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의 창조 카리스마
김영한 지음 | 리더스북
김영한 지음
리더스북 / 2006년 11월 / 229쪽 / 11,000원
제1장 과거의 애플은 왜 실패했나사과 밭에서의 탄생
1955년생인 스티브 잡스는 실리콘밸리의 발상지인 샌트란시스코 남부에 있는 팰러앨토에 살고 있었다. 그는 오리건주의 포틀랜드에 있는 리드칼리지에 진학했지만 첫 학기 만에 학업을 포기했다. 적성도 맞지 않는 데다가 평범한 노동자 부부에게 입양된 그로서는 양부모에게 학비를 의지하는 것이 마음 편치 않았다. 그래서 학업을 중단한 그는 게임회사인 아타리(Atari)에 입사지원서를 냈다. 아타리의 인사 담당자는 긴 머리에 히피스타일인 그를 밤에만 근무하는 조건으로 채용했다. 스티브는 아타리에 근무하면서 동네 선배인 워즈니악과 함께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데 몰두했다. 당시 워즈니악은 휴렛펙커드에 근무하고 있었지만 게임을 좋아해서 밤에는 스티브와 함께 게임 소프트웨어 개발에 매달리곤 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워즈니악이 컴퓨터의 주요 부품 중 하나인 인쇄회로기판(PCB)을 개발했다. 스티브는 인쇄회로기판의 사업가능성을 확신하고 워즈니악에게 동업을 제안했다. 이렇게 해서 워즈니악과 스티브는 1976년 애플 컴퓨터를 창업하게 된다. 스티브는 자신이 몰고 다니던 폴크스바겐을 처분하여 마련한 1,300달러를 가지고 차고에 사무실을 차렸다. 회사 이름은 '애플'로 지었다. 스티브는 사과를 좋아해서 그의 방에는 늘 일하다가 한 입 베어 먹고 남긴 사과가 몇 개씩 있었다. 그래서 애플의 로고는 한 입 깨물고 남은 사과 '바이트 애플'로 정해졌다. 바이트(bite)는 컴퓨터의 비트(bit), 바이트(byte)와 발음이 유사해서 사람들에게 친숙한 느낌을 주었다. 지금도 이 로고는 애플을 상징하는 최고의 가치다.
워즈니악은 기술개발을 맡고 스티브는 경영과 마케팅을 맡았다. 스티브 잡스는 샘플로 만든 인쇄회로기판을 들고 여러 회사를 찾아다녔다. 그러던 중에 이후 컴퓨터 체인 상점으로 발전하게 되는 바이트 숍(Byte Shop)의 폴 테럴에게서 드디어 첫 주문을 받게 된다. 개당 500달러에 50개를 사겠다는 주문이었다. 단돈 1,000달러도 없었던 그들에게 2만 5,000달러어치의 주문은 대단한 것이었다. 애플Ⅰ의 판매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자, 개인용 컴퓨터 회사인 코머도어(Commodore)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해왔다. 현금 10만 달러와 스톡옵션, 연봉 3만 6,000달러 지급이 채용 조건이었다. 하지만 스티브는 제안을 거절했다. 만약에 코머도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오늘날의 애플을 없었을 것이다.
골리앗에 도전하는 다윗
1976년, 애틀랜티시티에서 열린 제1회 PC축제에 스티브 잡스와 워즈니악은 애플Ⅰ을 출시했다. 그러나 애플의 제품은 모니터도 없고 키보드도 없는 단순한 인쇄회로기판 상태였기 때문에 참으로 보잘 것 없었다. 스티브 잡스는 여기서 새로운 자극을 받았다. 그래서 스티브와 워즈니악은 소프트웨어(OS)를 장치하고 키보드를 달아서 데이터 입력과 프로그래밍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완전한 PC를 만들기로 했다. 그런데 인쇄회로기판과 키보드를 하나로 결합한 박스를 만들 경우 냉각팬을 달아야 하는데 이 팬 소음이 골칫거리였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열이 나지 않는 회로를 설계해야 했다. 이 일을 담당할 엔지니어를 고용하기 위해서는 고액 연봉을 줘야 하고, 개발과 마케팅을 위해서도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스티브는 사업계획서를 만들어서 투자자들을 찾아다녔다.
