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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프를 창조한 사나이

히라노 다카아키 지음 | 굿모닝북스
가난한 연립주택



출생의 비밀

하야카와 도쿠지는 1893년 11월 3일 니혼바시 히사마스초(日本橋久松町)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1893년은 일본에서 처음으로 국산증기기관차를 만들고, 미국에서는 에디슨이 활동사진을 발명한 해이다. 1894년에는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일본군은 반도를 거쳐 만주로 진격한 데 이어, 산둥반도(山東半島)의 웨이하이웨이(威海衛)를 점령해 승리를 거두었다. 1895년 4월 도쿠지는 후카가와 구 히가시다이쿠마치(深川區東大工町)의 이스노 구마하치(出野熊八) 집안에 양자로 보내졌다. 도쿠지가 만 2세도 되기 전 생가의 형편에 따른 것이었다. 도쿠지가 양자로 들어간 집안은 평민들의 가난한 연립주택 지역이었다. 상하수도는 물론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고, 부엌이나 변소도 공동으로 썼다.



도쿠지의 양아버지 구마하치는 음식점에서 요리를 하고 버린 생선의 내장을 수집하는 일을 했다. 음식점을 돌아다니며 짐수레에 생선 내장을 가득 모아 비료용으로 내다 파는 것이었다. 구마하치의 수입은 뻔했다. 게다가 얼마 되지 않는 수입도 술 마시는데 거의 써버리곤 했다. 양어머니인 오라쿠는 그런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갔다. 이런 환경에서 도쿠지는 앞이마가 넓고 눈만 컸을 뿐, 해쓱하게 마른 데다 늑골이 튀어나오고 배가 불러있는 게 영락없이 영양실조에 걸린 어린아이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도쿠지는 늘 주린 배를 움켜잡고 구마하치의 귀가를 기다리곤 했다.



성냥갑 붙이기

그 무렵 보따리 하나만 달랑 든 열다섯의 젊은 여자가 도쿠지의 연립주택에 찾아들었다. 새로 들어온 여자 오마쓰는 임신해 사내아이를 낳더니 한 해도 지나지 않아 불룩한 배를 안고 다녔다. 시간이 지날수록 도쿠지를 향한 여자의 학대는 더욱 심해졌다. 당시 이 동네 사람들에게 성냥갑에 상표를 붙이는 일은 부업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일당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도쿠지는 이 일을 해서라도 집세를 벌어야 했다. 도쿠지가 벌지 않으면 생활이 되지 않았다.



같은 마을에 사는 고모인 오후사가 그런 도쿠지를 가여워하여 어느날 정성껏 요리를 마련해주었다. 음식을 걸신들린 듯 먹어치우고 집으로 돌아와 성냥갑 붙이기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도쿠지에게 오마쓰의 호통이 내리쳤다. "오늘은 배가 터지도록 먹고 왔을 거 아냐? 부지런히 손을 움직여야지. 아니 무슨 냄새야? 이 구린내, 너 또 방귀 뀌었지?" 도쿠지는 급히 일어나서 공동변소 쪽으로 달려갔다. 공동변소에 웅크리고 앉아 한동안 울고 있다가 화장실에서 나오려고 하는데, 오마쓰가 장승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어떻게 손을 봐주어야 할지 모르겠군." 오마쓰는 욕지거리를 늘어놓으며 도쿠지를 힘껏 밀어버렸다. 변소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도쿠지의 가슴을 오마쓰가 발로 차버렸다. 작은 몸뚱이의 도쿠지가 짧은 비명과 함께 어두운 변소 구멍 속으로 빠져버렸다.



도쿠지의 비명소리에 놀란 이웃 사람들이 달려왔다. 변소에 빠진 것을 찾아내는 사내도 달려왔다. 그는 인분을 퍼내는 구멍으로 들어가더니 순식간에 도쿠지를 걸머메고 구멍 밖으로 나왔다. 의식을 잃기 직전이었다. 오마쓰는 두레박으로 물을 퍼올려 도쿠지의 머리 위로 퍼부었다. 겨울 밤 우물물은 도쿠지의 몸을 잘라낼 듯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때 조오베라는 이름의 노인이 다가왔다. 조오베 노인은 연립주택에 사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교양을 갖춘 인격자로 주위에서 존경을 받고 있었다. 도쿠지는 조오베의 집으로 옮겨졌다. 열이 3일간이나 계속됐고 정신없이 잠만 잤다. 도쿠지가 의식을 되찾았을 때 조오베는 따뜻한 음식을 만들어 주며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도쿠지, 잘 참고 견뎌내라. 그러면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길 거야. 그러니까 성냥갑 붙이기 같은 일도 함부로 여겨서는 안 된다. 눈앞의 일을 등한시해서는 절대 대성할 수 없단다."



