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CEO에서 위대한 인간으로
앤드루 카네기 지음 | 21세기북스
어린 시절나는 1835년 11월 25일, 던펌린의 무디 거리와 프라이어리 거리가 만나는 길모퉁이의 조그마한 단층집 다락방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가난하지만 정직한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던펌린은 오랫동안 스코틀랜드 직조업의 중심지로 유명했던 곳이다. 나의 아버지 윌리엄 카네기는 직조업자였으며, 내 이름은 할아버지인 앤드루 카네기의 이름을 따라 지은 것이다.
할아버지는 위트와 유머감각이 뛰어나고 성품이 온화하면서도 활달한 기상을 지녀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져 있었다. '오리를 백조로' 변화시켜가며 고난을 떨쳐버리고 한평생 웃으며 살아온 나의 낙천적인 기질은 이 유쾌한 노인에게서 유전된 것이 아닌가 싶다. 외할아버지는 더 유명한 분이었다. 외할아버지 토머스 모리슨은 타고난 연설가이자 예리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지방 급진 정당의 진보 세력을 이끌었는데 후일 외삼촌 베일리 모리슨이 그 뒤를 이었다. 나는 조상들뿐만 아니라 태어난 장소에 있어서도 운이 좋았다. 사람이 어디에서 태어나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장소에 따라 각기 다른 환경과 전통이 그 사람 안에 잠재되어 있는 기질을 자극하여 개발하기 때문이다.
던펌린은 오랫동안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진보적인 도시로 알려져 왔다. 정치적 집회가 자주 열렸는데 집회의 연사가 주로 아버지 아니면 삼촌들 중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는 흥미를 갖고 자주 참석했다. 나는 '특권 철폐', '평등', '공화주의' 등 정치계를 동요시킨 급진적 이념들과 함께 다양한 신학적 논쟁을 들으며 자랐는데 이때의 이러한 논쟁과 토론이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어른들은 아마 잘 몰랐을 것이다.
수동식 직조기가 증기식으로 바뀌면서 우리는 큰 타격을 입었다. 아버지는 다가오는 산업혁명의 기운을 읽지 못하고 재래식을 고수했다. 얼마 후에 나는 가난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비열하지도 비굴하지도 비천하지도' 않았던 아버지가 이제 '지상의 형제에게 일거리를 구걸'해야 한다는 사실이 내 폐부를 찔렀다. 그때 나는 결심했다. 커서 어른이 되면 가족에게 이런 가난을 면하게 해주겠다고. 그때 어머니가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우리는 다 알지 못했다.
아이들을 다루는 데 특별한 재능이 있었던 로더 이모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셨다. 이모부가 영국 역사를 가르쳐주실 때의 일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스코틀랜드의 초기 역사에 대한 나의 지식은 모두 로더 이모부에게서 배웠다. 아마도 그때 그 장소에서부터 내 혈관에 스코틀랜드의 피가 흐르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의 소년으로서 나는 애국심이 대단했으며, 이는 평생 내 삶을 지탱해주는 힘이 되었다. 내 안에 있는 용기의 근원은 스코틀랜드의 영웅 윌리스이다. 소년에게 숭배할 영웅이 있다는 것은 커다란 힘의 원천이 되어준다.
던펌린과 미국가난하지만 정직한 집안의 아이가 부유한 집안의 아이보다 더 좋은 점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유모와 요리사, 가정교사, 선생님, 성인을 한데 합쳐놓은 것 같은 어머니와, 역할모델 겸 안내자이자 상담가 겸 친구인 아버지를 갖는다는 것! 어머니는 대단한 독서가여서 늘 책을 가까이 하셨고, 매일 아침 서재에 들어가 기도를 드리는 아버지의 모습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내 동생과 나는 이런 부모님 밑에서 자라났다. 백만장자나 귀족의 자녀들도 이런 귀중한 유산을 물려받지는 못할 것이다.