첫 투자자는 반도체 회사인 인텔에서 마케팅을 담당했던 마이크 마쿨라였다. 그는 9만 1,000달러를 투자했으며, 은행에서 추가로 25만 달러를 대출받을 수 있도록 사업계획서를 작성했다. 마쿨라의 동참으로 애플의 회사 지분은 스티브 잡스, 워즈니악, 마쿨라가 3분의 1씩 소유하게 되었다. 1977년 1월 3일, 애플은 주식회사로 전환하여 새롭게 출발했고, 그 해 4월 마침내 애플 Ⅱ의 상용화가 이루어졌다. 6컬러의 모니터와 키보드, 디스크드라이브와 1메가헤르츠의 프로세서, 4킬로바이트의 메모리가 내장된 애플Ⅱ는 컴퓨터산업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초기에는 판매량이 몇 만 대에 머물렀지만 후속 모델이 계속 출시되면서 판매량이 백만 대를 넘어섰다. 스물 두 살의 스티브 잡스는 PC라는 새로운 상품을 개발함으로써 커다란 성공과 부를 거머쥐게 되었다.
애플의 성공은 대형컴퓨터업체인 IBM에게도 위협적이었다. 하위 층에 있는 고객들을 애플이 흡수하는 바람에 점차 대형컴퓨터 구매고객이 줄어들었던 것이다. 그러니 애플을 견제할 만한 신제품 개발이 그들의 당면과제가 되었다. 8비트짜리 컴퓨터인 애플Ⅱ가 출시된 지 4년 뒤인 1981년 8월, IBM에서 첫 퍼스널컴퓨터를 출시했다. IBM에서 하드웨어를 만들고 마이크로소프트의 MS-DOS를 운영체계로 채택한 이 컴퓨터는 인텔의 16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인 8088과 16킬로바이트의 메모리, 그리고 디스크드라이브를 장착했으며, 흑백 모니터에 80글자로 24줄을 표시할 수 있었다. 가격은 1,565달러(최저 기준)였다.
스티브 잡스가 보기에 IBM의 신제품은 크고 투박했으며 새로운 기술이랄 것도 없는 데다 사용법도 어려웠다. 반면 애플의 제품은 더 작고 저렴하며 성능도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어 있었다. 스티브는 IBM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그는 곧바로 《월스트리트 저널》에 전면광고를 냈다. "IBM의 PC 시장 진출을 환영하며, 개인용 컴퓨터를 처음으로 만든 것은 애플이지만, 보다 많은 개인들이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책임 있는 경쟁을 하자"는 내용이었다. IBM의 10분의 1 크기밖에 안 되는 회사의 광고치고는 꽤나 오만한 것이었다. 스티브 잡스는 사람들에게 거대한 골리앗에 맞서는 다윗의 이미지를 심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스티브의 예상대로 애플은 이 광고로 인해 높은 인지도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성공은 애플이 아닌 IBM이 거머쥐었다. 비즈니스 고객들은 크기보다는 소프트웨어에 관심이 있었고, 가격도 기존의 것보다 저렴해진 IBM PC를 선호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작은 회사인 애플보다는 IBM이라는 브랜드를 신뢰했다. IBM의 추격으로 1983년 개인용 컴퓨터 시장에서 애플의 시장 점유율은 26퍼센트, IBM이 17퍼센트였으나 다음해에는 1, 2위가 역전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기술 집착의 좌뇌경영
이제까지 애플 제품은 워즈니악이 설계한 제품이었다. 스티브 잡스는 자신이 설계한 PC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스티브는 개발 중이던 매킨토시(Macintosh) 프로젝트를 직접 책임지고자 했다. 그는 매킨토시 개발팀을 별도의 건물에서 운영했고 모든 디자인과 운영체제 등을 직접 결정했다. 스티브와 개발팀은 사용자가 그래픽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GUI)를 채택했다. 당시만 해도 컴퓨터는 조작에 필요한 명령어를 키보드로 입력해야 했기 때문에 작동이 매우 어려웠다. 그런데 명령어를 상징하는 아이콘(icon)이 처음으로 매킨토시에서 등장된 것이다. 즉 초보자들도 그림으로 상징화된 아이콘을 마우스로 클릭만 하면 작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로선 대단히 획기적인 기술이었기에 스티브 잡스는 성공을 확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킨토시의 개발이 끝나갈 무렵인 1983년 말, 스티브는 대규모의 광고계획을 세웠다. 그는 <에이리언>의 영화감독 리들리 스콧에게 광고제작을 의뢰했고, 광고 효과를 높이기 위해 미식축구 슈퍼볼 경기 때 첫 광고를 내보내기로 했다. 슈퍼볼 텔레비전 광고는 1회에 100만 달러였으니 대기업들도 부담스러워할 만한 금액이었다. 애플은 광고제작비로도 75만 달러를 썼다. 