힘들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학교 갔다 와서 빨래하고 나무까지 해 오는디, 맨날 때리기만 하고…… 그래 놓고도 아줌니가 우리 새엄니라고 할 수 있어유?" 정작 그 소리를 듣고 쫓아 나온 것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새엄마가 때리는 것보다 몇 곱절 더 심하게 매타작을 해댔다. 그리고 아예 집밖으로 나가라고 호통을 치더니, 나를 내쫓고는 문을 잠갔다. 딱히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날 밤 나는 이웃집 마당에 들어가 헛간에 잠자리를 마련했다. 짚단을 깔고 귀퉁이에 쌓여 있는 포대를 꺼내 머리에 베고 다섯 자 내 몸뚱이를 덮었다. 밤이 깊어지니 오한이 났다. 포대 몇 개를 더 꺼내 와 덮었는데도 추위를 이겨낼 수가 없었다. 땅바닥이 너무 차가워 등허리가 저려왔다. 그래도 저주에 찬 욕설과 몽둥이뜸질이 반복되는 집보다는 한결 편했다. 다음 날 집 앞으로 가보니 동생들이 나와 있었다. 그 애들 역시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일찍부터 나를 기다린 듯 부스스했다. 점심때가 되어 동생들이 집에 갔다 나오더니 내게 뭔가를 내밀었다. 고사리 손으로 뭉친 주먹밥이었다. 사실 나는 전날 저녁부터 굶고 있던 참이었다. 주먹밥은 보리가 더 많은 탓에 잘 뭉쳐지지 않아 퍼석했고, 간도 되지 않아 싱거웠다. 그래도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동생들 앞에서 울 수가 없어 허겁지겁 주먹밥을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어린것들이 집 나간 형을 생각하고 배를 줄여가며 주먹밥을 만들어 오다니, 가슴이 뭉클했다. 어느새 다들 철이 들었구나 생각했다. 눈물 젖은 밥, 동생들이 마련해준 주먹밥 한 개가 그날 낮에 먹은 내 점심의 전부였다. 그러나 잘 차린 밥상이 부럽지 않은 뿌듯한 식사였다.

제2장 희망으로 가는 티켓

외로움과 적막감이 무력감으로 변해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내 심신을 짓누르기 바로 직전, 나는 외가로 발걸음을 향했다. 외가는 변함없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는, 세상에서 유일한 곳이었다. 한참 내 볼품없는 모양새를 뜯어보던 외할머니는 더는 참지 못하고 그만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얼마 동안 뜸을 들인 뒤 나는 어머니를 찾으러 가야겠다며, 어머니가 살고 있는 곳을 가르쳐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외할머니는 그것만은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외할머니가 교회에 가신다며 집을 나섰다. 이 틈을 이용해 외할머니 방을 뒤져보자. 어딘가에는 어머니에게서 온 편지가 있으리라고 나는 확신했다. 장롱 속에 있는 이불 단을 들추니 편지 한 통이 나왔다. 나는 외할머니가 소중한 게 있으면 이불 단 속에 넣어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겉봉투에 서투른 글씨로 주소가 적혀 있었다. 조심스럽게 편지지를 꺼냈다. 서울에서 이비인후과를 운영하는 병원장 댁에서 가정부로 일하고 있다는 얘기, 주인 부부가 잘 대해줘서 큰 어려움 없이 지내고 있다는 얘기가 써 있었다. 그리고 말미에 조심스럽게 "새끼들이 늘 걱정"이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었다.



나는 편지를 몰래 품에 감추었다. 그리고 외삼촌에게 돌아가겠다는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가면서 사탕이라도 사 먹으라며 외삼촌이 150원을 쥐어주었다. 그때 나로서는 처음으로 만져보는 큰돈이었다. 갑자기 내 앞에 환한 빛이 비치는 것 같았다. 나에게 난생 처음으로 삶의 목적지가 생겼다. 어머니 주소가 적힌 봉투와 용돈 이상의 돈, 한순간에 내가 가려는 곳으로 나를 데려다 줄 마법의 티켓을 손에 거머쥐게 된 것이다. 어디든 가리라. 어머니가 계신 곳이라면. 백 리가 넘는 길을 걸어서 홍성역으로 갔다. 20시 30분 홍성발 영등포행 완행열차를 탔다. 모든 게 궁금했다.



