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템플턴, 월가의 신화에서 삶의 법칙으로
로버트 허만 지음 | 굿모닝북스
더 큰 세계로테네시 주 시골 마을에서 자라난 것이 존 템플턴에게는 삶의 지향점과 강인함을 갖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윈체스터에서는 신뢰가 하나의 삶의 법칙이었다. 말 한 마디가 보증수표와도 같았고, 인격을 갖춘 사람이라면 약속을 한 뒤에 이를 번복하는 일이 결코 없었다. 집집마다 성경 책 한 권씩은 다 갖고 있었고, 어떤 집은 그 집의 유일한 책이 성경인 경우도 있었다. 영화관에서는 윤리의식을 심어주는 영화만 상영했다.
인격 형성이라는 면에서, 존 템플턴은 부모로부터 큰 긍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하비 템플턴)는 검약의 화신과도 같았지만, 가치 있는 행사에는 기꺼이 후원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의 어머니(벨라 템플턴)는 당시 테네시의 시골 마을에서는 보기 드문 훌륭한 교육을 받은 여성이었는데, 기독교 연합운동에 관심을 기울였던 그녀는 물질적인 번영이 선한 것이며, 긍정적이고,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비 템플턴과 벨라 템플턴은 이 같은 원칙을 지키며 살았고, 어린 존 템플턴에게 그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완전한 자유를 주었다.
벨라 템플턴은 자립 의지에 관해서도, 아주 탁월한 교사였다. 한 예로 존 템플턴이 열두 살 되던 해 여름, 그녀는 열다섯 살이었던 그의 형과 조카 두 명을 차에 태워 북동부 지역을 일주하는 두 달 동안의 여행에 나섰다. 아이들은 모두 재미있어 했지만, 그렇다고 느긋하게 휴식을 취한다거나 태평스러운 여행은 결코 아니었다. 모든 일정이 꽉 채워졌고, 매일같이 무수히 많은 볼거리와 체험 현장을 찾아 다녀야 했다. 가령 워싱턴이나 뉴욕, 필라델피아 같은 대도시에 도착하면, 그 지역의 모든 박물관을 둘러봐야 했다. 그것도 박물관의 모든 층, 모든 전시관을 다 보아야만 했다.
그리고 몇 년 뒤, 또 한 차례의 모험 여행길에 올랐다. 존 템플턴이 열여섯 살 때, 벨라가 차를 몰고- 이번에는 존과 하비, 한 명의 친구와 함께 - 서부로 향했다. 이들의 목표는 미시시피강 서쪽의 모든 것을 보는 것이었다. 이처럼 국토의 한 부분을, 혹은 하나의 지식 분야를 깊이 있게 공부하는 것은 어린 시절 존 템플턴에게 일상적인 생활의 한 부분이었다. 그것은 존 템플턴에게 자기 확신을 심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멀리 바깥을 보게 해주어, 훗날 세계적인 투자를 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또 벨라는 존에게 컴버랜드 교회에 열심히 다니도록 했고, 존은 열다섯 살 때 주일학교의 책임자로 선출되기도 했다. 벨라는 또 당시 캔자스시티를 중심으로 새롭게 번져갔던 기독교 연합교파의 정신을 로웰 필모어의 글을 통해 소개하기도 했다. 연합교파는 개인의 신념과 잠재력이 얼마나 큰 힘인가를 가르치고 있는데, 존의 삶에 이 두 가지는 정말로 대단한 영향을 미쳤다.
존의 부모가 자유방임으로 자녀를 키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벨라의 믿음을 이해해야만 한다. 벨라는 우리가 가족과 이웃들에게 자유와 용기를 준다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신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존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일찌감치 검약하고, 스스로 배우고, 자신의 일을 다 해야 한다는 자세가 몸에 배게 됐다. 아울러 벨라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얻어진 것이라는 생각을 갖도록 존을 가르쳤기 때문에, 존은 항상 자신을 낮추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존 템플턴의 학교생활은 아주 탁월했다. 센트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는 학생 대표로 고별사를 낭독했고, 졸업생에게 수여한 다섯 개의 금메달 가운데 토론과 연설, 모범적인 행동, 학업성취도 등 네 분야에서 금메달을 받았다. 존의 부모님과 선생님들은 그에게 아무리 높은 목표도 실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세상에 족적을 남길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해주었다.
