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 타협은 없다
케빈 매이니 지음 | 21세기북스
제1장 매버릭 탄생하다1903년 내셔널 캐시 레지스터 컴퍼니(NCR)의 패터슨과 2인자인 채머스(Hugh Chalmers)가 왓슨을 데이턴 시로 불러들여 자신들이 추진하고 있는 계획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왓슨에게 NCR 자회사로 중고 금전등록기 회사를 세워줄 것을 제안했다. 목적은 채머스와 패터슨이 설명한 대로 중고 금전등록기 시장 전체를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었다. 당시 중고 금전등록기가 NCR의 신제품 수익을 갉아먹고 있어 회사에 타격을 입히고 있었고 금전등록기 시장에 대한 NCR사의 통제력을 약화시켰다.
왓슨은 NCR의 자금으로 세컨드 핸드 캐시 레지스터 컴퍼니라는 위장 회사를설립했다. 왓슨은 NCR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임무를 잘 수행했다. 그리고 사업에서 성공을 거두자 사업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됐다. 1908년에는 NCR 본사에서 영업부 부책임자라는 유망한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패터슨은 1910년에는 왓슨을 영업부 부책임자에서 영업부 책임자로 승진시킴으로써 200개가 넘는 지점에 900명 이상의 영업사원을 다루는 임무를 그에게 맡겼다. 영업사원들은 왓슨을 위해 충성스럽게 일했다. 판매실적이 좋고 영업사원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던 왓슨은 NCR의 스타가 되었다. 왓슨은 1912년까지 데이턴에서 중고 금전등록기 사업을 운영했고 NCR에서 영향력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912년 2월 22일 아침, 데이턴 시에 사는 사람들은 신문을 펼쳤을 때 모두 놀랐다. 데이턴 데일리 뉴스 제일 첫 면 헤드라인에 "NCR 직원 연방 대배심에 기소되다." 신시내티에서는 뉴스 첫 단락에 "데이턴 시 소재 내셔널 캐시 트러스트 컴퍼니 임직원 30명이 셔먼 반독점법 위반 혐의로 이곳 연방 대배심에 기소되었다."라고 기술했다. 두 단락 아래에는 기소된 사람들의 명단이 있었다. 명단의 제일 첫 번째는 패터슨이었고 몇 개 이름이 지난 다음에는 왓슨이 있었다.
정부는 30명의 피고인을 세 가지 혐의로 기소했다. 첫 번째 기소내용은 공정거래를 위반하여 NCR이 금전등록기 업계에서 다른 경쟁업체들을 몰아냈다는 것이다. NCR은 경쟁업체 직원들에게 뇌물을 먹였고 운송 회사와 통신 회사에도 뇌물을 써서 주문이 누락되게 하거나 운송 중 제품에 손상을 입히도록 했다는 것이다. 기소장에 따르면 또한 NCR에서는 경쟁업체 신용에 손상을 입히고 경쟁 제품을 중상모략한 혐의가 있다고 했다. 두번째와 세번째 기소내용은 그러한 방법으로 금전등록기 사업을 독점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1913년 2월 13일 에드가 파크를 제외한 모든 피고인이 세 가지 기소내용에 모두 유죄인 것으로 평결이 내려졌다. 이 일은 결과적으로 왓슨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재판과 재판 결과는 왓슨에게 개인의 일이나 성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었다. 또한 자신이 자기중심적이고 부정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보여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러한 재판을 겪지 않았다면 왓슨은 IBM을 건설한 위대한 리더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NCR측 변호사인 존 밀러는 즉시 항소했다. 판사는 피고인들을 보석금 5000달러에 풀어주고 선고를 연기했다.
1913년 4월 17일에 왓슨은 재닛과 결혼했다. 왓슨 부부는 웨스트 코스트로 신혼여행을 떠났고, 몇 주일 후 왓슨 부부가 다시 데이턴에 돌아오자 패터슨은 깜짝 놀랄 결혼 선물을 선사했다. 데이턴 외곽에 패터슨 농장으로 사용하는 주택 근처에 집을 한 채 선사한 것이다. 재판 이후 우울한 날들과 비교해서 모든 일이 갑자기 순조롭게 풀리는 듯했다. 그러나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왓슨에게 호의를 베풀던 패터슨이 곧 마음을 바꿔 왓슨을 해고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왓슨은 재닛을 데이턴에 남겨둔 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뉴욕으로 떠났다.
