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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성공하는 장사의 법칙

이정식 지음 | 아롬미디어
프롤로그 - 성공하려면 ... 먼저 나를 다스려라 그리고 늘 건강하라



'마인드 컨트롤'로 최상의 나를 유지한다

마인드 컨트롤은 내 인생에서 강인한 정신력과 자신감을 갖게 한 원동력인데, 나는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면, 눈을 감은 채 20분이나 30분쯤 그대로 누워, 오늘 할 일을 생각해 보고, 오늘 할 일들이 잘 될 거라고 여러 번 마음속으로 외친다. 이것을 매일 반복하다 보니 부정적인 사고는 사라지고, 모든 일이 잘 되어 갈 것이라는 긍정적인 사고가 아예 머리에 박히고 말았다. 또 넘쳐흐르는 자신감은 -어떠한 상대를 만나도- 얼굴이나 행동으로 나타나 상대방에게 강한 카리스마로 작용하게 되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감을 잃지 않는다

어느 날 의사가 내게 "전립선암입니다. 수술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일 년 전에는 단순 염증이라고 하더니, 이제 와서 암이라면서 수술을 권하는 의사의 말에 화가 나, 상계동에 있는 암 전문 병원에서 다시 진찰을 받았고, 그 병원에서는 우선 '방사선' 치료부터 해보자고 하며, 입원치료를 권했으나 나는 통원치료를 고집했다. 왜냐하면, 병원에 있으면 나 자신이 약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치료를 받으며, '나는 자신 있다. 나는 암을 이겨낼 수 있다.'라고 마음을 다지면서 열심히 병원에 다녔다. 암의 수치(피를 빼서 암의 수치를 검사한 것)가 62였던 것이, 두 달 정도 지나자 반으로 뚝 떨어졌다. 그러더니 -0.1(정상인의 경우 1~2 정도임)이 되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 뒤 방사선 치료를 4개월 더 받고 나서 중단했고, 한 달에 한 번씩 남성호르몬 억제 주사를 맞았다. 2개월 정도는 열심히 약도 먹고 주사도 맞았다. 그러나 그 후로는 약도 안 먹고 주사도 맞지 않았다. 나는 약과 주사 대신 '반드시 암을 이겨 낼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졌고, 마인드 컨트롤을 더욱 열심히 했다. 치료를 받는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이 병으로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그런 나의 자신감이 결국 병을 이겨내게 했다.



건강이 없으면 성공도 없다 / 술을 마셔도 '약'이 되게 마신다

주위 사람들은 내가 '타고난 건강 체질'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나 스스로 '건강을 만들어낸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82킬로그램의 몸무게를 오랫동안 그대로 유지해 오고 있는데, 한번에 먹는 음식량은 아주 적다. 조금씩 자주 먹는 습관을 들인 것이다. 그러나 아침은 절대로 거르지 않는다. 나는 성격은 급하지만 생활 속에서는 가급적 여유를 가지려고 노력한다.

예를 들어, 약속시간은 항상 여유 있게 잡고, 늘 약속시간 30분쯤 전에 도착하여, 만나는 용건에 관한 내용을 점검하면서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하는 '여유로움'을 즐기는데, 그러고 있으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떠오르기도 하고, 잘못 생각한 부분이 포착되기도 하며, 덤으로, '시간관념이 철저하고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는 신뢰도 얻게 된다. 참고로 내가 술을 좋아하고, 자주 마시면서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술을 마시기 전에 일단 안주를 먼저 먹고, 처음부터 술을 한 입에 털어 넣지 않으며, 술을 즐겁게 마시고, 술 마시면서 유익한 대화를 나누기 때문이다.



첫 번째 테이블 - 스물 두 번의 실패



불길이 삼켜버린 내 생애의 첫 가게

나는 전남의 '초도'라는 섬에서 태어났고, 그 뒤 육지(여수)에서 지금의 중학교에 해당하는 고등공민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시계 수리점의 점원- 을 구해 일하면서 여수상고(지금 여수정보고등학교)를 졸업했고, 그 뒤 서울로 올라왔다. 그 후 여러 가지 사정으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입대했고, 전역 후에 곧 결혼했는데, 당시 생계수단으로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천호동에 조그마한 금은시계점을 운영했다. 그런데 개점한 후 일 년 정도 지난 어느 날, 옆집에서 불이 나 모든 것을 잿더미로 날려 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하지만 물건을 외상으로 받아 다시 가게를 개점했고, 다행스럽게 화재 전보다 장사는 더 잘 되었다.