여덟 살의 새출발

19세기를 마무리짓는 1900년의 어둡고 긴 겨울이 끝나자 도쿠지는 근처에 있는 사립 도이심상소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오마쓰의 두 아이들을 돌보느라 또 부업으로 성냥갑 붙이기를 하느라 쌓인 피로로 인해 수업 중 자꾸 졸기만 했다. 도저히 학교에 다닐 처지가 못 되었다. 도쿠지는 결국 이듬해 봄 2학년 수료증을 받는 것을 끝으로 소학교를 중퇴해야 했다. "도쿠지 군, 인간이란 눈물이라는 것을 눈 밖으로 흘러내려서는 안 되는 법이야. 마음속으로, 자신의 내면으로 흘리는 것이다. 절대 참는 것이다. 고생이란 인생의 기초이기도 한 것이니까." 도이 선생님이 해준 격려의 이 말은 두고두고 도쿠지에게 큰 힘이 되었다.



20세기가 정식으로 막을 올린 1901년 도쿠지는 여덟 살이 되었다. 조오베가 구마하치를 찾아왔다. "성냥갑 붙이는 일은 결국 집에서나 하는 부업이지 않은가. 도쿠짱을 위해서라도 견습직공으로 내보내 솜씨를 익히도록 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걸세. 돈벌이도 훨씬 괜찮을 거야. 일할 곳도 확실한 대로 찾아놓았으니 이번 일은 내게 맡겨도 나쁠 건 없을 거야." 이제 도쿠지는 집을 나오게 되었다. 1901년 9월 15일이었다.



견습직공에서 장인으로



눈 덮인 료고구바시

도쿠지가 고용살이하는 곳은 에도 시대부터 유서 깊은 가라지야(금속공예품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은방[銀房])였다. 양산의 쇠장식을 만드는 게 주된 일거리였다. 도쿠지가 일하게 된 사카다 공장에서는 양산의 부속품을 만들었지만 일체의 기계장치를 사용하지 않고 모든 작업을 손으로 했다. 도쿠지는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종일 쉴 틈도 없이 생쥐처럼 뛰어다녀야 했다. 그런데 체력이 도저히 따라주지 않는 작업이 한 가지 있었다. 사카다 공장이 있는 기타후타바초에서 니혼바시에 있는 지가네야까지 세공할 재료를 받으러 가는 일이었다. 도쿠지가 지가네야에서 받는 지가네(地金)는 놋쇠판을 둘둘 말은 것인데, 지가네의 무게는 보통 20킬로그램이었고, 때로는 30킬로그램이었다. 어른이 운반하기에도 무거운 것이었으니 어린아이의 양어깨는 등뒤부터 온통 벌겋게 부어 올랐다.



어느 눈 내리던 날의 일이다. 도쿠지는 다른 때보다 빠른 걸음으로 지가네야로 향했다. 그러나 지가네를 짊어지고 돌아오는 도중 도쿠지는 료고구바시(반원형으로 불룩한 북 모양의 목조다리)의 중간에서 오도가도 못한 채 주저앉아버렸다. 입고있던 옷이라고 해봐야 일년 내내 걸치는 작업복 한 벌뿐인데, 양말도 신지 못해 발은 벌겋게 부어 올랐다. 배가 하도 고파 도저히 힘을 낼 수가 없었다. 결국 쌓인 눈에 발이 미끄러지며 몇 미터 아래쪽으로 굴러버리고 말았다. 먼 훗날 도쿠지는 이렇게 회고했다 "눈이 덮인 료고구바시는 당시 열 살이었던 나에게는 너무도 길기만 한 다리였다. 하지만 그 날 이 다리를 넘은 것이 결국 오늘의 복된 길을 갈 수 있는 다리를 놓아주었다고 생각한다."



오야가타의 불운

오야가타(주인이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말)인 요시마쓰(사카다 공장의 주인)가 돌연 기계를 도입하고 연필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교육제도 개혁에 따라 소학교는 물론 중학교도 계속 늘어나 연필의 수요가 급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필심을 나무의 축 중심으로 통과하게 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제품을 제대로 만들지 못해 생산하면 할수록 적자는 늘어갔다. 결국 공장 설비는 물론 가재도구까지 모두 차압당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다시 불운이 덮쳐왔다. 작업대를 앞에 높고 납땜에 열중하던 요시마쓰가 그만 납땜용 석유램프를 팔소매로 걸어 넘어뜨렸다. 석유를 정면으로 뒤집어 쓴 요시마쓰가 순식간에 불에 휩싸여 때굴때굴 굴렀다. 요시마쓰가 화상을 입고 자리에 눕자 사카다 공장의 직공들은 하나 둘씩 떠났고, 도쿠지를 비롯한 세 명의 젊은 직공이 공장을 책임지게 됐다. 양산의 부속으로 들어가는 세공품은 어떻게 해서든 만들어 나가겠는데, 거래선과의 교섭이나 자금융통은 경험이 없는 세 사람에게 아무래도 무리였다.



