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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평전

조성기 지음 | 작은씨앗
제1장 유년생활



유일한의 아버지 유기연은 1861년에 태어나 아홉 살 때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어 친척집을 전전하며 살아가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국민학교도 나오지 못한 채 어느새 스물여섯 살 노총각이 되고 말았다. 그는 이제야말로 자립적인 인생을 살고자 결심하고 개나리 봇짐 하나만 지고 고향마을을 떠났다. 그렇게 두 달 정도 짚신을 신고 북쪽으로 올라가 드디어 평양에 도착하였다. 마침 추수철인 가을이라 집집마다 일손이 달려 품을 팔 곳이 많았다. 평양에서 20리 가량 떨어진 강계라는 마을 길가에 외동딸 김확실과 함께 살고 있는 과부집이 하나 있었다. 과부는 키도 훤칠하고 기골도 장대한 유기연이 사윗감으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혼인식을 올렸을 때 유기연의 나이는 27세였고 김확실은 15세였다. 평양집에 살림을 차린 그들은 옷감 장사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 무렵 미국 감리교 선교위원회에서 파송한 닥터 홀(William James Hall)이라는 캐나다인 의사가 평양에 들어와 의료 선교 사업을 하고 있었다. 새로운 문물에 대한 호기심이 많던 유기연도 닥터 홀에게 가서 치료도 받고 성경 이야기도 듣곤 하였다. 닥터 홀은 섣불리 전도부터 하려 들지 않았고 친절한 봉사를 통하여 사람들이 감동을 받는 가운데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이런 닥터 홀의 인격과 봉사에 유기연도 감동을 받고 예수를 믿어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 무렵 유기연은 아내의 이름을 김확실에서 김기복(金基福)으로 바꾸어 호적에 올렸다. 아내를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복으로 여긴다는 뜻이었다. 1893년에 첫딸 유선한이 태어났다. 1895년 1월 15일, 장남이 태어나자 유기연은 아이의 이름을 유일형(柳一馨)이라고 지었다. '형(馨)'은 향기 형으로 살아가는 동안 아름다운 향기를 멀리까지 풍기는 인생이 되라고 지어준 이름이었다. 유일형이 나중에 유일한으로 개명하게 된다.

일형이 태어나던 해는 동학란의 주모자인 전봉준이 효수형을 당하고 을미개혁이니 을미사변이니 하여 온 나라가 뒤숭숭하던 시기였다. 유기연은 기독교를 통하여 서양 문물에 접했을 뿐 아니라 그 당시 평양에 거주하였던 민족지도자들의 강연을 통하여 조국의 현실과 개화사상에 더욱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들은 강연 때마다 지금 세계가 급변하고 있으므로 조선의 자녀들이 많이 세계로 나가 서구 문물을 익혀서 조선의 독립과 부강을 위해 일하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유기연은 아마도 일형을 민족지도자들의 강연회에 데리고 가서 어리지만 뭔가 조국의 현실에 대해 느끼는 바가 있도록 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세계에는 한국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큰 나라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나라들의 문물을 배우고자 하는 소원이 일형의 마음 속에도 일어나기를 바랐을 것이다.



국민학교도 나오지 않은 아버지 유기연은 자신이 하지 못한 공부를 일형에게는 어떤 일이 있어도 시켜야 한다는 일념이 있었다. 그리하여 일형에게 여러 가지 책들을 사주고 가정교사를 붙여 공부를 돕도록 해주었다. 일형은 일곱 살 때 집에서 50리 떨어진 양잠 학교로 보내졌다. 거기서 누에를 치고 비단실을 뽑는 기술을 배우고 오라는 것이었다. 첫 학기가 끝날 무렵, 일형은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양잠업은 일형의 가족들에게 중요한 가업이 되었고, 모든 식구가 그 일에 매달렸다. 누에의 유일한 먹이가 되는 뽕나무 잎들은 어디서나 잘 자랐다. 일형은 집안사람들과 함께 아버지의 양잠업을 도와주면서 앞으로 자신의 인생과 사업을 얼마나 세심하고 정성스럽게 쌓아가야 할 것인가 원초적인 교육을 받은 셈이다.



