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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CNN으로 세계를 움직인다

자넷 로우 지음 | 크림슨
기술을 장악하라



최초의 24시간 뉴스 네트워크인 '케이블 뉴스 네트워크(CNN)'를 설립하기로 결심한 터너는 보유하고 있던 자산의 거의 전부를 이 일을 위해 쏟아 부었다. 그가 CNN을 통해 추구하고자 했던 대의는 그가 했던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암흑시대, 대중은 암흑 속에서 살아야 했던 시대로의 회귀를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정보는 곧 힘입니다. CNN은 이 정보의 민주화에 기여할 것입니다."

CNN을 설립한 터너는 케이블 TV 부문의 틈새를 찾는 한편으로, 뉴스의 질적 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먼저 열정과 도전정신을 가진 인재들로 뉴스 제작 팀을 구성했고, 또 CNN의 비즈니스 측면을 개발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아울러 세상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사건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동시에 방송 관계자들에게 권한을 대폭 위임함으로써 단 1년 만에 CNN의 위상을 확고히 했다. 터너를 비롯한 CNN의 이사진은 다른 방송사에 비해 턱없이 적은 예산에도 불구하고 정해진 근무시간 없이 거의 하루 종일을 일하다시피 했다.

의도는 좋았지만, 언론계와 텔레비전 뉴스에 익숙지 못했던 초창기에 그는 여러 번 실수를 범하기도 했다. 제작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터너는 여러 차례 공익을 강조하는 논설을 직접 내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터너도 초창기에 했던 말들을 되짚어 보게 된다. 그래서 때로는 텔레비전과 타협해야 할 때도 있었고, 마음에도 들지 않는 프로그램이나 영화도 어쩔 수 없이 내보내야 했다.

CNN이 처음 설립되었을 때 기존 방송사들은 '애송이 얼간이 뉴스'라며 비아냥거렸지만, 미디어 비평가들은 CNN이 중국 대학생들의 봉기를 보도하면서 도약을 시작했고, 걸프전을 특종 보도하면서 한순간에 핵심 미디어 중 하나로 부상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1989년에 로마 프리에타 지진이 샌프란시스코 해안을 강타한 소식을 긴급 타전하면서 다른 신문과 텔레비전 방송사들도 CNN을 주요 경쟁자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당시 CNN 기자들은 소형 카메라를 들고 지진 발생 지역을 누비며 피해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도했다. 그러자 다른 방송사들도 현장 화면을 생중계하기에 이르렀다.

1999년에 이르러 CNN은 36개의 뉴스 보도국을 확보했고, 이중에 24개는 미국 이외의 국가에 포진해 있었다. 이런 네트워크를 통해 CNN 가시청 지역의 가구 수는 8천만 가구로 늘어났다. 그 뒤 터너는 컴퓨터와 디지털 기술 시스템을 신속하게 도입함으로써 텔레비전 운영 방식을 최첨단 기술로 무장시켰다. 하지만 엄격한 프로그램 편성만큼은 조금의 융통성도 허용치 않았다.

CNN 인터렉티브(CNN Interactive)와 소프트웨어 제조업체인 오라클(Oracle)은 1997년 스프링 컴덱스(Spring Comdex) 컴퓨터 박람회에서, 두 회사의 합작 웹사이트인 '커스텀 뉴스 웹사이트(The Custom News Website)'를 소개했다. 고객이 뉴스를 선택하여 간편하게 접속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동안 지나치게 많은 뉴스에 노출되어 온 인류에게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고 그는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과도한 정보가 우리의 안락한 삶까지 위협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우리가 맞춤형 뉴스 프로그램을 선보인 것도 이러한 정보 과잉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서입니다."

도전적인 소년



테드 터너의 아버지, 에드 터너는 미시시피 주 섬너에서 대지주이자 상점 주인이던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그러나 대공황으로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여 곤궁한 살림살이를 면치 못하게 되자 에드 터너는 학교를 그만두고 일자리를 얻기 위해 신시내티 북부로 이주했다. 여기서 그는 테드 터너의 어머니인 플로렌스를 만나 결혼을 했다.

