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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

조동성 외 지음 | 이지북
김우중 약력

1936년 대구에서 교육자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신문배달과 냉차 장사를 하며 가족의 생계를 이었다. 경기고등학교와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으며, 한성실업에 입사하여 무역업에 종사했다. 1967년 31세의 나이에 자본금 5백만 원으로 다섯 명의 직원과 함께 대우실업을 설립했다. 대우실업은 내수보다 수출을 지향하며 창업 원년에 58만 달러의 수출 실적을 올렸다. 대우실업은 이후 한국기계, 대한보일러, 옥포조선, 새한자동차 등의 부실기업을 인수하며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대우는 김우중의 세계경영과 발맞추어 전 세계를 무대로 사업을 전개했고, 국내에서는 현대에 이어 재계 2위 그룹으로 급성장했다. 맨손으로 시작해 창업 30년 만에 대우를 세계적인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낸 김우중은 전 세계적으로 사례를 찾기 힘든 고속성장을 이루었다. 그가 걸어온 경영의 길은 곧 우리 근대 경제사와 그 족적을 같이한다.



1. 인간 김우중을 말하다



내가 만난 김우중 - 이문열




첫 만남 : 1989년 초여름 어느 날이었다. 아끼는 문단 후배 하나가 찾아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큰일났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문단의 허리가 내려앉겠습니다. 출판 불황 때문에 지금 우리 신진작가들의 생활이 말이 아닙니다. 생존자체가 위협받을 만큼 열악해졌습니다. 그냥 보고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런 서두와 함께 그 후배는 당시 출판계가 겪고 있는 불황과 더불어 신진작가들이 빠져 있는 경제적 곤궁을 전해주었다. "어떻게 그들을 도울 길이 없을까요? 이건 소설가 누구누구의 문제가 아니고 한국 문단의 문제입니다."



그 날 그 후배가 돌아간 뒤 나는 급한 글쓰기조차 미뤄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먼저 헤아려본 것은 내 자력으로 무언가 그들에게 도움 될 일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생각이 지원의 규모와 기한에 미치자, 자력으로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다. 작가의 창작에 심리적인 부담을 주지 않는 지원의 형태로도 불안정한 사적(私的) 희사(喜捨)보다는 안정된 제도적 보조가 나을 듯했다. 하지만 그 날 오후 내가 그 지원요청을 왜 하필이면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에게 하게 되었는지는 얼른 그 까닭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도 김 회장을 먼저 찾아보기로 한 것은 내 책 대부분을 출판한 민음사를 드나들면서 보고 들은 것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 때 대우문화학술재단은 민음사에 위탁해서 <대우총서>란 책을 내고 있었다. 어쨌든 전화번호 안내 서비스를 통해 대우그룹 비서실의 전화번호를 알아낸 나는 무턱대고 김우중 회장에게 면담요청을 했다. 그 때 대우는 세계경영을 앞세우고 세계를 누비던 국제적인 대기업이었고, 그만큼 김우중 회장도 분주했을 것인데,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면담을 요청했고 당연하다는 듯 그 즉답을 기다렸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그런 내 자신이 조금은 기이하다. 대우그룹 회장 비서실에서 김우중 회장과 면담할 장소와 시간을 알려온 것은 내가 전화를 걸고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바로 그날 저녁 여섯 시 반에 힐튼호텔 중국식당에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시간에 맞춰 약속장소에 가니 김우중 회장은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인사를 나누었으나 갑자기 어색하고 쑥스러워졌다. 내가 가져간 용건이 너무 난데없고 일방적이란 생각이 그제야 불쑥 들었다. 겨우겨우 겉도는 이야기를 이어가는데, 바로 식사가 들어왔다. 식사는 코스를 따라 차례로 나오는 중국식 요리로, 내게서 어색함이 덜해진 것은 음식이 몇 차례 나온 뒤였다. 차츰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기분이 되었다.