제2장 플린트와 만나다1911년에 플린트는 '컴퓨팅 스케일','태뷸레이팅 머신 컴퍼니','인터내셔널 타임 레코딩 컴퍼니'을 하나로 합병하고 뉴욕 엔디콧에 본사를 두었다. 플린트는 컴퓨팅 태뷸레이팅 레코딩 컴퍼니(Computing-Tabulating-Recording Company:C-T-R)라는 이름만으로는 어떤 회사인지 상상하기 어려운 이름으로 합병된 회사를 불렀다. 그러나 회사는 잘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많은 부채를 안고 시작했고 회사는 엔디콧, 데이턴, 워싱턴, 디트로이트,뉴욕에 퍼져 있었다. 규모를 키운 장점과 트러스트가 시장에서 가지는 장점을 살리지 못했으며 세 회사의 경영자들은 서로 무시하고 대립했다. 1914년에 플린트는 누군가 새로운 인물을 영입하여 회사를 구해낼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4월에 플린트와 왓슨은 계약을 체결했다. 플린트는 왓슨을 사장이 아닌 총책임자로 임명했다. 자기 자리를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왓슨이 최고 경영자 역할을 했다. 왓슨이 취임하고 첫해에 C-T-R은 더욱 어려워졌다. 자금은 고갈되고 봉급은 6개월이나 체불되었다. 왓슨은 C-T-R 조직에 대해 깊이 연구했고 플린트가 많은 회사들을 합병함으로써 혼란스러운 구조가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일부 자회사들은 빈 껍데기였고, 이른바 제조 공장이라는 것은 단지 연장 창고에 지나지 않았다. 왓슨은 회사를 합리적인 구조로 바꾸기 위해 노력했고 재정적인 압박을 완화시켰으며 실험 부서에 기술자들을 고용했다. 그리고 빨리 인쇄할 수 있는 천공카드 작성기를 설계하도록 했다. 그러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어떤 사업부를 매각한다든가 하는 과격한 조치는 절대로 취하지 않았다. 오래된 경영진을 해고하지도 않았고 자기 사람을 데리고 오지도 않았다. 왓슨이 데려온 사람은 단지 NCR을 같이 나온 휴스턴과 로저스뿐이었다.
1914년 가을, NCR측 변호사는 반독점 판결에 대한 항소를 신시내티 항소심 법원에 제기했고, 항소심은 4개월 동안 진행됐다. 1915년 3월 13일 토요일 오후 12시10분, 아서 키트리지는 왓슨에게 전보를 보냈다."원심 판결 파기됐음. 새 판결이 내려졌음.축하함." 이 전보를 통해 왓슨은 처음으로 판결 내용을 알게되었다. 월슨 정부는 다시 항고할 수도 있었지만 대신에 피고인들에게 타협안을 제시했다. 정부는 패터슨과 다른 피고인들이 서명하기만 하면 다시 항고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모든 피고인들이 서명했지만 왓슨은 하지 않았다. 왓슨은 서명하면 죄를 인정하는 것이라며 자신은 어떠한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했다. 3월 15일 월요일에 C-T-R 이사회가 소집되어 왓슨을 사장으로 지명했다.
제3장 C-T-R이라는 이름의 회사왓슨이 처음 왔을 때 C-T-R에는 눈에 띌 만한 문화가 없었다. 여러 부문 각각이 단지 자신들만의 고유한 방식을 갖고 있었을 뿐, 각각의 구성단위를 결합시킬 문화적인 응집력이 없었다. 그래서 NCR에서 온 완고한 왓슨은 자신의 문화를 C-T-R에 심었다. 그 문화가 후에 왓슨이 미국 비즈니스의 발전에 공헌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그것은 옷차림새를 비롯해 겉모습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중요한 사람을 만날 때는 그 사람처럼 입어야 한다." 그것은 영업의 일환이며,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의 일부였다. 그러나 왓슨은 옷치장을 과하게 하거나 번지르르한 조끼 또는 장신구를 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고객이 당신의 멋진 회중시계가 아니라 당신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라."
왓슨이 C-T-R에 오래 있게 될 것이고, 왓슨의 인정에 따라 회사 내에서의 출세 여부가 좌우된다는 것이 직원들에게 분명해지면서 왓슨식 옷차림새가 회사 전체에 전파되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C-T-R에서는 보수적인 정장 차림이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복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직원들은 왓슨의 개인적인 습관과 신념에 주목하고 그것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왓슨이 알코올에 관한 규칙을 정했든 아니든 간에 금주는 사실상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C-T-R에서는 그 누구도 업무 중 술을 마신다거나, 술을 마신 다음에 고객 앞에 나서는 법이 없었다. 심지어는 직장 밖에서 사적으로 술을 마시는 것조차도 위험했다.
