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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심 경영

최수부 지음 | 랜덤하우스중앙
첫 번째 인생 저력 - 굳은 의지 : 세상 어느 곳이나 내게는 학교였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나를 보고 '광동 최씨 고집'이라고 부르곤 한다. 최씨들이 고집 세다는 거야 예부터 흔히들 하던 말인데, 특히 나를 두고 그 말을 강조하는 걸 보면 내가 유난히 더 고집스럽게 산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광동제약의 모습이 그렇게 허술해 보이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그 고집 때문이라면 나는 온갖 사연이 가득한 지난 70년 인생을 고집스럽게 산 것이 후회스럽지 않다. 그래서 나는 이제 그 70년 인생과 40년 광동제약의 고집을 되돌아보려고 한다. 이 책은 초등학교 4학년이 배움의 전부였던 한 철부지가 어떤 고집으로 세상을 살아냈는지, 그 최씨 고집에 관한 이야기다. 그 고집이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결코 희망의 끈만은 놓지 않도록 하는 또 다른 김씨 고집, 이씨 고집, 박씨 고집으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무작정 살길을 찾아 일본으로 찾아온 우리 부모님은 누가 더하고 덜할 것도 없을 만큼 억척스럽게 일만 하던 사람들이었다. 내가 소학교에 들어갈 무렵 부모님이 운영하시던 우리 공장에는 재일교포와 일본인을 합쳐 100명이 훨씬 넘는 종업원이 일하고 있었다. 일본인 종업원을 50명 이상 거느리고 있었으므로 적어도 일본인들에게 우리 가족은 대놓고 괄시할 수 있을 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나는 일본인 아이들로부터 노골적인 멸시를 당했다. 어떤 폭언이나 폭력에도 굴하지 않았던 나는 일본 아이들의 괴롭힘이 더욱 심해지자 나는 아이들을 크게 혼내주고는 다시는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 일로 학교로부터 퇴학을 당하여 집에서 빈둥거리며 지내기를 4개월. 나는 내가 겪은 '해방' 말고 또 다른 진정한 해방 소식을 들었다. 1945년 8월 15일이었다.



해방이 되자 아버지는 주위의 일본인 사업가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미련 없이 짐을 싸서 조선 땅을 밟았다. 그리고 나는 1946년 봄, 외가가 있는 마을에 있는 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학을 했다. 그때 조선말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상태였던 나는 학교 아이들로부터 '쪽발이'라는 놀림을 들으면서도 이를 악물고 학교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내가 한국말을 잘 못하는 데 있기 때문에 나는 하루빨리 우리말에, 그것도 경상도 토박이 사투리에 익숙해지기 위해 애썼다. 그 와중에 사업 구상을 위해 분주하게 다니시던 아버지가 그동안 모아두었던 돈을 사기꾼들에게 다 날리면서 우리 가족은 당장 먹을거리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내 나이 열두 살, 나는 본의 아니게 집안 생계를 책임지는 소년 가장이 되었다. 물론 형이 있었지만 성격이나 체격으로 볼 때 고된 일을 하기에는 아무래도 형보다 내가 적격이었다. 아래로 넷이나 되는 어린 동생들을 저대로 두면 굶어 죽이기 딱 알맞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내 학교 생활은 일본에서의 소학교 2년, 한국에서 또 2년 그렇게 4년으로 끝이 났다. 우선 나는 내가 가진 학벌로도 가능한 일을 찾아 그 일을 천직이라고 여겼고 내가 가진 에너지를 몽땅 거기에 쏟아부었다. 그랬더니 누구도 내 짧은 학벌을 따지는 사람이 없었고, 나 또한 배우지 못한 지난 일을 후회하거나 하소연할 일이 없었다.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이 된 후 시골 구석구석을 떠돌며 온갖 장사를 하는 동안 나는 제법 요령 있는 장사꾼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신용만은 반드시 지키는 그런 장사꾼이 되고 싶었다. 파는 물건이 무엇이든 질이 떨어지는 물건을 속여서 파는 일만은 절대로 하지 말자는 약속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나친 이익을 남기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펼친 좌판 앞을 오가는 사람들 모두에게 항상 활짝 웃는 얼굴로 친절한 인사말을 건넸다. 물론 어린 내가 무슨 거창한 철학이 있어서 신용이니 믿음이니 친절이니 하는 걸 생각한 것은 분명 아니었다. 그런데도 시장통에서 내 나름대로의 방식을 익히게 된 것은 장사가 되고, 안 되는 이유를 따져본 결과였다. 어쨌든 열두 살에 처음 시장에 나선 나는 온갖 장사를 거치며 4∼5년을 지내는 동안 나름대로의 장사 수완을 익혔다. 그리고 그 수완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바로 '신용'이었다.



