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CNN으로 세계를 움직인다
자넷 로우 지음 | 크림슨
테드 터너는 10대 시절부터 아버지의 간판 사업을 도와 남부의 폭염 속에서 중노동을 했다. 터너는 광고를 통해 비즈니스에 뛰어들었고, 방식은 다르지만 인생의 대부분을 광고와 비슷한 분야에서 보냈다. 간판에서 시작하여 라디오 방송으로, 다시 UFH 텔레비전에서 위성 텔레비전 네트워크로 옮겨갔다. 겉모습은 달랐지만 그가 추구하는 목표는 하나였다. 즉, 더 많은 광고를 더 높은 가격에 수주하기 위해 커뮤니케이션 매체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후일 그는 간판 사업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끈기에 있었다고 말했다.
테드 터너가 주디 나이와 결혼한 직후, 아버지는 그를 '터너 애드버타이징' 메이콘 지사의 총괄관리자로 임명했다. 일주일 중에 엿새 반을, 그리고 하루의 대부분을 일에 쏟아 부은 터너는 부임한 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메이콘 지사의 매출을 두 배로 늘렸다. 아버지가 삶을 마감할 무렵 터너는 옥외광고 비즈니스의 속성을 거의 꿰뚫고 있었다.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터너 애드버타이징을 물려받은 그는 사업체의 매각을 취소하고 본래의 조직을 다시 복원하리라 다짐했다. 터너는 인수자들에게, 사업체 매각은 파산을 우려한 아버지의 급작스런 결정이었음을 강조하고, 인수 계획을 취소해 달라고 간청했으나 인수자들은 터너의 제의를 거절했다. 이에 터너는, 매각 서류에 서명할 당시의 아버지의 정신상태가 온전하지 않았음을 강조하며, 계약을 파기해 달라는 청원을 법원에 냈다. 동시에, 여전히 자신의 통제 하에 있던 조직을 이용하여 자사의 간판 임대 실적을 극대화시켰다. 그로 인해 매각이 예정된 사업체의 실적은 점점 바닥으로 추락했고, 결국에는 존폐를 걱정해야 할 수준까지 이르렀다. 마침내 터너는 터너 애드버타이징의 상대적 우위를 무기로 인수자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간판 사업체의 경영권을 장악한 뒤에도 그의 노력은 그치지 않았다.
이후 그는 학창 시절을 보냈던 채터누가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던 한 라디오 방송사를 인수하여 운영 방식을 전면 개편했고, 이 사실을 홍보하기 위해 기존의 간판 매체를 적극 이용했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채터누가에서 두 번째 라디오 방송사를 인수했고, 찰스턴에서 두 곳, 플로리다 주 잭슨빌에서 또 한 곳의 방송사를 추가로 사들였다. 터너가 인수한 라디오 방송사들은 하나같이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싼값에 사서 대대적인 체질 개선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터너의 천재성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는 사람들을 매혹시켜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인수한 업체의 직원들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모하여, 터너를 위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심히 일했다. 이 무렵 터너는 이미 세계적인 미디어 거물로의 길을 걷기 시작하고 있었다.애틀란타를 집어삼킨 애송이테드 터너가 미디어 분야에 진출하게 된 것은 남부의 하류 라디오 방송사 몇 개를 인수하여 알짜배기 방송사로 전환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터너 커뮤니케이션스 코퍼레이션(Turner communications Corporation)과 라이스 브로드캐스팅(Rice Broadcasting)의 합병을 통해 훗날 애틀랜타 슈퍼스테이션WTBS(Atlanta Superstation WTBS)란 이름으로 알려진 지역 텔레비전 방송사의 경영권을 취득했다. 터너는 이 방송사의 호출 부호를 터너 커뮤니케이션스 그룹을 의미하는 WTCG로 바꾸고 흑자 기업으로 전환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먼저 그는 저렴하고 재미있으며 현실로부터 잠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시청자들에게 제공하려 했다. 또한 자신의 간판 사업을 통해 방송사를 적극 홍보하는 동시에 방송을 이용한 광고 수주에도 열을 올렸다. 초창기에는 전국을 대상을 한 광고 방송이 어려웠기 때문에 광고 인쇄물(DM)을 주로 활용했다. 터너는 시청자들이 보내온 우편물을 지역별로 분류하여 시청자들의 주요 거주지를 파악하는 등 철저한 시장분석을 실시했다. 또 그는 재미가 있으면서 예산이 적게 들어야 한다는 점 등 나름대로 몇 가지 기준을 만들었으며 시청자들의 웃음을 자아내기 위해 갖가지 아이디어를 동원했다. 터너는 레슬링과 롤러 대회뿐 아니라 다양한 시트콤을 재방송하기로도 유명하다.
