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CEO 스티브 잡스
시릴 피베 지음 | 이콘
1955-1974"10살인가 11살 때 처음으로 컴퓨터를 보았어요. 에임스에 있는 나사의 연구소에서였죠. 그 때 컴퓨터와 사랑에 빠져버린 거죠."
- 스티브 잡스, 1995년 4월 20일, 컴퓨터월드 스미스소니언 시상 인터뷰 중에서
스티브는 1955년 2월 2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고아로 태어났다. 출생 직후 중산층 출신의 폴과 클라라 잡스 부부에게 입양되었다. 지금은 작고한 부모님에 대해 스티브 잡스가 간직하고 있는 이미지는 존경으로 가득차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잡스 부부는 스티브에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한 관심과 개방적인 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자유분방한 교육 덕분에 그는 매우 일찍 기술에 눈을 떴고 기존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한 예로 레이저 공장의 기술자였던 아버지는 스티브가 대여섯 살 때부터 차고에 있는 작업대에서 같이 일하자고 말했다고 한다.
스티브가 다섯 살 되던 해에 잡스 가족은 나중에 실리콘 밸리라고 불리게 될 지역의 중심에 위치한 마운틴 뷰로 이사하게 된다. 스티브는 "주변에 엔지니어들이 넘쳐났었죠."라고 회상하면서, "그 곳은 유년기를 보내기엔 세계에서 최고였어요."라고 덧붙였다. 스티브의 이웃이었던 래리 랭은 당시 HP의 엔지니어였는데, 자신의 전자공학에 대한 열정을 스티브에게 전해주게 된다. 스티브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 후론 어떤 제품을 보더라도 더 이상 신비하게 느껴지지 않았죠. 물건들은 사람이 작업한 결과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 겁니다. 그건 제게 아주 강한 자신감을 심어 주었습니다. 배움과 발견으로 인해 복잡해 보이던 것들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그는 전자공학에 대한 열정이 피어오르는 흥분을 느끼며 성장한다.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아도 '전문가들' 곁에서 그런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훌륭한 학문을 쌓지 않고도 천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가 기억하는 학교와의 첫 접촉은 고통스러운 것이었고, "처음엔 무척 힘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어린 시절의 스티브는 선생님의 수업을 잘 듣는 아이가 아니었다. 매우 자립심이 뛰어났던 그는 겉보기에는 주의가 산만한 학생같았다. 그러던 그가 4학년이 되었을 때 선생님이었던 힐 여사가 그를 눈여겨보게 된다. 후일 스티브는 그녀를 "내 인생의 성녀 중 한 분"이었다고 회고하게 된다. 전체적으로 힐 선생님과 함께 했던 그 해는 당시 채 열 살도 되지 않았던 스티브가 비범한 인성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학문적 측면에서 볼 때 저는 일생동안 배운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그 한 해 동안에 배웠습니다."
기술과 달리 학업은 그에게 계속해서 열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던 것 같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홈스티드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열일곱 살 때, 잡스는 HP의 컨퍼런스에 참석하기 시작했고, 여름방학 동안 거기서 임시직으로 일하게 된다. 바로 이 때 그는 전자공학의 작은 천재 스티브 워즈니악을 만나게 된다. 후일 잡스는 워즈가 "내가 만난 사람 중 전자공학에 관해 나보다 아는 것이 많았던 첫 번째 인물이었다."라고 회상했다.
1972년 그는 오리건 주의 리드 칼리지에 입학하고, 많은 분야에 관심을 가졌지만 학업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결국 잡스는 입학 6개월 만에 학기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그만둬 버린다(그래서 그에게는 대학 졸업장이 없다). 막 생겨나기 시작한 응용 컴퓨터 산업에 심취한 그는 2년간 아타리 사에서 게임 프로그래머로 일한다. 당시 잡스는 히피의 전형이었다. 매우 독립적이었으며 머리를 반쯤 기른 그의 모습은 어른 같아 보였지만 사회에서 자기 자리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사소한 일거리'로 번 돈으로 인도 여행을 한 후 1974년 가을 캘리포니아로 돌아온 그는, 공동농장에서 몇 개월을 보내고 홈브류 컴퓨터 클럽에서 워즈니악을 다시 만나게 된다. 이 클럽은 컴퓨터광들이 만든 클럽으로서 후일 '해킹'으로 유명해지게 된다.
