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 사람을 향해 진보하라
이만중 지음 | 고즈윈
1부 보이지 않는 가치에 집중하라유혹의 순간들과 아버지의 회초리고향인 경기도 양주(楊洲)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였다. 한국전쟁이 막 끝났을 무렵, 동생과 함께 집을 나서다가 집 어귀 골목에서 지금 돈으로 치면 20~30만 원쯤 되는 지폐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날 저녁 밥상머리에서 아버지가 동네사람 전(全)씨의 돈을 잃어버린 일을 말씀하실 때, 밥을 먹던 동생이 무심코 형과 함께 돈을 주운 일을 말했다. "그래? 그 돈 어쨌느냐?" 나는 주머니 속에서 돈을 주섬주섬 꺼냈다. "돈을 주웠으면 당연히 주인을 찾아주려고 해야지, 어찌 그 돈이 네 주머니에 들어 있어. 길에서 주웠다고 그게 네 돈이야? 이놈이 도둑놈 아니냐!" 그 날 내 종아리에서는 피가 터지고 회초리가 여러 개 부러져 나갔다. 내 기억에 그렇게 심하게 매를 맞아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1967년, (주)한국나일론에 입사해 1년이 조금 지났을 무렵 부산출장소 소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때가 26살. 업무는 부산항으로 들어오는 회사의 수입물품을 보세운송하거나 통관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일을 하는 과정에 이런저런 유혹이 적지 않았다. 당시 우리 집안은 겨우 하루 세끼 굶지 않을 정도로, 그다지 좋은 형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단호하게 그 많은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던 것은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아버지의 매서운 회초리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인생의 '무형자산'을 쌓다부산출장소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독립적으로 판단하여 일해야 하는 점이 힘들었다. 그 시절 업무 관계로 만난 분들은 대개 50대 이상이었는데 이런 분들의 경험을 듣고 생각하고 실제로 적용해보다 보니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때 업체 사장님들이나 담당자들을 그저 하청업체의 약자, 나에게 잘 보여야만 하는 사람들로 생각했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쉽게 결정하기 어려운 일은 바로 상급자 입장에서 생각하고, 그래도 어려운 경우에는 그보다 더 위에 있는 상급자의 입장에서 다시 생각했다. 그래도 결정하기 힘들 때에는 오너의 입장에서 생각했다. 이런 업무의 특성과 습관 덕에 부산출장소 생활은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부산출장소를 떠나 본사로 올라온 나는 원사 판매를 담당했다. 이 시절에는 실의 품질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원사를 팔 때마다 클레임이 잦았다. 당시 코오롱은 일본 도레이 사와 기술합작을 하고 있었는데, 경영학 전공인 나는 기술은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분야라고, 내 일이 아니라고 뒷짐만 지고 있거나 다른 이의 판단에만 전적으로 의존하기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책을 사서 읽고 애프터서비스 담당자들, 때로는 일본 기술자들과 함께 우리 제품을 쓰는 공장이란 공장은 안 가 본데가 없을 정도로 그렇게 몇 년을 다니다보니 어느 틈에 나 역시 기술자가 다 되어 있었다. 4년 정도 원사 판매를 담당한 뒤 다시 원단사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원사 판매 때 경험한 클레임들이 원단사업부에 와서 원단을 개발하는데 그렇게 큰 힘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 때의 경험들이야말로 섬유공학과 출신 개발담당자들을 지휘하는 데 아주 요긴한 무기가 되어주었다.
옳다고 믿는다면 타협하지 마라1976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부사장이 나를 불렀다. 기성복 사업을 하기로 결정했는데 맡아서 해보겠다는 사람도 없고 맡길 사람도 마땅치 않다는 것이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자네가 기성복에 대해 아는 게 뭐 있나?" "뱃속에서부터 배워 나오는 놈이 어디 있습니까? 제가 잘 해낼 자신이 있습니다." 당시 코오롱은 등산 용품과 등산의류, 약간의 수영복 정도만 생산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제일모직과 반도(지금의 엘지)에서 미미하게나마 기성복 사업을 시작한 상태였다. 기성복의 '기'자도 몰랐기에 모든 걸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 우선 관련 서적들을 모았다. 미국 기성복의 역사나 일본 기성복의 역사 등을 살펴보면서 하나 둘 사업의 뼈대를 세우기 시작했다. 통계청에 가서 기성복 시장의 자료도 뽑아보고 직원들에게 직접 발로 뛰며 시장조사를 해오도록 시켰다. 기성복 사업을 위한 구체적인 프레임이 하나 둘 완성되었다.