밤의 노점상

도쿠지는 생각다못해 밤의 야시장에 혼자 나가 쌓여있던 연필을 내다 팔았다. 먼 훗날 치열한 판매전선으로 뛰어들게 될 도쿠지가 이날 야시장에서의 경험으로부터 얼마나 큰 교훈을 얻었는지는 도쿠지조차 상상할 수 없었다. 야시장은 도쿠지가 처음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사회를 접해본 무대이기도 했다. 야시장에서 연필을 팔고 받은 돈은 아직 누워있는 요시마쓰에게 건네주었다.



한편 야시장에서 만난 당시 대학생이었던 아오타 도미오는 고학으로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도쿠지를 친동생처럼 귀여워 해주며 야학에 다닐 것을 권했다. "비록 야시장일지라도 인생의 학문이다. 배울게 있다. 그러나 어떤 경제적 어려움이 있더라도 조금이라도 시간이 있으면 야학에 가서 공부해야 한다." 야학을 다니게 된 도쿠지는 삼국지나 징기스칸 같은 영웅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에디슨이나 라이트 형제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그동안 어렴풋이 알았던 것들을 확실하게 가슴에 새길 수 있었다. 야학을 통해 어느새 신문을 읽을 수 있는 성과도 거두게 됐다. 1909년 4월 15일 도쿠지는 열여섯의 나이에 견습직공으로서 시작한 7년 7개월의 고용살이 계약을 끝냈다.



최초의 특허 도쿠비죠

도쿠지는 괜찮은 물건을 만들면 야시장에 나가 팔며 바쁘게 하루를 보내곤 했다. 그러다가 1920년 2월의 어느 날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사실을 알게 됐다. 납품을 하러 갔다가 갑자기 배가 아파왔고, 공장으로 돌아가기보다는 생가인 구마하치 집으로 가는 것이 더 빨라 그곳에 가서 쉬기로 했다. 배를 움켜잡고 도착했으나 아무도 없었다. 도쿠지는 다다미 위를 뒹굴다가 혹시 약이라도 없나 하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가구라고 해봐야 조그만 찻장이 전부였다. 찻장의 서랍을 열었다. 두 번 째 서랍 밑바닥에 곱게 싼 게 있어서 무심히 펼쳐보니 길쭉한 문서첩이 나왔다. 문서는 양자 계약서였다. 첫째 줄에는 '하야카와 마사키치 삼남 도쿠지 메이지 1893년 11월 3일 생'이라고 적혀있었다. 지금 보고 있는 문서는 다름 아닌 도쿠지 자신이 양자로 출가했음을 알려주는 증서였다. 도쿠지는 다음날부터 요시마쓰 조차 몰라볼 정도로 표정이 아주 밝아졌다.



활동사진을 보다가 착안한 도쿠비죠(비죠는 버클의 일본식 표현)의 발명은 이렇게 시작된다. 도쿠지가 열아홉 살이 되던 1912년 봄, 여러 가지 궁리를 하며 시험제작을 해왔던 제품이 거의 완성되었다. 요시마쓰가 보면서 물었다. "그런데 이 벨트에는 구멍이 하나도 안 뚫려있지 않은가?" "그게 바로 이 버클의 고유한 특징이지요." 도쿠지가 만든 버클의 안쪽에는 가느다란 굴림대가 세공되어 들어가 있었다. 벨트를 맨 사람이 필요한 길이만큼 굴림대로 조였다 풀었다 할 수 있었다. 도쿠지가 고안한 버클의 원리를 비로소 이해한 요시마쓰는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도쿠! 이건 대단한 거야. 이건 정말 특허감이야. 특허를 내라" 이렇게 해서 도쿠지가 발명한 버클은 당초 상상하지도 않았던 극적인 비약을 하게 됐고, 도쿠지의 운명마저 크게 변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요시마쓰가 권한 도쿠비죠라는 이름으로 특허를 출원하기로 했다.



슬픈 운명

도쿠지는 요시마쓰에게 자신이 구마하치의 집에서 양자 계약서를 보았던 일과 자신이 하야카와 집안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친척인 아사다 요지로를 찾아갔다. "네가 바로 버클의 특허를 취득했다는 그 도쿠지였구나. 역시 핏줄은 속일 수 없군. 네 아버지도 손재주가 뛰어나 기술 분야에서는 뛰어난 분이었으니. 그래 참으로 잘 찾아와 주었다. 내 어머니가 네 아버지의 누님이 되니까 나는 네 사촌이 되는군." 도쿠지는 사촌인 요지로로부터 집안 내력을 들었다.



