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드러커 나의 이력서
피터 드러커 지음 | 청림출판
저자 서문문필가의 인생 자체가 주목받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단지 저작물이 주목받을 뿐이다. 나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고 1927년에 그곳을 떠나왔다. 그 후 독일, 영국, 미국으로 이주해서 살았으며 그 과정에서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무역상사의 견습사무원, 증권회사 직원, 펀드매니저로도 일했다. 또한 여러 영국 일간지의 미국 주재기자를 역임했고, 대학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내 최초의 저작물은 1933년에 출판되었다. 나는 그 이후 지금까지 줄곧 저작활동을 해왔다. 그 결과로 서른 권이 넘는 책을 출판했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논문과 기사를 발표했다. 이 책은 이런 나의 저작물 가운데 나의 인생에 관한 일들을 발췌 정리한 것이다.
1. 기본은 문필가, 95세에도 현역2004년 11월 19일 나는 아흔다섯 번째 생일을 맞았다. 이제 나는 보청기 없이는 듣는 것도 어렵고 걷는 것조차 어렵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일하고 있다. 나는 비서 없이 일정관리를 언제나 스스로 해왔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내 수첩은 앞으로 몇 개월 동안 해야 할 업무 일정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대학교수 혹은 컨설턴트로 불리고, 때로는 '경영학의 아버지'라고 평가 받는다. 하지만 나의 기본은 문필가이다.
드러커의 유머로스엔젤레스에서 승용차로 40분 정도 떨어진 인구 3만 4,000명 정도의 지방도시 클레어몬트. 이곳에 드러커 박사의 자택이 있다. 2004년 8월 하순 첫 번째 인터뷰를 위해 방문했다. 그와 인터뷰를 하며 나는 별 생각 없이 "한가할 때는 무엇을 하며 지내세요?"라고 질문했다. 그러자 그는 신중한 얼굴로 다시 질문했다. "한가한 때란 도대체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한가한 때란 말하자면… 그러니까…" "한가한 때란 존재하지 않는다네. 내 경우 일을 하지 않으면 많은 책을 읽지. 확실한 계획을 세워서 집중적으로 말이야." 즉 늘 바쁘다는 말이었다.
한국과 드러커드러커 박사가 한국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54년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의 고문 자격으로 방한한 때였다. 또한 그는 1950~1960년대 뉴욕 대학에 재직하면서 한국의 젊은 관료들과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한편 드러커 박사는 최근 발표한 저서『실천하는 경영자』를 통해 기업가 정신의 최고 실천국은 의심할 바 없이 한국이라고 밝혔다.
2. 제국의 도시 빈에서 태어나다나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5년 전인 1909년 11월 19일 빈에서 태어났다. 당시 빈은 수백 년에 걸쳐 유럽에서 군림한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는, 인구 5,000만 명에 달하는 대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였다. 내가 열네 살이나 열다섯 살 무렵에 부친인 아돌프는 "네가 다섯 살이 되기 전, 여름방학 때 가족들과 함께 아드리아해로 여행 갔던 것을 기억하고 있니?"라고 물었다. 아버지는 계속해서 "그때 서둘러 여름휴가를 끝낸 것도 기억하니?"라고 질문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기억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실은 그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단다. 나는 몇 년간의 휴가를 모아서 너희들과 실컷 여름휴가를 보낼 작정이었는데 갑작스럽게 황태자 암살 소식이 날아들었지. 전쟁은 어떻게 해서든 피하고 싶었기 때문에 급히 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당시 외국무역성의 장관으로서 오스트리아 제국 정부 내에서 영향력을 갖고 있던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빈으로 돌아와야 했다.
드러커 박사의 집필 방법드러커 박사는 우선 글의 전체상을 수기로 묘사한다. 그러고 나서 그것을 토대로 자신의 생각을 녹음한다. 테이프에 녹음한 것을 타자기를 이용해서 원고화 하는 것은 보조원이 대신한다. 보조원이 타이핑을 끝내면 그것을 바탕으로 스스로 타자기를 이용하여 초고를 쓰는 작업이 시작된다. 초고와 두 번째 원고는 버리고 세 번째 원고로 최종 원고를 완성한다.