일형이 소년으로 자라는 동안 나라는 열강의 각축전 속에서 점점 일본의 손아귀로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유기연은 청일 전쟁을 평양에서 직접 겪은 터라 노일 전쟁이 한국 땅과 백성들에게 또 어떤 폐해를 끼칠지 몹시 걱정되었다. 유기연은 국권이 일본에 완전히 넘어가기 전에 장남이라도 우선 미국으로 빨리 보내야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혔다. 그럴 즈음 미국 선교사가 교회 예배 중에 두 명의 한국인 아이를 유학 보낼 수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 유기연은 옳다구나 하고 그 선교사를 찾아가 자기 아들 일형을 부탁하였다. 유기연이 일형을 미국으로 보내기로 한 자신의 결심을 아내 김기복에게 비치자 아내는 극구 반대하였다. 일형을 보내려면 자기를 죽이고 보내라는 식이었다. 며칠이 지나자 아내의 마음도 조금 바뀌어 있었다. 나라가 전쟁에 휘말려들고 있는지라 전쟁 중에 죽기라도 하면 모자의 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일형은 새로 맞춘 양복을 입고 1904년 봄, 제물포에서 가족들과 눈물로 작별하고는 순회공사 박장현의 손에 이끌려 멕시코로 가는 배를 탔다. 박장현과 그의 조카 박용만은 영어도 가르쳐주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민족정신을 일깨워주는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박용만이 일형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지금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과 마찬가지야. 우리나라 인재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도 우선 실력을 키워야 돼. 일본보다 모든 면에서 앞서 가고 있는 미국에서 열심히 배워 일본을 앞질러야 된다 이거야." 박용만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일형은 집이 그리워 울곤 하는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일형은 박용만을 비롯한 10여 명의 일행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머물렀고, 그곳에서 대한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한국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제2장 또 다른 세상



일형은 박장현을 따라 샌프란시스코로 와서 그 지역 초등학교를 6년간 다녔다. 일형은 용돈 한 푼 아버지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는 가운데 10살 남짓한 나이에 식당 종업원, 신문배달, 구두닦이 등 온갖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다. 그 무렵 한국에서는 일본이 한국의 이권들을 하나씩 차지하며 경제 침탈을 일삼고 세력을 넓히자 한국에서 어느 정도 재력을 쌓아가던 상인들은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기연도 사업이 여의치 않았음에 틀림없다. 일형이 초등학교 생활을 시작했을 즈음인 1906년 4월 1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리히터 규모 7.8의 강력한 지진이 일어났다. 3천여 명이 목숨을 잃고 28만 개의 건물이 무너졌다. 미국 전역에 샌프란시스코 이재민을 돕는 운동이 일어나고 이 소식은 교회를 통하여 한국에 있는 유기연에게도 전해졌다. 그는 지진 참사로 고생하는 샌프란시스코 이재민들과 아들을 생각하여 의연금 5원을 보내었다.



일형이 미국으로 온 지 2년쯤 되어 아버지로부터 학비를 받지 못하게 되자 네브라스카주 커니로 가게 되었다. 역에 내리니 그곳 침례교회 목사와 교인들 몇 명이 마중을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주일 예배때 일형을 돌보게 될 가정도 소개되었다. 36세와 38세의 독신 자매 두 사람이 살고 있는 가정이었다. 두 독신 자매는 일형을 영어 공부에서부터 시작하여 신앙교육까지 성실하게 개인지도를 해주었다. 일형은 두 자매를 통하여 신앙을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어떻게 실천하는가를 피부로 느끼듯이 배울 수 있었다. 일형은 한국에서 교회 활동은 열심히 하지만 그 신앙이 생활과는 동떨어진 교인들을 많이 보았는데, 그 두 자매는 신앙이 곧 생활이요 생활이 곧 신앙이었다. 그들은 일형에게 어머니, 이모처럼 여겨지기도 하고 큰누나들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1908년 7월 박용만은 전북미 한인 대표자대회를 개최하였고 이 대회에서 군사훈련 교육안이 통과되었다. 드디어 1909년 6월 여름, 네브라스카주 커니 농장에서 군사 학교 군기가 게양되어 펄럭이고 13명의 학생들이 군사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일형이 여름 방학이 되어 두 자매에게 소년병 학교에 갈 뜻을 비치자 "나라를 위해 용감히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면서 흔쾌히 승낙해 주며 꽤 많은 용돈을 손에 쥐어주었다. 박용만이 군사 학교를 헤스팅스로 옮긴 지 4개월이 될 무렵, 한국에서는 그야말로 '경술국치'인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되었다. 한일합방 소식이 들려오던 날, 헤스팅스 대학에 있던 군사 학교는 통곡 소리로 가득하였다. 특히 박용만은 짐승과도 같은 소리를 내며 울음을 토하였다. 박용만은 결의를 더욱 다지고 군사 훈련에 심혈을 기울였다.