영화와 관련하여, 1986년 테드 터너는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유나이티드 아티스트(MGM/UA)의 자산 대부분을 사들였다. 이 영화사에서 보유한 영화 도서관을 인수하겠다는 목적이 가장 컸다. 또 1993년, 그는 10억 달러를 투자하여 작은 규모의 영화사 두 곳을 인수했다. 테드 터너가 인수한 이후 뉴라인 시네마와 캐슬락 엔터테인먼트는 영화상 수상작을 다수 배출했다. 두 영화사를 인수한 후에도 미디어 분야를 향한 터너의 인수 노력은 그치지 않았다.
저렴한 비용으로 방송사를 인수하고 치밀한 프로그램 편성을 통해 거둔 기대 이상의 성공에 고무된 터너는 다음 단계에 돌입했다. 극초단파 및 케이블 텔레비전 기술을 바탕으로 슈퍼스테이션 시스템을 창안하여 채널 17의 프로그램(광고를 포함하여)을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시장에도 보급한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극초단파 전송 방식은 속도가 느리고 비용이 많이 들 뿐 아니라 장거리 전송에는 부적합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터너는 두 가지 이유로 인해 기존의 소규모 UHF 방송사를 슈퍼스테이션으로 전환하게 된다. 첫째, 1975년에 연방통신위원회(FCC)에서 케이블 텔레비전의 확산을 억제하는 몇 가지 규정을 만들었다. 둘째, 이와 때를 같이하여 RCA에서 자사 최초의 통신위성을 쏘아 올렸다. 이때 터너는 위성방송의 기술적 우수성에 관심을 가졌다. 인공위성을 이용하면 전파가 도달할 수 있는 지구상의 모든 지역으로 텔레비전 신호를 빠르고 쉽게 보낼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1976년 12월 27일, 터너가 슈퍼스테이션 방식을 도입함으로써 전국을 무대로 한 방송이 시작되었다. WTCG(훗날의 WTBS)에서 사상 최초로 RCA의 새트컴(Satcom) 1호 위성에 하루 24시간 전파를 발사하면서 이 방송사의 방송권역은 순식간에 1천만 평방마일 이상으로 확장되었다. 테드 터너가 전국을 무대로 한 방송매체 개발에 열을 올린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전국 광고주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광고주들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애틀랜타와 오클라호마 주, 나아가 알래스카 주까지 무려 700만 이상의 시청자들을 포괄하는 방송권역이 주는 기회를 그들도 마냥 도외시할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터너의 새로운 시도는 기존의 방송사들에게는 엄연한 위협이었다.
터너가 마흔 번째 생일을 맞이한 1978년, 드디어 주민들은 터너가 세운 기업이 애틀랜타를 지배할 뿐 아니라 이 도시의 대표적 상징이 되리란 사실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 터너의 몇몇 친구들은 그의 일생을 담은 비디오테이프를 제작하여 생일선물로 선사했다. 테이프의 제목은 '애틀랜타를 집어삼킨 애송이!'였다.스포츠 왕국테드 터너는 1976년에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팀을 인수하여 자신과 애틀랜타 팬들의 삶에 수많은 일화를 남기기 시작했다. 인수할 당시 브레이브스 팀은 유감스럽게도 내셔널리그 서부지구에서 꼴찌를 달리고 있었다. 그는 구단을 인수한 후 구단주에게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행동까지 마다하지 않음으로써 선수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예를 들어 터너 가족을 위한 특별석이 마련되어 있었음에도 그는 수시로 1루 덕아웃 뒤에서 경기를 관람하며 여느 팬들처럼 코치나 선수, 심판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곤 했다. 또 그는 선수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 라커룸을 가족적인 분위기로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아울러 관중을 다시 경기장으로 불러모으기 위해 색다른 행사도 마련했다.