"그래 무슨 일로 나를 만나자고 했습니까?" 김우중 회장이 그렇게 물어오자, 나는 별로 머뭇거리지 않고 청구서 내듯 내 요청을 디밀었다. 내가 지정하는 여섯 명의 신진작가에게 한 달에 1백만 원씩 익명으로 우선 1년만 송금해달라는 엉뚱한 요청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필요한 배경을 장황하게 설명하려는데, 차인지 커피인지를 단숨에 훌쩍 마셔버린 김 회장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비서실에 그 여섯 명의 계좌번호를 알려주십시오. 제 개인 계좌를 통해 가명으로 송금하겠습니다." 딴에는 단단히 마음먹고 찾아간 내가 오히려 맥이 빠질 정도로 선선한 승낙이었다. 그게 너무 고마워서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하며 감사를 표시하는 내게 김우중 회장이 한 대꾸가 또 한 번 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이 나라에서 그 정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이 나 뿐만은 아닐 겁니다. 그런데 이(李)작가가 유독 나를 골라 부탁해주어서 나 같은 사람도 작으나마 문단에 보탬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으니,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납니다."



솔직히 말해 지금도 나는 그 때 김 회장이 내 부탁을 들어준 것 자체보다, 내 부탁을 들어준 그와 같은 마음가짐이 훨씬 더 감동스럽다. 김우중 회장을 폄하하는 사람들은 그의 이런 문화학술 지원사업에 대해 '죽 솥 맡은 부엌데기 인심 쓰듯' 제 돈도 아닌 것을 여기저기 제 이름 붙여 펑펑 쏟아 부었다고 빈정거린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잘라 말할 수는 없으나, 내가 그 때 김우중 회장에게서 본 것은 후원자(後援者) 문화의 한 전범(典範)이라고 할 만큼 문화에 대한 진지하고도 겸손한 이해와 성의였다.



두 번째 만남 : 1992년 연말, 나는 대우그룹 홍보실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회장님의 연말연시 여행에 동행할 수 있겠는지를 묻는 전화였다. 그 무렵 김우중 회장은 해마다 연말연시가 되면 세계에 흩어져 있는 대우그룹 사업현장을 둘러봄과 아울러 새로운 사업구상을 위해 보름 정도 여행을 하는 관례를 굳혀가고 있었다. 그 때 그룹 밖의 문화계 인사 한 사람을 초청하여 동행했는데, 그 이태 전에 동행한 사람은 김용옥 전(前) 고려대 교수였다. 이 여행을 계기로 김우중 회장과의 두 번째 만남이 있게 되었다. 그 해 김우중 회장이 세내어 썼던 아에로플로트의 대형 항공기로 크리스마스 다음 날 서울을 떠난 나는 그 뒤 여남은 날 동안 눈이 핑핑 돌 정도로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았다. 대개 대우의 사업현장이 있는 나라들로, 러시아, 이집트, 수단, 미얀마, 베트남, 파키스탄, 이란, 이렇게 일곱 나라를 들렀던 것은 뚜렷이 기억난다.



김우중 회장은 '일 중독자'라는 항간에 떠도는 말이 결코 헛소문이 아님을 내가 실감한 것도 그 여행을 통해서였다. 그 여행에서 김우중 회장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그 나라의 원수나 경제 각료, 그리고 대기업가들을 만나 상담(商談)을 나누는 것이었다. 러시아에서는 옐친이 나왔고, 버마와 수단에서도 당시의 국가원수가 나왔다. 나는 언젠가 그 경험이 내 글을 위해 필요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욕심이 생겨 여행 첫날부터 가능하면 김우중 회장의 상담에 배석시켜주기를 요청했다. 그런데 이틀이 지나면서 나는 그 요청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조찬 회동, 오전 상담 한두 차례, 오찬 회동, 오후 상담 또 한두 차례 만찬 회동, 그리고 다시 야간 상담…. 이렇게 상담에서 상담으로 이어지는데, 나는 가만히 앉아 구경만 해도 서너 번이면 벌써 지쳐 떨어질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사흘째 되던 날 나는 회장 수행비서에게 일정조정을 부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루 세 번, 그 나라의 원수나 최대기업 총수와의 만남이 있을 때만' 배석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사정하게 된 것이었다.