음주문제와 복장문제 외에도 왓슨은 자신의 개인적인 가치를 회사에 불어넣었다. 왓슨은 옛날 직장인 NCR의 문화를 자신의 내면에 지니고 있었고, 그것을 여러 모습으로 C-T-R에 옮겨 심었다. 왓슨은 패터슨의 100포인트 클럽의 아이디어를 빌려와 C-T-R에서는 100퍼센트 클럽을 만들어냈다. 자신의 할당량을 달성하거나 초과한 영업사원은 그 해에 클럽의 회원이 되어 일주일 간의 연례회의에 참석하는 것이 두 회사 모두 같았다. 결국 왓슨은 사원전용 컨트리클럽, 교육 훈련을 위한 연수원 그리고 정보 기관지로서의 역할을 하는 사보 등 NCR의 여러 가지 문화적 소산을 재건했다.
1917년에 왓슨은 C-T-R을 재정비하고 합리화하려는 시도를 하면서, 세 개의 캐나다 자회사를 하나로 통합시켰다.그리고 C-T-R 캐나다라고 부르는 대신 인터내셔널 비즈니스 머신스(International Business Machines)라는 새 이름을 붙였다. 그 이름은 해외 영업을 포괄하게 되었고, 1923년에 왓슨은 C-T-R의 중남미 자회사에도 이 이름을 붙였다.왓슨은 이 이름을 좋아했다. 이 이름은 진로를 가로막지도 않았고 거대 조직다운 느낌이 있었다. 1924년 2월 5일 왓슨은 뉴욕증권거래소에 '인터내셔널 비즈니스 머신스(IBM)'를 상장하는 신청서를 제출했고, 이로써 C-T-R은 사라졌다.
제4장 젖먹이 IBM을 기르다태뷸래이팅Tabulating 머신은 전문가 외에는 아무도 해독할 수 없는 특수한 언어를 사용하여, 즉 직사각형의 카드에 구멍을 뚫어 정보를 입력하기 때문에 그 기계는 점차 '천공카드기계(punch card machines)'로 알려지고 있었다. 그때까지 태뷸레이팅 머신 같은 것은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각 산업에서 막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단계였기 때문에, 1920년대에 그 분야는 새로운 아이디어에 활짝 개방되어 있었다.
이런 이유로 왓슨은 자신이 가장 먼저 '데이터처리(data processing)'라고 부른 분야에 점점 더 관심을 돌렸다. 당시 50대였던 왓슨은 데이터처리에 관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내길 즐겼으며,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자신의 엔지니어팀에 그 아이디어를 수류탄처럼 떨어뜨렸다. 왓슨은 점점 더 많은 시간을 천공카드기계의 개선방안, 적용방안, 판매방안 들을 생각하는데 들였다. 왓슨이 몰두하는 것이 곧 회사 내 다른 사람들이 몰두하는 것이었다. 그는 더 많은 관리시간, 더 많은 기술인력, 더 많은 자금을 천공카드기계에 할애했다. 데이터처리는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기술이라는 것을 왓슨은 깨달았다. 명석한 엔지니어들은 천공카드기계를 개선할 수 있을 것이고, 똑똑한 세일즈맨은 그것을 이용할 새로운 분야와 새로운 고객을 찾아낼 것이었다, 최고의 연구 개발과 최고의 마케팅을 지원할 수 있는 기업은 어떠한 경쟁자라도 이겨낼 수 있었다. IBM은 그 두 가지를 모두 할 수 있는 유일한 회사였다.
1920년대 말의 급상승하는 주식시장에서 IBM은 스타로 부상했다. 주가의 상승 수준으로 볼 때, 1927년 주당 85달러였던 주가가 1929년에는 573달러 75센트로 폭등한 미국 라디오 회사(Radio Corporation of America, RCA)를 대적할 수는 없었지만 IBM은 수많은 투자자들을 행복하게 그리고 부유하게 만들었다. IBM의 주식은 1927년 주당 54달러로 시작했다. 1929년 최고치일 때 주가는 4배 이상 뛰었다. 회사는 성장으로 활기를 띠었다. 1929년 1월부터 9월까지 이익은 1928년의 같은 기간보다 29퍼센트 증가했다.