그런데 터너와 메이저리그 커미셔너인 보우이 쿤의 관계는 그리 원만하지 못했다. 발단은 터너에게 있었다. 자유계약 시장을 교란시켰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게다가 좌익수 게리 매튜스와 5년간 150만 달러에 계약을 하면서 터너와 쿤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터너와 매튜스의 첫 접촉이 어느 칵테일 파티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 규칙 위반에 해당됐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애틀랜타 주민 4만 명 이상의 서명이 담긴 탄원서까지 제출했지만, 쿤은 터너의 자격을 정지시켰다. 1980년, 쿤은 테드 터너가 자유계약 선수 데이브 윈필드를 호화스런 할로윈 파티에 초대하여 부정한 방식으로 입단을 권유했다는 이유로 두 번째 조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터너는 이 같은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터너가 쿤을 야구계로부터 쫓아낼 수도 있는 지위에 오르면서 역전되기 시작했다. 1982년, 터너를 포함한 다수의 구단주들이 쿤의 연임에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커미셔너의 연임을 반대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터너는 이렇게 대답했다. "보우이 쿤은 거의 14년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구계가 과연 14년 전보다 나아진 게 있나요? 없습니다. 오히려 금전적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만 가중되었을 뿐입니다. 그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요? 물론 쿤만의 잘못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리더입니다. 한 구단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고 해서 관리자만을 나무랄 수는 없지만 어떻든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은 바로 관리자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터너의 브레이브스 팀은 6년을 꼴찌로 보낸 끝에, 1982년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챔피언십을 차지했다. 이때 그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후 1991년과 92년, 95년, 96년에 걸쳐 네 차례나 월드시리즈에 진출했고, 1995년에는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차지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가족 같은 팀을 만들겠다던 터너의 의지가 조금씩 꺾이는 듯했다. 다른 구단주들이 그의 방식을 비난해온 것도 한 가지 이유지만 더 큰 문제는, 애써 가족적인 환경을 만들어도 선수들과의 계약협상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터너도 다른 구단주들의 행동을 점점 닮아갔다.
터너가 인수한 스포츠 팀 자체의 수익성은 매우 열악했다. 그러나 그는 이 팀들을 바탕으로 저렴한 비용에 시청할 수 있는 스포츠 프로그램을 편성함으로써 부가 수익의 발판을 마련했다. 터너가 운영하는 모든 사업체는 서로 공생관계에 있다. 다시 말해 서로가 서로를 후원하고 홍보해 주는 식이다. 예를 들어 애틀랜타의 CNN 본사 견학을 마친 관광객들은 자연스럽게 CNN 선물 판매점으로 이동한다. 이 상점으로부터 몇 걸음 떨어진 곳에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기념품 판매점도 있다. 또한 브레이브스의 경기를 보기 위해 터너필드를 찾은 관중들에게는 CNN과 ESPN, 슈퍼스테이션, 스래셔스를 비롯하여 타임워너에서 보유한 각종 자산을 홍보하는 스코어 카드가 제공된다.
한편 1980년과 84년의 올림픽이 냉전 논리로 인해 반쪽 올림픽이 되었다는 사실에 그는 분개했다. 특정 국가의 선수들이 배제된다는 것은 올림픽 정신에도 정면으로 위배될 뿐 아니라, 세계평화와 인류애마저 짓밟는 처사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따라서 그는 이 모든 대의를 지향하는 세계 스포츠대회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이름하여 '굿윌게임(Goodwill Game : 친선경기를 의미한다)'이었다. 테드 터너와 회사 관계자들이 주관한 첫 번째 굿윌게임은 1986년 7월 5일부터 20일까지 모스크바에서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는 트랙과 필드 경기에서부터 테니스, 유도, 요트에 이르기까지 총 18개 종목의 선수들이 참가했다.