스티브는 제작진에게 '따귀를 맞은 듯한 충격을 줄 수 있는 광고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 광고는 그의 바람대로 단숨에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 광고는 조지 오웰(George Owell)의 소설 《1984년》을 차용한 것으로, 제복을 입은 노동자들이 강당에 앉아 있고 빅 브라더(오웰의 소설에 나오는 감시자)가 대형 스크린을 통해 명령을 내리고 있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때 경비대에 쫓기는 한 소녀가 강당으로 뛰어 들어와 스크린을 망치로 내리치면서 다음과 같은 멘트를 한다. "1984년 1월 24일은 애플이 매킨토시를 소개하는 날입니다. 여러분은 왜 우리의 '1984년'이 조지 오웰의 《1984년》과 다른지 알게 될 것입니다."」
매킨토시의 스펙터클한 광고는 대성공을 거두어 뉴스에서까지 소개되었다. 수백만 달러의 홍보 효과가 '공짜'로 이루어진 셈이다. 다음 날부터 사람들은 애플 매장으로 몰려들었다. 주문은 폭주하였고 출시 100일 만에 7만 대 판매도 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막상 결과는 기대했던 것보다 초라했다. 매킨토시를 보러 온 사람들이 IBM으로 눈길을 돌렸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개발자의 기술에 대한 만족이 아니라 실제 컴퓨터 사용자를 얼마나 만족시키느냐 하는 점이었다. 고객들은 크기보다는 소프트웨어에 관심이 있었고 작은 회사인 애플보다는 IBM이라는 브랜드를 신뢰했다. 스티브는 기술이 뛰어나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좌뇌(左惱) 중심적인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다. 가뜩이나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애플에게 매킨토시의 실패는 치명적인 손실을 안겨주었다.
설립자가 축출되다
스티브는 CEO가 되기를 원했지만 이사회에서는 그를 CEO로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인물을 물색했다. 스티브는 CEO가 될 수 없다면 자신이 쉽게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차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떠올린 사람이 펩시콜라의 회장인 존 스컬리(John Sculley)였다. 그는 마케팅 전문가였지 컴퓨터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가 회사를 운영한다면 기술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에게 도움을 청할 것이라는 생각에 스티브는 스컬리의 영입을 추진했다. 스컬리는 연봉 100만 달러, 보너스 100만 달러, 그리고 100만 달러 상당의 스톡옵션과 장려금을 받으며 영입 제안을 수락했다. 그러나 그는 2년 뒤 스티브 잡스를 애플에서 쫓아낸다.
스컬리가 사장으로 취임했을 때 애플의 경영 상태는 좋지 않았다. 애플 Ⅱ의 후속으로 개발한 애플Ⅲ의 실패로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이어서 개발한 1만 달러짜리 비즈니스용 PC인 '리사(Lisa)'마저 참담하게 실패하고 만다. 주가는 절반 이상 곤두박질쳤다. 1985년 4월 11일, 스티브 잡스를 제거하기 위한 이사회가 열렸다. 당시 스티브는 이사회 의장이었다. 스컬리는 이 자리에서 자신에게 회사운영의 전권을 달라고 요구했고, 이사회는 스티브에게 사무실을 옮겨달라고 요구했다. 스티브는 보유 주식의 10퍼센트인 85만주를 판 1,100만 달러를 가지고 고별인사를 했다. 그리고 다음해 초, 달랑 한 주만 남기고 애플의 모든 주식을 처분했다. 한 주를 남겨둔 것은 연례 경영보고서를 계속 받아보기 위해서였다.
스티브가 떠난 뒤에도 애플의 상황은 계속해서 절망적이었다. 비즈니스 세계는 성능이 훨씬 향상된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를 운영체제로 채택한 최신형 IBM PC로 몰려갔다. 애플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존 스컬리는 결국 CEO에서 물러나야 했다(1993). 이후 애플은 파격적인 조건으로 CEO들을 영입했다. 존 스컬리 다음의 구원투수로는 애플의 유럽 사장으로 탁월한 판매실적을 보여주었던 마이클 스핀들러(Michael Spindler)였다. 그는 디젤이라는 별명에 맞게 하루에 열여덟 시간을 일하는 건실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애플을 회생시키지는 못했다.