IBM은 엔디콧과 데이턴에 공장을 운영했고 캐나다 토론토, 독일 진델핑겐,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에 생산기지를 두었다. IBM은 저울, 육류분쇄기, 시계, 직원 시간기록계, 쿠폰 인쇄기, 태뷸레이팅 머신, 분류기, 천공기, 천공카드를 판매했다. IBM은 아직 미국 산업에서 특별히 큰 존재는 아니었지만 다른 회사들이 당할 수 없는 에너지와 활력으로 좋은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제5장 도전과 행운1929년 10월 24일 '검은 목요일(Black Thursday, 1929년 10월 24일 뉴욕주식시장이 대폭락한 날을 말하는 것으로 1930년대 세계공황의 발단이 되었다)'에 시장이 과대평가되었다고 결정을 내린 투자자들과 투기꾼들은 이성을 잃었다. 1929년 11월 18일 월요일, 왓슨은 본사 중역 회의를 소집했다. 왓슨은 현재 회사가 처한 상황을 자세히 밝혔다. 향후 사업 전망이 좋지 않다는 점을 인정했다. 모든 미국 기업이 그의 말처럼 '일시적침체'를 경험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IBM은 가만히 앉아 무기력하게 운명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회사를 키울 수 있는 방안을 찾으려 했다. 그는 다음 같은 두 가지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첫째, 공장을 계속해서 운영하고 감원을 실시하지 않는다. 둘째, 전 세계 대부분의 기업이 연구개발비를 대폭 삭감하고 있지만 IBM은 연구개발비를 늘린다. 이러한 결정은 회사를 망하게 할 수도 있는 위험한 결정이었다.
왓슨은 IBM이 대공황을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었다. 기업회계 부문의 5퍼센트만이 기계화되어 있기 때문에 아직도 시장 잠재력은 충분하다고 보고 있었다. 분명 불황기에도 계속해서 기계를 팔 수 있는 여지는 있었다. 왓슨은 또한 기업들이 지금은 IBM에서 생산하는 기계의 구매를 미루고 있지만 경기가 살아나면 수요가 살아날 것으로 전망했다. 경기가 살아나 기업들이 다시 IBM의 기계를 구입하기로 결정한다면 잠재된 수요가 폭발할 것으로 예상했다. 따라서 왓슨은 IBM이 폭발하는 수요에 부응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왓슨은 공장에서 기계와 부품을 계속 생산해 재고가 충분히 확보되도록 했다. 사실 1929년과 1932년 사이에 왓슨은 IBM의 생산 능력을 33퍼센트 증가시켰다.
왓슨은 대공황이 곧 끝날 것으로 기대했지만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창고에 쌓여만 가는 제품과 부품 재고는 커다란 재정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드디어 궁지에 몰린 왓슨에게 IBM을 구할 수 있는 커다란 행운이 찾아왔다. 1935년 8월 14일 루스벨트 대통령은 사회보장법에 서명했다. 어떠한 법안도 사회보장법만큼 정보 처리에 대한 수요를 폭발적으로 증가시킨 전례가 없었다. 회계 기계에 대한 수요가 하루아침에 급증하였고, 모든 사업장에서 회계 기계를 추가로 구입해야 했다. 회계 기계를 사용하지 않던 기업들도 기계가 필요하게 되었다. 정부는 대량으로 기계를 주문했다. 이러한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기업은 IBM 하나뿐이었다. 창고에는 재고로 쌓아둔 기계와 부품, 부속 장치가 가득했고 100퍼센트 가동 중인 공장에서는 즉시 더 많은 제품을 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IBM은 연구 개발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고 새로운 제품을 계속해서 출시해왔기 때문에 다른 경쟁사에 비해 성능이 우수한 기계를 생산할 수 있었다. IBM은 뉴딜정책의 회계부문 사업 담당 업체로 선정되었다.
이 기간에 IBM은 급성장을 거듭했다. 연매출은 1934년 1900만 달러에서 1935년 2100만 달러로 급증했다. 성장 행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36년에는 2500만 달러, 1937년에는 3100만 달러를 기록했다. 이후 45년 동안 IBM의 매출은 끊임없이 증가했다. 이때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IBM은 데이터처리 산업을 완전히 장악했다.
제6장 친구, 영웅 그리고 예스맨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