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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지 못할 시련은 없다

황규빈 지음 | 학원사
도전 : 깨지지 않는 벽은 없다

대학을 졸업하고 동부의 대기업에 다니던 내가 실리콘밸리의 작은 회사로 간 것은 지극히 즉흥적이었고, 실리콘밸리 생활이 1년쯤 지난 후 나는 내 사업을 하고 싶다는 욕심이 일기 시작했다. 당시 게임기를 개발한 아타리(ATARI)라는 회사가 돈방석에 앉았다는 소문도 나를 자극시켰다.



당시 아무리 인기 있는 게임이라 해도 그 수명은 6개월을 넘지 못했다. 사람들은 6개월 이상 한 게임에 열광하지 않았고 그 정도 지나면 새로운 게임, 조금 더 업그레이드된 게임을 원했다. 문제는 새 게임이 나올 때마다 게임보드를 바꿔야 된다는 것이었다. 지금이야 게임 프로그램들이 소프트웨어로 되어있어 소프트웨어만 올리면 다른 게임을 할 수 있지만 그때는 달랐다. 보드 하나로는 하나의 게임밖에 할 수 없었다. 나는 그 틈새를 파고들기로 했다. 게임의 논리를 마이크로칩에 프로그램해 넣으며 게임보드를 바꾸지 않고도 여러 다른 게임을 즐길 수 있다는 원리였다.



이것을 가지고 내 사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나는 저녁 시간을 이용해 경영학 공부를 시작했다. 이론 무장 후, 현장 실습으로는 일단 실패할 확률이 적은 프랜차이즈 사업을 해보기로 하고 편의점 세븐 일레븐 가게를 차렸다. 6개월 후 이것저것 끌어 모아보니 9천 달러쯤 되었다. 드디어 1975년 5월 15일, 실리콘밸리 남부 쿠퍼티노의 우리 집 차고에서 <텔레비디오>를 설립했다. 차고 회사는 거래 업체들의 시선을 받지 못했다. 가장 큰 문제는 모니터였다. 당시 게임용 모니터를 만드는 곳은 전 세계에서 모토롤라 한 곳 뿐이었고, 가격도 엄청나게 비쌌다. 그것도 없어서 못 팔 지경이라, 그런데 우리 같은 구멍가게에 모토롤라 같은 큰 회사가 모니터를 대줄 리가 없었다.



6개월 동안 9천 달러를 다 날려버렸다. 그런 어느 날, 차고에서 게임 보드의 설계도를 그리던 나는 저녁이 되어 가게로 갔다. 축 처진 어깨를 하고 카운터 한쪽에 놓인 TV를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보는데 갑자기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TV였다. 흑백 TV를 조금 조정하면 게임용 모니터가 될 것 같았다. 당장 차고로 달려가 게임용 흑백 모니터의 설계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디에서 모니터를 만들 것인가가 문제였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문득 한국의 TV 공장을 찾아보자는 생각이 들어 다음 날로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날아갔다. 금성사, 천우사, 삼성전자…, 여섯 개 회사가 모두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 일곱 번째로 찾아간 곳이 대한전선이었다. 절박한 마음으로 담당자들에게 설명을 하다보니 어느 순간 내 목은 쉰 소리를 내고 있었다.



진심은 통하였던가. 대한전선은 미국의 앞선 기술을 배울 수 있겠다는 계산으로 모니터를 만들어 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은 멀었다. TV모니터가 게임용 모니터로 변신하기까지는 고비에 고비를 넘겨야 했다. 한 가지를 고쳐놓으면 다른 한 가지가 말썽을 일으켰다. 그러기를 3개월. 마침내 시제품 모니터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은 많았다. 우선 자금 문제였다. 게임 보드를 제쳐두고 모니터에 매달리는 사이 내게는 한 푼의 수입도 생기지 않았다. 고민 끝에 대기업의 투자를 받아보기로 했다. 우선 게임기회사 아타리의 부사장을 만나보기로 했다. 마이크로 프로세서 방식의 게임기를 개발 중이라는 내 설명에 그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투자를 하지 않겠다면 기술제휴를 하자고도 했지만, 이 역시 별 관심이 없는 듯 했다. 아무 것에도 흥미를 보이지 않는 그에게 이번에는 모니터 이야기를 꺼냈다. 모니터라는 말에 그는 마침내 관심을 보였다. 아타리에서 품질 테스트만 통과하면 얼마든지 주문을 내겠다고 구두로 약속받았다.