그후 나는 군용 트럭을 임대해서 장사를 하는 형과 함께 더욱 큰 시장을 돌며 부지런함과 정직을 무기 삼아 어깨 너머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직접 트럭을 임대해서 군납 사업을 시작하여 경상도 각지의 시장을 돌았다. 아무리 업자가 되고 큰돈을 만져도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남을 속이지 말자는 것과 항상 부지런하자는 것이었다. 제 몫 챙기는 일에는 어리석었어도 나는 부지런하게 군납업자 노릇을 했다. 그리고 그 덕에 군에 입대하기 전까지 그럭저럭 여덟 식구 생활비와 동생들 학비를 댈 수 있었다.





두 번째 인생 저력 - 성실 : 내가 모은 건 돈이 아니라 희망이었다

3년간의 군 복무를 마치고 나왔을 때 아버지와 형을 제외한 나머지 식구들은 모두 고향을 떠나 서울에 정착하고 있었다. 먼저 상경한 어머니가 참기름 장사로 터를 잡은 후 동생들을 서울로 오게 한 것이었다. 물론 다른 형제들 모두 돈벌이를 위해 어떤 일거리라도 찾으려 애쓰고 있었지만 실업자가 넘쳐나던 당시의 나라 형편상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땅히 하는 일도 없이 지내다가, 동생에게 들어온 제약회사 외판원 일을 내가 대신 하게 되었다. 내가 영업사원으로 취직한 곳은 고려인삼사였는데, 그곳에서 유일하게 생산하던 경옥고의 효능에 대해 확신하게 된 나는 당시 웬만한 회사원 한달 월급에 해당하는 가격인 경옥고를 가지고 영업에 나섰다. 영업 첫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종로와 광화문 일대의 모든 상점과 사무실을 샅샅이 들렀지만 퇴짜를 맞고 말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을지로 근처 양복점에서 2개를 판매한 것을 시작으로 내가 받는 영업 수당이 웬만한 대리점 전체 영업 수당에 이를 정도로 내게 경옥고를 주문하는 고객은 하루하루 늘어만 갔다.



영업을 하러 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하고 나온 사무실이나 상점이라도 자주 들르고, 그 때마다 진심이 담긴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는 것, 비록 약을 사주지는 않아도 결코 섭섭해하거나 원망하지 않는 것, 언젠가는 그 사람도 내 고객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 것, 이런 자세가 중요했다. 내가 서울 바닥에서 익힌 영업 비결, 그 첫째는 이처럼 집념과 끈기를 가지는 것이었다. 절반은 천부적이고 절반은 후천적인 '최씨 고집'과 30리 길을 걸어다니던 어린 시절의 인내심이 그 밑거름이 되어주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재무부와 국회까지 들어가서 영업을 할 정도의 당당한 자세와 남다른 배짱이었다. 그리고 일단 경옥고를 사준 고객들을 찾아 복용 방법은 잘 지키는지, 효과는 있는지 등을 체크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고객과 외판원으로 만난 사이가 마치 오랜 친지나 이웃처럼 느껴지게 마련이었다.



직접 대한인삼제약사의 대리점을 개설해 경옥고를 팔기 시작한 1961년, 고객 관리차 찾아갔던 조흥은행 충무로 지점장의 제안으로 한 달에 79,700환(당시 웬만한 직장인 대여섯 달치 월급에 해당하는 돈)씩 넣으면 1년 후 100만 환을 타는 적금 상품에 가입했다. 그리고 이것을 계기로 앞으로 3년 이내에 3백만 환의 돈을 모아 뭔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겠다는 확고한 목표 하나를 정했다. 그리고 1963년 여름, 나는 마침내 목표로 삼았단 3백만 환의 자금을 모았다. 차비를 줄이고 담뱃값을 아끼며 점심값을 절약하여 모은 3백만 환!



돌이켜 보면 3백만 환이라는 목표를 가진 것이 내게는 참으로 중요한 동기부여가 되었던 것 같다. 그 목표를 가지고 차곡차곡 쌓이는 적금통장의 저축액을 확인하는 매 순간이 있었기에 나는 더 많이 걷고도 발가락이 덜 아팠다. 싸구려 담배를 필터 끝까지 아껴 피우면서도 입이 쓰지 않았고, 50원짜리 수제비에도 입이 달았다. 이처럼 목표는 꿈이 되고 꿈은 항상 또 다른 꿈을 낳기 때문에 아무리 소박한 꿈일지라도 그 꿈을 가지는 자체가 소중하다. 이력서에 적어 넣을 거창한 학력이나 그럴듯한 자격증 몇 개보다 훨씬 소중한 것이 바로 그 꿈이다.