1개월 후, 코오롱그룹 사장단 21명과 회장님이 참석한 가운데 브리핑을 했다. 나는 기성복의 역사에서부터 현재 한국 기성복 시장의 실태와 전망 등을 상세히 설명했다. 그리고 앞으로 의류 시장은 기성복이 주도할 것이라는 점을 역설했다. 다들 진지한 표정으로 경청했다. 브리핑이 끝난 후 회장님이 물었다. "수고했어! 음, 그런데 원단은 당연히 우리 코오롱 것을 쓸 거지?" 순간 나는 기운이 쏙 빠지는 것 같았다. 코오롱에서 생산하는 원단이라고 해 봐야 당시에는 나일론과 폴리에스테르가 전부였다. "회장님, 소비자가 실크 달라고 하면 실크를 줘야 하고 울을 달라고 하면 울을 줘야 합니다. 기성복 사업은 우리가 팔고 있는 원사나 원단과 별개의 영역으로 보셔야 합니다. 우리 소재로만 패션사업을 하라고 하시면 저는 오늘 브리핑하는 것으로 끝내겠습니다." 회의장이 술렁거렸다. 나는 아닌 걸 '예'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그럼, 이 부장이 알아서 해." 오늘날 기성복 시장에서 커다란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코오롱 패션사업부는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시장의 흐름을 읽어라1977년 4월 1일, 드디어 패션사업본부 안에 스포츠 그룹과 숙녀복 그룹, 두 개 부서가 탄생했다. 숙녀복 그룹장으로 새로운 일을 시작한 나를 가리켜 '바보'라며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전까지 나는 코오롱에서 돈을 가장 잘 버는 원단사업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코오롱의 패션사업본부를 발족한 지 5개월만에, 마침내 코오롱 여성 기성복 브랜드인 '벨라'가 탄생했다. '벨라는 나의 꿈, 아름다운 날개여' 라는 CM송을 유행시키기도 한 바로 그 브랜드다. 이 시절 코오롱의 벨라보다 먼저 나와 있는 브랜드들이 몇 개 더 있었는데 반도와 논노가 대표적이었다.
이들의 여러 제품 가운데에는 실크블라우스가 있었는데, 우리도 실크블라우스를 팔고 있었다. 다른 브랜드의 실크 블라우스의 가격은 23,000원 선이었고, 우리는 19,800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장조사 결과 우리 제품이 상대적으로 적게 팔리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다른 브랜드의 실크 블라우스와 비교해도 품질도 전혀 손색이 없고 가격도 싼데 시장에서는 밀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가격을 올리기로 결정했다. 디자인을 약간 변화시키면서 23,800원이라는 가격표를 붙였다. 동종업계 제품 중 가장 비싼 가격이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때부터 실크블라우스가 잘 팔리기 시작했다.
시장 흐름을 읽고 고가 및 고급화에 주력한 전략이 성공한 사례였다. 시장흐름을 읽어내는 능력이 없으면 열심히 일하고도 성과를 내지 못한다. 저가로 공략할 때와 고가로 공략할 때를 알고 대처하는 것,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미리 알고 상품화하는 것 등은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속에서 동물적 본능처럼 길러진다. 보끄레가 중국시장에서 on&on과 W.을 고급 여성의류 브랜드로 각인시키는 전략을 추구한 것도 이때의 경험에서 비롯됐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조직이 열려 있어야 좋은 열매가 열린다승진을 하면 태도가 달라지는 사람들이 있다. 본인은 달라진 게 없다고 하지만, 심할 경우 하루아침에 말투부터 행동까지 모두 확 바뀌는 사람들이 있다. 승진을 했다는 건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졌다는 뜻이고 책임이 더 무거워졌다는 뜻이다. 혼자서 생각하고 결정할 일들이 더 많아졌다는 뜻이다. 그 사람이 갑자기 범접하지 못할 어려운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는 절대 아닌 것이다. 강남 사무실에서 일하던 무렵 나는 정릉에 살고 있었다. 나는 퇴근할 때마다 같은 방향에 사는 직원들을 모두 태우고 다니면서 집 근처에 하나 둘씩 내려 주었다. 직장상사의 차를 타든 안타든 그게 뭐 그리 중요한 일이야 싶을 수도 있지만 그 차이는 엄청나다.
