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어떻게 아시아 최고의 부자가 되었을까
왕펑 지음 | 아인북스
비결 1 立 : 역경에 굴하지 않고 우뚝 서다
하늘은 큰 소임을 맡기기 전에 생각과 의지를 시험한다맹자는 '하늘은 한 사람에게 큰 소임을 맡기기 전에 반드시 생각과 의지를 시험한다'고 설파했다. 역경은 인간을 분발하게 만들어 생존과 발전을 모색하게 만든다. 시련을 이겨내는 과정에 성공은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많은 곤경에 처하지만 투지가 식지 않는 사람만이 살아남는다. 리자청은 10대에 학교를 중퇴하고 무일푼으로 사회에 뛰어들어 세계적인 기업군단을 일궈냈다. 평생을 몸 바쳐 일하고 공부했기 때문이다.
리자청의 유년 시절, 중국은 몹시 혼란했다. 1937년 7월,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리자청의 고향 광둥(廣東)성의 차오저우(潮州)도 일본군에게 점령당했다. 이로 인해 초등학교 교장이었던 리자청의 아버지 리윈징(李雲經)은 직장을 잃었다. 초등학생인 리자청도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사람들은 방화와 약탈을 일삼는 일본군을 피해 점차 그곳을 떠났다. 리윈징도 가족을 데리고 초등학교 교사인 동생에게로 갔다. 하지만 동생도 곧 실직을 했고 저축한 돈도 바닥이 나고 말았다.
리윈징은 홍콩으로 떠나기로 했다. 홍콩에는 시계무역업으로 꽤 성공한 처남 좡징안이 살고 있었다. 리윈징 가족이 찾아가자 좡징안은 기꺼이 누이 가족에게 방을 내주었다. 하지만 리윈징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지는 않았다. 인척을 회사에 개입시키지 않으려는 처사였다. 리윈징은 처남의 마음이 이해는 되었지만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가족을 위해 여러 가지 잡일을 했다. 그러나 그때는 2차 세계대전 중이라 홍콩경제도 어려웠다. 게다가 힘든 일을 해보지 않았던 리윈징은 하루하루가 힘겨웠다. 결국 리윈징은 누적된 피로와 영양실조 등으로 결핵에 걸려 죽고 말았다. 이때 리자청은 중학교 1학년이었다.
상인으로 성공할 유전자는 없어도 타고난 포부와 식견, 용기를 가졌다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리자청은 학교를 그만두고 찻집(가벼운 식사인 딤섬(點心)과 차를 파는 곳)에서 일을 했다. 외삼촌이 자신의 공장에서 일하도록 권유했으나 사회생활을 해보고 싶었고 신세를 지는 것 같아서 거절했다. 리자청은 매일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찻집에 출근하여 찻물과 딤섬을 준비했다. 하루에 일하는 시간은 15시간이 넘었다. 외삼촌에게서 자명종을 선물 받은 그는 10분 빠르게 시계를 맞춰놓고 가장 먼저 출근했다. 퇴근도 가장 나중에 했다. 이런 습관은 반 세기 넘게 계속되어 왔다. 지금도 그는 손목시계를 실제 시간보다 10분 빠르게 돌려놓고 생활한다.
찻집에서 일을 배우면서 그는 두 가지를 실천했다. 첫째는 손님들의 신분, 고향과 연령, 직업, 성격 등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손님들이 돈을 쓰는 심리를 파악하고 정성껏 서비스를 해서 기꺼이 지갑을 열게 만드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어떤 손님이 새우만두를 좋아하는지, 쌀국수에 고추를 넣어먹는지, 홍차와 녹차를 좋아하는 손님은 누구인지 등을 기억했다. 이러한 서비스로 매상이 더욱 오르게 되자, 찻집주인은 리자청을 총애하여 월급도 많이 올려주었다.
찻집에서 일을 한지 1년이 다 될 무렵, 리자청은 외삼촌의 시계회사에서 기술을 배우고 싶었다. 또한 독학으로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기로 결심했다. 리자청은 매일 저녁 열심히 공부했다. 또한 영어도 열심히 익혔다. 생전에 리자청의 아버지가 "홍콩에서 뿌리를 내리고 국제적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광둥어와 영어를 마스터해야 한다"고 당부하셨기 때문이다. 리자청은 부친의 뜻에 따라 열심히 영어공부를 하여 몇 년 후에는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훗날 그에게 영어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었다.
