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에서 CEO까지
웨스 모스 지음 | 비즈니스맵
1.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찾는다마리아 처칠은 가족과 친구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고자 노력했다. 그것은 대기업에 취직해서 기업인으로 성공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뭇사람이 부러워하는 IBM, 리바이 스트라우스 등에서 일했으나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또 다른 그럴싸한 직장을 구해 옮겨 다니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러다가 9.11테러로 인한 친구의 갑작스런 죽음과 그 몇 달 후 다니던 회사가 파산하면서 당한 실직은 그녀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그녀는 "남은 삶 속에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은 무엇인가?"를 자문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사람들의 기대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일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본능적으로 끌리는 분야를 찾으려고 노력했어요." 우습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녀가 진정 좋아했던 일은 여행과 쇼핑이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모두 돈을 벌지 않으면 즐길 수 없는 일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방법은 없을까?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갑자기 마리아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갑자기 신발을 취급하는 부티크를 시작하겠다는 결심이 섰어요."
시장조사를 하던 마리아는 LA에는 이탈리아산 수제화를 파는 곳이 한 군데도 없다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이탈리아 신발은 흔해 빠진 백화점 제품보다는 한 단계 더 고급스러우면서도, 500달러가 넘는 명품 브랜드 고급 신발보다는 저렴해서 부담 없이 구입할 수 있었다. 마리아는 이 사실을 적극 활용했다. <풋웨어 뉴스>라는 주간지에서 파리에서 신발 전시회가 열린다는 사실을 확인한 그녀는 만 달러 어치의 상품을 덜컥 주문했다. 그리고 장사를 시작할 가게를 구했다. 돈이 넉넉하지 못했던 그녀는 유동인구가 밀집한 번화가를 포기하고 후미진 곳에 있는 점포를 임대했다. 그리고 하루에 16시간씩 일하면서 모든 일을 직접 맡아 했다. 마리아는 부티크의 이름을 데바우트로 지었는데 이는 프랑스어로 '일어서다'라는 뜻이다.
마리아는 우편의 힘을 이용해서 마케팅을 하기로 하고 부티크 인근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주소지를 구매해서 전단지를 발송했다. LA에는 독특한 신발을 원하는 시민들이 많았기 때문에 데바우트 부티크는 첫해부터 이윤을 남겼으며 두 번째 해에는 매출이 200% 이상 성장했다. 마리아가 이처럼 빨리 성장할 수 있었던 요인은 그녀가 이탈리아까지 가서 직접 상품을 고르기 때문이다. 데바우트의 독창성은 패션잡지계의 많은 이목을 끌고 있으며 TV에도 방영된 덕분에 유명한 쇼들을 담당하는 디자이너들도 독특한 신발이 필요하면 데바우트를 방문한다. 사업을 시작할 때 마리아는 직원을 고용하지 않았지만 4년이 지난 지금 매니저에서 경리사원까지 총 6명의 직원을 두고 있다.
그녀는 요즘도 신발을 직접 구매하기 위하여 이탈리아로 신발 모험을 떠난다. 사업상 떠나는 모험이지만 남편과 동행해 관광을 즐기기도 하면서 즐거움을 누린다. 그녀는 데바우트를 시작하기 전에 힘든 시기를 겪었던 것이 좋은 경험이었다고 만족해한다. "높은 연봉이 보장된 안정된 직장에 안주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오늘날과 같은 성취를 이루지 못했겠죠." 마리아가 말을 이었다. "직장을 잃은 상황이었지만 매일 이렇게 외쳤어요. '다른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빼앗을 일은 이제 하기 싫어! 즐기면서 돈을 벌고 싶어!'라고요. 이렇게 다짐하니 포기했던 삶의 계획을 되찾을 수 있었어요."
2. 자신감을 갖는다데이브 헬프릭의 사업이야기는 미시건 주립대에서 시작한다. 매주 월요일 데이브는 다른 학생들의 빨래를 수거하고 목요일이 되면 학교 근처 빨래방에 가서 월요일에 맡겼던 옷가지를 찾아 학생 고객들에게 세탁된 옷을 갖다 주었다. 그는 1년간 세탁물 서비스를 통해 1만 5천 달러를 벌어들였다. 대학 졸업 후 IBM에 입사한 데이브는 국제 구매 담당으로 일하면서 회사 경비를 5천 5백만 달러나 절감시키는 성과를 올렸지만 회사 규정에 따라 5만 달러에 불과한 연봉을 받게 되자 크게 실망하게 된다.