3. 세상에서 가장 자상한 아버지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아버지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전시 경제 운영을 맡은 주요 정부 고관 세 명 중 한 사람인 외국무역성 장관이 되었다. 외국무역성은 18세기에 설치된, 제국에서 가장 오래된 부서로 아버지는 공업 생산을 지휘했다. 전쟁은 4년이나 계속되었다. 그 사이 제국은 10번 이상 거듭된 민족간 분쟁으로 엉망이 되었고 공업화도 뒤쳐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오스트리아가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버지와 그 동료 분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전쟁 발발부터 전후까지 아버지의 일은 힘든 것이었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온화하셨고 세상에서 가장 자상한 아버지였다.
유머러스한 할머니드러커 박사는 일가친척 중 할머니와 각별했다. 세계대전으로 제국이 붕괴하자 할머니는 부다페스트에 사는 맏딸을 만나기 위해서 여권과 비자가 필요했다. 당시에는 여권을 취득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는데 『방관자의 시대』에 따르면, 할머니는 드러커 박사의 아버지 아돌프가 장관으로 있던 외국무역성으로 달려가서 아돌프에게는 비밀로 하고 부하직원에게 부탁해서 헝가리 등 주변국의 여권과 비자를 모두 취득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고 "공복인 공무원을 사사로운 일에 쓰다니 말도 안 된다"며 화를 냈지만 할머니는 "공복은 국민을 섬기는 존재이며 나는 국민의 한 사람일세."라며 반론을 펼쳤다고 한다.
4. 프로이트와 악수하다나는 부모님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사람들과 접할 수 있었다. 내게 그 경험은 실질적인 교육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말기 가족이 함께 빈 시내의 레스토랑에서 점심식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아버지의 권유로 같은 식탁에 합석한 다른 가족의 가장과 악수를 했다. 내가 악수를 했던 이는 정신분석의 아버지 지그문트 프로이트였다. 양친은 프로이트와 오랫동안 친하게 지냈다. 부모님은 또한 오랫동안 일주일에 수차례씩 홈파티를 열었다. 우리 집을 자주 찾아오던 단골손님들 중에는 조지프 슘페터나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와 같은 유명한 경제학자 외에도 전후에 초대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이 된, '건국의 아버지' 토마시 마사리크도 있었다. 이처럼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드나들던 가정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나는 어렸을 때부터 독일어뿐 아니라 영어와 프랑스어도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었다.
초대 체코대통령드러커 박사가 인터뷰 중에 언급한 인사들 가운데 신문기사에는 등장하지 않는 저명인도 있다. 그중 한 사람은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하이에크의 은사이자 세계경제학계에서 군림한 오스트리아학파의 대표격인 루트비히 폰 미제스이다. 드러커 박사는 후일 뉴욕 대학에서 미제스와 동료가 되었으나 그래도 미제스에 관해서 친구처럼 이야기한 적은 없었다. 미제스와 친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아버지 아돌프라고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다.
5. 배움의 기쁨을 알게 한 최고의 교사나는 1942년부터 대학교수로 일해 왔다. 내가 장기간 교단에 섰던 것은 가르침을 통해 나 역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평생 동안 끊임없이 배우길 원했고,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도 평생 계속해서 가르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어떻게 배워왔는지를 이야기하는 데 있어 꼭 짚어봐야 할 시절은 바로 초등학교 때이다. 내가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네 살 무렵이었는데 그 이후로 나는 책벌레가 되었다. 그런데 나는 읽는 것은 잘 했지만 글씨 쓰는 것은 형편없었다. 그 때문에 4학년이 되던 여덟 살 때 시내에 있는 사립초등학교로 전학을 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만난 분이 평생 잊을 수 없는 미스 엘자와 미스 조피 자매이다. 나는 그들에게서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받았으며 배우는 즐거움과 기쁨에 푹 빠져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위대한 교사단 일 년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미스 엘자와 미스 조피에게로부터 배우는 일의 즐거움을 배운 드러커 박사는 인터뷰에서 "배우기 위해서는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된다. 가르치는 쪽이 배우는 쪽 이상으로 많은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한편 드러커 박사는 "유능한 교사는 많이 알고 있지만 위대한 교사는 아주 적다."고 지적했다. "위대한 교사와 유능한 교사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난다."고 전제한 뒤에 "나는 위대한 교사가 아니라 유능한 교사이다."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위대한 교사란 미소를 짓는 것만으로 학생들을 매료시켜버리는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교사를 의미하는 것이다. 미스 조피처럼 말이다.