테스트를 통과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한전선에서 만들어 보낸 샘플 모니터를 들고 아타리에 들어갔다가 작동이 되지 않아 낭패를 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문제가 있는 모니터는 한국으로 보내 다시 만들어 와야 했다. 한국에 가는 비행기표 값도 그때의 내겐 엄청난 부담이었다. 한국 공장에 도착하면 나는 기술진들과 함께 밤을 새워 문제점을 찾아, 고치고 새로운 샘플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그 박스를 들고 버스를 타고 3킬로를 걸어 공항에 간 뒤 스물 몇 시간을 날아 미국에 도착했다. 나의 한국행은 그렇게 일곱 차례에 걸쳐 6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우리 모니터를 별 볼 일 없는 것으로 여기던 아타리 기술진들도 그런 나의 정성에 감동을 받기 시작했다. 결국 테스트에 합격했다.

남은 일은 주문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아타리의 주문 담당 매니저에게 매일같이 전화를 걸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늘 같았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라, 아직 결정을 못하겠다…' 나중에는 아예 내 전화를 받지도 않았다. 더는 기다릴 수 없다고 생각한 나는 직접 아타리의 사장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장을 만나는 일은 주문 담당 매니저를 만나는 일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문득 아타리의 사장이 나와 같은 유타주립대의 전기과를 졸업했다는 것이 떠올랐다. 예상대로 사장의 동창생 신분으로 약속잡기가 더 쉬웠다. 나는 마침내 사장과 마주 앉을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런저런 학교 이야기를 꺼냈다. 사장도 내가 대학 동창이라는 사실에 쉽게 마음을 여는 것 같았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마침 사장이 내게 요즘 하는 일을 물었다. 게임용 모니터를 만들고 있다고 하자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사장은 그 자리에서 담당자를 불렀다. 이미 기술진이 확인한 사안을 두고 왜 망설이는 것이냐고 호통을 쳤다. 다음날로 아타리에서 모니터 주문장이 들어왔다. <텔레비디오>가 받은 최초의 주문이었다. 그것도 무려 2천 대 분량, 15만 달러 어치였다. 믿어지지 않았다.

사업을 하다보면 반드시 원리원칙대로만 되지 않을 때가 있다. 쉽게 풀릴 것 같던 일이 벽에 부딪쳐 옴짝달싹 할 수 없을 때도 많다. 그럴 때 사람들은 보통 그 벽을 돌아서, 또는 넘어서 다음 단계로 건너간다. 하지만 내게 그런 전략은 애초에 없었다. 나는 벽이 나오면 그 벽의 틈을 찾았다. 난공불락의 성벽에도 개미 한 마리 지나다닐 구멍은 있기 마련이다. 손가락 크기의 작은 구멍이 거대한 댐을 무너뜨리듯, 나는 그 빈틈을 찾아 벽을 직접 공격하는 방법을 택했다.



성공 : 세계 컴퓨터 역사가 새로 쓰이다

모니터 사업이 잘 되는 중이었지만, 모니터를 대체할 품목을 미리 준비해야 했다. 왜냐하면 후발 모니터 업체들이 가격 경쟁에 뛰어들었고, 흑백 게임도 머지않아 사양길을 걷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자주 공항을 드나들던 어느 날, 무심히 항공사 직원의 손놀림을 지켜보고 있던 내 눈에 직원이 사용하고 있는 CRT 터미널이 들어왔다. 이 단말기는 자체적으로 문자를 편집하거나 스스로 기억된 자료를 불러내는 기능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이 단말기에는 덤 터미널(dumb terminal)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나는 이거다 싶었다. 덤 터미널에 똑똑한 지능을 주는 것이었다. 마이크로 프로세서 원리를 덤 터미널에 써먹으면 되었다. 10달러짜리 칩 하나를 더 넣음으로써 우리의 터미널은 '덤'이 아닌 '스마트 터미널(smart terminal)'이 될 수 있었다. 또 나는 터미널의 포장도 획기적으로 바꾸어보기로 했다. 플라스틱으로 모니터와 키보드를 함께 싼다면 모양도 깔끔하고 무게도 훨씬 가벼워질 것으로 판단했다. 그런데 대한전선이 게임용 모니터라면 기존에 하던 것이니 주문하는 대로 계속 만들어 주겠지만 터미널용 모니터를 새로 시작하는 일은 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내 제안을 받아줄 또 다른 전자회사를 찾아 이곳저곳을 뛰어다녀야 했다. 마침 동양정밀에서 한번 해보겠다고 나서주었다.