어느 날 데이브는 주택에 페인트 칠을 해주는 프랜차이즈를 운영하는 대학 동기 친구를 만나게 된다. 친구에게 사업 이야기를 들은 데이브는 그 자리에서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대기업에서는 많은 돈을 벌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한 거죠. 페인트 사업에서 가능성을 발견했어요." 데이브는 컬러웍스(Colorworks)에게서 마스터 프랜차이즈를 구매하여 다른 사업주에게 프랜차이즈 판매권을 팔았고 이들에게서 로열티를 받았다. "사업 시작하고 처음 2년이 힘들었어요.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큰 원동력으로 작용했어요." 데이브는 컬러웍스와 함께 일하기 시작한 초창기에는 대학시절 이루었던 성공을 떠올리며 어려운 시기를 버텨 나갔다. 또한 거래를 좋은 조건에서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외부자원을 적극 활용하여 많은 업무를 해결했다. 첫해 데이브는 30만 달러의 매출과 5만 달러의 순이익을 올렸고 다음 해에는 매출이 50만 달러로 뛰어올랐다. 이후 페인트 사업은 계속 성장해 매출이 25백만 달러까지 올랐다. 데이브는, 컬러웍스 프랜차이즈의 일부를 매각하고 그 수익을 건설업에 투자했는데 이렇게 해서 탄생된 컬러웍스 개발의 가치는 1천만 달러에 달한다.
데이브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 때문에 편안히 몸담고 있던 대기업의 세계에서 벗어나 사업가의 길로 접어들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능력, 즉 IBM에서 거래를 성사시키는데 선보였던 뛰어난 재능을 적극 활용하기로 선택했고, 큰 조직의 한계가 주는 부정적인 요소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대기업이라는 화려한 명성과 안정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큰 자신감이 필요하다. 다행히 그는 어린 시절부터 크고 작은 성공을 경험하며 자신감을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 데이브는, 지나치지 않은 적절한 자신감은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3. 대의명분을 발견하다워렌 브라운이 대학을 다니던 시절 캠퍼스 내에서 성폭행 사건이 이슈화되어 성폭행 예방수업을 도입하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워렌도 여기에 합류했는데 그는 뛰어난 연설가였기에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고, 결국 성폭행 예방수업이 개설되었다. 이후 워렌은 로스쿨에 진학하여 학업에 정진하면서 공중보건 석사학위까지 도전하였는데, 과중한 학업에 따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밤마다 맛있는 음식을 요리하여 친구들을 초대하는 것을 즐겼다.
로스쿨을 졸업하고 보건복지부에 취직한 워렌은 대법원에 제출할 사건 때문에 밤늦게까지 집에도 가지 못하고 일만 했다. 중요하면서도 신이 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참 일하고 주위를 둘러보면 사무실에 혼자만 남아 있곤 했다.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열정을 가지고 이 직업에 뛰어들었지만 그가 일하던 사무실은 무슨 일을 하느냐보다 어떤 넥타이와 양복을 입었는지에 신경을 쓰는 그런 곳이었다. 순간 워렌은 '이 일은 내가 생각했던 그런 직업이 아니다!'라며 현실을 깨닫고는 차라리 케이크 굽는 일이 더 낫겠다는 계시를 받게 된다.
워렌은 2001년 1월 어느 목요일 드디어 빵 굽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3일 내내 빵을 구웠다. 일요일이 되자 75명의 친구들이 그의 아파트에 모여 케이크를 시식하고 맛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사업가의 삶에서 극적인 순간은 감격의 첫 주문과 함께 시작된다. 사람들이 케이크를 주문하기 시작하자 워렌에게 빵 굽는 일은 단순한 꿈 이상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러나 낮에는 변호사로 일하고 밤이 되면 제빵사로 변신하는 생활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심신이 녹초가 된 그는 병원에서 '과로로 인한 만성피로' 진단을 받았고 담당의사는 삶의 속도를 늦추라고 경고했다. 그렇지만 빵 굽는 작업은 워렌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수단이자 마음의 휴식을 취할 통로였다. 만성피로 진단을 받은 것을 계기로 워렌은 변호사 일을 그만두고 '케이크 러브'라는 가게를 열었다.