그 뒤 천호동의 점포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부산으로 내려갔고, 부산에서 다시 여수로, 여수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서울로, 서울과 영호남 지역을 계속해서 돌아다녔다. 그 과정 중에서 한때 부산 개금에 10평쯤 되는 방 하나 딸린 가게를 세로 얻어 전자오락기 몇 대를 놓고 동네아이들을 상대로 장사를 했으나, 아이들의 코 묻은 돈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 다시 시계 수리점을 하던 중, 마침 값이 아주 싼 조그마한 가게가 나와 그곳에서 옷 장사를 시작했다. 장사는 그럭저럭 잘 되었는데, 어느 날 바로 옆의 만두 가게에서 불이 나, 내 가게까지 전소되고 말았다. 또 한 번의 불길이 내 희망의 작은 씨앗을 살라 먹어 버린 것이었다.



그 화재로 살길이 막막해 나는 죽기로 결심했는데, 남겨질 처자식을 위해 보험을 들고, 교통사고를 위장하여 죽기로 했다. 부산의 번화가인 서면 로터리 버스 정류장을 죽는 장소로 선택하고, 어느 비 오는 날 술을 마시고 버스에 뛰어들려고 했으나, 발이 땅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갑자기 용기가 없어진 것이었다. 몇 시간을 비를 맞으면서 그렇게 서 있었다가 결국 집으로 돌아왔고, 다음날에도 장대비를 고스란히 맞으면서 서면 로터리로 출근했고,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에도 나갔으나 용기가 없어 죽지 못했다. 결국 시간이 길어지면서 위장 자살은 포기하고 말았다. 사는 것도 힘들었지만, 죽는 것은 사는 것 이상으로 힘들었던 것이다. 결국 나는 "그래 다시 한 번 해보자!"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가짜 요리사 6개월만에 '사막의 주방장'이 되다

생계를 겨우 해결하고 있던 중, 친구가 찾아와 해외로 돈 벌러 가자며, 주방 일을 한번 배워 보라고 권했다. 요리사 자격으로 중동을 가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중동으로 갈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알아보았더니, 요리사 자격증이 없어도 칼질만 잘하면 갈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시장에 가서 무를 한 가마니 사 와, 집에서 무 써는 연습을 시작했다. 사흘을 쉬지 않고 썰었더니 무 한 가마니가 없어졌다. 우리는 한동안 무 반찬만 먹었고, 우리 집만 먹기에는 입이 달려, 무를 이웃에도 나누어주었다.

시험 보는 날, 시험장에 들어가 보니 역시 무를 써는 것이 실습 시험이었다. 너무 긴장한 탓인지 무가 자꾸 굵게 썰어졌고, 예상하지 않았던 파 써는 실습 시험도 있었는데, 파는 썰어 본 적이 없어서 엉망이었다. 당연히 불합격이었다. 다시 무와 파를 사다가 써는 연습을 했고, 두 번째 시험에서도 긴장은 되었지만 그런 대로 잘 했다. 결국 '요리 보조 합격통지서'를 받아 들었다.



한 달 후 리비아 '벵가지' 건설현장에 도착했다. 주방에서 일하는 식구는 쉰 명 남짓이었다. 요리사는 나까지 포함하여 여덟 명이었다. 문제는 다음날 새벽에 일어났다. 새벽에 주방에서 무를 썰고 양배추를 잘랐다. 양배추는 한 번도 잘라 본 적이 없어서 진땀이 났다. 아니나 다를까. 결국 손을 베고 말았는데, 주방장이 보더니 나를 창고로 데리고 가 "당신 요리사가 아닌 것 같은데, 솔직히 이야기해.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귀국 조치시킬 테니"하고 엄포를 주었다. 나는 할 수 없이 주방장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한참을 듣고 있던 주방장이 "그럼 좋다! 사정을 들으니 딱한 것 같은데, 국 끓이는 것부터 가르쳐 줄 테니 열심히 일해야 해"하고 격려해 주었다. 눈물나도록 고마웠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중동 생활이 시작되었다. 남들이 잘 때 나는 야채창고에서 감자 깎는 방법과 무채 써는 방법, 그리고 양배추채 써는 방법을 연습했고, 다음 식사에 쓸 재료를 미리 준비해 놓았다. 열심히 배우며 죽도록 일했다. 그런 지 6개월쯤 지났을 때, 주방에서 사건이 터졌다. 주방장이 말을 잘 안 듣고 일을 안 한다고 주방 식구 한 사람을 구타한 것이었다. 현장 관리직 사람들을 포함하여 모두가 폭력을 행사한 주방장을 당장에 귀국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나는 주방장을 위해 담당 대리에게 애원했는데, 내 애원이 효과를 보았는지 어쨌는지, 주방장은 귀국 조치만은 당하지 않고 다른 현장으로 옮기는 것으로 결말이 났다. 주방장은 내게 고맙다고 했다.