외삼촌 회사에 들어간 리자청은 잔일을 했다. 그는 하루빨리 기술을 익히기 위해 틈틈이 기술자들의 어깨 너머로 눈 도둑질을 했다. 회사직원들은 리자청이 사장의 조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나이는 어리지만 영리하고 부지런하다'며 사장에게 칭찬을 했다. 기술자들은 리자청을 기특하게 여겨 기꺼이 시계를 조립하고 수리하는 기술을 가르쳐주었다. 리자청은 반 년 만에 시계에 관한 기술을 거의 마스터했다. 외삼촌은 그런 리자청의 발전이 기뻤지만 겉으로는 칭찬 한 번 하지 않았다.
목표는 아주 높게, 멀리 정하라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홍콩경제는 영국정부의 산업시설 복구 정책에 힘입어 활기를 띄고 인구도 100만여 명으로 급증했다. 외삼촌의 '증난'시계회사도 활황의 물결을 타고 매출액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그래서 외삼촌 좡징안은 시계조립공장을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 이제는 조립과 수리가 아닌 자체 생산한 시계로 홍콩의 시계시장을 석권하기로 결심했다. 리자청은 외삼촌회사의 미래에 대해 낙관했지만 외삼촌의 그늘에 있으면 안일해져 투지를 상실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리자청은 자신의 생각을 외삼촌에게 말하면서 홍콩 시계업계의 전망에 대한 생각도 말했다. "스위스의 시계 제조기술은 세계 최강이고, 일본은 틈새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전자시계를 개발했습니다. 고가시장은 스위스가 독점하고, 중가시장은 일본이 석권하고 있으니 하루 빨리 중저가 시장을 차지하세요."라고 건의했다. 외삼촌은 조카의 결정을 존중해 주었고, 리자청은 외삼촌의 회사를 나왔다. 얼마 후, 리자청의 예상대로 홍콩은 중저가 시계 생산에 주력함으로써 스위스와 일본에 이어 세계 3위의 시계 생산기지가 되었다. 리자청은 어린 나이에도 평소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높은 안목과 식견을 가질 수 있었다. 그가 이룬 오늘의 성공에는 풍부한 지식이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항상 새로운 시도를 하고, 적극적·능동적으로 행동하라1946년 초, 열일곱 살이 된 리자청은 플라스틱제품을 생산하는 회사의 영업사원으로 취직을 했다. 그리고 6개월 만에 1등으로 영업실적을 올렸다. 이는 2등보다 6배나 많은 실적이었다. 근면함과 재빠른 두뇌회전 능력을 가진 그는 영업을 하면서도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플라스틱 시장 동향에 대한 정보를 얻고 홍콩을 몇 개의 구역으로 나눈 뒤 각 구역의 소비수준과 시장현황을 기록했다. 이것을 상세히 분석한 뒤, 사장에게 각 상품별 생산량과 판매 전략을 건의했다. 사장은 리자청의 건의를 그대로 반영했고, 그 결과 회사는 큰 수익을 올리게 되었다.
리자청은 능력을 인정받아 1년 후에는 세일즈 매니저로 승진했다. 그리고 2년 후에는 사장으로 승진하여 회사업무를 총괄하게 되었다. 스무 살에 사장이 되었고 고소득자가 되었지만 리자청은 창업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세일즈를 하면서 플라스틱이 급부상할 것을 예견했다. 게다가 제조가 쉽고 가벼우며 색깔과 형태를 다양하게 구현해내는 플라스틱에 매료되었다. 당시에는 사치품에 속할 정도로 가격이 비쌌지만 조만간 플라스틱이 대중적인 소비품이 되리라 확신했다. 리자청이 창업을 결심하고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사장에게 전달하자 사장은 승진과 월급인상을 약속하며 그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마음을 굳힌 리자청은 다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기로 했다.
이익에 급급하면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다리자청의 창업 자본은 5만 홍콩달러였다. 그동안 어머니께 수입전부를 드렸으므로 창업자금은 어머니와 주변사람에게서 빌린 것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이미 신용을 얻었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그의 창업에 도움을 주었다. 그는 플라스틱공장에 창장(長江, 양자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양자강은 작은 물줄기도 받아들여 만리를 도도하게 흐르듯이 비록 시작은 보잘 것 없지만 창장플라스틱공장은 중국인의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공장을 세웠을 무렵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그래서 홍콩의 영국 정부는 대중국무역을 봉쇄했다. 중개무역으로 경제를 지탱하던 홍콩이 큰 타격을 입자 정부에서는 산업정책을 조정하여 가공무역을 경제의 중심으로 삼으려 했다. 이런 상황에 리자청이 플라스틱 업종을 선택한 것은 적절한 대응이었다.