개업 초기 워렌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자본이 부족했습니다. 신용카드가 없었다면 빚에 허덕이며 헤매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죠." 그때 그의 인생을 변화시킬 사건이 발생한다. <워싱턴 포스트>에서 제빵사의 길을 가기 위해 변호사 일을 그만 둔 그의 이야기를 커버스토리로 올린 것이다. "신문에 이야기가 실린 뒤로 인생이 바뀌었어요. 이틀 동안 전화가 쇄도했거든요." 이 중에는 오프라 윈프리에게 걸려온 전화도 있었다. 오프라쇼에서 그는 최선을 다해 인터뷰에 응했고 많은 시청자들이 워렌의 열정과 추진력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면서 워렌의 '케이크 러브'는 급성장하게 되었고, 그는 불행한 변호사에서 행복한 사업가로 변신했다.
케이크 러브를 운영하면서 워렌은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그가 파는 빵들은 무표백 밀가루와 버터만을 사용하며 대부분의 빵집에서 주원료로 사용하는 표백 밀가루나 쇼트닝은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사람들에게 건강에 좋은 재료를 사용해야 할 필요성을 전달하고 더 나아가 시험 삼아 집에서 직접 빵을 구워 보라고 권장한다. 워렌은 사람들이 가능한 한 인생을 즐기고 내면의 목소리를 찾아 자신의 진정한 재능을 발견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피력했다. 그에게는 케이크를 만드는 과정이 사람들의 판단을 가로막는 눈가리개를 떼고 자신의 주변을 둘러보며 세상을 탐구하는 통로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4. 인습적인 사고방식을 버린다>B
존 쉬블리는 무슨 일을 할 때마다 "더 나은 최선책이 있다."라는 확신을 갖고 산다. 그가 대학 다닐 때 했던 유리창 청소 사업의 예를 들어 보자. 당시 미국에서는 유리창 청소사업이 사라지고 있었는데 그는 대학생들을 직원으로 고용해서 부유한 동네를 공략했다. "직원에게 일을 시켜놓고 저는 이웃집을 방문합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이웃 스미스씨 유리창을 닦고 있는데요, 저희에게 청소를 맡겨 보실 생각은 없으신지요?'라고 하면 거절하는 집주인이 없었어요." 존은 초창기부터 인습에서 벗어난 자신만의 철학을 믿고 일에 착수했다.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일을 사업으로 선택하고 이를 성공시키기 위해 고급인력을 고용하는 방식은 일반 사람이 쉽게 따라할 수 있는 범주의 행동이 아닌 듯싶다.
존은 사업가다운 배포가 있었기 때문에 '이까짓 문제쯤이야'하는 식으로 여유로운 태도로 임했고, 그래서 융자 브로커 사업도 쉽게 시작할 수 있었다. 그는 엘리트 직원을 고용하면서 월급을 많이 줘야 하는 부담을 덜기 위해 직원들과 수익을 50대 50으로 나누는 급여체계를 구상해 내었다. 이렇게 해서 회사지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급여문제도 해결되었고, 직원들은 실적대로 월급을 받을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일에 열중했다. 존은 사업이 무엇인지 배우게 되었고, 대금업자들 사이에서 좋은 평판을 유지해 주택융자 브로커 사업을 튼튼하게 성장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존은 큰 물의를 일으키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라디오 광고에 출연해 기존의 담보융자회사들은 모두 사기꾼에 불과하다고 몰아붙인 것이다. "사람들에게 사과하기는 쉬워도 인정받기란 어렵습니다. 대중 앞에서 펼치기 어려운 말을 제가 하고 기회를 포착하는 겁니다."
