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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라

Toshio Hosogai 지음 | 성안당
Chapter 1. 모든 것은 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 셈에 대한 끝없는 도전



컴퓨터 탄생의 도화선, 해석 기관의 창조자 / 찰스 배비지


찰스 배비지는 1719년 12월 26일 영국의 Debon 주 Teignmouth에서 태어났다. 호기심이 강한 소년이었던 배비지는 기계에 흥미를 보였다. 배비지는 1810년 수학의 명문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했다. 배비지는 대학 졸업 후 왕립천문학회에서 천문학상의 계산을 돕게 되었다. 그때, 천문학의 지루하고 방대한 계산을 도와주다가, 기계로 계산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선은 정확한 수표가 필요했다.



1823년 배비지는 차분 기관(Difference Engine - 20자리의 대수 계산용)이라 부르는 계산 기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 기계는 유한 계차법을 사용하여, 사칙 연산뿐만 아니라 다항식의 해(解)를 구하는 것도 가능했다. 유한 계차법이란 다항식의 해를 모두 덧셈으로 구하는 방법이다. 첫 번째 해와 두 번째 해의 차를 구하고,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차를 구하면, 차의 수열을 얻을 수 있다. 이 수열에 대해 또 차를 구하는 작업을 하면 또한 2차 항의 수열을 얻을 수 있다. 이와 같이 해 나가면, 수열이 모두 동일한 숫자가 될 때가 온다. 그 때 맨 처음의 해와 각 수열의 최초의 수치를 알고 있다면, 몇 번째 해라도 그 수치들을 더해 나가면 얻을 수 있는 구조이다. 이 방법은 노력은 많이 들지만 계산 자체는 단순하기 때문에 기계에게 시키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차분 기관은 연산 부분과 인쇄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쇄 부분은 숫자밖에 인쇄할 수 없었는데, 배비지는 0에서 9까지의 숫자로 각각 3천 개, 총 3만 개의 활자를 준비해 인쇄기를 차분 기관에 연동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이 발상은 그의 계산기가 단순히 '계산을 해서 보여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제대로 일할 수 있는 기계가 될 수 있음을 약속하고 있었다. 1827년에 배비지는 독자적으로 새로운 대수표를 만들어 발표했다. 배비지의 대수표는 면밀한 크로스 체크를 하고 있어, 기존의 대수표보다 훨씬 정확했기 때문에 그 후에 유럽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의 계산기 프로젝트는 완성을 목전에 두고 중단되었다.



배비지는 1834년에 신형 계산기에 대한 구상을 발표했다. 차분 기관은 계산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단순한 기계였지만, 이번에는 범용성을 가지게 한다는 것이 배비지의 생각이었다. 그것이 해석 기관(Analytical Engine)이다. 해석 기관의 구성은 펀치 카드에 의한 프로그램 입력, 스토어라고 불리는 기억 장치, 밀이라고 불리는 연산 장치, 카드 천공기, 인쇄장치 등의 입출력 장치가 있어, 현대의 컴퓨터 구성과 거의 동일했다. 특히 연산 장치와 기억 장치를 분리한 점과 프로그래밍이라는 발상을 도입한 것은 오늘날 높이 평가되고 있다.



찰스 배비지의 해석 기관의 내용을 20세기 컴퓨터의 태동기에 활약했던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다. 이는 에이다 로벨라스가 쓴 해석 기관의 상세한 설명서가 현대에 전해지기 때문이다. 1833년 파티에서 만난 시인 바이런의 딸인 에이다는 배비지의 계산 기계에 상당한 흥미를 보였다. 1834년 배비지는 차분 기관을 버리고, 해석 기관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1840년에 배비지는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해석 기관에 대한 강의를 했다. 그 강연록이 유럽에서 출판되었을 때, 에이다는 그 강연록의 번역과 상세한 주석을 작성했다. 1848년에 출판된 에이다의 '배비지의 해석 기관의 고찰'은, 오늘날 해석 기관의 훌륭한 해설서로 전해지고 있다. 그 책에서는 서브루틴과 루프, 점프 같은 프로그래밍 개념의 성립이 그녀의 해설 속에 분명히 인식되어 있었다.