그 후 하루는 현장 사무실에서 나를 부르더니, 내 경력을 물어 왔다. 사무실에서는 내 주방 경력을 7년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곳저곳 식당에서 7년 동안 일했다고 대답했고, 담당 대리가 나더러 "주방장을 해볼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웃으면서 "다른 요리사도 많은데, 사양하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담당 대리가 재차 권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다음 날 주방장이 되었다.



나는 주방장이 되고 난 뒤부터 음식에 더욱 신경을 썼다. 숙소를 돌면서 근로자들에게 부식에 대한 설문조사도 했고, 그것을 반영하였다. 다음날부터 반찬이 달라졌고, 당연히 내 인기는 올라가기 시작했다. 귀국을 얼마 남기지 않고 있을 때 현장 사무실에서 불러 3개월을 연장해 줄 테니 주방 일을 더 맡아 달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가족들이 너무 보고 싶어, 회사의 부탁을 뒤로하고 귀국했다.

그 뒤 1986년 봄, 리비아 사막에서 피땀 흘려 모은 돈으로, 상도동 뒷골목에 작은 점포를 얻어 통닭과 맥주를 팔았다. 통닭 호프집을 낸 것이다. 처음에 기대했던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런 대로 장사가 되었다. 그 뒤 조금 더 좋은 위치에서 '통닭 숯불 바비큐'를 해보기로 하고, '돌핀스 바비큐'란 상호로 개점했는데, 장사가 너무 잘 되었다. 신바람이 났다. 그렇게 6~7개월 정신 없이 통닭을 굽고 있던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자기도 이런 것을 해보고 싶은데 도와줄 수 없겠느냐고 했다. '돌핀스 바비큐' 분점을 내 줄 수 없겠느냐는 것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프랜차이즈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돌핀스 바비큐 분점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24호 분점이 나가고, 사업이 순풍에 돛을 단 듯 진행되고 있던 어느 날, 우편물 하나를 받았다. 모 대기업의 특허관리팀에서 보낸 공문이었다. 내용인 즉 "돌핀스라는 상호는 이미 상표 등록을 해둔 것이니, 허락 없이는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기업에 전화를 걸어 사과하고 다시는 상호를 사용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상호를 바꾸어 다시 시작해 볼 수도 있었지만, 마침 생각해둔 다른 사업아이템 -독도해물탕- 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돌핀스 바비큐'를 그만두기로 했다.



섬 소년, 추억의 입맛을 팔다

그 뒤 '독도해물탕'이라는 상표를 특허 출원했는데, 등록하는 데 2년이나 걸렸다. 상도동에 본점을 냈는데 -본점은 다른 사람이 운영했음- 장사가 아주 잘 되었다. 이때부터 이른바 대박이 터지기 시작했다. 서울, 경기 지역은 물론이고 지방에서도 속속 '독도해물탕' 간판이 걸리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바다에 접해 있는 여수, 부산, 울산에도 점포가 생겼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바닷가에서 영업이 더 잘 되었다. 그 뒤, "독도는 우리 땅…"이 세간의 화두가 되고 노래까지 다시 뜨면서, 우리 점포도 급속하게 늘어났다. 30평 이상의 점포만 전국에 120개나 되었다.



