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50에 꿈을 토핑한다
성신제 지음 | 더난출판
chapter 1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보다나는 이제 막 인생의 반환점을 돌았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난하게 보냈던 어린 시절과 어렵게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오르막길이었다. 그러나 직장생활을 거쳐 이 땅에 피자헛이라는 외식 브랜드를 처음으로 선보이면서 부와 명예를 거머쥔 뒤부터는 거칠 것 없는 질주가 시작되었다. 이후 피자헛을 매각하고 케니로저스 로스터스라는 사업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내 앞길은 탄탄대로가 계속 이어질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순항을 거듭하던 사업도 1997년 우리나라의 경제여건이 급속히 악화되면서 매출이 매우 빠른 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늘어나는 금융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던 나는 미국 본사에 급히 연락을 취했지만 그들은 날로 악화되는 우리나라의 경제 상황을 우려한 나머지, 일방적으로 투자 약속을 백지화했다.
사력을 다해도 경제여건 악화라는 사회적 위기를 견뎌낼 수 없었던 나는 결국 1997년 10월 10일 부도를 맞았다. 내 나이 50의 일이었다. 재기를 꿈꾸기는커녕 떼지어 몰려드는 채권자들로부터의 수모를 감당하기에도 벅찬 나이였다. 채권자들로부터 배신감과 모욕감을 느꼈고, 죽음을 생각했지만 이제까지의 치열하게 살아온 시간들, 그리고 소중한 가족들을 떠올리자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오기가 솟구쳤다. 죽음을 결심하고 끝을 생각하던 그 자리에서 그렇게 내 삶은 희망으로 급선회하였다. 어린 시절은 물론이거니와 사업을 하면서도 어려움에 부딪힐 때마다 내게 힘을 주었던 것은 가족의 위로와 격려였다. 케니로저스 로스터스가 부도로 쓰러졌을 때 나는 세상에 혼자 내버려진 것처럼 외롭고 두려웠다. 그러나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면 거기에는 언제나 가족이 있었다. 힘이 되어주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발만 동동 구르던 아내와 어려움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아이들이 바로 내 힘의 원천이었다. 그들이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이겨낼 수 있게 했고, 재기의 의지도 다질 수 있게 했다. 내 삶의 이유, 내 삶의 희망은 바로 가족이다.
나는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식으로 재기를 다짐했다. 그리고는 피자 사업을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10여 년 동안 피자헛을 운영하면서 나름대로 경영 노하우도 익혔고, 무엇보다 피자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신제 피자를 창업하기 전에 주위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괜한 고생 사서 하지 말고, 적당한 외국 브랜드를 들여오는 게 어때요? 당신이 잘만 관리하면 성공은 보장된 것 아니겠소?" 그러나 나는 그들의 권유를 단호히 뿌리쳤다. "아뇨. 나는 이제 내 이름을 내건 브랜드로 승부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외국 브랜드들과 당당히 어깨를 겨룰 수 있는 순수 국산 피자를 이 땅에 정착시킬 겁니다. 두고 보십시오." 나는 한때 이 땅에 피자헛과 케니로저스 로스터스라는 미국의 외식 브랜드를 들여와 제법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 성공 뒤에 찾아온 좌절은 너무 아프고 끔찍했다. 다국적 기업의 냉혹한 자본주의적 논리를 온몸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크게 세 번의 실패를 맛보았다. 그 실패는 모두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주었고 나를 절망에 빠뜨렸다. 그때마다 나는 지지리 복도 없는 삶이라고 자신을 저주했고 세상을 원망했다. 그러나 아무리 저주와 원망을 퍼부어도 사라진 과거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자의든 타의든 나는 늪에 빠져 있었고, 나 혼자 힘으로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런 상황들이 닥쳤을 때,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
chapter 2 내 자산은 패기와 신용대학을 졸업하고 해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군복무를 마친 내가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회사는 호남정유의 비서실이었다. 그곳에 근무하면서 비로소 안정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었지만, 세계를 누비며 마음껏 역량을 발휘하고 싶어 과감히 호남정유에서 퇴사하고, 당시 수출로 한창 호황을 누리던 종합무역상사 (주)삼화에 입사하여 해외지사 관리실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요즈음 흔히 쓰는 명칭으로 '해외사업 본부' 정도에 해당하는 그곳에서 나는 능통한 영어 실력을 인정받으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1979년 봄, 삼화의 사주였던 고 김지태 회장이 야당에 정치자금을 지원한 것 때문에 박대통령으로부터 괘씸죄에 처해진 삼화는 즉시 자금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거래 은행의 자금 관리가 본격화되었고, 급기야는 회사 내에서 발생하는 모든 비용의 지출이 완전히 동결되기에 이르렀다. 무려 6개월 이상 모든 지출이 중단되다보니 그동안 거래 관계에 있었던 원자재 업체와 가공 업체로부터 완전히 신용을 얻어 제품을 만들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오랜 고민 끝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7만 2천 원으로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빈손으로 시작한 사업이었지만 나를 믿고 격려해주던 삼화의 옛 동료들, 인맥을 통해 충원한 직원들은 크나큰 힘이 되었다. 사업이란 단순히 돈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인간적인 신뢰와 믿음이 돈보다 더 귀하다는 사실도 그때 알게 되었다.