배비지의 해석 기관은 진공관이나 반도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컴퓨터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단지 배비지는 그 컴퓨터를 '기관(Engine)'이라고 불렀다는 점이 흥미롭다. 또한 계산 부분을 "밀", 기억 부분을 "스토어"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로 미루어 배비지는 분명히 어떤 종류의 공장의 기능을 연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약 100년 후에 독자적으로 컴퓨터를 구상했던 앨런 튜링은 계산 부분을 "인간"으로, 무한히 긴 테이프를 이용한 기억 부분을 "인간의 기억"에 견주었다. 완전히 계산 기계를 의인화한 발상이었다. 개개인의 발상이 시대를 넘어 살아 있는 것이다. 찰스 배비지는 1871년 10월 18일에 사망했다. 그의 해석 기관은 로벨라스 부인의 상세한 해설서로 남게 되었고, 배비지 사후 약 70년 후, 몇 명의 연구자의 눈을 사로잡게 된다. 그 때가 진정한 컴퓨터 시대의 개막이었다.



노이만형 컴퓨터의 고안자 / 폰 노이만

존 폰 노이만은 1903년 12월 28일 헝가리의 수도인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1914년 노이만은 김나지움인 루텐에 들어갔다. 김나지움은 10~18세 사이의 우수한 소년들이 공부하는 학교이다. 노이만은 8년 간 착실히 영재 교육을 받게 되었다. 1921년 노이만은 김나지움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부다페스트 대학에 입학하여 수학을 전공했다.



1937년에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노이만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미국 정부의 군사 연구에 참가했다. 그런 중에 탄도 계산과 원자폭탄의 폭발을 제어하는 유체 역학 계산 등 고속의 계산기의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노이만은 계산기에 흥미를 증대시켜 나갔다. 노이만은 1944년에 펜실베이니아 대학 무어 학교의 계산기 프로젝트(ENIAC)를 지휘하고 있던 하먼 골드스타인이라는 육군 중위를 만난다. 노이만은 이후 어드버이저로서 ENIAC를 자주 방문하게 된다. 노이만은 ENIAC 팀의 논의에 참가하게 되었고, 그의 두뇌는 그곳에서 곧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노이만은 1945년 「EDVAC에 관한 보고서 제1고」를 완성하였다. 그 안에는 최초로 프로그램 내장 방식 컴퓨터의 정보 처리를 설명하였다. 이 보고서는 나중에 에커트와 모클리의 특허 논쟁으로 발전되는데, 물론 프로그램 내장 방식이 노이만의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프로그램 내장 방식은 계산기를 만드는 데 필연적인 과정이지, "누가 생각했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단, 노이만은 그 명석한 두뇌로, 복잡한 것을 간단히 표현하거나 근본 원리를 추출하는 것을 쉽게 할 수 있었다. 계산기 노하우를 상업화하려 했던 에커트와는 달리 폰 노이만은 기계 계산의 논리화, 추상화라는 학문적 흥미밖에 없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노이만은 프린스턴의 고등 연구소에서 컴퓨터 개발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컴퓨터가 전후 과학 발전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되리라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 노이만은 컴퓨터에 관한 논문을 많이 써냈다. 1946년에는 버크스, 골드스타인과 같이「전자계산기의 논리 설계의 예비적 토론」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에는 컴퓨터 설계의 기본이 명확히 논해져 있고, 한동안 이것이 교과서처럼 사용되었다. 노이만은 1947~48년에 골드스타인과 공저로「전자계산기를 위한 문제의 계획과 코딩」3권을 발행했다. 이것은 프로그래밍에 관한 최초의 책으로, 프로그래밍의 정의와 방법론을 다루고 있다.



노이만의 프로젝트가 개발한 컴퓨터는 1952년경에 완성되었다. 이 머신의 구조는, 오늘날 컴퓨터 설계의 기본이 되고 있다. 이것이 후에 노이만형 아키텍처라고 불리게 되었다. 노이만형 아키텍처의 특징은 프로그램 내장 방식과 순차 처리 방식이다. 순차 처리란 명령을 순서대로 처리해 가는 방식이다. ENIAC는 순차 처리가 아닌 병렬 처리를 수행하도록 설계되었다. 처리 속도를 향상시키고자 연구한 결과였지만, 이 점이 설계를 복잡하게 하고, 진공관의 수를 늘리고, 시스템을 불안정하게 하는 원인이었다. 노이만은 이것을 좀 더 간단하게 하고자 순차 처리 방식을 제청한 것이었다.