내 생애 최초의 사업은 동물들의 집을 지어주신 아버지 덕분에 비둘기와 토끼를 기를 수 있게 되면서 이루어졌다. 나는 새끼가 태어나면 그들의 이름을 붙일 수 있게 해준다는 조건으로 친구들에게 토끼 먹이를 모아 오게 했는데, 이 일은 나의 조직력을 보여준 최초의 사건이 되었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조직력은 훗날 내게 물질적 성공을 가져다준 주요 요인이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무엇을 알거나 스스로 무언가를 해서가 아니라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을 뽑아 쓸 줄 알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누구나 알아두어야 할 귀한 지식이다.
증기식 기계의 도입으로 인해 던펌린의 중소 제조업자들은 점점 더 고전하게 되었다. 결국 부모님은 미국행을 결정하셨는데 내 기억으로는 부모님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 어린 두 아들을 위해 미국행을 결심하신 듯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1848년 5월 17일 던펌린을 떠나게 되었다. 그때 내 나이는 열세 살이었다. 피츠버그의 친척들은 우리의 도착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고 우리는 그들의 따뜻하고 애정 어린 환영에 그간의 고생을 잊을 수 있었다.
피츠버그와 취직이제 가장 커다란 문제는 내가 할 일을 찾는 것이었다. 갓 열세 살을 넘긴 나는 미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가족의 생계를 돕기 위해 일거리를 찾으려고 애썼다. 가난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아버지가 면직물 공장에 들어가시게 되면서 내게 같은 공장의 얼레잡이 일자리를 구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주급 1달러 20센트를 받고 첫 직장에 출근하게 되었다. 시간은 더디고 일은 재미없었지만 가족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데에 자부심을 느꼈다. 훗날 나는 수백만 달러를 벌었지만 그런 거금도 최초의 주급을 탔을 때의 그 행복감만은 못했다. 이제는 부모님에게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나도 가정 경제의 한몫을 감당하게 된 것이다.
1850년 초의 어느 날 저녁, 직장에서 돌아와 보니 좋은 소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신국 국장인 데이비드 브룩스 국장이 전보를 배달할 소년을 구한다는 소식이었다. 면접은 성공적이었고 언제부터 나올 수 있느냐는 물음에 필요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시작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이를 붙잡지 못하는 것은 큰 실수이다. 일자리가 주어졌을 때 머뭇머뭇하다가는 무슨 일이 생겨 일을 못하게 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일자리를 빼앗길 수도 있다. 나는 일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바로 일을 시작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리하여 나는 본격적으로 인생의 첫발을 내디디게 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거의 매순간 무언가를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모르는 것이 많고 배워야 할 것이 많은지를 알게 되었다. 사다리의 제일 아래 칸에 서 있다고 느껴졌다. 이제 사다리를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나는 전보 배달을 하며 피츠버그의 주요 인사들을 알게 되었으며 이 시절에 평생의 친구들을 만났다. 훗날 앨러게니 계곡 철도회사의 감독관으로 유명해진 데이비드 매카고와 훗날 내 뒤를 이어 펜실베이니아 철도회사의 피츠버그 지부 감독관이 된 로버트 피트케른이 그 친구들이다. 그 무렵의 전보 배달부 소년들에게는 어른들의 칭찬과 인정을 많이 받을 수 있어서 즐거운 일이 많았다. 영리한 소년이 성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사람들의 인정이었기 때문이다.
앤더슨 대령의 장서즐거운 일도 많았지만 전보 배달 일은 몹시 힘이 들었다. 이틀에 한 번 꼴로 야근을 해야 했는데 그런 날은 11시가 다 되어 집에 돌아가곤 했다. 따라서 자기계발을 할 시간도 별로 없었고 책을 사 보자니 집안 형편이 허락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이 내려주신 축복처럼 책의 보고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제임스 앤더슨 대령이 400권의 장서가 갖추어진 자신의 도서관을 소년들에게 개방한 것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나의 토굴에 창문이 열리고 지식의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매일 일에 지치고 장시간 야근을 해도 책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가벼워졌다.