예를 들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 상사는 직원들과 호흡을 함께 하면서 동태와 업무를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매일 직원들을 불러다 이런저런 일들을 꼬치꼬치 물을 수는 없는 일이다. 상대방의 시간과 자율성을 해치기 때문이다. 그럴 때 퇴근길에 함께 차를 타고 다니면서 스스럼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개인적인 이야기나 회사일과 관련된 정보를 자연스럽게 공유할 수 있다. 상사와 부하직원 간에 '열린 마음'이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친밀감이 쌓이는 것이다. 꼭 차를 태워주는 경우가 아니라도 이러한 방향으로 이끌다 보면 그 조직은 자연스럽게 열린 조직으로 가게 된다.
2부 신뢰의 나무를 심어라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처음 보끄레를 창립하고 몇 년 후부터 나는 강당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회사에 대형 강당을 두는 것은 비경제적으로 보일 수 있다. 현재 사옥으로 오기 전에도 초라하지만 5층에 작은 교육장을 마련해 두고 수시로 여러 가지 교육을 실시했다. 나는 유능한 사람이 되기에 앞서 가치관이 올바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육의 반 이상은 인성(人性)교육이고 나머지가 직무와 관련된 내용이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 회사의 가족들은 과거에 비해 놀랄 만큼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했다고 자부한다.
보끄레가 성장하자 점점 거래처가 늘어갔다. 요즘이야 대다수의 회사가 사용하는 표현이 되었지만 보끄레 창립 초기만 해도 '협력업체'라는 말은 흔히 쓰이지 않았다. 그저 '하청공장'이라는 말로 통했다. 그러나 나는 하청공장이라는 말을 절대 쓰지 말라고 못 박았다. 반드시 협력업체라는 말을 쓰게 했다. 하청공장이란 표현에는 상대가 나보다 아래에 있다는 의미가 깔려 있다. 나는 '그분들의 도움이 있기에 우리가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자고 직원들에게 주문한다. 그래야만 그들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감사할 줄 알게 되고 말 한마디도 공손해진다. 또 길게는 서로의 어려움을 가슴을 열고 의논할 수 있는 진정한 동반자가 될 수 있다.
최고의 체험이 최고의 서비스를 만든다2002년 8월, 중국 북경의 북경백화점에 있는 on&on 매장에 들렀을 때다. 마침 중국 손님 몇몇이 옷을 구경하고 있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66 사이즈의 한 손님이 원피스를 고르더니 자신에게 맞는 사이즈의 옷을 찾아 달라고 부탁했다. 공간이 협소하여 매장에는 55 사이즈만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매장 여직원이 아무렇지도 않게 "메이요우(沒有, 없습니다)." 하고 잘라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깜짝 놀랐다. 분명히 창고에 있을 텐데 창고까지 가서 옷을 찾기가 귀찮은 모양이었다. 충격이었다. 중국 직원들의 서비스 정신이 이 정도인줄도 모르고 계속 방치했더라면, 중국 on&on 매장들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슨 묘안이 없을까? 획기적인 사고의 전환이 필요했다. 그들에게는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절실한 경험이 필요했다.
나는 그들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체험하고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로 했다. 심천매장에서 3명, 북경에서 1명, 상해에서 2명, 이렇게 모두 6명의 중국 매장 직원들을 5박 6일 일정으로 한국으로 초청했다. 공항에서부터 경영기획실담당자를 내보내 현수막을 내걸고 그들을 맞이하게 했다. 엘리베이터 안에도 중국 직원들의 이름을 일일이 적어 '한국방문을 환영합니다!'라고 붙여 놓았다. 회사 도착 첫날, 5박 6일간의 체험 프로그램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마친 후, 5성급 호텔인 인터콘티넨탈호텔에 여장을 풀게 했다. 품격 높은 서비스를 받아보게 하기 위해서였다. 둘째 날은 청담동의 고급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도록 했다. 깔끔하게 제복을 입은 직원들이 무릎을 꿇고 손님을 올려다보며 메뉴를 골라주는 모습, 잘 모르는 메뉴를 꼼꼼하게 설명해 주는 모습, 처음부터 끝까지 미소 띤 얼굴로 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놀라워했다.