참고로 프랜차이즈 사업은, 분점 개업 시 점포 내부 시설 설비에서 얻는 마진과 개업 후 재료 유통에서 얻는 마진이 주 수입원이기 때문에, 프랜차이즈에 있어서 유통은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해물의 경우는 이 유통이 고비용 구조였고, 종류도 많고, 생물이기 때문에 유통 자체도 쉽지 않았으며, 비용도 많이 들어갔다. 결국 체인점의 확장 속도가 떨어지면서 소득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해, 본사 사무실 경비 충당이 부담이 될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다른 업종을 알아보기 시작했는데, 마침 그 때 고향 친구가 찾아와 냉면 전문점을 해보자고 해, 냉면 전문점을 개점했다. 냉면 전문점 본점은 개점하자마자 손님이 몰려들어 장사가 아주 잘 되었다. 그러던 중 대형 냉면 전문점이 생기면서, 중소형 냉면집들이 설 자리를 잃어 가기 시작했는데, 내가 시작한 냉면 전문점 역시 그런 시대의 조류에 휩쓸려 버렸다.



모르는 길로 들어서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친구의 소개로 최 모라는 사람을 만났는데, 이 만남을 통해 사람을 만나는 것이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나는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그 사람이 제안한 아이템 가운데 하나가 청둥오리 전문점-청둥오리를 기계에 구워서 소스에 찍어 먹는 방식- 인데, 함께 본점을 개설해서 가맹점을 모집하자고 하여 그렇게 하기로 했다. 내가 망하려고 그랬는지 몰라도, 본점을 물색하는데 강남 도곡동 소재 단독건물 1~2층 200평 점포가 눈에 들어왔다. 적잖은 투자비는, 지인을 통해 소개받은 대기업에 근무하던 윤홍범이라는 젊은 친구와 동업하는 방법으로 조달했다.



준비 과정에서 강남이니만큼 고급스럽게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밑 빠진 독에 물 붓듯이 돈이 새 나갔다. 그리고 오리 요리 주방장을 최 모가 불러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은 완전히 엉터리 주방장이었다. 음식 메뉴도 타 업체의 메뉴를 가미하는 쪽으로 급선회하여 당초의 청둥오리 구이 전문점이 오리 전문점으로 바뀌게 되었다. 다른 문제의 의사결정도 대부분 최 모가 했다.



아무튼 오리 전문점을 개업하던 날, 몰려드는 손님들로 가게는 장사진을 이루었다. 일간지에 7단통(1회에 2천만 원, 20회) 광고를 내보내기 시작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한꺼번에 몰려드는 고객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했다. 음식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는데, 지배인이 있었지만 종업원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서빙도 서툴러 고객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 일로 인해 개업은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지만, 배움에 대한 대가는 너무나 컸다.



한 달 정도 지나자 매출액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망하는 징조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 달 후부터 100만 원대 이하로 매출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한 달에 약 5천만 원의 손실이 나기 시작했다. 안간힘을 써 봤으나 모두가 허사였다. 배신감을 느낀 손님들은 다시는 오지 않았다. 역시 음식 장사는 단골장사이고 식당 광고는 '입소문'이 최고인데…. 그렇게 넉 달을 버티다가 드디어 손을 들고 말았다. 적잖은 빚까지 얻어 쓴 나머지 어음도 부도가 났다.



살아 있는 한 도전은 계속된다 / 실패하면서 강해지고 속으면서 배우다

내 집을 남에게 넘기지 않으려고 3차 경매를 앞두고 백방으로 돈 빌릴 곳을 알아보았으나, 세상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결국 집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고, 우리 식구는 상도동 산동네로 이사했다. 이사를 하고 나서 하루는 고향 후배가 찾아와 바닷장어 프랜차이즈를 해보자고 권유해, 방배동에 '독도장어탕' 집을 열었다. 크게 만족할 만한 정도는 아니지만 그런 대로 장사는 되는 편이었다. 그러나 가맹점 모집은 여의치 않았다. 결국 장어탕 집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말았다.



그 뒤에도 나는 서서 마시는 선술집, 쇠고기 전문점(등심촌), 돌구이 전문점, 그린 가든, 독도회 마당, 양주 바, 샤브샤브 전문점 등을 운영하면서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고, 돈을 제법 모은 뒤에는 모아 둔 돈으로, 봉천동에 1, 2층 250평의 큰 규모로 '독도해물찜'에 승부를 걸었는데, 결국 나는 해물찜을 시작으로 요식업계에서만 다섯 가지 업종에 도전하여 모두 실패를 경험했고, 빚만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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