후일 행운의 여신이 내게 미소지었을 때 내가 행한 최초의 일 중 하나는 대령의 기념비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 기념비는 현재 다이아몬드 스퀘어의 회관과 도서관 앞에 세워져 있다. 나는 소년 시절의 경험을 통해 자질과 재능과 야망을 지닌 소년소녀들을 돕는 방법으로 공공 도서관을 지어 널리 사용하게 하는 것 이상 좋은 일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도서관에서 단 한 명의 소년이 내가 앤더슨 대령의 손때 묻은 장서 400권에서 얻은 것의 절반만큼이라도 유익을 얻는다면 그 도서관은 헛되이 지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신국전보 배달부 소년들은 아침에 기술실 청소를 해야 했기 때문에 전신 기사들이 출근하기 전에 전신 기기들을 만져볼 수 있었다. 내게 이것은 새로운 기회였다. 나는 곧 키를 조작하여 나와 같은 목적으로 기계를 만지는 다른 전신국 소년들과 통신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이 무언가를 배우면 오래지 않아 그 지식을 활용할 기회가 오는 법이다. 오래지 않아 나는 가끔 전신 기사가 외출할 때 그를 대신하여 통신 기기를 다루게 되었고 곧 능숙해졌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을 하다보니 오래지 않아 월 25달러라는 거액의 급료를 받고 전신 기사로 승진하게 되었다. 지식이란 어떤 식으로든 유용하게 쓰이게 마련이다.
내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또 한 가지 사건은 '웹스터 문학회'에 가입한 일이다. 문학회는 엄선된 회원으로 구성되었고 결속력이 강했으며, 우리 모두에게 참으로 유익한 모임이었다. 나는 모임에서 있을 토론을 준비하기 위해 많은 책을 읽었고 이를 통해 보다 명확한 사고를 할 수 있었다. 훗날 청중 앞에서 침착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웹스터 문학회에서의 훈련 덕분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다음의 두 가지를 연설할 때의 규칙으로 삼고 있다. 첫째는 청중 앞에서 마음을 편히 갖는 것이고, 둘째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철도회사나는 얼마 후에 토머스 A. 스콧이라는 비범한 인물을 알게 되었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철도회사의 피츠버그 지부에 감독관으로 파견되어 있었는데, 몇 번의 인연을 계기로 나는 1853년 2월 1일, 월급 35달러를 받기로 하고 스콧의 사무원 겸 전신 기사가 되었다. 스콧은 더할 나위 없이 바람직한 상사였으므로 나는 곧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는 위대한 인물이었고 그의 밑에서 많은 일들을 익힐 수 있었다. 젊은이가 높은 사람과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게 되면 이미 인생의 싸움에서 반은 승리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모든 소년은 자신이 하는 일의 범위를 넘어서 윗사람의 주목을 받을 만한 일을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내 경력을 망쳐버릴 뻔한 사건이 발생했다. 임금 대장과 수표를 가져오라는 지시를 받고 피츠버그로 돌아오던 중 기차가 흔들린 사이 수표를 잃어버린 것이다. 기관사에게 부탁하여 열차를 되돌렸고, 운이 좋게도 강둑 위에 떨어져 있는 수표 봉투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수표가 만약 강물 속으로 가라앉았더라면, 나는 한순간의 부주의로 땅에 떨어진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또 얼마나 여러 해를 애썼을지 모른다. 그때 이후로 나는 젊은이들이 한두 가지의 큰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심하게 책망하지 않게 되었다.
이 시기에 우리 가족의 경제 형편은 꾸준히 나아지고 있었다. 우리는 가족회의를 열어 작은 목조가옥 두 채가 있는 땅을 매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자와 원금을 갚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도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우리는 슬픔 속에서도 일을 해야 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내 책임은 더욱 막중해졌다. 바로 그 무렵 행운의 여신이 우리 집 문을 노크했다. 스콧이 내게 500달러 정도 여유가 있으면 투자를 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한 것이다. 투자할 여유 자금이라곤 50달러도 없었지만 훌륭한 지도자와 재정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우여곡절 끝에 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것이 나의 첫 번째 투자였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책상 위로 배달된 10달러 짜리 수표는 땀 흘리지 않고 자본을 통해 벌어들인 최초의 수입이었다. 그리고 그 후로도 몇 년 동안 적은 금액이나마 친구들과 공동으로 투자를 했다.