김우중 회장의 '일중독'과 함께 그때 돌아본 세 대륙에 펼쳐 놓았던 자취들도 몇몇은 아직 선연하게 떠올릴 수 있다. 옐친과의 면담으로 추진되어 연산(年産) 백만 대를 목표하던 중앙아시아의 자동차 공장, 강경한 호메이니 정권의 해당 각료가 안내원처럼 나서 유치를 원하던 이란의 도로통신 관련 사업, 대우가 차관까지 주선해주며 수주했던 파키스탄의 고속도로, 베트콩 출신의 하노이 시장이 나와 요청하던 호텔 건립과 생산기지 유치 등 그런 것들이 논의되는 자리를 그때 나는 구경했다. 그 뒤 한동안 김우중 회장을 떠올릴 때마다 무슨 휘황한 후광처럼 빛나던 기억이었다. 그러나 1990년 후반의 어느 날 홀연 그 후광은 스러지고 신화는 무너졌다. 김우중 회장의 이미지는 수만 리 이역에서 숨어 지내는 고달픈 경제사범에서 파렴치한 국제사기꾼까지, 그리고 권력의 희생양에서 실패한 정경유착(正經癒着)의 전형적인 사례까지, 다양한 편차로 재편성되어 유포되었다. 그리고 다시 6년이 지난 지금, 검찰은 돌아온 김우중 회장을 상대로 우리 시대의 가장 흥미로운 진실게임을 시작하였다. 두 번의 스쳐가듯 한 엷은 인연으로 김우중 회장의 진실을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복잡하고 엄중한 경제원리에 대해 별로 아는 바 없는 한 작가로서는 더욱 그렇다.





2. 대우의 흥망성쇠와 황제의 쓸쓸한 귀환



세계를 넘나든 김우중에게서 배우는 경제관과 인생신념 - 배병휴




70년대 수출 노인의 슬픈 귀국 : 해외로 도피 중이던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귀국은 '우리를 서글프게 만드는 노인'의 황혼 귀가였다. 김 전 회장의 귀국은 천하의 대한민국 성공 브랜드가 IMF 피의자 신분으로 추락하여 억지로 돌아오는 패자의 귀국이어서 초라하고 슬픈 장면을 연출 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병색이 완연한 노인이 되어 죽기 전에 어떤 형태로든 책임지려는 모습을 보이려 귀국했다는데, 환영은 기대하지 않았겠지만 폭력이 먼저 맞아주었으니 TV 화면으로 지켜보는 이들이 울적하지 않았을까. 김 전 회장이 정처 없이 유랑하다 뒤늦게 귀국을 결심한 배경이 무엇인지 우리네는 알지 못한다. 그 이전에 왜 김 전 회장이 망명하듯 소리 없이 출국했는지도 자세히 알지 못한다. 다만 엉망진창 난동의 귀국현장을 거쳐 어렵게 귀국한 그의 모습은 '수출에 미쳤던 1970년대 젊은이'가 병든 노인에 중죄인의 혐의자 신분이 되어 돌아왔다는 점에서 그때 그 시절을 함께 살아온 우리들을 서글프게 만들었음은 숨길 수 없는 솔직한 심경이다.



관계 당국의 발표나 언론보도를 종합하면 김 전 회장의 유죄 형량은 매우 무거운 것으로 믿어진다. 천문학적 규모의 분식회계와 은행대출사기, 대규모 비자금 조성 등은 믿기 어려울 정도이지만 중죄를 면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그렇지만 법원의 최종심 결과를 보기 전에는 정확히 논평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앞으로 수사 결과에 따라 진실이 드러나겠지만 비록 중죄라 해도 김 전 회장이 따로 소명하고 가감할 내용이 적지 않을 것으로 믿어진다.



시대가 요구한 특례 수출 스타 : 김우중은 수출 제일주의 시대가 낳은 영웅이었다. 그는 스스로 시대를 앞당겨 수출을 제일의 가치로 실천하고, 순간적으로 번쩍이는 아이디어로 시대 흐름을 선도하기도 했다. 김우중은 감각과 행동력을 동시다발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타고난 세일즈맨이었다. 김우중이 해외를 다녀오면 경제기자들이 우르르 쫓아가 취재경쟁을 벌인 것이 상례였다. 김우중의 해외 세일즈 성과가 바로 경제면의 기사가 되었다. 김우중은 수출 특기로 국내 5대 재벌성에 진입한 유일한 기업인이었다. 당시 나라님이나 장관들은 수출에 뛰어난 김우중을 어떤 분야를 맡겨도 가장 잘 해낼 인재라고 판단했다. 대우그룹이 모태인 (주)대우를 제외하면 창업한 기업이 없었던 것이 이 때문이었다. 대우를 기업 인수 재벌이라 부르고 부실기업 재건 전문이라 평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대우전자를 비롯하여 기계, 자동차, 조선, 중공업 등 대우그룹의 골격이 모조리 인수기업들로 구성됐다. 그리하여 섬유 수출 전문의 대우는 중공업 전문의 종합그룹으로 변신하여 5대 재벌성에 진입했다가 말년에는 제2위 규모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김우중은 부실기업을 인수하면 현장에서 침식하며 파고드는 특유의 열정을 보였다. 새한자동차와 옥포조선소를 인수했을 때 현장에서 몇 달씩이나 파고들어 기어이 자동차와 조선의 특성을 탐구해냈다.