그 다음은 물리학 박사이자 경영자였던 길 아멜리오(Gil Amelio)였다. 그는 항공우주산업체인 로크웰 인터내셔널에서 잭 웰치의 경영방식을 도입하여 회사에 기록적인 수익을 안겨주면서 월스트리트의 영웅으로 떠오른 인물이었다. 이후 그가 쓴 경영서는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아멜리오는 명령과 통제의 낡은 관리기법으로 인해 직원들의 팀워크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그보다 더한 문제점은 소비자시장에서 물건을 팔아본 경험이 없다는 점, 성공적인 광고나 마케팅을 운용해본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결국 그는 직원들도 장악하지 못하고 뾰족한 대안도 없이 1년을 고군분투하다가 해임되었다. 존 스컬리, 마이클 스핀들러, 길 아멜리오, 이렇게 세 명의 선장이 거쳐 가면서 애플은 점점 침몰해가고 있었다.
제2장 좌뇌에서 우뇌로, 기술에서 디자인으로 감성의 세계로 들어서다
애플을 떠난 스티브 잡스는 1986년 말, 넥스트(NeXT)라는 회사를 창립했다. 애플에서 함께 일했던 직원 여럿이 그를 따라왔다. 그는 기관과 개인투자자들로부터 투자를 유치했다. 그리하여 카네기멜론과 스탠퍼드를 비롯한 미국 유수의 대학이 넥스트에 출자했다. 1988년 10월, 넥스트는 넥스트큐브(Next Cube)를 출시했다. 이 컴퓨터는 검은색 외장으로 큐빅형 CPU와 스피커가 내장된 17인치 사각 모니터를 갖추었다. 또한 팩스 모뎀, DSP(digital signal processor)에 의한 음성인식 기능, 350메가바이트의 광자기 디스크드라이브 등 뛰어난 기술로 주목받았다. 학생들에게는 6,500달러의 특별가로 판매되었으나 이는 다른 PC보다 높은 가격이었다.
스티브는 자신감에 넘쳤다. 그러나 상황은 스티브가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넥스트의 컴퓨터가 혁신적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었지만 시장에서는 여전히 생소한 제품이었다. 뿐만 아니라 시장에는 두 부류의 경쟁업체들이 나타났다. 하나는 기능은 훨씬 떨어지지만 가격을 대폭 낮춘 PC였고, 다른 하나는 워크스테이션으로 더 비싸지만 성능이 뛰어난 제품이었다. 넥스트의 총 생산량은 5만 대에도 미치지 못했다. 1993년, 스티브 잡스는 하드웨어 생산을 중단하고 소프트웨어에 전념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하드웨어 분야를 캐논에 매각하고 나머지 부분에서는 구조조정을 단행하기에 이른다.
스티브 잡스가 소프트웨어 쪽으로 관심을 돌리게 된 것은 거듭된 실패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럴 만한 계기가 있었다. 스티브는 넥스트를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스타워즈>를 만든 영화감독 조지 루카스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당시 루카스는 재정난으로 필름을 매각하는 상황에 있었다. 그때 스티브가 본 것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컴퓨터그래픽의 광신도들이 거기 모여 있었고,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선명한 디지털 사진과 3D 영상물을 제작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욕심이 생긴 스티브는 오랜 협상 끝에 1,000만 달러라는 낮은 가격으로 루카스 필름을 인수했다. 이는 루카스가 애초에 제시한 금액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루카스 필름을 인수한 스티브 잡스는 회사명을 픽셀(pixel, 화소)과 아트(art, 예술)를 합친 픽사(Pixar)로 정했다.
루카스에서 일하던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픽사로 영입되었고 직원은 44명이었다. 초기에 픽사가 취급한 사업은 '랜더맨(Renderman, 애니메이션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인 렌더링rendering을 도와주는 소프트웨어)'이었다. 그러나 랜더맨의 매출은 매우 저조했기 때문에 픽사는 지속적으로 인력과 경비를 감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투자가 필요한 내부 프로젝트가 하나 올라왔다. 존 래세터(John Lasseter)가 3D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들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래세터는 원래 디즈니에서 일하던 애니메이션 전문가였는데, 루카스 사단에 들어온 후 컴퓨터 기술을 익혀서 3D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로 평가받는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