테드 터너는 어머니의 말쑥한 외모와 외향적인 성격뿐 아니라 아버지의 극단적인 변덕 그리고 충동적인 성향까지 그대로 물려받았다. 성공에 대한 강한 집착을 갖고 있는 아버지에 의해 테드 터너는 여섯 살의 나이에 신시내티의 군사학교에 입학했다. 그 뒤 더 엄격하기로 소문난 조지아 군사학교에, 다시 테네시 주 채터누가에 위치한 장로교 군사학교인 맥칼리 스쿨에 입학하게 된다.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열정과 독립심을 가졌던 그도 맥칼리에 적응하는 데는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나중에는 상황이 달라져 최고의 생도로 인정받게 된다.

동급생들과 교수들은 테드 터너에 대해, 스스로의 규칙에 따라 행동하는 자제력 강한 소년으로 묘사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독서광이었다. 특히 그리스와 로마의 고대신화에 등장하는 신과 영웅들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한때는 마케도니아의 왕이자 정복자인 알렉산드로스 대제를 자신의 이상형으로 삼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관심을 가진 건 한 가지뿐이었다. 열심히 노력했을 때 달성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그 일을 하게 되었는지, 무엇 때문에 그토록 영예로운 자리에 오를 수 있었는지에 늘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터너의 나이 54세였을 때 맥칼리 재학생들 앞에서 연설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이 학교를 무척이나 사랑합니다. 그만큼 내게 많은 것을 준 학교니까요. 학교에 다닐 때는 뭐가 고마운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학교를 졸업하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돌이켜보면 학교가 여러분에게 얼마나 고마운 곳이었는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학교에서 배운 것은 그야말로 최악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학교를 통해 생애 처음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터너의 아버지는 늘 열심히 일했지만 아들과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테드 터너는 실질적으로 자기를 키워준 사람은 바로 지미 브라운이라고 했다. 터너는 지미 브라운을 이렇게 묘사한다. "내게는 또 한 사람의 아버지이자 큰형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내겐 형제가 없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와 생각이 잘 맞았지요. 아버지도 내가 브라운과 잘 지내기를 바랐습니다. 아버지 역시 그와 매우 친밀한 사이였거든요. 브라운은 우리 집에서 고용한 사람이었지만 실제로는 우리 가족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지미 브라운과의 우정 덕분에 나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브라운이 터너에게 가르친 것들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요트와 사냥, 낚시를 빼놓을 수 없으며 브라운과 터너는 여전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맥칼리를 졸업한 1956년, 터너는 하버드에 입학원서를 제출했으나 퇴짜를 맞은 후, 로드 아일랜드 주 프로비던스에 위치한 브라운 대학에 등록했다. 터너에게 있어 대학생활은 그동안 통제받고 때로는 보호받는 교육환경에서 벗어나 겪게 된 최초의 경험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비즈니스와 관련된 공부를 하길 바랐지만, 막상 터너가 전공으로 선택한 분야는 고전문학이었다. 아마도 브라운 대학에서는 공부하기가 쉬운 분야라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터너가 어릴 때부터 즐겼던 고전 및 영웅서적들과도 무관하지는 않았다. 그 당시 그의 가정환경은 불안정 그 자체였다. 여동생 메리 제인은 치명적인 질병으로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였고, 부모는 결국 이혼에 이르고 말았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던 여동생은 어머니에게, 터너의 양육은 아버지에게 맡겨졌다.

이 무렵 터너는 위턴 여자대학 인근의 여자 기숙사에서 열린 파티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학교 측으로부터 정학 통보를 받는다. 복학한 후에, 마지못해 아버지의 소원대로 전공을 경제학으로 바꿨지만 제대로 된 학점을 받지는 못했다. 그뒤 터너는 기숙사에 여학생을 들였다는 이유로 대학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퇴학은 그에게 공교육의 마침표를 의미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젊은 시절의 엉뚱한 행위마저 완전히 끝난 건 아니었다.