달랑 7만 2천 원의 창업자금으로 시작했던 사업이 기대했던 퇴직금을 받지 못해 난항에 부딪힐 즈음 나와 함께 합작투자로 사업을 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생각해보니 나쁜 제안은 아닌 것 같아 아파트를 담보로 융자를 얻어 세일산업이라는 운동용품 제조회사를 설립하여 그들은 공장에서 제조를 책임지고, 나는 해외 주문을 전담했다. 사업이 점차 본 궤도에 오르자 파트너들이 갑자기 임시 주주총회를 설립해 나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굵직굵직한 바이어들로부터 주문이 쌓이고, 공장에서 품질 좋은 제품이 나오는 것을 믿고, 굳이 서울에 별도로 사무실을 두고 합작 형태로 이윤을 나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그들의 배신에 분통이 터졌지만 뒤늦게라도 그들의 천박한 본색을 알게 된 것이 다행이다 싶어 순순히 물러서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내가 떠난 후 사업은 그들의 낙관적인 전망과는 달리 문제가 발생하여, 결국 회사는 내가 손을 뗀 지 3개월 만에 부도가 나 도산했고, 파트너들은 구속되었다. 그 바람에 투자금 회수를 위해 그들에게서 받아두었던 어음은 하루아침에 휴지 조각이 되고 말았다. 더군다나 빌린 융자금의 이자를 내지 못하자 은행에서는 집안의 모든 물건에 빨간 딱지를 붙였다.
온 집안에 빨간 딱지가 들러붙은 1982년 겨울,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사업 파트너들에 대한 분노와 앞이 보이지 않는 암담한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정신적으로도 거의 공황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그러나 그 지독한 혼란이 걷히자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부딪혀보자는 오기가 생겨나 해외로 입양되어 가는 아이를 데리고 나가는 대가로 미국행 왕복 비행기표를 받아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빠듯한 여비로 근근이 버티며 바이어들과 상담을 벌였다. 이후 나는 어려운 일에 처할 때마다 종종 그때의 일을 떠올린다. 주머니 속의 동전까지 계산에 넣어야 했을 만큼 빠듯했던 출장 경비와 숨이 막히는 고통 속에서 허기를 달래기 위해 억지로 먹어야 했던 텁텁한 식빵, 그리고 가난 때문에 머나먼 타국 땅으로 입양되어 갈 수밖에 없었던 코흘리개 아이들. 그런 기억들이 되살아날 때마다 이상하도록 삶의 전의가 느껴지는 것이었다.