소년병 학교는 여름에만 열렸기 때문에 유학생들이 학기 중에는 소속된 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헤스팅스 대학으로 와서 군사 훈련을 받았다. 1912년 헤스팅스 소년병 학교에서 13명의 첫 졸업생들이 나왔다. 그 중에 유일형이 들어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일형은 군사 훈련을 통하여 민족의식이 더욱 견고해졌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역경도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을 기를 수 있었다. 이것은 일형의 인생에 두고두고 귀한 밑거름이 되었다. 소년병 학교를 졸업한 일형은 이제는 소년이라기보다 어엿한 청년으로 자라나 있었다. 그 소년병 학교에서 일형은 일생을 함께 할 동지들을 만났다. 일형과 초등학교도 같이 다닌 구영숙은 나중에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와서 유한양행 사장이 되고 초대 보건부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한국에 있는 유기연에게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한일합방이 되자 일본 땅이 되어버린 조선에 더 이상 살기가 싫어 그는 식솔을 데리고 북간도 연길로 이사를 하고 말았다. 조국을 잃은 것도 억울한데 한국의 가족들마저 조국 땅을 등지고 떠나간다 하니 일형은 분통하기 그지없었다. 일형은 16세가 되었을 때 자기를 돌봐준 두 자매를 떠나 헤스팅스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미국에서 고학하는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일형도 신문배달을 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신문보급소에서 일형의 이름을 타자로 치다가 실수로 '일한'이 되고 말았다. 일형은 이름이 틀렸다고 말하여 고치려고 하다가 그대로 두기로 했다. 그동안 일형이라는 이름을 영어로 발음하기 어려운지 사람들이 '일향(il hang)'이라고 부르고 있었던 차였다. '일한(一韓)', 하나의 대한제국이라는 의미도 되고 세계 제 1의 대한제국이라는 의미도 되었다. 아버지도 일형의 편지를 받고 일한이라는 이름을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일한은 그동안 신체 단련 훈련을 받아 미국 아이들에게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튼튼한 체력을 지니게 되었다. 영어를 거의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자 아이들을 이끄는 지도력도 발휘하였다. 일한은 공부에서 늘 일등을 하였는데 미국 아이들이 수군거리며 공부벌레라고 놀리자 그동안 속해 있던 웅변서클에서 나와 보란 듯이 미식축구부로 들어갔다. 미식축구 선수로서 받은 훈련은 소년병 학교 훈련과 함께 유일한이 장차 기업가로 성공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에 틀림없다. 미식축구의 비결들은 기업 운영에 하나하나 응용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센터로서 미국인 선수들을 이끄는 가운데 일한은 한국인이 미국인보다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다만 한국인들에게는 미식축구에서 요구되는 자기 직분에 대한 철저한 책임과 협동심이 부족한 것이 흠이었다.



일한은 사정이 어려워진 아버지를 위해 은행에서 대출한 100불을 갚기 위해 여기저기 이력서를 내어 직장을 구하다가 멀리 디트로이트까지 가서 에디슨 변전소라는 데서 일하게 되었다. 자동차로 세계 문명을 바꾸어놓으려는 열정이 꿈틀거리는 디트로이트에는 여러 공장들이 있고, 그 공장들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전기 공급이 원만하게 이루어져야 했다. 일한은 돈을 빨리 벌어 은행에서 빌린 돈도 갚고 학비도 마련해야 했으므로 야간근무를 자청하는 일이 많았다. 일한이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야간근무를 하였는데 마침 정전사고가 일어났다. 일한은 우왕좌왕하였고 결국 비상연락망이 가동되어 직원들이 달려오고 나서야 사고를 수습할 수 있었다. 다음날 변전소 사장은 책임 소재를 따졌다. 그의 상사는 일한이 자원하여 근무를 맡았고 견습생이라 사고 원인을 얼른 알아내지 못했다며 선처를 부탁했고, 사장은 성탄절임을 감안하여 특별히 용서를 하였다. 일한은 1년 간 열심히 돈을 벌어 은행빚도 갚을 수 있게 되었고 대학 등록금도 마련하였다.