세 번째 인생 저력 - 신용 : 믿음은 하늘보다 먼저 사람을 감동시킨다

목표로 삼았던 3백만 환의 창업자금을 모은 1963년, 나는 본격적으로 창업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름난 작명소를 찾아가 한약재의 본거지인 중국 내에서도 가장 큰 성의 이름이며, 중국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염원을 담은 '광동'제약사로 회사 이름을 정했다. 그럭저럭 시설과 조직이 갖추어진 1963년 가을에 나는 제약사 설립 허가와 경옥고 품목 허가를 신청하였다. 약사와 공장장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동의보감』등 한방에 관한 서적을 몇 번씩 읽으며 한약재와 처방에 대한 지식을 쌓아갔다. 사실 『동의보감』을 뒤적이며 틈틈이 공부를 해온 것은 처음 경옥고 외판원을 시작할 때부터 생긴 습관이었다.



영업사원들에게 내가 가진 영업의 노하우를 알려주고, 나 또한 시간을 내서 직접 고객들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자전거에 수십 개씩 경옥고를 싣고 운반도 하고, 수금된 돈을 맞추고 정리하는 일도 했다. 생산뿐 아니라 영업에 있어서도 나는 여전히 영업사원이었고, 거기다 운반 및 경리 담당이었다. 그렇게 나의 외길은 시작되었고, 지금까지 그 길 이외에 딴 길을 찾거나 걸어본 적이 없다. 그 외길의 첫걸음이었기에 경옥고와 맺은 인연은 참으로 소중하고 값지다. 그리고 열두 살에 땔감을 해서 내다 팔고 이후 시장을 다니며 장사를 시작한 이래 영업사원이 되고 대리점주가 되고 제약사 사장이 되기까지 단 한순간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정직과 신용이었다. 나는 회사의 규모가 커진 이후에도 주요 약재만큼은 반드시 내 손으로 고르고 구입했다. 인삼 같이 비싼 재료라도 정량을 지키는 등 철저하게 처방을 지키고 정성을 다하는 일도 중요했다.



경옥고 단일 품목으로 시작한 광동제약사는 착실한 성장을 거듭했다. 물론 1960년대 중후반까지 가내 제조업 형태를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전국에 걸쳐 신규 거래처가 속속 생겨나면서 매출도 큰 폭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기업이 그렇듯 광동제약사 또한 순풍에 돛 단 듯 평탄한 성장의 길만을 걸었던 것은 아니었다. 책임자가 관리 약사의 명의 변경을 하지 않은 바람에 무허가 업소로 판정받아 제약회사 허가 취소 처분을 받은 일, 당시 의약품 외판이 실정법으로 금지된 상태였음에도 한 영업사원이 보건사회부에 경옥고를 팔려고 들어가는 바람에 영업정지 처분을 받은 일, 경옥고를 생산하던 다른 회사의 퇴직 공장장이 경옥고를 만드는 과정에서 인삼 대신 도라지를 넣었다는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양질의 재료만을 쓰던 광동제약의 경옥고까지 판매 부진을 겪은 일들이 있었다. 특히 가짜 경옥고 사건으로 생겨난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내가 생각해낸 것은 국내산 우수 약재를 우리 고유의 처방에 따라 정확한 함량을 지켜서 투명한 비닐 봉지에 담아 포장하여 판매하는 것이었다. 소비자들이 직접 눈으로 확인한 후 안심하고 달여먹을 수 있도록 편리한 비닐봉지 속에 100% 우수 국산 한약재를 담은 것이다.