첫 대회에서는 여러 가지 문제점도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종목별 우수 선수들이 상당수 불참했으며, 세계의 시청자 수도 매우 적었다. 그리고 일부에서는 이 대회를 연 목적이 터너의 의도대로 인류의 화합을 위한 게 아니라, 올림픽 중계권을 획득하지 못한 CNN이 다른 방송사와 차별화된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고안한 아이디어일 뿐이라며 혹평하기도 했다. 대회를 결산한 결과, 예상대로 터너는 2,600만 달러라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두 번째 굿윌게임은 1990년 7월, 워싱턴 주 시애틀에서 열렸다. 이 대회에서 터너가 잃은 돈은 4,400만 달러에 육박했다. 하지만 대회 자체는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1994년 대회를 위한 준비작업에 곧 착수했다.잇따른 행보CNN 설립 후 경영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터너는 3대 텔레비전 방송사인 ABC와 CBS, NBC 중에 하나를 추가로 인수하고픈 강한 욕망을 느꼈다. 1985년, 그는 대량의 정크본드와 약간의 현금을 동원하여 CBS를 상대로 적대적 인수를 시도했다. 하지만 이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고 2,100만 달러라는 막대한 손실을 입고 말았다. 인수를 포기한 직후 라스베이거스의 억만장자 거간꾼인 커크 커코리언으로부터 자기 소유의 영화사인 MGM/UA를 인수하라는 제안을 받았다.
터너가 인수 문제를 논의하고 있을 때 모하메드 알 파예드도 이 영화사 인수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흥정 때문에 옥신각신하는 걸 싫어했던 터너는 커코리언이 제의한 16억 달러에 MGM/UA를 인수키로 결정했다. 이 가격은 당시 MGM/UA의 시장 가격이 8억 2,600만 달러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거의 두 배에 달하는 액수였다. MGM/UA 인수 계약에 서명한 직후, 그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 방영하기 위해 사들인 영화 가운데 몇 편이 이미 퇴물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다음에 벌어진 상황은 아버지 에드 터너가 자살하기 직전의 상황과 소름 끼칠 정도로 비슷했다. 20억 달러에 달하는 엄청난 빚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재정적인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영화 스튜디오와 카세트 사업 부문 및 MGM 로고 사용권을 커코리언에게 되팔았다. 물론 매각 가격은 그가 인수할 때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었다. 다만 과거에 그토록 원했던 영화 필름 3,600개는 매각에서 제외했다. 터너는 자신의 판단착오 때문에 그동안 축적해 온 자산 모두가 위험한 지경에 빠졌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렇게 전전긍긍하던 중 마침내 해결책을 강구할 기회가 찾아왔다. 커코리언에게 추가로 지불해야 할 수억 달러를 마련하지 못해 또 한번의 시련을 겪고 있을 무렵이었다. 1986년 6월, 터너는 존 말론과 닉 니콜라스 그리고 마이클 푸츠 등 케이블방송 업계의 가까운 인사들을 데리고 MGM 스튜디오를 방문한 적이 있다. 방문에 앞서 이들 케이블 방송사 운영자들은 어떻게 해야 터너의 왕국도 살리고 MGM 인수도 바람직하게 처리할 수 있을지 토론을 벌였다.
논의 결과, 터너가 보유한 회사 자산의 약 37퍼센트를 TCI 회장인 존 말론이 주도하는 케이블 방송사 컨소시엄에 매각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케이블 운영자들은 커코리언에게 갚아야 할 5억 달러를 터너에게 주는 대가로 TBS 주식의 약 1/3과 의결권주 16퍼센트를 받았다. 이렇게 해서 터너의 지분은 51퍼센트로, 의결권주 보유량은 67.8퍼센트로 줄어들었다. 비록 과반수 이상의 지분을 통해 경영권을 보유한 터너였지만, 케이블 운영자들과 맺은 구조개선 협약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실권을 가진 이사회를 재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말론과 HBO의 마이클 푸츠, 타임워너의 제럴드 레빈 등 이미 능력을 검증받은 이사진들이 포함된 새로운 이사회가 구성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테드 터너는 과거의 영향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영화 도서관에 보관된 필름을 이용하여 좋은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방영하면서부터였다. 상황이 바뀌면서 MGM의 소액주주들은 MGM의 자산을 지나치게 헐값에 팔았다는 이유로 이 영화사 이사진을 고소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터너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1999년 여름, 「뉴욕타임스」와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터너 클래식 무비(Turner Classic Movies)를 극찬하는 평론을 게재하면서 TCM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인기를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