미국으로 건너가 세일즈를 펼친 덕분에 최악의 고비는 모면했지만 회사 사정이 어렵기는 매한가지였다. 그 즈음 나는 미국에서 피자헛의 판촉 제품에 대한 주문을 받았다. 몇 차례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계속해서 거래관계를 유지하며 그들로부터 신뢰를 얻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때 쌓은 신용이 발판이 되어 일개 영세 무역업체의 사장에 불과했던 내가 피자헛의 한국 내 독점 영업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가진 것 하나 없이 오로지 패기와 신용을 무기 삼아 일군 그때의 성공은 지금도 내 가슴 한구석에 뿌듯한 자부심으로 남아 있다.
chapter 3 피자사업에 도전장을 내밀다피자헛에 판촉물과 주방용품을 공급하는 사업을 도맡아 하다가 가맹점을 신청하려고 알아봤더니 우리나라의 대기업 몇 군데에서 이미 피자헛에 가맹점 신청을 해놓고 있는 상태였다. 일단 해보기로 마음 먹은 이상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는 심정으로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피자헛의 미국 법인인 펩시코 인터내셔널 회장과의 면담 자리에서 강한 패기와 열정으로 우리 회사가 왜 적합한지, 우리 회사를 통해 피자헛이 어떠한 이득을 취할 수 있는지를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표현해 결국 영업권을 따낼 수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마치 전투를 치르듯이 개점 준비에 혼신을 다한 끝에 드디어 마침내 1985년 2월 22일, 드디어 피자헛 이태원 1호점이 문을 열었다. 걱정과는 달리, 문을 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고객들이 몰려들어 매장 안은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나는 물론 직원들 입가에는 함박웃음이 떠날 줄 몰랐다. 그리고 이처럼 이태원점이 우리의 기대보다도 훨씬 더 요란하게 문을 열면서 바야흐로 한국에는 '피자의 전성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무일푼으로 시작해 50여 개의 피자집을 경영하기에 이르자 주위 사람들은 나를 가리켜 경영능력이 탁월하다느니, 사업가로서의 자질이 뛰어나다느니 하는 말들을 했다. 그러나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나름의 속사정이 있게 마련이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나는 그 당시에도 뚜렷한 목표와 그것을 이루려는 승부 근성이 누구보다도 강하게 꿈틀대고 있었다. 하지만 피자헛을 경영하던 세월을 쭉 돌이켜보면 성공의 기쁨을 만끽하며 지낸 시간보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불안과 초조 속에서 지낸 시간이 더 많았음을 솔직히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중에서도 유독 나로 하여금 실패의 중압감에 시달리게 했던 점포가 있었는데, 바로 1986년에 세워진 피자헛 청담점이었다. 그동안 이태원, 해밀턴, 뉴코아점, 이렇게 3개 점포의 예상 밖의 성장에 고무된 나는 사방에서 잔뜩 빚을 얻어 청담동에 새로운 점포를 신축하기 시작했다. 건물 기초공사 과정에서 이웃집과 문제가 생겨 준공검사와 영업허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건물을 다 지어놓고도 법원의 판결이 나기 전까지는 영업을 할 수 없었는데, 이 경험을 통해 배운 것도 많았다. 청담점을 구상하던 당시 피자헛의 안살림을 담당하던 아우는 너무 무리한 계획이라면서 주저했다. 하지만 사업이란 기회가 주어질 때 재빨리 움켜잡아야 하며, 머뭇거리다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과단성 있게 계획을 밀고 나가는 추진력이야말로 사업가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 중 하나라고 나는 늘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청담점의 경우처럼 아무리 추진력 있게 일을 진행해도 때때로 예기치 않은 난관에 부딪힐 수 있는 게 사업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 일이 있고 나서 나는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강력한 추진력으로 밀고 나아가되 난관에 부딪힐 경우를 예상해 최소한 그 자리에서 현상 유지는 할 수 있을 정도의 치밀한 계획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말이다. 사전 계획이 없는 추진력은 무모한 도전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미국 펩시코 인터내셔널 측의 3대 레스토랑 체인 중 하나라는 이유로, 당시에는 낯설은 '멕시코 음식'을 무턱대고 들여온 타코벨의 경우에서도 그렇다. 나는 사업가를 곡예사라고 생각한다. 줄타기하는 곡예사를 보라. 그리고 곡예사의 웃는 얼굴 뒤로 날카롭게 빛나는 눈빛과 긴장감으로 가득한 근육을 주시해보라. 그것이 바로 사업가가 갖고 있어야 할 자세다!