간신히 고비는 넘겼지만 금형 제작은 쉽지 않았다. 무려 6개월 동안, 나는 터미널의 케이스를 만들어내는 작업에 12만 달러를 쏟아 부었다. 비로소 모든 테스트를 통과한 <텔레비디오>의 CRT 터미널을 보니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텔레비디오>의 스마트 터미널은 세상에 소개되자마자 주문이 밀려들었다. 경쟁업체들이 우리 터미널의 진정한 무기인 두 가지 혁신 - 반도체 기술과 미려한 외관 - 에 대해 깨달았을 땐 이미 덤벼들기에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79년 CRT 터미널을 내놓은 첫 해 <텔레비디오>의 매출은 2백 30만 달러에 순이익은 20만 달러였다. 81년에는 무려 3천 5백만 달러의 매출에 5백 10만 달러의 순이익을 내게 되었다. 터미널 시장에 뛰어든 지 4년 만에 <텔레비디오>는 스마트 터미널 분야의 세계 1위 업체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CRT 터미널 개발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즈음, 나는 제품에 대한 광고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광고비를 크게 책정할 여유가 전혀 없어 혼자 해보기로 했다. 우리 터미널의 장점은 스마트 터미널을 싼 가격에 판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그대로 옮겨보면, 'Smart Terminal with Dump Terminal Price!'가 되었다.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광고는 유럽 시장부터 했다. 다행히 우리가 낸 광고는 효과를 보기 시작했다. CRT 터미널이 날개 돋힌 듯 팔리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제대로 된 광고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가장 잘 나가는 PR 전문가에게 맡기고 싶었다. 애플과 인텔의 광고가 가장 멋지다고 생각해 알아보니, 이 두 회사의 PR을 맡고 있는 곳이 레지스 멕케나의 회사였는데, 부사장은 내가 준비해 간 텔레비디오의 홍보책자를 보더니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우리 회사의 설립과정과 미래에 대해 성심성의껏 설명했다.



최선을 다해 이야기하고 나니 셔츠가 흠뻑 젖어있었다. 하지만 부사장은"미스터 황, 뜻은 잘 알겠습니다만 지금 우리의 사정상 그렇게 작은 회사까지 맡을 겨를이 없습니다. 유감입니다." 라고 말했다. 천천히 서류를 챙겨 돌아 나오려는 순간, 사무실 뒤편에서부터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레지스 멕케나입니다. 제가 당신 회사의 PR을 맡고 싶습니다." 멕케나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는 나의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나의 끝없는 도전 의지에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멕케나는 당장 내가 과거에 만든 광고 문안부터 'Smart with Price of Dump!'로 바꿔주었다. 역시 프로였다. 그 후 맥케나는 많은 도움을 주었다. <포춘>에 기사를 실리게 하여 <텔레비디오>를 하루아침에 스타로 만들어준 것도 멕케나였다. <포춘>에 나의 기사가 실리고 나니, 바로 그 다음날부터 전화통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 이후 몇 개월 동안은 하루에 두 개 이상 크고 작은 인터뷰를 했다.



CRT 터미널 매출이 쑥쑥 올라가던 즈음, 나는 다음 사업은 무얼 가지고 하나 하는 연구에 들어갔다. 첨단 IT산업의 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나의 한 발 앞선 준비, 빠른 의사결정력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때 애플에서 PC를 처음 세상에 내놓았다. 바로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이용한 개인용 컴퓨터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도 80년 중반부터 PC의 개발에 들어갔다. <텔레비디오> PC는 뭔가 달라야 했다. 나는 그들보다 한 발 앞선 것을 내놓아야 했다. 당시 PC는 다른 컴퓨터의 데이터를 PC로 가져오기가 어려웠다. 결국 PC를 업무용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다른 PC와 데이터를 공유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네트워크 기술이 필요했는데 우리에게는 그러한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 그 즈음 알고 지내던 홍콩 친구가 자기가 투자한 제트램(Jet Lab) 연구소 직원들이 네트워크 소프트웨어를 개발했으니 생각 있으면 가보자구 했다. 제트랩에 도착해, 프로그램을 검토해 보니 신기하게 잘 돌아갔다. 나는 그 자리에서 네트워크 소프트웨어를 사겠다고 했다. 금액은 15만 달러였다. 아깝다는 생각은 없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텔레비디오>의 세 번째 히트작인 PC 네트워크 시스템이었다. PC에 파일서버를 붙여 PC간 네트워크를 구현한 것이다. 나는 세계 최초로 PC 네트워크 시스템을 실현시킨 사람으로 컴퓨터 역사를 새로 쓰게 되었다. 시장에서의 인기는 물론 대단했다.