"하야카와 집안의 전성기는 대략 네가 태어났을 무렵 정점을 지났지. 네 아버지는 청일 전쟁이 시작되면서 군대용 셔츠를 제조했어. 전쟁으로 인해 주문이 밀려드니 잠잘 틈도 없었단다. 네 어머니는 육군성의 명령이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면서 바쁘게 일했는데, 그만 폐병으로 쓰러져버렸지. 폐병으로 몸져눕자 전쟁이 끝나면서 군으로의 납품이 중단됐어. 곧 이어 간병하던 네 아버지마저 폐병에 감염돼 쓰러졌단다. 하야카와 집안은 그렇게 갑자기 불꽃이 꺼져버린 셈이 됐지. 더구나 네 어머니가 폐병이었기 때문에 갓난아이였던 너에게 젖조차 물릴 수 없었단다. 구마하치 씨의 안사람이었던 오라쿠 씨가 네 어머니 밑에서 미싱재봉 일을 했던 게 인연이었지."



샤프 펜슬



결혼

도쿠지가 요시마쓰에게서 축복을 받으며 독립한 것은 1912년, 견습직공으로 들어온 지 햇수로 10년째 되던 해였다. 견습직공으로 일하며 번 돈을 거의 오마쓰에게 빼앗겨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우선 혼조의 마쓰이초에 있는 단독주택을 빌리고 중고 다다미와 이불, 식기를 갖추고, 작업에 필요한 기계설비와 재료를 구입했다. 남은 돈은 겨우 한 달 치 식비 정도였다. 하지만 일은 많았다. 하루 종일 휴식시간도 없이 계속되는 강행군이 이어졌다. 몸이 부서지도록 일을 한다는 것이 이렇게 즐겁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주문은 끊이지 않고 밀려왔다. 도쿠지는 정식 직공과 계약 고용인을 몇 명 추가로 고용했다. 그럴수록 작업의 호율화나 제품 개량, 신제품 개발 등에 좀더 많은 시간을 쓸 수 있었다.

도쿠지는 사촌형인 요지로에게 하야카와 집안의 내력을 듣고 친누이(도리코)와 친형(마사하루)을 만났다. 도리코는 미쓰코시백화점에 근무했는데 당시 여자들이 동경하는, 시대의 최첨단을 달리는 여성이었고, 마사하루는 요쓰야시오초에 있는 후타바야자전거주식회사 영업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도쿠지는 형인 마사하루와 의기투합해 언젠가는 함께 하야카와형제상회를 설립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즈음 도쿠지는 요시마쓰 밑에서 일할 때 찾아왔던 수도기구 판매상 마키시마의 권유를 받는다. 도쿠지를 신뢰하던 마키시마는 결혼할 때가 되었다며 한 여자를 소개시켜 주었다. "도쿠군, 이 처녀는 인물이 아주 좋아. 이름은 후미코라고 하는데, 심지가 곱고 순수하지. 내가 이 아이를 어렸을 적부터 줄곧 봐왔기 때문에 잘 알지." 1913년 3월 도쿠지는 후카가와하치만의 신전에서 간소한 혼례식을 올렸다.



발명

시간은 이미 자정을 지나 새벽 2시를 향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썰렁한 작업장, 더구나 어두운 전등 불빛 아래서 도쿠지는 말없이 미세한 가공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도쿠지의 머릿속은 오직 한 가지에만 집중해 있었다. 이것만 마무리지으면 구리다시 연필의 마지막 과제가 해결된다. 금속축의 끝부분에 나오는 연필심의 끝을 적당한 길이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최근 며칠간 도쿠지는 마지막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몇 번이나 시제품을 만들어 분해하고 조립하기를 수없이 반복했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다만 장인에게는 감이라는 게 있기에, 여기서 한걸음만 더 나아가면 완벽한 제품을 완성시킬 수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기존의 셀룰로이드제 구리다시 연필은 쇠로 된 부속을 몇 개 조합해 만든 것이어서 쉽게 부서졌다. 도쿠지는 이를 개량하기 위해 구리다시 연필을 외장은 니켈 금속축으로 하고, 내부에는 한 장으로 된 놋쇠를 사용했다. 그런데 연필심이 나오는 파이프를 가늘면서도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단단하고 녹이 슬지 않는 금속을 써야만 했다. 그런데 놋쇠로 이런 정밀한 파이프를 만드는 일은 아무리 솜씨 좋은 도쿠지에게도 대단히 어렵고 힘들었다. 나선형의 가는 홈을 만들어 회전축에 밀어내기 장치를 끼워 넣으면, 회전축은 홈을 통해 끝의 연필심을 밀어내도록 했다. 연필심은 밀어 낼 때마다 자동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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