존 템플턴이 테네시 주 윈체스터에 있는 센트럴 고등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것은 1930년으로 대공황의 초기였다. 예일 대학교로 진학하게 된 존의 대학교 등록금은 그의 부모가 제 1차 세계대전 때부터 착실히 따로 저축해놓은 돈으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저축한 돈이 충분한 것은 아니어서 존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잡지 구독을 권유하는 만만치 않은 일을 하기도 했다.
존에게 2학년은 더욱 힘든 시련의 시기였다. 대공황으로 인해 경제 전반이 파탄 지경에 달했기 때문이다. 존의 아버지는 윈체스터의 지주 겸 농장주였지만, 역시 최악의 곤경에 부딪친 상황이었다. 존이 1학년을 마친 그 해 여름 아버지는 존에게 더 이상 등록금을 대줄 수 없다고 말했다. 존은 당시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맨 처음에는 무척이나 가슴 아프게 들리더군요. 하지만 지금 되돌아보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얻을 수 있었던 최대의 행운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최상위 성적을 받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고, 장학금을 두 개나 받아 등록금을 해결할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예일대 재학 시절의 존은 엄청나게 적극적이었고 무슨 일에든 도전해보려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장학금을 받기 위해 최고의 성적을 올려야 했고, 장학금과는 별도로 학비 조달을 위한 과외 활동 - 피어슨 칼리지에서 조교 생활 등 - 을 해야 했다. 이 일을 계기로 당시 피어슨 칼리지의 학장이자 로즈 장학재단의 코네티컷 주 장학생 선발위원회 위원이었던 알랜 발렌타인으로부터 로즈 장학생을 지원해보라는 권유를 받아 지원했고, 결국 로즈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로즈 장학금으로 모든 비용이 해결된 옥스퍼드에서의 생활은 그야말로 장밋빛 인생과 같은 것이었다. 옥스퍼드 대학교에 도착한 존은 교정의 분위기가 예일대와 사뭇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옥스퍼드에서는 2년 동안 학점도 없고 시험도 없었으며 별도의 반 편성도 없었다. 대신 개별 지도 교습을 받아야 했다. 존의 경우 발리올 칼리지의 유명한 법학 교수인 미스터 타일러로부터 일주일에 한 시간씩 개별적으로 강의를 듣는 것이었다. 존은 우선 문학학사 학위를 위한 교과목들을 배워야 했다.
한편 옥스퍼드 대학교는 학생들에게 크리스마스 휴일로 6주, 부활절 휴일로 6주, 여름 휴일로 14주를 주었다. 이 기간 중에 존을 비롯한 로즈 장학생들은 영국의 품격 있는 인사들을 만날 수 있었고, 영국의 고풍스러우면서도 아름다운 풍광을 찾아 여행하기도 했다. 존은 당시 이런 방문이 아주 재미있었고, 가끔은 당황하기도 했지만 항상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자리였다고 회상한다.
존이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가졌던 또 다른 배움의 기회는 늘 사전에 꼼꼼하게 준비한 일련의 여행이었다. 존은 몸에 밴 검약습관 덕분에 옥스퍼드에 있는 동안 400달러나 모을 수 있었다. 그래서 존은 예일대 동창생으로 당시 캠브리지에서 공부하고 있던 제임스 인크세터에게 7개월간에 걸친 35개국 여행을 함께 떠나자고 제안했다. 물론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한 다음에 말이다. 덕분에 존과 제임스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서민들의 삶을 몸소 체험하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옥스퍼드에서 공부하는 동안 존은 투자자문가가 되기로 한 결심을 더욱 굳혔고,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자신의 이력과 목표 등을 담은 자기소개서를 써서 미국의 증권회사와 투자자문회사에 보냈다.
존에게는 세계 일주 여행이 더 넓은 투자 기회를 열어주는 것이었다. 어쨌든 7개월간의 세계 일주 여행은 그의 인생에 걸쳐 가장 많은 것을 배운 기간이었다. 여행은 북부 유럽 지방부터 시작했는데 마침 1936년 올림픽이 열린 베를린에서는 6일간이나 머물렀다. 둘은 독일을 거쳐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여행했고, 다뉴브강을 따라 배를 타고서 유고슬라비아와 루마니아를 둘러봤다. 그 뒤 존과 제임스는 중동을 거쳐 인도와 중국, 일본을 여행했다. 덕분에 존은 서민들의 경제가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이해했고, 나라마다 다양한 정치체제가 실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것은 그가 투자 기회를 찾기 위해 세계여행을 하기로 했던 가장 큰 이유기도 했다.