6. 붉은 깃발 대오 선두에 서다월반하여 입학한 김나지움은 라틴어를 중심으로 고전 교리를 가르치는 신학 예비학교였다. 라틴어 학교라고 불리던 그곳을 나는 8년간 다녔다. 그곳에서의 8년은 라틴어 동사의 불규칙변화 등을 기억하는 시간이었다. 어쨌든 나는 김나지움에서 수업 중에 책상 밑에 역사나 문학책을 숨겨서 읽으며 지냈다. 김나지움 시대에 내 인생의 크나큰 전기가 있었는데 열네 살이 되기 직전인 1923년 11월 11일, 사회주의청년단의 선두에 서서 붉은 깃발을 내걸고 가두행진을 한 것이다. 물론 내가 사회주의에 공명하여 데모에 참가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행진 도중 문득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들고 있던 붉은 깃발을 다른 사람에게 억지로 떠맡기고 대열을 빠져나왔다.
뛰어난 인물들로 넘쳐나는 빈김나지움에서 청년시대를 8년 간 함께 보낸 동급생은 28명 정도였다. 그런데 그 28명 중 졸업 후에도 빈에 머문 사람은 네 명뿐이었다고 한다. 그 이유에 관해서 드러커 박사는 "실업률이 높고 격렬한 내란이 발발하던 빈에서는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빈에 남은 것은 능력 없는 동급생들뿐이었다"고 설명한다. 해외로 탈출한 사람들 중에는 미국에서 명문대학 교수나 항공기 부품 설계자로 성공한 친구, 도미니카공화국에서 최대의 은행을 설립한 친구도 있었다. 열네 살 때 국외 탈출을 결심한 드러커 박사가 결코 특별한 경우가 아니었던 것이다.
7. 도서관에서 이루어진 대학교육빈의 김나지움에서는 따분한 수업에 때문에 진절머리가 났었다. 그런 상황에서 벗어날 가장 빠른 방법은 독일이나 영국에서 견습사원으로 일을 시작하는 것이었고 나는 아버지의 부담을 덜어드리기 위해서라도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가 대학에 진학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나는 결국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1927년 독일로 이주하여 함부르크의 무역회사에서 견습직원이 되었다. 견습업무는 재미없었지만 함부르크에서 사는 동안 나는 모든 일에 충실했으며, 사무실 건너편에는 공립도서관이 있었기 때문에 도서관에서 독일어나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책을 닥치는 대로 읽을 수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진짜 대학 교육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8. 대공황 속에서 기자의 길을 걷다함부르크 무역회사에서 견습을 끝내고 1929년 1월에 제대로 된 일을 얻었다. 미국계 투자은행 프랑크푸르트 지점의 증권분석가 일이었다. 분석 업무를 하면서 계량경제학 논문을 두 편 썼다. 그 중에 하나는 계속 급등하고 있던 뉴욕의 주식시장에 관한 것이었는데 나는 그 논문에서 뉴욕 주식시장이 '더더욱 상승하는 일 외에는 다른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런데 그 몇 주 뒤인 10월 24일, 뉴욕 주식시장은 역사적인 대폭락을 기록했다. 소위 '암흑의 목요일'이었다. 한편 '암흑의 목요일'로 인해 내가 몸담고 있던 미국계 투자은행도 파산하는 바람에 나는 실직했다. 그런데 운 좋게도 실직과 동시에 신문기자가 될 수 있었다. 입사 후 곧 해외뉴스와 경제뉴스 담당 편집자가 되었다.