해안 경비대에서 복무하던 시기에 그는 첫 번째 부인인 주디 나이에게 청혼을 했다. 그리고 복무가 끝난 뒤에는 사바나의 집으로 돌아와 다시 아버지와 함께 일을 시작했다. 아버지 에드 터너는 아들의 결혼식 들러리를 자청했다. 그러나 행복했던 이 순간을 마지막으로 터너 일가의 삶은 고통과 슬픔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한다. 테드 터너의 아버지 에드 터너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에 위치한 가족 소유의 빈든 농장에서 38구경 권총으로 머리를 쏘아 자살하고 말았다. 이때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엉뚱하고 때로는 모질게 행동했던 아버지였지만 아들을 향한 사랑만큼은 남 못지 않았으며, 터너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이런 식의 죽음은 아들 터너에게 평생 치유하지 못할 마음의 병을 안기고 말았다. "그 일로 인해 나는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내가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해 주던 유일한 사람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터너는 TV 프로그램 〈60분〉에 출연해 다이안 소이어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내게 가장 큰 기쁨과 만족을 줄 수 있는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돌아가신 아버지를 다시 모셔 와서 지금의 나를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여한이 없을 겁니다. 그리고 아버지 역시 지금의 내 모습을 무척 흐뭇하게 생각하실 겁니다."

"그게 광고야, 멍청아!"



테드 터너는 10대 시절부터 아버지의 간판 사업을 도와 남부의 폭염 속에서 중노동을 했다. 터너는 광고를 통해 비즈니스에 뛰어들었고, 방식은 다르지만 인생의 대부분을 광고와 비슷한 분야에서 보냈다. 간판에서 시작하여 라디오 방송으로, 다시 UFH 텔레비전에서 위성 텔레비전 네트워크로 옮겨갔다. 겉모습은 달랐지만 그가 추구하는 목표는 하나였다. 즉, 더 많은 광고를 더 높은 가격에 수주하기 위해 커뮤니케이션 매체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후일 그는 간판 사업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끈기에 있었다고 말했다.

테드 터너가 주디 나이와 결혼한 직후, 아버지는 그를 '터너 애드버타이징' 메이콘 지사의 총괄관리자로 임명했다. 일주일 중에 엿새 반을, 그리고 하루의 대부분을 일에 쏟아 부은 터너는 부임한 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메이콘 지사의 매출을 두 배로 늘렸다. 아버지가 삶을 마감할 무렵 터너는 옥외광고 비즈니스의 속성을 거의 꿰뚫고 있었다.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터너 애드버타이징을 물려받은 그는 사업체의 매각을 취소하고 본래의 조직을 다시 복원하리라 다짐했다. 터너는 인수자들에게, 사업체 매각은 파산을 우려한 아버지의 급작스런 결정이었음을 강조하고, 인수 계획을 취소해 달라고 간청했으나 인수자들은 터너의 제의를 거절했다. 이에 터너는, 매각 서류에 서명할 당시의 아버지의 정신상태가 온전하지 않았음을 강조하며, 계약을 파기해 달라는 청원을 법원에 냈다. 동시에, 여전히 자신의 통제 하에 있던 조직을 이용하여 자사의 간판 임대 실적을 극대화시켰다. 그로 인해 매각이 예정된 사업체의 실적은 점점 바닥으로 추락했고, 결국에는 존폐를 걱정해야 할 수준까지 이르렀다. 마침내 터너는 터너 애드버타이징의 상대적 우위를 무기로 인수자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간판 사업체의 경영권을 장악한 뒤에도 그의 노력은 그치지 않았다.

이후 그는 학창 시절을 보냈던 채터누가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던 한 라디오 방송사를 인수하여 운영 방식을 전면 개편했고, 이 사실을 홍보하기 위해 기존의 간판 매체를 적극 이용했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채터누가에서 두 번째 라디오 방송사를 인수했고, 찰스턴에서 두 곳, 플로리다 주 잭슨빌에서 또 한 곳의 방송사를 추가로 사들였다. 터너가 인수한 라디오 방송사들은 하나같이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싼값에 사서 대대적인 체질 개선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터너의 천재성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는 사람들을 매혹시켜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인수한 업체의 직원들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모하여, 터너를 위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심히 일했다. 이 무렵 터너는 이미 세계적인 미디어 거물로의 길을 걷기 시작하고 있었다.