1967년에 첫 제품이 나간 후 불과 몇 개월 만에 전국적으로 우리 제품 판매를 대행하는 이동 건재상 업자들만 해도 3∼4천 명에 이르렀다. 이처럼 이동 건재상의 성공으로 광동제약사는 가짜 경옥고 사건의 후유증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경옥고도 점차 과거 수준의 매출을 회복했다. 우리에게는 회사 문을 닫을 위기 속에서 광동 경옥고의 믿음을 지켜낸 정직함이 있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 쌓아온 소비자들과의 신뢰가 있었다. 아울러 한약재와 한방의 우수성을 믿는 고집스러움이 있었다. 그 같은 정직과 신뢰와 고집이 있었기에 우리에게 기회는 왔다. 기회는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오는 것이며, 그 준비된 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1970년대를 맞으면서 광동제약사는 이동 건재상의 폭발적인 인기와 경옥고 매출의 회복에 힘입어 연 매출액이 30∼40억 원을 넘고 있었다. 또 꾸준한 인력 보강으로 우수한 생산 및 관리 사원들이 근속을 하고 있었고, 이동 건재상을 통해 전국적인 영업망이 개척되어 있었다. 하지만 우리 고유의 한방을 과학화하여 우수한 의약품을 만들어 팔기 위해서는 일정한 규모의 공장과 설비가 필수였다. 그래서 나는 영등포구 시흥동에 새로운 공장 부지를 마련했고, 개업한 지 꼭 10년 만인 1973년 9월 13일, 광동제약은 주식회사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회사 형태를 법인으로 전환하여 명실공히 제약회사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그후 나는 본격적인 제약업 진출과 약국 영업을 위해 적극적으로 각 분야의 전문 인력을 보강했다. 그리고 광동제약주식회사의 새로운 미래를 열 첫 작품으로 우황청심원을 선택하여 준비를 시작했다. 우왕청심원은 뇌 질환, 중풍성 질환, 심장성 질환, 신경성 질환 등에 쓰이는 오랜 처방으로 『동의보감』의 '풍(風)'의 항목에 수록된 이래 궁궐을 비롯한 각지에서 널리 사용하던 약이었다. 특히 그 탁월한 효능이 입증되면서 조선 왕실에서 친교를 위해 중국에 선물로 보낼 정도로 귀하게 여겼다. 우황청심원을 구성하는 생약 제제는 사향과 우황을 비롯해 30여 종류인데, 사향노루의 향낭(향주머니)을 말려서 만드는 사향과 소 쓸개에 병이 생겨서 뭉쳐진 부위인 우황은 그 진품을 구하기 어려울 만큼 귀한 약재였다. 물론 이 처방을 바탕으로 제품을 생산하고 있는 조선무약 같은 업체가 있었지만 좋은 재료를 구해 정성을 다해서 만든다면 그 결과가 어떻든 후회스럽지 않을 것 같았으므로 우황청심원의 제조 허가를 취득한 후 나는 우선 가장 좋은 품질의 원료를 구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우황청심원의 생산을 계기로 한방을 과학화한다는 기업 모토가 일치하는 조선무약과의 숙명적인 경쟁관계가 시작되었다. 또한 주요 원료를 직접 내 손으로 고른다는 철칙을 더욱 철저하게 지키게 되었다.

우황청심원을 개발한 후에 생산한 것은 쌍화탕인데, 이 제품 역시 『동의보감』에 나오는 처방으로 조선시대 양반층에서 보약으로 삼아 조석으로 마셨다고 전해질 정도로 널리 사용되었다. 기를 보충하고 피로를 회복하는 데 효능이 있다고 한다. 또한 비교적 처방이 간단하여 대량 생산과 보급이 가능하다는 이점도 있었다. 최고 품질의 재료를 썼기 때문에 당시 시중에 나와 있는 쌍화탕의 두 배가 넘는 가격이었지만 약사들이 먼저 먹어보고 효과를 알아본 덕분에 매출이 점차 늘기 시작했으며, 신문을 비롯한 각종 매체에 광고를 내기 시작하자 판매량은 250만 병 등으로 급증했다. 본격적인 대중 의약품 시장 개척이라는 과제를 일거에 실현하게 해준 주역, 그것이 바로 쌍화탕이었다.



우황청심원과 쌍화탕의 성공으로 광동제약은 '한방의 과학화'와 '대중 의약품 시장 개척'이라는 두 과제의 실현을 위해 의미 있는 걸음을 내딛게 된다. 40년 광동제약 역사상 그것은 분명 작지만 큰 걸음이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 한 대리점 주가 물건 값을 제대로 입금하지 않아 약을 주지 않았더니 그것에 앙심을 품고 자신이 보좌관으로 있는 국회의원을 찾아가 광동제약을 음해하는 온갖 거짓정보를 제보하였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국회의원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광동제약에 대해 제재를 가하라고 요구하면서 나는 한바탕 곤혹을 치러야만 했다. 결국 영장이 발부된 나는 무죄 판결이 날 때까지 99일간 억울한 수감 생활을 했다.



내가 수감되던 날 쏟아졌던 집중호우로부터 공장을 지킨 것은 광동제약의 사원들이었다. 그리고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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