영등포역. 플랫폼에 발을 디디자 을씨년스런 분위기가 사정없이 내 어깨를 짓눌렀다. 역 건너편에 이삿짐센터 간판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앞에서도 삼륜차가 줄지어 있었다. 안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보자 나도 모르게 용기가 났다. 나는 다짜고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난로에서 나오는 온기로 실내는 훈훈했다. 배달 온 아이로 알았는지, 아무도 나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나는 일단 난롯가로 가 언 손을 녹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얼굴에 곰보자국이 많은 아저씨가 내게 말을 걸었다. 얘기를 나누다가 어머니를 찾으러 왔다고 하며 어머니 주소가 적힌 편지봉투를 내보였다. 아저씨는 주소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아저씨는 나를 데리고 가 다른 아저씨들이 자고 있는 구석에 누울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주위에서는 그 아저씨를 그냥 박 씨라고 불렀다. 그 이외에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푸근한 대접을 받고 잠이 든 다음 날, 일찍 깼는데도 아저씨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 후 곰보 아저씨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아침을 먹자며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해장국집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해장국을 먹으니 더 이상 서울이 낯선 곳 같지 않았다. 몸과 마음을 녹여가며 국물을 들이켜고 있을 때, 아저씨가 이미 어머니가 살고 있는 집을 알아놓았다고 말했다. 용달차로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아저씨가 내려준 곳은 정말 용달차를 타고 얼마 가지 않은 주택가 골목이었다. 커다란 집 대문의 초인종을 누른 것은 내가 아니라 아저씨였다. 그 소리를 듣고 나온 분을 보니 분명 우리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문을 열고 나오다 나를 보고는 그 자리에서 실신하듯 쓰러졌다. 어머니가 가까스로 눈을 뜨더니, 꿈인지 생신지 모르겠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더니 나를 붙잡고 얼굴을 비비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일하던 집에서 대략 5백 미터 떨어진 시장 근처를 배회하다 보니 약사가 10여 명이나 되는 큰 약국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얼마 동안 밖에서 '광생약국'라는 상호가 붙은 약국 안의 동정을 살피다 문을 밀고 들어갔다. 당시만 해도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은 전화로 약을 주문하여 배달을 시키곤 했다. 약국 주인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날 당장 약 심부름을 내게 맡겨주었다. 새벽에는 신문을 돌렸다. 신문 배달을 마치고 나면 아침을 먹고 부리나케 약국으로 달려갔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밤 10시까지 강행군하는 날들이 계속됐다. 어서 돈을 벌어서 어머니를 모시고 내려가 동생들과 한집에 같이 사는 것. 그것은 내 삶의 목표이자 형으로서의 의무였다.



일주일쯤 그 집에서 더 머물다 나는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잘 곳을 찾아 나섰다. 사내자식으로 태어나서 어머니에게 짐이 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불현듯 내 머릿속에 한 곳이 떠올랐다. 산허리를 타고 한참 올라간 언덕 위의 교회. 당초부터 그런 곳이 나를 재워주려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기대를 품은 곳은 예배실이었다. 그곳은 밤에는 신자들이 드나들지 않으니 구석에 넝마라도 깔고 누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는 교회 문을 두드리는 데도 별로 주저하지 않았다. 나는 혹시 빈 공간이 있나 하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마침 앞에서 준수한 청년이 걸어왔다. 처음 보는데도 그는 내게 앉으라고 의자를 권했다. 나는 대뜸 잠자리가 없어 이곳을 찾아왔다고 사정을 이야기했다. 청년은 자신을 전도사라고 소개하며 따라오라고 했다. 전도사는 교회에서 기거를 하고 있었다. 그분은 나를 교회 안에 딸려 있는 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자신과 같이 생활하는 것이 불편하지 않다면 여기서 자도 좋다고 허락했다. 갑자기 내 앞에 그렇게 고마운 분들이 줄지어 나타날 수도 있나. 겹쳐 오는 행운 앞에 나는 감사한 정도를 넘어 외람스러울 지경이었다.