처음에는 리자청도 다른 공장들과 마찬가지로 플라스틱완구를 생산했다. 그런데 생산량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품질관리에 소홀하여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거래처에서 제품의 질이 조악하다며 반품을 요구해왔고 줄줄이 창장과의 거래를 중단한 것이다. 창고에는 불량제품과 반품된 완구들로 가득 찼고, 소문을 들은 은행은 대출상환을 재촉했다. 리자청은 우선 직원들을 모아놓고 자신이 직원들 탓만 한 것에 대해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회사사정에 맞춰 인원을 해고해야 함을 밝히고 회사사정이 회복되면 다시 채용할 것을 약속했다.
직원들과 얘기를 마친 리자청은 은행, 자재공급상, 거래처 등을 방문하며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했다. 기한 내에 빚을 갚고 손해배상도 틀림없이 하겠다고 약속했다. 창장이 문을 닫으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은행과 거래처들은 어음 기한을 연장해 주었다. 이렇게 주변의 이해를 구한 리자청은 직접 뛰어다니며 재고를 팔고 불량제품은 싼값에 넘겼다. 그 돈으로 채무의 일부를 변제하여 급한 불을 끈 후 공원들에게 기술을 훈련시키고 새 기계를 들여놓았다. 리자청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자 은행과 거래처들은 신뢰를 보냈다. 어려움이 어느 정도 극복되자 리자청은 해고했던 직원들을 다시 복직시키고 해고기간의 임금까지 계산해 주었다.
사업이 순조로울 때도 변혁과 발전을 꾀하라리자청이 플라스틱 업계에 몸담은 지 7년째 되던 해, 자신이 아직도 이 분야에서 두각은커녕 평범한 업자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평소와 다름없이 영문 잡지를 뒤적이던 그는 눈에 확 들어오는 기사를 발견했다. '이탈리아의 한 회사가 플라스틱조화의 제조에 성공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서구사회는 급속한 산업화로 주부들의 취업률이 상승하고 있었다. 서구인들은 꽃으로 장식하길 좋아하지만 바쁜 생활 때문에 신경을 써서 꽃을 키우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플라스틱조화는 진짜 꽃을 대신하면서도 무궁무진한 모양을 만들어 낼 수가 있으므로 현대인의 구미에 딱 들어맞는 것이었다.
리자청은 플라스틱조화의 인기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므로 먼저 선점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날 홍콩 전역을 돌아다닌 결과, 플라스틱조화를 갖춘 상점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리자청은 당장 이탈리아로 향했다. 리자청이 잡지에서 보았던 회사를 찾았을 때, 수많은 디자인의 제품들을 볼 수는 있었지만 생산 공정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는 없었다. 호텔로 돌아온 그는 이런저런 고민을 하면서 신문을 펼쳐보다가 방문했던 회사의 생산 공장에서 직원을 모집한다는 구인광고를 발견했다.
그는 곧장 공장으로 찾아가 원서를 냈다. 그러나 외국인인데다 여행비자만 갖고 있었기 때문에 허드렛일만 해야 했다. 그가 맡은 일은 폐기물을 처리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공장 곳곳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는 근면함과 성실함으로 작업반장의 눈에 들었고 숙련기술자들과도 사귈 수 있었다. 휴일이면 리자청은 그들을 중국음식점으로 불러 식사를 대접하면서 기술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시간이 지니고 플라스틱제조에 대한 요령을 거의 익힌 그는 샘플과 자료를 가지고 귀국했다.
플라스틱 조화를 생산하게 된 리자청은 빨리 시장을 점유하기 위해 저가 전략을 취했다. 그러자 몇 주일 만에 홍콩의 크고 작은 꽃가게와 일반 가정, 사무실, 택시 안에까지 플라스틱조화가 진열되었다. 그의 회사는 무명의 작은 회사에서 일약 홍콩 플라스틱업계의 강자로 부상했다. 그러자 예상했던 대로 플라스틱조화를 생산하는 회사들이 계속해서 생겨났다. 동종업계에서 선두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장의 규모를 늘리고, 생산 설비를 강화해야 했다. 리자청은 주식회사로의 전환을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1957년 말, 리자청은 창장플라스틱공장을 창장공업유한공사(주식회사)로 전환하고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이때 그의 나이 28세였다.