당시 피자헛은 내가 운영하던 한국 피자헛 주식의 45%를 소유한 2대 주주였다. 그래서 그들이 선임한 이사가 한국에 상주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펩시코 인터내셔널과 계약을 맺을 당시에 한국의 법 조항과 맞지 않았던 사실을 들먹이며, 회사 주식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나는 정당하게 법적 소송을 하고 이제라도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겠다고 큰소리쳤지만, 그들과 맞서 싸운다면 그토록 공을 들였던 한국 피자헛은 소송의 승패를 떠나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두손 두발 들고 그들의 요구를 따르자니 지난 10여 년 동안 피자헛에 기울였던 노력이 너무도 아까웠다.
1993년 6월, 오랜 고민 끝에 결국 나는 주식매매 계약서에 서명했다. 미국의 펩시코 인터내셔널에 내가 가지고 있는 한국 피자헛의 주식을 전량 매각한 것이다. 주식매매 계약이 완료된 후 우리나라 실정에 무지한 낯선 이방인들에 의해서 내가 키워온 피자헛이 천덕꾸러기로 전락하는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었으므로 입술을 깨물며, 당분간 회사에 머물러달라는 펩시코 인터내셔널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무엇을 해도 가슴 한 구석이 뻥 뚫려버린 듯한 허전함을 메울 길은 없었다. 방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피자헛과 완전히 결별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고, 결국 사퇴를 선택했다.
chapter 4 다시 외식사업에 승부를 걸다피자헛과 결별한 후 방황을 끝내고 일어선 나는 회사를 떠날 때 함께 보따리를 싼 동료들과 함께 새로운 사업을 물색하다 참나무 장작으로 닭을 구워내는 '로스팅(roasting)' 방식의 패스트푸드 업체 케니로저스 로스터스를 선택했다. 모든 타당성을 숙고해본 결과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나는 케니로저스 로스터스의 고문을 만나 합작투자를 이끌어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서로 간의 책임의식을 높이고 사업의 규모도 한층 대형화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케니로저스 로스터스를 이용해본 적이 있는 고객이라면 로티세리라는 기계 앞에서 날카로운 칼을 들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통닭을 찌르고 있던 나를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또한 다 구워진 통닭을 내려놓고 지뢰 탐지기 같은 것으로 찔러대던 모습도 기억할 것이다. 날카로운 칼로 통닭을 찌르는 것은 구워지는 도중 닭의 몸에서 나오는 기름이 특정 부위에 뭉치는 것을 막고 열을 가급적 몸통 깊숙이 전달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필수 작업이었다. 그리고 다 구워진 통닭을 여기 저기 찌르는 것은 몸통 가장 깊숙한 곳까지 충분히 익었는지 여부를 알기 위해 온도를 측정해보는 품질 관리의 가장 중요한 단계였다.
온도 측정을 하다 하다 지친 직원들이 나에게 슬그머니 온도계를 내미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들이 재면 그렇게 안 나오던 온도가 내가 재기만 하면 단번에 정확히 올라가곤 했다. 그리고 닭을 구워낸 후 날카로운 가위로 배를 가르고 다리와 날개를 잘라 4등분하는 내 모습을 보는 지켜보는 직원들은 찬탄을 하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사장님은 정말 칼잡이 같아요. 양재동 칼잡이." 양재동 칼잡이라…. 생각해보니 나는 정말 그렇게 불려도 전혀 부끄럽지 않을 만큼 내 사업에 열중했다.
사업이 번창일로를 걷던 1997년 1월, 한보그룹의 부도 이후 진로그룹과 대농그룹마저 어려운 지경에 놓이면서 매장에도 서서히 고객들의 발길이 줄어들었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분위기였지만 사업주인 내 입장에서는 날마다 속이 타들어갔다. 1994년 계약 당시 투자를 약속했던 케니로저스 로스터스 본사마저 등을 돌린 후 회사는 최악의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chapter 5 삶보다 가까이 죽음을 느끼다케니로저스 로스터스 본사의 투자가 물거품으로 돌아간 후 주거래 은행에 돌아온 5천만 원짜리 어음을 결국 막지 못하면서 케니로저스 로스터스의 한국법인인 한국 로스터스(주)는 결국 최종 부도 처리되고 말았다. 사실 그 당시 나는 채무를 변제하기에 충분한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 부동산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