도병희 전도사는 내가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는 걸 알고 야간학교 과정을 소개해 주었다. 나는 의무교육도 제대로 마치지 못해서 초급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고백했다. 영등포교회에는 중등과정과 고등과정이 개설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이보다 내게 더 안성맞춤인 곳이 또 있을까? 일자리 가까운 곳에 숙소에 배움터까지 완비되다니. 그곳은 마치 나를 위해 마련된 시설 같았다. 전도사는 헌책을 구해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공책까지 몇 권 사주었다. 세상에 이렇게 고마운 분이 있는가. 세상에 천사가 있다면 바로 이런 분일 것이다.



목돈이든 푼돈이든, 어머니와 나는 돈이 모이는 족족 고향의 외삼촌에게 송금했다. 어머니가 서울로 떠나간 지 어느덧 8년, 내가 무작정 어머니를 찾아 나선 지 6년 이상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드디어 외삼촌에게서 우리 다섯 식구가 살 집과 전답을 마련해 놓았다는 전갈이 왔다.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마치 소녀처럼 좋아했다. 나는 그 이상이었다. 그 뒤 그것보다 천 배, 만 배 큰돈을 만져보았지만, 내 일생에서 그때처럼 기뻤던 적은 없었다.



외삼촌이 마련한 집으로 동생들을 데리고 오던 날. 우리 식구는 한 덩어리가 되어 부둥켜안고 웃음바다와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떨어졌던 동생들과 같이 살며, 나는 가족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점을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내가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섯뿐이었지만, 가족이 뭉친 힘은 다섯이 아니라 열·스물, 그 이상이었다. 그렇게 일 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나도 이제 스물두 살, 어느덧 어엿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제3장 광활한 세상 속으로

고향으로 돌아오자 우리는 한 울타리 안에서 같이 사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하지만 세 마지기 논으로는 아무리 둘러봐도 변변히 농사지을 수 있는 땅덩어리가 못 되었다. 허리띠를 바짝 줄인다면 겨우 입에 풀칠이야 하겠지만, 그밖에 수입은 전혀 기대할 게 없었다. 어머니는 새벽길을 걸어 바다로 나가 조개를 캐다 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해 가을, 김장철이 되자 배추와 무를 운반하러 외지에서 화물차들이 몰려왔다. 수확 철이라 모두들 바쁘게 움직였다. 형 또래의 청년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화물차 한 대씩을 맡아 배추를 실은 다음 장거리를 뛸 수 있도록 갈무리해주는 일을 떠맡았다. 그 즈음 마침 일거리를 찾고 있던 나도 그 작업에 끼어들었다. 그렇게 가을 한철 메뚜기처럼 뛰어다니다 보니 그럭저럭 겨울을 버틸 만한 돈을 다시 모을 수 있었다.



힘겹게 겨울을 나자마자, 나는 새로운 살길을 찾아 나섰다. 그때 눈길을 돌리게 된 것이 화물수송이었다. 나는 배추 수송 현장에서 만난 트럭 기사 이흥수 씨에게 보수도 필요 없으니 조수로 쓰면서 수송일에 눈을 뜨게 해달라고 막무가내로 매달렸다. 배추를 실어 나르며 내가 눈여겨보았던 것은 깊숙이 감추어진 노다지가 아니었다. 단지, 화물일이 어떻게 돌아가는가 하는 게 내 주요 관심사였다. 가을철에 수확한 작물을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서는 화물차를 부른다. 그러면 트럭이 달려오고 물건을 실어줄 사람들이 동원된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농민들과 화물차 소유주들은 직접 거래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나 트럭운전자 같은 일용 노동자들 빼고는, 화주와 차주들 사이 중개업소가 개입해야 배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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