노이만은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아주 중요시했으며, 모든 사람과 원만하게 해 나가고자 했다. 노이만은 과학의 여러 분야에서 최고의 업적을 남겼다. 또한 노이만은 일반적으로 게임 이론(게임에 참여하는 자의 행동을 분석하고 그 결과적인 균형을 측정하기 위한 응용 수학의 한 분야) 창시자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1944년에 발행된 모르겐슈테른과의 공저「게임의 이론과 경제 행동」이 기점이 되고 있다. 경제학적 견지에서 게임 이론의 유용함을 보여 준 것은 이것이 최초다. 폰 노이만은 기상학, 생물학 등에도 업적을 남기고 있다. 노이만은 1957년 2월 8일 54세의 나이로 워싱턴 DC에서 암으로 죽었다.



Chapter 2. 컴퓨터 시대가 찾아왔다 - 불가능이 컴퓨터란 현실로



최초의 범용 컴퓨터 ENIAC의 공동 제작자 / 프레스퍼 에커트


현대의 컴퓨터 계보를 거슬러 가다 보면 그 원점에는 ENIAC이 나타나게 된다. 본격적인 계산기를 만들려면 적어도 수천 개의 진공관이 필요했는데, ENIAC은 진공관 18,000여 개를 사용하여 만들었다. 이것을 계획하고 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것은 22세의 에커트와 34세의 모클리였다. ENIAC은 당시 참고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논리 회로, 계수 회로, 동기 방식, 데이터 저장 방법 등 다양한 문제들을 일일이 해결해야 했다. 아마도 수백 가지의 발명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ENIAC의 공적은 정글에 활주로를 닦았다는 것이다. ENIAC의 노하우는 무어 스쿨 렉처(알프레드 무어라는 사람의 유산을 기금으로 펜실베니아 대학에 설치한 기증 학부)에서 이어져 갔다. 그 이후로 설계자들은 컴퓨터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드디어 교본이 생긴 것이다.



프레스퍼 에커트는 1919년 4월 9일에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에커트는 어린 시절부터 과학, 실험, 발명 같은 것을 좋아해서 열두 살 때에는 진공관을 이용한 라디오를 만들기도 하고, 전자석으로 제어되는 모형 요트를 만들기도 했다. 무어 스쿨 재학중인 1940년에는 빔을 사용한 음향 시스템에 관한 특허를 받기도 했다. 물리학 박사 존 모클리는 계산기에 상당한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전자 공학을 공부하기 위해 무어 스쿨에 찾아왔다. 에커트와 모클리는 전자식 계산기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ENIAC의 개발이 시작된 것은 1943년 5월이었다. 에커트는 진공관에 대해 철저한 예비 조사를 했다. 그 결과 전압과 전류를 정격보다 아래에서 일정 수준을 유지하면 수명이 목표치보다도 2,500시간이 늘어나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는 신뢰성 확보를 위해 필요한 전자 회로의 기준을 만들었다. 그것들을 정리해 개발자 전원에게 '에커트 표준'을 지키도록 지시했다. 이러한 작업은 대규모 프로젝트나 많은 사람들이 관련되는 일에서는 중요한 것이었다. 좋은 표준은 사물을 이해하게 만들며,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보여 준다. 그의 표준은 제대로 그러한 역할을 해냈다. 에커트는 후에 이렇게 말했다. "느긋하게 시작했던 것은 현명했다."



에커트와 모클리는 세계 최초의 전자식 계산기를 만들었고, 세계에서 최초로 컴퓨터를 판매하는 회사를 세웠다. 그들은 컴퓨터가 군대나 연구소만이 아니라, 민간 기업에서도 필요로 하게 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1946년 10월 설립된 회사의 명칭은 일렉트로닉 컨트롤이었다. 나중에 COBOL의 어머니라고 불리게 되는 머레이 호퍼는 1950년 경의 회사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에커트와 모클리는 특히 편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팀이 하나가 되어,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컴퓨터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아주 자유로운 분위기였습니다. 참신했지요. 이 사람들은 일이라고 하는 것에 얽매이는 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이 만든 상용 컴퓨터는 UNIVAC(the Universal Automatic Computer)라고 이름 붙여져 1951년에 제1호기가 완성되었다. 그 이후로 디지털 컴퓨터는 급속도로 실용기로 접어들며 화려한 발전을 이루게 된다.