1976-1984 : 애플의 탄생"사과 : 이 단순한 단어 속엔 고도의 정교함이 내포되어 있다"
- 스티브 잡스
잡스와 워즈니악이라는 성을 가진 이 두 명의 스티브는 공통점이 거의 없었다. 둘 다 테크놀러지의 신봉자였지만 그 배경은 서로 달랐다. 도구는 인간에게 유용하도록 인간에 맞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워즈니악은 생각했다. 그는 전자공학의 신봉자였으며 간단한 기계들을 고안해내는 데 특출한 재능이 있었다. 반면, 잡스는 창조적 예견자(visionary)의 성향을 지녀, 개인용 컴퓨터의 등장이 세상을 바꾸어놓을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예견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매우 보완적인 관계였을 뿐만 아니라 공동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잡스는 워즈니악에게 개인용 컴퓨터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조직적으로 일해야 한다고 설득했고, 잡스의 폭스바겐 버스를 비롯해서 얼마 안 되는 재산을 처분한 뒤 두 친구는 1,300달러를 가지고 모험을 시작한다. 풀타임의 정규직을 가져본 적도 없고 사회생활 경험도 거의 없던 잡스가 워즈니악을 설득해 그들 자신의 회사를 차린 것이다. 한편 잡스는 회사 이름을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인 '애플'로 지었는데, 이로 인해 '바이트(byte)'라는 단어와 회사 이름을 재미있게 연결 지을 수가 있었다. '바이트'는 정보의 최소 단위인 비트(bit)의 집합으로 구성된 컴퓨터의 기본 단위를 의미하지만 한편으로는 깨물어먹다라는 뜻의 'bite'라는 동사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애플 I'은 실제로 혁신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개인용 컴퓨터는 아니었고 사용자가 기술에 대해 많이 알고 있어야 했다. 게다가 두 스티브는 666.66달러에 그들의 '첫 번째 사과'를 판매하는 데 애를 먹었다. 충격적인 숫자(이로 인해 컴퓨터엔 '짐승의 기계'라는 별칭이 붙게 되었다)로 이루어진 이 가격은 흔히 말하듯이 잡스가 심취해 있던 우상파괴적 신비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 두 발명가의 '학생다운 유머 감각'을 잘 드러내주는 것이었다. 애플컴퓨터는 애호가들 사이에서 '훌륭한 예술작품'으로 평가되면서 점점 소문이 퍼지게 되지만 상업적 성공의 길은 멀게만 보였다. 그러나 워즈니악은 벌써 새로운 버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1976년 그는 잡스 집의 차고에서 '애플 II'를 제작하기 시작하여 그 해 가을 작업을 마쳤다.
이때의 2년간(1974년부터 1976년까지)은 잡스에게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이 기간 동안 잡스는 미리부터 CEO로서의 자질을 키워나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열정이 매우 빠르게 전달되며 자신에게 카리스마가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이미 투쟁하는 법을 배웠으며 자신의 주도권을 나타내는 법을 익혔다. 그러나 이 시기는 특히 자신이 정확한 비전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잡스는 세상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길 원했고 자신이 그럴 능력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잡스는 당시 인텔의 마케팅 담당 이사였던 마큘라를 설득해 투자를 받을 수 있었고 애플컴퓨터 주식회사가 도약하게 되는 '제2의 탄생'이 되었다. 당시 잡스의 나이는 21세였다. 몇달 후 이사회 의장으로 선출된 마큘라는 향후 20여 년간 애플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애플 II는 1977년 4월 상용화 되었다. 개인용 마이크로 컴퓨터가 탄생한 것이다. 애플 II는 컴퓨터 산업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특히 애플은 단지 연구소나 컴퓨터실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사무실에서 소형컴퓨터가 사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과 그 장점을 보여줌으로써 하나의 혁명을 일으켰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애플 II에 진정한 애정을 갖고 계속 사용하는 팬들이 수천 명에 달할 정도이다.