'암흑의 목요일'에 관한 신문기사당시 드러커 박사는 미국계 투자은행의 뉴욕 본점에서 매주 보내오는 조사보고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그것을 고객에게 배포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동시에 보고서를 신문용으로 고쳐 써서 '프랑크푸르트 게네럴 안차이거'를 포함한 지역신문에도 제공하고 있었다. "보고서는 언제나 '뉴욕 주식시장의 폭락은 일시적인 것이며 곧 시장은 상향조정될 것이다'라는 내용뿐이었다."고 드러커는 회고했다.
9. 파시즘의 본질을 보게 된 히틀러의 취재'프랑크프루트 게네럴 안차이거' 신문사에 입사한 2년 후인 1931년, 나는 세 명의 부편집장 중 한 명이 되었다. 뉴스는 로이터 통신 등 통신사에 의존하고 있었지만 특집기사나 논설은 스스로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난 쉴 새가 없었다. 스스로 취재도 했다. 당시 현저히 대두되기 시작한 나치스 당수인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오른팔인 요제프 괴벨스의 연설을 듣고 직접 인터뷰도 했다. 히틀러나 괴벨스가 연설에서 "우리들은 빵 가격의 인상도, 인하도, 고정화도 바라지 않는다. 나치스에 의한 가격을 요구한다"고 외치면 농민들은 갈채를 보냈다. 이것은 파시즘의 본질을 정확히 나타낸 것이었다.
나치스와 매스컴드러커 박사는 기자로서 정계나 산업계의 리더들을 만나면 나치스의 위험성에 관해서 몇 번이고 경고했다. 그는 히틀러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사람들이 그리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면서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의 시골 출신으로 출세한 인물이다. 제대로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결코 사용하지 않을 저급한 독일어를 사용했다. 그래서 우익 정당의 리더들은 누구도 그를 신중히 다루지 않았고, 만일의 경우가 생기더라도 간단히 통제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고 했다. 또한 드러커는 "매스컴은 신중하게 히틀러를 다루지 않았다. 만일 히틀러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캠페인을 전개했었다면 나치스의 정권 장악을 저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10. 나치스를 피해 독일을 탈출하다프리드리히 슈탈에 관해서 쓴 책이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1933년 1월, 나치스가 정권을 잡은 후에도 나는 프랑크푸르트에 머물고 있었다. 19세기의 철학자인 슈탈은 '독일 보수주의의 아버지'로 불렸지만 인종적으로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그에 관한 글을 쓴다는 것은 나치스에 대한 일종의 공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원고는 독일에서는 상당히 저명한 출판사에 보내져 있었다. 그런데 내가 그것을 기다리지 않고 독일을 떠나면 출판 계획이 백지화 될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생겼기 때문에 독일을 떠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독일 탈출은 다른 모양으로 결정되었다. 나치스가 정권을 장악하고 난 수주일 후에 내가 일하고 있던 프랑크푸르트 대학에 나치스가 들어왔고, 소름끼치는 미래의 광경을 미리 본 듯한 느낌이 든 나는 곧바로 빈으로 향하는 열차에 올라타게 되었다.
유대인드러커 박사는 프랑크푸르트 대학 법학부 조교를 하던 때에 슈탈을 연구대상으로 선택했다. 그 이유는 슈탈이 완전히 잊혀진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 배경에서 보면 슈탈에 관해서 쓴다고 하는 것 자체가 반나치스적 행위라고 할 수 있었다. 슈탈은 독일의 보수 본류인 프로이센적 정신을 체현하는 철학자이자 정치가였으며, 17세에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한 유대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나치스가 내건 반유대주의를 드러커 박사가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프랑크푸르트에서도, 빈에서도 주변에는 늘 유대인이 많았으며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친구였다는 것에 배경이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