제3장 세상을 향해 한 걸음 앞으로



일한은 드디어 1916년 21세 때 미시간주 앤 아버(Ann Arbor)에 있는 미시간대학에 입학하였다. 앤 아버는 디트로이트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지역이어서 일한은 처음에는 대학생활을 하면서 변전소나 다른 공장 같은데서 아르바이트를 할 생각이었으나, 차츰 자신의 전공인 상과 회계학을 살리는 방향으로 학비를 벌 구상을 하기 시작했다. 일한은 우선 중국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면 어떨까 궁리하였다. 일한은 중국의 향취가 배어 있는 동양의 제품들을 도매점에서 직접 사와 구매를 유도하였다. 제품에 대한 호응이 예상했던 것보다 커서 시간제 아르바이트보다 훨씬 수입이 좋았다. 일한은 여러 시행착오의 원인들도 살펴가며 학교에서 배우는 회계학을 응용하여 장부 정리도 일목요연하게 해나갔다. 일한은 직접 발로 뛰면서 체험한 작은 성공을 토대로 장사를 좀더 조직적으로 넓혀가도 될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이 무렵 일한은 같은 대학에 다니는 한국 학생들과 중국 학생들을 모아 한중장학회를 조직하고 회장직을 맡았다. 한국 학생들과 중국 학생들은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친해질 수가 있었다. 한국학생회 회원 중에 한국 여학생은 없고 중국 여학생들 몇 명이 있었는데 일한은 한 여학생을 보는 순간 마음이 와락 끌리는 것을 느꼈다. 그 여학생의 이름은 호미리(胡美利)였다. 호미리는 미국 서부 철도 건설회사 중역의 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호서념은 중국 광동 출신으로 재미 중국 사회에서는 저명한 인사로 알려졌다. 일한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끼며 슬며시 팔을 뻗어 호미리의 손을 잡았다. 일한은 부드러운 머리카락 감촉을 느끼며 자기가 호미리에게 선물한 중국 향수 냄새를 코로 깊이 들이켰다.



1919년 4월 13일, 중국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한국의 정통정부임이 내외에 공식적으로 선포되었다. 바로 그 다음 날 4월 14일부터 4월 16일까지 서재필을 중심으로 한 한인 대표 150여 명은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리틀 극장에서 제1차 한인 총대표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때 미시간대학 졸업반인 24세의 일한도 당당히 재미한인 대표로 참여하여 '한국 국민의 목적과 열망을 표명하는 결의문' 기초작성 위원회 대의원으로 수고하였다. 이 결의문은 준헌법적 성격을 지닌 문건으로서 새로 건설될 민주공화국의 기본원리를 담은 건국의 청사진으로 간주될 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일한은 대한민국 헌법 개요라 할 수 있는 그 결의문을 150여 명의 대표들 앞에서 발표하였다. 이 대회는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이 미국인과 더불어 영어를 사용하면서 진행시킨 국제회의라는 점에서 특기할 만했다.



호미리는 미시간대학 학부를 졸업하고 의과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동북부에 있는 코넬 대학으로 전학하였다. 호미리를 코넬로 보내고, 외로움을 달래가며 졸업반 공부를 마친 일한은 상과 전공을 살려 미시간 중앙철도회사 회계사로 취직하였고 그 후에 미국 전역에 널리 알려진 제너럴 일렉트릭 회사로 직장을 옮겨 좀더 넓은 세계를 경험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세계적인 큰 기업을 경영할 수 있는 안목과 자질을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다. 일한은 회사 직원으로 월급만 받아먹는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의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중국 제품 판매 같은 작은 규모의 장사가 아니라 대규모의 사업을 펼칠 계획을 세웠다. 일한은 호미리와 다른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숙주나물을 통조림에 담는 실험을 거듭해 나갔다. 이렇게 만들어진 숙주나물 통조림은 큰 호응을 얻게 되었다.



차츰 판매망이 넓어지자 일한은 생산공장 건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일한의 대학동창이자 디트로이트에서 식료품 장사를 하고 있던 스미스는 일한이 개발한 제품이 가능성이 있음을 확인하고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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