비결 2 進 : 지혜와 용기로 기회를 포착하여 과감히 나아가다
세인의 허를 찌르는 기세로 밀고 나가라흔히 자신과의 싸움이 다른 사람과의 싸움보다 훨씬 어렵다고 한다. 이 말은 리자청의 인생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의 일생은 항상 도전의 연속이었다. 어려운 환경에서 비롯된 투지와 끊임없이 공부하여 얻은 지식 그리고 체험으로 얻은 안목으로 그는 계속되는 도전에 성공해 간다. '날지 않을 때는 조용하지만 한번 날면 하늘을 찌른다'라는 말은 위대한 인물의 공통된 속성을 묘사한 것이다. 확신이 섰을 때는 과감히 뛰어드는 용기야말로 영웅이 갖춰야 할 기질인데, 리자청이 바로 그런 기개를 갖추었다. 리자청의 결단성 있는 성격이 가장 잘 드러난 사건은 바로 지하철 건설공사의 입찰이었다. 플라스틱산업으로 두각을 나타낸 리자청이 부동산 개발 사업에 뛰어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지하철 건설의 1기공사는 주룽반도의 관탕(觀塘)에서 해저터널을 뚫어 홍콩섬의 센트럴까지 연결하는 공사로 15개역으로 이루어졌다. 이 중 센트럴역과 진종(金鐘)역은 부근에 정부기관들이 들어서 있었고 센트럴의 은행가에서 지척에 있었으므로 승객이 가장 많은 중요한 역이었다. 그래서 이 두 역위에 건물을 지으면 돈이 쏟아져 들어올 것이라 했다. 건설 회사들은 하나같이 이 지역에 군침을 흘렸다. 리자청도 마음이 동하기는 했지만 창장은 시의 외곽지역과 시골의 산지에 건물을 지은 경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동안 건설경험을 쌓았으므로 이제는 이미지 변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77년 1월 14일, 지하철공사는 역사 공개입찰을 공고했다. 개발지역은 우정총국(郵政總局)이 있던 자리로, 지하철 역사가 세워지면 주변지역을 재개발한다는 것이었다. 선두권에 있는 부동산개발 회사와 건설 회사들의 경쟁 속에 창장이 수주를 할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했다. 당시 홍콩의 재계에는 자딘 매디슨 그룹(Jardine Matheson Limited, 영국계 중국기업으로 무역, 조선, 보험, 부동산 등에 진출하여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회사)과 같은 영국계 건설회사가 참여할 것이 확실했다. 언론에서는 이미 자딘 매디슨 그룹의 승리를 당연시하는 기사를 냈다.
리자청은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생각으로 자료들을 분석하고 연구했다. "지하철공사는 홍콩정부의 공영기업이다. 하지만 중국의 국영기업과 달리 독립적으로 경영된다. 그래서 자금의 조달에서부터 설계와 시공, 경영면에서 민간기업과 다른 점이 거의 없다. 지하철공사는 개발 지역에 대한 지가 책정금액으로 약 6억 홍콩달러를 정부에 지불했고, 부족한 돈은 차후 상권개발로 발생하는 수익으로 보전할 계획이라고 했다. 또한 이를 현금과 지하철 채권으로 지불하겠다고 제의했으나 정부 측에서는 현금만을 고집했다. 지하철공사는 지가책정금액도 고금리로 대출을 받아 지불했기 때문에 원금을 상환하기 위해 더 큰 수익을 얻어야 한다."
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리자청은 전략을 짰다. 그리고 '상업빌딩 건설계획안'을 지하철공사에 제출했다. 그가 구상한 방법은 두 가지였다. 첫째, 지하철공사의 현금부족을 해결해주기 위해서 건설비용을 현금으로 제공하는 것이었다. 둘째, 지하철공사가 정부에 원금을 상환할 수 있도록 수익을 창출해주는 것이었다. 즉 빌딩을 모두 분양한 후에 발생하는 수익을 지하철공사 51%, 창장실업 49%의 비율로 배정했다. 물론 리자청의 입장에서는 현금부담이 막중했지만 이미 입찰에 대비하여 1976년 겨울, 주식공모를 통해 1.1억 홍콩달러를 조달했고, 입찰을 따내면 2억 홍콩달러를 대출받을 수 있도록 은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