애틀란타를 집어삼킨 애송이



테드 터너가 미디어 분야에 진출하게 된 것은 남부의 하류 라디오 방송사 몇 개를 인수하여 알짜배기 방송사로 전환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터너 커뮤니케이션스 코퍼레이션(Turner communications Corporation)과 라이스 브로드캐스팅(Rice Broadcasting)의 합병을 통해 훗날 애틀랜타 슈퍼스테이션WTBS(Atlanta Superstation WTBS)란 이름으로 알려진 지역 텔레비전 방송사의 경영권을 취득했다. 터너는 이 방송사의 호출 부호를 터너 커뮤니케이션스 그룹을 의미하는 WTCG로 바꾸고 흑자 기업으로 전환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먼저 그는 저렴하고 재미있으며 현실로부터 잠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시청자들에게 제공하려 했다. 또한 자신의 간판 사업을 통해 방송사를 적극 홍보하는 동시에 방송을 이용한 광고 수주에도 열을 올렸다. 초창기에는 전국을 대상을 한 광고 방송이 어려웠기 때문에 광고 인쇄물(DM)을 주로 활용했다. 터너는 시청자들이 보내온 우편물을 지역별로 분류하여 시청자들의 주요 거주지를 파악하는 등 철저한 시장분석을 실시했다. 또 그는 재미가 있으면서 예산이 적게 들어야 한다는 점 등 나름대로 몇 가지 기준을 만들었으며 시청자들의 웃음을 자아내기 위해 갖가지 아이디어를 동원했다. 터너는 레슬링과 롤러 대회뿐 아니라 다양한 시트콤을 재방송하기로도 유명하다.

영화와 관련하여, 1986년 테드 터너는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유나이티드 아티스트(MGM/UA)의 자산 대부분을 사들였다. 이 영화사에서 보유한 영화 도서관을 인수하겠다는 목적이 가장 컸다. 또 1993년, 그는 10억 달러를 투자하여 작은 규모의 영화사 두 곳을 인수했다. 테드 터너가 인수한 이후 뉴라인 시네마와 캐슬락 엔터테인먼트는 영화상 수상작을 다수 배출했다. 두 영화사를 인수한 후에도 미디어 분야를 향한 터너의 인수 노력은 그치지 않았다.

저렴한 비용으로 방송사를 인수하고 치밀한 프로그램 편성을 통해 거둔 기대 이상의 성공에 고무된 터너는 다음 단계에 돌입했다. 극초단파 및 케이블 텔레비전 기술을 바탕으로 슈퍼스테이션 시스템을 창안하여 채널 17의 프로그램(광고를 포함하여)을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시장에도 보급한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극초단파 전송 방식은 속도가 느리고 비용이 많이 들 뿐 아니라 장거리 전송에는 부적합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터너는 두 가지 이유로 인해 기존의 소규모 UHF 방송사를 슈퍼스테이션으로 전환하게 된다. 첫째, 1975년에 연방통신위원회(FCC)에서 케이블 텔레비전의 확산을 억제하는 몇 가지 규정을 만들었다. 둘째, 이와 때를 같이하여 RCA에서 자사 최초의 통신위성을 쏘아 올렸다. 이때 터너는 위성방송의 기술적 우수성에 관심을 가졌다. 인공위성을 이용하면 전파가 도달할 수 있는 지구상의 모든 지역으로 텔레비전 신호를 빠르고 쉽게 보낼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1976년 12월 27일, 터너가 슈퍼스테이션 방식을 도입함으로써 전국을 무대로 한 방송이 시작되었다. WTCG(훗날의 WTBS)에서 사상 최초로 RCA의 새트컴(Satcom) 1호 위성에 하루 24시간 전파를 발사하면서 이 방송사의 방송권역은 순식간에 1천만 평방마일 이상으로 확장되었다. 테드 터너가 전국을 무대로 한 방송매체 개발에 열을 올린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전국 광고주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광고주들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애틀랜타와 오클라호마 주, 나아가 알래스카 주까지 무려 700만 이상의 시청자들을 포괄하는 방송권역이 주는 기회를 그들도 마냥 도외시할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터너의 새로운 시도는 기존의 방송사들에게는 엄연한 위협이었다.

터너가 마흔 번째 생일을 맞이한 1978년, 드디어 주민들은 터너가 세운 기업이 애틀랜타를 지배할 뿐 아니라 이 도시의 대표적 상징이 되리란 사실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 터너의 몇몇 친구들은 그의 일생을 담은 비디오테이프를 제작하여 생일선물로 선사했다. 테이프의 제목은 '애틀랜타를 집어삼킨 애송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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