금융담보융자의 수익은 이자에서 나오는데 이중 대부분은 대금업자들이 챙기고 중개업자에게는 융자수수료가 돌아간다. 존은 기존 방법과 다른 참신한 생각을 떠올렸다. "거래마감비용을 차용자가 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제가 대신 지불하면 더 많은 고객이 몰릴 것 같았어요. 물론 거래마감비용을 이자에 포함시키면 됩니다." 예를 들어 30만 달러를 융자받아 30년이 넘도록 담보에 가까운 이자를 지불하는 차용자가 있다. 이와 같은 경우 대금업자에게는 엄청난 이익이다. 다른 브로커들은 융자 수수료를 받고 끝나지만 존은 몇 백 달러의 융자수수료를 받지 않고 담보이자에 일정 비율을 적용해 9천 달러를 달라고 대금업자에게 요구했다. 물론 9천 달러에는 고객 대신 자신이 지불하는 거래마감비용 3천5백 달러도 포함되어 있다. 기름칠이 잘된 기계처럼 그의 전략이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대금업자들은 존에게 담보이자의 일정비율을 떼서 지불해야, 그가 더욱 큰 액수를 대출하는 고객을 섭외해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또 다른 지원자는 라디오 광고였다. "여러분이 거래마감비용을 지불하시다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앞으로는 저희가 거래마감비용을 지불하겠습니다." 이 광고는 다른 브로커를 통해 융자를 받았던 고객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할 만큼 직설적이고 강력했다.
현재 존의 사업은 경쟁회사를 누르고 숨 가쁘게 달리고 있다. 사업을 시작한 지 햇수로 11년을 맞이하면서 1억 달러의 가치를 지닌 회사로 성장했고, 지금도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융자 사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웹에 기반을 둔 소프트웨어 응용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있다. 존은 이렇게 말한다. "억만장자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창출해 내고,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데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지녔다는 점이죠."
5. 끊임없이 솟는 활력
미주리 주 시케스턴에서 자라난 데이빗 요크는 어렸을 때부터 오뚝이 같은 근성을 보여 주었다. 열네 살 때 데이빗은 집안 농장 앞으로 뚫린 고속도로 근처에 폭죽 판매대를 설치했다. 하지만 그날 오후 불어닥친 토네이도가 쌓아 놓은 폭죽 화물을 모두 집어삼켜 판매를 포기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데이빗의 어머니도 이쯤에서 그만두라고 권했지만, 이를 뿌리치고 그는 또 다시 폭죽을 주문했고 2주 동안 5천 달러를 벌었다. 그는 매년 6월이 되면 폭죽 판매대를 설치했고 3년간 벌어들인 수익으로 불과 열여섯 살에 신형 자동차를 구입할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의 백화점에서 일하던 데이빗은 고향집에 내려갔다 오면 항상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사과푸딩을 가져와서 친구들에게 맛볼 기회를 선사했는데, 한번이라도 사과푸딩을 먹어 본 사람들은 그 맛을 잊지 못했다. 그러던 와중에 데이빗은 누이들과 함께 고향에서 '덤플린스'라는 작은 베이커리를 열어 집에서 막 구운 빵을 파는 장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덤플린스는 음식맛이 일품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번창했고 데이빗은 프랜차이즈 사업권을 구입하고 싶다는 문의를 받게 되었다. 시케스턴에 왔다가 이 놀라운 사과푸딩 맛을 보고 간 사람들은 하나 같이 덤플린스 베이커리를 시작하려고 했다. "사업에 탄력이 붙기 시작했어요. 몇 달째 체인점을 열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섰을 정도였으니까요." 첫 5년 동안 남부의 아홉 개 주에서 사업을 시작한 덤플린스 체인점은 총 30개나 되었다.
사업을 추진하다 보면 진공 상태의 삶처럼 걸림돌이 전혀 없는 순탄한 길을 가는 경우는 없다.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하려면 다른 체인점을 관리해야 하기 때문에 사업본부의 기초를 강화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자본이 필요하다. 데이빗은 투자자들을 알아보려고 했지만, 여동생들의 의견은 달랐다. 그들은 사업을 계속 확장할 경우 경제적인 위기가 발생할까 염려했기 때문에 시케스턴 본점만 잘 운영하자고 주장했다. 데이빗은 프랜차이즈 시장의 잠재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누이들을 이해할 수 없었고 좌절감을 느꼈다. 하지만 누이들이 회사의 2/3를 소유했기 때문에 데이빗은 덤플린스에서 손을 떼는 수밖에 없었다.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리게 마련이다. 가족들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난 후 데이빗은 애틀랜타로 거처를 옮겼다. 그때는 1996년 애틀랜타에서 올림픽 경기가 열리기 직전이었고 부동산 시세가 가파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데이빗은 낡은 집을 사들여 리모델링 하여 되파는 사업으로 2년 동안 많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