DEC 미니컴퓨터의 아버지 / 고든 벨

IBM으로 대표되는 메인 프레임 전성시대에 DEC는 미니컴퓨터라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DEC의 미니컴퓨터는 영업용 냉장고 크기를 하고 있어 실제로는 '미니'가 아니다. 그러나 DEC는 처음으로 컴퓨터라는 것을 개인적인 레벨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것은 연구자들에게는 상당히 기뻐할 만한 일이었고 혁신적인 일이었다. DEC의 미니컴퓨터는 그 용도로 보면 개인용 컴퓨터의 선구자인 셈이다. 사실은 UNIX도 DEC의 미니컴퓨터 PDP-7상에서 제작되었다. 1970년경 켄 톰프슨이 방구석에 굴러다니던 PDP-7에 자신의 코드를 조금씩 입력하던 것이 그 시작이었다. 미니컴퓨터는 광범위한 호환성을 무기로, 일찍부터 네트워크에 강한 특성과 기능을 가지게 되었다.



고든 벨은 1934년 8월 19일 미국 미주리 주 커크스빌에서 태어났다. DEC에 80번 째 사원으로 들어온 벨은 곧바로 PDP-1의 개발과 납품을 도왔다. PDP(Programmed Data Processor)는 컴퓨터란 말을 피하고 데이터 프로세서라고 이름 지었다. 고든 벨은 컴퓨터 디자이너로서 PDP와 VAX 등 DEC가 생산하는 대다수의 미니컴퓨터 디자인을 수행했다. 그가 만들고 싶었던 컴퓨터는 대화성이 뛰어나고, 사용하기 쉬운 컴퓨터였다. 벨은 통신 장비를 개발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컴퓨터를 데이터 통신에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기초 기술을 손에 넣었다. 1962년 발매된 PDP-4는 벨이 완전히 새롭게 디자인한 최초의 머신이 되었다. 벨의 디자인은 매우 심플했는데, 크기를 줄이고 가격을 낮춘 머신이었다.



1963년에 발표된 PDP-5는 PDP-4의 데이터 수집용 머신으로, 세계 최소형 12비트 컴퓨터였다. 이 PDP-5는 PDP-8로 진화해 간다. PDP-8은 12비트 CPU를 사용한 싱글 태스크 머신이며 IC 기술과 코어 메모리가 사용되었고 냉장고 크기 정도의 크기에 1만 달러를 밑도는 가격에 팔렸다. 이것은 DEC에서 처음으로 양산 체제를 이끌어 낸 미니컴퓨터였다. 빠르고 값싸며 작은 컴퓨터가 요청되던 시기에 PDP-8은 대히트 했다. 벨이 다음으로 디자인한 PDP-6은 PDP-5와는 반대로 DEC최대의 36비트 멀티프로세서 머신으로, TSS를 지원하는 세계 최초의 컴퓨터였다. 1964년에 발표된 이 머신은 PDP-10으로 발전한다. 1966년 벨은 카네기멜론 대학에서 멀티프로세서에 대한 연구했다. 그 연구를 기반으로 PDP-11이 탄생했다. PDP-11은 1970년에 발표된 스택 구조, 유니버스 구조를 채택한 멀티프로세싱이 가능한 본격적인 컴퓨터로서 DEC의 명성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1968년 시애틀의 레이크사이드 스쿨에 텔레타이프가 설치되었다. 그 텔레타이프는 제너럴 일렉트릭 사의 PDP-10에 전화로 연결이 가능한 것이었다. 타임 셰어링(TSS)이라는 시간을 빌려 처리하는 구조인데, 아이들에게 최첨단 기술을 체험시키려는 부모들이 비용을 부담했던 것 같다. 빌 게이츠는 이 PDP-10과의 대화에 매료되었고, 이 때 역시 텔레타이프에 매달려 있던 상급생 폴 앨런과 후에 마이크로소프트사를 만들게 된다. "처음 프로그램을 작성했던 것은 13살 때이다. 단순한 Tic-tac-toe 프로그램이었는데, 거기에 사용한 컴퓨터는 거대했으며, 사용하기 어렵고 느렸지만 최고로 매력적인 기계였다(미래로 가는 길, 빌 게이츠)."



1972년 벨은 DEC의 엔지니어링 부사장 대우로 PDP를 잇는 차기 컴퓨터 VAX(Virtual Address Extension)의 설계를 감독했다. 가상 메모리(주 기억 장치의 기억 영역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목적으로 고안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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