존이 세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것은 1937년 봄이었다. 그는 돌아오자마자 주디스 두들리 포크와의 결혼 계획을 짜기 시작했고, 그 해 4월 17일 테네시의 미국 성공회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존은 어머니의 폰티악 승용차를 빌려 멕시코시티 인근으로 2주간의 신혼여행을 떠났다. 5월이 되자 둘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뉴욕으로 향했다. 두들리는 맨해튼의 크라이슬러 빌딩에 사무실이 있던 광고회사 영&루비캄에 월 150달러를 받기로 하고 취직했다. 존도 월 스트리트에 있는 페너 & 빈(Fenner & Beane)의 신설 된 투자자문 부서에 취직했는데, 월급은 두들리와 마찬가지로 150달러였다. 이제 존과 두들리에게 가장 절실한 일은 검약과 절제를 통해 미래의 투자를 위한 돈을 저축하는 것이었다.
템플턴 그로스 펀드존 템플턴은 여러 투자자문회사와 입사를 위한 인터뷰를 가져, 그 중에서 5곳으로부터 채용하겠다는 제의를 받았는데, 그가 선택한 곳은 그 가운데서도 급여가 가장 적었던 페너 & 빈이었다. 급여는 비록 작았지만 배울 수 있는 기회가 가장 큰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근무한 지 3개월 뒤 로즈 장학생 출신으로 그의 친구인 조지 맥기가 텍사스에 있는 지질탐사 회사인 내셔널 지오피지칼 컴퍼니에서 함께 일하자고 제의 - 재무책임자 직책과 월 350달러 - 해 왔다. 존은 두들리는 물론 페너 & 빈의 동료들과 상의한 뒤 텍사스로 가기로 했다. 두들리는 텍사스에서 광고회사를 차렸다. 존과 두들리는 투자를 위해 자신들의 소득 가운데 50%를 저축했다. 덕분에 2년 후, 뉴욕으로 돌아왔을 때는 투자자문회사를 차려 독립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모았다.
그들은 철저하게 검약의 원칙을 지켰고, 자동차와 집, 가구를 구할 때는 누가 더 '말도 안되는 가격'으로 살 수 있는지 게임을 하기도 했다. 존 템플턴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검약과 싸게 물건을 구입하는 것이 그저 일상처럼 느껴진다. 싸게 사기 위해 그들은 물건값을 모두 현금으로 지불했고, 지출계획을 아주 신중하게 세워 절대 돈을 빌리지 않았다. 절약하는 일을 부담스럽게 느끼기 보다는, 즐기기 위해 마치 게임을 하듯이 자신들의 계획을 친구와 친척들에게 전부 알렸고, 친구들과 친척들은 그들에게 절약할 수 있는 길을 알려주곤 했다.
한편 존 템플턴은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자, 제 2차 세계대전이 불가피해졌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는 지금까지 투자의 세계가 전쟁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이미 공부해두었고, 여기에 기초해 판단할 때 전시에는 생산성이 가장 떨어지는 기업조차도 회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가격과는 관계없이 수요가 엄청나게 늘어나기 때문이었다. 존은 그래서 뉴욕 증권거래소에 상장돼 있는 주식 가운데 주당 1달러 미만으로 거래되는 모든 종목을 100달러어치씩 매수하기로 했다.
이 같은 모험에 필요한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그는 패너 & 빈에서 자신의 상사였던 딕 플랫으로부터 1만 달러를 빌렸다. 플랫에게는 존의 이 같은 투자가 매우 위험해 보였지만, 결국 존이 매수한 104개 종목 가운데 최종적으로 파산한 것은 4종목에 불과했다. 존은 1년 만에 플랫에게서 빌린 돈을 모두 갚았고, 매입한 주식들은 최초 매수 후 평균 4년 정도 보유한 뒤 모두 팔았는데, 그가 처음 투자했던 1만 달러는 4만 달러 이상으로 불어나 있었다.