1979년은 애플과 잡스에게 매우 중요한 해였다. 회사는 제 모습을 갖추어갔고 재능 있는 엔지니어들을 끌어들이는데, 그 중에는 특히 애플의 31번째 직원이자 '매킨토시' 프로젝트를 맡게 된 제프 라스킨이 있었다. 그는 게임 전용 컴퓨터 제작 계획을 포기하고 '강력하면서도 사용하기 편한 컴퓨터'를 만들자고 마큘라를 설득한다. 그러나 당시 모든 노력은 애플 II의 후속 버전인 '리사 Lisa'의 개발에 집중되고 있었기 때문에 매킨토시 프로젝트는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 해 말, 잡스는 향후 수년간의 흐름을 바꿔놓으며 자신의 '혁명적' 개인용 컴퓨터의 비전을 실현시켜줄 기술을 발견하게 된다. 1979년 11월, 제록스 사의 연구소인 PARC가 연구 중인 기술 가운데서 잡스는 그래픽 인터페이스를 발견한 것이다. 잡스에게 이것은 하나의 계시였다. 자신의 비전을 구체화하는 데 부족했던 무언가를 이제야 발견한 것이다. 개인용 컴퓨터는 하드웨어 측면에서 아무리 혁신적이라 할지라도 사용하기 쉽고 간편해야 했던 것이다. 다음 달 PARC에 다시 찾아가 책임자들에게 애플이 그 기술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설득한다. 그 후로 잡스는 PARC의 기술을 반영한 개인용 컴퓨터 출시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1980년 초, 리사 프로젝트의 작업 계획에 여러 가지 지시사항이 추가되었고, 잡스는 리사 작업팀을 보강하기 위해 제록스의 엔지니어 십여 명을 끌어들이게 된다.
1980년 12월 12일, 애플은 증시에 상장된다. 주식은 1시간 만에 모두 팔렸고 주가는 상장 하루 만에 32% 상승한다. 대주주이자 당시 25세였던 스티브 잡스는 일순간에 백만장자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애플의 성장으로 상황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규모가 커지고 증시에 상장되면서 회사의 성격은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직체계는 비대해졌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내세우는 일은 더 어려워졌다. 재정적 문제들과 경쟁의 압력이 대두됨에 따라 이익 다툼이 생겨나게 되었다. 상업적인 요구들과 인간관계에서 오는 문제들은 두 스티브가 차고에서 누리던 행동의 자유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잡스는 이제 자기가 만든 회사에서 입지를 굳히면서 혁명적인 컴퓨터를 만들어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려야 했다.
1981년 1월, 잡스는 리사가 자신이 꿈꾸는 컴퓨터가 될 수 없으리란 것을 깨닫고 애플 경영진들을 설득하여 매킨토시 프로젝트를 맡게 된다. 그 후 3년간 잡스는 매킨토시 프로젝트를 자신의 생각에 맞도록 고쳐나가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쏟아부었고, 이 과정에서 일부 동료들의 원망을 사기도 했다. 한편 1981년 8월, IBM이 첫 퍼스널 컴퓨터Personal Computer를 출시한다. 혁신적인 것이라곤 전혀 없었고 가격도 애플 II보다 두 배 이상 비쌌지만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로 2년간 백만 대가 팔렸고 첫 글자를 따서 만든 PC가 개인용 컴퓨터의 동의어가 될 정도였다. 1983년 초, 애플은 두 가지의 새로운 컴퓨터를 시장에 출시한다. 약 1만 달러에 출시하여 상업적 실패를 본 리사와 대성공을 거두며 이후 10년 이상 생산된 '애플 IIe'가 그것이었다.
1983년 12월, 매킨토시의 첫 TV광고가 방송된다. 이 광고는 애플의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왔다. 내용이나 형식 면에서 절제되고 혁신적이며 혁명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광고는 IBM에 대한 애플, 즉 골리앗에 대한 다윗의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하고자 했다. 컴퓨터라는 도구는 인간을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유의 원천이 되어야 했고, 그는 모두에 맞서서 홀로 그것을 증명해 보이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세상은 변화할 것이다. 잡스 자신으로 인해서 말이다.