펜실베이니아 철도회사의 총감독1856년, 스콧이 펜실베이니아 철도회사의 총감독으로 승진이 되었기 때문에, 23세의 나는 그를 따라 알투나로 가게 되었다. 스콧은 승진하면서 주변의 질시를 받았다. 게다가 부임 초기에 노동자들의 파업을 겪어야 했다. 파업 사태는 갈수록 심각한 양상을 띠었지만 피츠버그 시절 나에게서 작은 친절을 받았던 한 노동자의 도움으로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었다. 나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이런 일을 여러 번 경험하였다.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베푼 약간의 관심과 친절은 나중에 큰 보답으로 돌아온다. 작은 친절에는 전혀 사심이 깃들어 있지 않으며, 형편이 넉넉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감사를 받는다는 점에서 그 보상은 더욱 크다.
어느 날 스콧과 함께 알투나에서 보낸 2년 동안에 있었던 일 중 가장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 침대차라는 문명세계의 필수품을 발명한 T. T. 우드러프를 만나게 된 것이다. 침대차에 대한 설명을 듣고는 좀처럼 그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을 정도로 흥분했다. 이후 그는 내게 이권의 8분의 1을 줄 테니 이 새로운 사업을 같이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해왔고 나는 받아들였다. 이는 내가 거금을 벌어들인 최초의 사업이었다. 이후 생활에 중요한 변화가 생겼다. 우리끼리만 살던 생활에서 벗어나 하인을 두기로 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아들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해오신 어머니가 앞으로는 더 많은 시간을 독서에 할애하고 친구들과도 더 자주 왕래하며 편안한 삶을 누리게 해드리고 싶었다. 마침내 설득당한 어머니는 우리와 함께 외출을 하고 이웃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스콧은 알투나에서 근무한 지 3년쯤 되던 1859년 부사장이 되어 필라델피아로 옮기게 되었다. 스콧과 헤어지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데 그 대신 다른 상사를 모셔야 한다는 생각에 견딜 수 없었다. 그때 스콧은 조용한 방으로 나를 불러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 이제 자네 문제인데, 자네 피츠버그 지부를 맡을 수 있겠나?" 나는 당시 겨우 스물네 살이었지만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이였다. 나는 승낙했고, 65달러의 월급을 받다가 월 1500달러를 받는 한 지부의 책임자가 되었다. 피츠버그 지부장으로서의 나는 가장 이해심이 없고 몰인정한 감독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책임감 때문이었겠지만, 나 자신이 지칠 줄 몰랐기 때문에 인간의 인내의 한계를 고려하지 않고 직원들에게 과도하게 일을 시켰다.
남북전쟁 시기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전쟁차관으로서 수송부를 담당하고 있던 스콧의 부름을 받고 워싱턴으로 갔다. 나는 내게 많은 것을 준 조국을 위해 일할 수 있게 된 것을 영광으로 여기며 남부와의 교통을 확보하기 위해 정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다. 그 후로 나는 스콧 대령과 함께 전쟁 사무국 건물에서 일하게 되었다. 철도뿐 아니라 전신사무도 맡고 있었으므로 정계의 유력 인사들을 볼 기회가 더러 있었다. 링컨 대통령은 사람을 차별하는 법이 없어 사환을 대할 때나 시워드 장관을 대할 때나 태도와 어조가 한결같았다. 잘난 체하는 면이 전혀 없다는 것이 그의 매력이었다. 나는 위인들 중 링컨처럼 모든 사람을 이해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주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행동과 말로 평등을 실천한 링컨은 가장 완전한 민주주의자였다. 전쟁이 길어지게 되자 지속적으로 사무를 맡아줄 담당관이 필요해졌고, 스콧과 나는 워싱턴의 담당 부서를 다른 사람들의 손에 맡기고 회사의 각자 위치로 복귀했다.
교량 건설1863년 나는 몇 명의 동업자와 함께 만든 파이퍼앤드쉬퍼회사를 키스톤 교량회사로 재조직했다. 목재 대신 철로 만들어진 튼튼한 교량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다. 키스톤 교량회사는 늘 만족스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