존과 두들리는 텍사스에서 뉴욕으로 돌아온 지 1년 만에, 자신의 투자자문회사를 차려 독립할 수 있는 기회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조지 타우니라는 사람이 불과 8명의 고객을 가진 투자자문회사를 운영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이 회사의 경영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5,000달러를 제시했다. 결국 그의 뜻이 받아들여져 회사의 이름은 타우니, 템플턴 & 도브로우로 바뀌었다. 2년 뒤 이 회사는 밴스, 채핀 & 컴퍼니를 인수해 이름을 템플턴, 도브로우 & 밴스로 변경하게 된다. 존은 이 시기가 그의 투자 인생 가운데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운 시절이었다고 회고한다. 하지만 존의 검약 원칙은 그의 회사 전부분에 적용됐고, 그 덕분에 회사는 출범 2년 만에 흑자로 돌아서 매년 이익을 내기 시작했다.
그 뒤 다행히 존의 사업은 잘 돼나갔다. 그 후 어느 날 그는 휴가를 떠나기로 하고, 이번에는 버뮤다로 향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는 말처럼, 모든 일이 다 순조롭게 풀려가고 있을 때 비극이 찾아왔다. 1951년 2월 두들리가 존과 함께 버뮤다를 오토바이로 여행하던 중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다. 그녀는 머리를 다쳐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그곳에서 숨을 거뒀다. 사실 그의 어머니도 1950년 9월에 돌아가신 터라, 몇 달 만에 다시 찾아온 비극의 고통은 더 컸다. 존에게는 다행히도 이런 고통을 견뎌낼 만한 정신적인 힘이 있었다. 그는 더욱 큰 결의와 함께 열정적으로 투자자문회사의 일을 다시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의 재단 이사회 일도 교회가 맡긴 임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이 시기에는 두 가지 일이 더 있었는데, 존에게는 두들리를 잃은 슬픔을 잊을 수 있는 좋은 약이 됐다. 하나는 롱아일랜드에 있는 피셔스 아일랜드에 아이들을 위한 여름 별장을 구입한 것이었다. 존은 허리케인이 자주 불어 닥쳐 이 섬 주민들이 모두 가슴 졸이고 있을 때, 이 여름 별장을 1만 5,000달러를 주고 매입했는데, 나중에 이 별장을 63만 달러를 받고 팔았다. 이 시기의 또 한 가지 중요한 일은 사업가들의 새로운 단체인 젊은 사장들의 모임(Young Presidents Organization, Y.P.O.)을 시작한 것이었다. Y.P.O.를 통해 새로 많은 친구들을 사귀게 된 것은 존에게 더할 나위 없는 힘이 됐다. 사업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랬고, 사회적인 관계에서나 정신적인 삶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랬다.
모임에서의 대화는 주식이나 제품 생산 문제를 주제로 하다가 자연스럽게 개인적인 문제나 종교적인 이야기로 옮겨갔다. 존은 이들 모임이야말로'어떻게 하면 더욱 훌륭한 사장이 될 수 있는지를 배우는 장(場)이자 오랜 친구를 정기적으로 만나는 즐거움을 주는 기회'였다고 말한다.
바로 이런 경험들이 있었기에 존 템플턴은 1954년 11월, 템플턴 그로스 펀드(Templeton Growth Fund Ltd.)라는 비범한 투자 프로그램을 출범시킬 수 있었다. 템플턴 그로스펀드는 구상할 때부터 전세계를 투자대상으로 하는 글로벌 펀드를 지향했고, 출범하자마자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해외 주식시장을 꿰뚫어보는 존의 통찰력 때문이었는데, 특히 당시 우량기업의 주식이 아주 값싸게 거래됐던 일본 주식시장이 큰 역할을 했다. 1983년에 『템플턴 프라이즈』라는 책을 쓴 윌리엄 프록터는 좋은 주식을 싸게 사는 존의 투자방식을 이렇게 설명했다.
템플턴의 기본적인 공식은 회사의 전체 자산 가치를 그 회사가 발행한 주식의 수로 나누는 것이었 습니다. 이런 계산법은 그 회사 주식의 진정한 가치를 알려주었지요. 즉, 주가가 이 가치보다 낮다 면 그것은 싸게 사는 게 되겠지요. 그러나 많은 회사들은 이런 공식만으로 진정한 가치를 계산해내 기가 어렵고, 투자 기회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다른 현명한 투자자들처럼 템플턴도 임기응 변식의 수법을 쓰고는 합니다. 가령 소매 유통회사를 평가할 때는 입지조건의 변화 가능성을 보려 고 하죠. 이런 것들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템플턴은 어떤 특정 기업이나 산업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할수록 최종적으로 더 나은 결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