김우중의 실패, 우리의 실패 : 김우중 신화의 대미는 세계화 시대의 세계경영으로 장식코자 설계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그의 저서가 베스트셀러가 된 것도 세계경영에 대한 기대심리가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것이 IMF가 오면서 세계경영이 잘못됐다는 말이 금세 확산되었다. 재벌의 구조개혁에 김우중이 가장 소극적이고 부정적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그러다가 재벌개혁의 사령탑인 이헌재 금감위원장 입에서 대우를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말이 슬금슬금 나오기 시작했다. 대우그룹 해체과정을 둘러싸고 이헌재 위원장이 먼저 김우중 퇴진론을 밀어붙인 것이다. 왜 김우중이 재벌개혁 의 과정에서 비판받고 강제퇴진 압력을 받는 수모를 겪게 되었을까. 자세한 내막은 알 수가 없다. 정치적, 경제적 배경이 얼마만큼 작용했는지도 짐작은 할 수 있지만 진상을 모두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김우중이 이헌재의 공개 퇴진 압력을 받고 주변을 정리할 수 있었던 시한은 고작 6개월이었다. 정부와 채권단이 허용해준 이 시한 내에 대우의 유동성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김우중의 모든 사재는 처분하게 되어 있었다. 유동성 부족이란 대우와 김우중에 대한 신용 추락으로 당장 결제자금도 메울 수 없을 정도로 긴급한 상황이었다. 이때 김우중은 죽기를 각오하고 초 고강도 구조개혁안을 제시했지만 결과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모든 사재를 담보로 제공하고 주식 포기각서와 처분 위임 각서마저 제출했으므로 모든 것을 던진 셈이었다.



정부가 요구한 퇴진 방침도 수용했다. 그는 단지 시한부 전문 경영인의 자격으로 대우를 살려보겠노라고 했다. 당시 우리네는 김우중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서면 성공하리라고 믿었다. 우리 시대 영웅의 추락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우리 모두를 위해 김우중은 끝까지 국가와 사회로부터 추앙받는 유공자로 남아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 경제가 선진국 수준에 이르기까지 유공자가 많았지만 실패한 경영자만 드러나고 존경받는 기업인이 없는 세월이 서글프고 후회스러웠다. 이 때문에 김우중의 신화가 되살아나기를 고대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러니까 수출 스타 김우중은 실패했고, 우리 모두도 실패한 것이다.



그의 노후를 어떻게 예우할까 : 대우와 김우중의 정경유착, 분식회계, 사기대출, 비자금 조성 등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거대한 세계경영 조직을 어찌할 수 없어 구조조정에 소극적인 자세로 비친 점도 당시로서는 유죄였다. 결과적으로 대우그룹의 부실 때문에 자산관리공사 12조 7천억 원, 예금보호공사 17조 원, 도합 29조 7천억 원의 공적자금이 소요됐으니 할 말이 있을 수 없는 처지이다. 그러나 김우중은 대한민국 성공 브랜드의 상징으로 수많은 젊은이에게 창업과 수출의 동기를 부여한 성공 모델로서 공헌했다. 세계경영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동구권과 러시아 등 요즘의 BRICs권(개발도상국의 틈새시장) 진출과 당시 미수교국이던 아프리카 제국에 진출하여 국교를 수립케 하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 공적도 산술적으로 계량하기 어려운 공적이다. 이 때문에 김우중에 대한 공과는 별도로 분석하고 평가해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소견이다.



검찰수사가 진행되는 이 시점에서 사면과 복권을 이야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만 나중에라도 김우중의 공적에 관한 예우를 생각하자는 주장은 해체된 그룹을 부활시키자든가 김우중에게 오너의 지위를 복원시켜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늙고 병든 노인으로 귀국한 김우중에 대한 예우로서 과거의 공적뿐만 아니라 그룹 해체 과정과 해외도피 및 한동안 국적을 포기했던 과정에 불가피성이 있었다면 그것은 그대로 인정해주는 관용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뜻이다. 비록 죄는 밉지만 김우중에게도 최소한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고 노후의 편안한 여생을 한국 땅에서 보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대우 사태 이후 도피생활에서도 나타난 세계경영 - 한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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