모험 :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묘약

흥남 부두 가까이에서 자란 나는 어려서부터 호기심이 많았다. 해방과 함께 러시아 군대가 주둔하기 시작하면서 내 호기심은 부쩍 커지게 되었다. 즉흥적인 가출을 감행한 건 이즈음이었다. 그날도 러시아 군인들과 하루 종일 놀고 난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동네 어귀에서 같은 반 친구를 만났는데, 친구는 집에서 마침내 나의 무단결석을 알게 됐다고 겁을 주었다. 그 길로 방향을 돌려 내가 찾아간 곳은 전차 역이었다. 무조건 집을 떠나야 한다는 급한 마음밖에 없었다.



전차 역으로 향하는 사이 나는 탈출지를 만주로 정했다. 하지만 탈출은 순조롭지 못했다. 만주로 가는 도중 국경 근접 도시에 내렸다가 고모를 만난 것이 실수였다. 나는 이제 서울에 가 나를 낳아준 어머니를 만나는 것으로 목표를 수정했다. 그 후로도 수없이 많은 고비를 넘기며 마침내 서울에 도착하니 함흥 집을 떠난 지 보름 만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를 수소문해 만나기까지는 다시 사흘이 걸렸다. 그날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찾아간 곳은 지금의 성남 근처에 있는 커다란 과수원이었다. 이곳에서 이모할머니는 과수원 일을 하나씩 가르쳐 주고 일을 하게 했는데, 나 역시 새로운 일이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하지만 어린 농부가 누린 수확의 기쁨은 겨우 한 해 농사에서 끝내야 했다. 친척들 간의 연락을 통해 마침내 내가 있는 곳을 아버지가 알게 된 때문이었다.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아들이 제 발로 들어온 고마움 덕분이지, 아버지는 큰 야단을 치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학교에 다시 가는 것이었다. 모험을 다니는 내내 공부가 왜 필요한 지 몸으로 깨달은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흥남제련공장의 기술자였는데, 큰아들을 무릎에 앉히고 이런저런 공장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얼큰하게 취한 아버지의 이야기는 두서없이 돌아다니며 방향을 잃기 일쑤였지만, 나의 호기심 과녁에 화살을 꽂기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아버지는 가끔씩 집으로 작업도구들을 들고 오는 일들이 있었다. 아버지가 깜박 잊고 도구들을 회사로 가져가지 않은 날은 그 물건들이 온종일 내 차지였다. 쇠톱으로는 나무 조각을 잘라가며 뭔가 만들어보려 애를 썼고 양철판을 자른다며 재봉가위의 이를 다 뽑아놓기도 했다.



그즈음 내가 통학하던 길에는 함흥공과대학이 있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강의실 칠판에는 하얀 분필로 수많은 선들이 복잡하게 그려져 있었다. 창문 안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이 하얀 선들이 무슨 기계를 만드는 밑그림이 된다고 했다. 충격이었다. 그림만 제대로 익히면 라디오도 만들고 전차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그날부터 매일같이 등하교 길에 강의실 안의 풍경을 눈에 담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읍내에 있는 책방에 가게 됐다. 기계 그림이 책 표지에 있는 것을 골라 사가지고 집에 돌아온 나는 책이 닿도록 읽고 또 읽었다. 이제껏 보아왔던 어떤 책보다 재미있었다. 어떻게 하면 철판에 전기가 통하고 또 이것을 이용해 얼마나 많은 물건을 만들 수 있는지 알고 나니 당장 만들어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전자석을 만들고 이를 이용하여 내 눈높이의 선풍기를, 초인종을 만들었다. 다음에 도전한 것은 유선신호기 형태의 전화기였다. 이후로도 나는 필요한 물건이 생기면 그걸 어떻게 내손으로 만들어볼까 궁리부터 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다보니 <텔레비디오> 시절 놀라운 '작품'이 하나 탄생하기도 했다. 바로 키보드와 컴퓨터 본체를 연결하는 스프링 모양의 선이다. 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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