마지막에는 자원한 직원들의 집에서 홈스테이를 시켰다. 그들은 한국 직원들과 어울려 찜질방에도 다녀왔다. 고객서비스 체험 프로그램은 성공적이었다. 한 중국 직원은 "너무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아요." 라고 했다. 한국에 다녀간 후, 중국 직원들은 고객과 눈만 마주쳐도 반갑게 인사하는 친절한 점원으로 변했다. 그때 맺은 인연으로 지금도 나는 가끔 그들과 통화를 한다. 중국으로 출장을 가면 정말이지 내 자식들보다 더 반갑게 나를 반긴다. 그 직원들은 이런 말도 했다. 다른 회사에서 월급을 두 배로 준다고 해도 절대로 가지 않겠다고,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자기는 없었을 것이라 고마워한다. 그들은 나에게서 감동을 받고 나는 또 그들에게서 감동을 받는다. 우리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하고 감사한 존재들이다.
(주)보끄레의 탄생 - 작은 배려가 큰 인연이 되어'보끄레'라는 회사명이 무슨 뜻인지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다. 보끄레는 '의류 사업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작업'이라는 의미에서 탄생했다. '뷰티(Beauty)'와 '크리에이션(Creation)'을 합성한 말이다. '보끄레(BEAU+CRE)', 어감에서 전해지는 수줍은 듯하면서도 감칠맛 나는 무언가가 느껴지지 않는가? 1991년 보끄레를 설립해 본격적으로 의류 사업에 뛰어들게 된 데에는 코오롱 시절 잠깐 인연을 맺은 한 사람의 덕이 컸다.
코오롱 입사 4년째, 폴리에스터 원사 판매를 담당하고 있을 때였다. 대구에서 직물공장을 하던 업체가 있었는데 한 달에 원사를 약 20톤씩 쓰는 적지 않은 규모였다. 그런데 운영자금이 부족했던지 늘 한 번에 5톤이나 10톤씩 사갈 여유가 없어 수시로 500킬로그램이나 1톤, 이렇게 소량씩 구입해 갔다. 구매는 당시 대학교 4학년인 직물공장 사장 아들이 맡았는데, 당시는 원사 구매 사정이 어려웠던 때라 소량 주문은 받아주는데 가 없었던 지 그는 결국 코오롱을 찾아왔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실 500킬로그램을 준비해 전화를 걸면 그가 달려와 실을 사갔다. 외상도 아니었고 그저 거래를 하는 공장에 대한 기본적인 배려를 해 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학생이 나를 찾아와 통장을 건넸다. 3개월을 불입한 통장이었다. 1개월 불입금이 나의 1달 월급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거 가지고 계세요, 제가 매달 적금을 넣어드리겠습니다." 소량의 실을 구입해 갈 수 있도록 해준 것이 고맙고 미안했던 모양이다. "사람 잘못 봤습니다. 우리처럼 앞날이 창창한 사람들이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이거는 가져가시고 일이나 열심히 하십시오, 내가 공짜로 주는 것도 아니잖아요? 다시는 이런 생각 마세요." 그는 얼굴이 빨개져 어쩔 줄 몰라 했다. 이후 다른 부서로 옮기면서 나는 그를 까맣게 잊고 살았다.
그 후 1990년 가을, 거의 20년 만에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코오롱 그만두셨다면서요?" 무척 반가웠다. 몇 차례 만나 점심이나 저녁을 나누던 중 그가 패션 브랜드를 하자고 제의해 왔다. 당시 나는 생각해 본적이 없던 일이며 급할 것도 없어 간곡하게 거절했으나 그 친구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 날 이후 이 문제를 놓고 반년쯤 승강이가 어어졌고 결국 내가 졌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오늘의 (주)보끄레머천다이징이다. 그는 나와 함께 지금 보끄레의 최대 주주다.
3부 스스로 인생을 경영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