1984년 1월 24일, 맥이 출시되었다. 사람들은 모니터와 마우스를 갖춘 가볍고 작은 크기의 '호감이 가는' 기계를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역사상 처음으로 개인용 컴퓨터가 그래픽 인터페이스를 갖추고 그림과 창을 통해 컴퓨터의 내용을 간단하게 다룰 수 있게 된 것이다. 맥은 컴퓨터 전문가들을 만족시키지는 못했는데 이들에게는 맥이 간단한 장난감 정도로 비쳤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맥이 '비서를 위한 컴퓨터'라고 빈정거리기도 했지만, 맥의 우수성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맥은 컴퓨터에 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컴퓨터의 기능을 선사했던 것이다. 1984년, 애플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세찬 파도에 불을 당겼고, 매킨토시는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상표 중 하나가 되었다. 누가 뭐라 해도 스티브 잡스는 도전에 성공한 것이다.
잡스는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자신의 비전을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일단 프로젝트가 끝나자 그는 비즈니스 세계의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고 첫 번째 고난의 행로가 시작되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던 그는 때로 자신이 회사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잊어버릴 때가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너무 자기중심적이었으며, 협력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애플의 임원들 사이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1985년 여름 애플은 창립 후 처음으로 분기 적자를 기록했고 잡스가 채용했던 애플의 회장 스컬리의 거센 공격이 시작되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그 이사회가 열린 지 며칠 만에 잡스는 애플의 운영진에 의해 모든 직위가 해제된다. 그의 공식적인 지위는 그 때부터 아이러니컬하게 'Global thinker'가 되었다. 그는 한 사무실에 고립되었는데, 그 후로 이 방은 사내에서 '시베리아'라고 불렸다. 잡스가 그 자신의 회사에서 '유배'된 것이다. 1985년 9월 17일, 잡스는 사표를 제출한다.
1985-1995 : 새로운 모험을 향해"스티브 잡스는 이미 잘 만들어진 자신의 전설에 아마 한두 장을 덧붙이게 될 것이다."
- 비즈니스위크, 1988년 10월 24일
애플에서 잡스가 보낸 마지막 몇 달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운명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렇게 쫓겨난 것에 대해 약간은 상처받은 듯 보였으나, 우리가 상상하듯이 그는 당하고만 있을 사람은 아니었다. 이번에도 역시 그 유명한 1979년의 PARC 방문이 그에게 안내자 역할을 했다. 잡스는 이렇게 회상한다. "당시에 그들은 작업 중이던 세 가지 일들을 제게 보여주었어요. 그런데 저는 첫 번째 것만을 보고는 너무나 놀라 눈이 멀어버려서 나머지 두 가지를 그만 놓쳐버렸던 거죠. 그걸 다시 발견하기까지는 여러 해가 걸렸어요. 그 세 가지는 그래픽 인터페이스, 객체지향 컴퓨터 그리고 네트워크였지요."
특히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문제가 한 가지 더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교육이었다. 애플 초기부터 잡스는 자신이 '교육상의 문제'라고 판단한 문제에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1995년에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더 이상 아이들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죠. 우린 미국의 전 학교에 컴퓨터를 한 대씩 기증하고 싶었어요." 교육에 대한 잡스의 높은 관심은, 너무 폐쇄적이고 비혁신적인 교육체계에 대한 혐오에서 생긴 것 같다. 어쨌든 잡스는 애플을 떠나면서 다시 한 번 교육시장을 공략해서 아직은 뭔가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1986년 2월 그는 한 주를 제외하고 자신이 보유한 모든 애플 주식을 팔아버린다. 잡스의 삶은 이제 애플을 떠나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것이다.
1986년 말, 31세의 잡스는 자신의 두 번째 회사인 넥스트 NeXT를 창립하고 컴퓨터의 사양을 교육시장에 적합하도록 만들기 위해 여러 대학들과 공동으로 작업한다. 항상 그랬듯이 잡스는 컴퓨터의 구상과 디자인에 관련된 모든 세부 사항에까지 참견을 했고 역시나 거칠고 완강해 보였다. 1988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