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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홍하상 지음 | 한국경제신문사
2002년, 삼성2002년 4월 2일, 미국 뉴욕 주식시장의 발표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시가 총액은 65조 6,800억 원으로서 소니의 63조 5,600억 원보다 2조 1,200억 원 앞섰다. 사상 최초로 삼성전자와 소니의 위상이 역전됐음을 알린 것이다. 뉴욕 주식시장의 보도자료가 발표되자 한국과 일본의 언론들은 일제히 삼성전자의 소니 추월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삼성전자는 2002년 1/4분기에 총매출 9조 9,300억 원, 영업이익 2조 1,000억 원, 순이익 1조 9,000억 원을 기록했다. 이 같은 삼성전자의 실적은 세계의 IT 시장과 반도체 시장의 경기침체를 딛고 일구어낸 성과이기에 더욱 의미가 컸다. 또 「Time」은 삼성전자의 성공 배경을 공격적인 경영과 강도 높은 구조조정으로 분석했다. 특히 삼성이 탁월한 디자인과 첨단 기술력을 통해 차세대 패키지 상품인 홈미디어 센터 개발 부문에서 소니, 마이크로소프트 등을 앞서고 있다고 평가했다.



국내 언론들도 일본에서 전자기술을 배워온 삼성전자가 30년 만에 일본을 추월했다고 일제히 대서특필했다. 일본의 전자업계도 큰 충격을 받았다. 소니의 불편한 심기가 드러난 것은 며칠 후다. 소니의 계열사인 미국의 콜럼비아 픽쳐스가 개봉한 영화 〈스파이더 맨〉속에서 뉴욕 타임스퀘어 빌딩에 부착되어 있는 삼성전자의 광고를 「USA 투데이」의 신문광고로 대체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 영화에서는 뉴욕의 번화가에 자리한 타임스퀘어 빌딩이 세 차례 나오는데, 다른 기업의 광고판은 그대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삼성전자의 광고만 엉뚱한 것으로 바뀐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영화를 홍보하기 위한 TV 광고 속에서도 삼성전자의 광고는 다른 회사의 무선전화 광고로 교체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은 소니를 자극할 만한 어떤 발언도 자제하라고 사장단에 엄명을 내리는 한편, 소니의 이데이 회장에게 삼성전자의 윤종용 부회장을 보내 오해가 없도록 정중한 예를 표했다. 삼성전자의 소니 추월로 한국과 일본이 온통 흥분하고 있던 4월 22일, 도쿄의 중심가에 자리한 일본 현지법인 삼성 재팬에는 진귀한 손님이 한 사람 찾아왔다. 그는 바로 이우에 사토시 산요전기 회장이었다. 이우에 회장은 1969년, 삼성의 이병철 회장이 12인치 흑백 TV를 산요 상표가 붙은 주문자상표부착방식으로 생산하고자 했을 때 기술을 가르쳐준 설립자 이우에 도시오 사장의 아들이다. 그는 "삼성전자가 어떻게 소니를 이길 수 있었는지 알고 싶어 직접 찾아왔다."라고 말했다.



삼성전자의 이 같은 대역전극의 이면에는 몇몇 뛰어난 경영자들이 있었다. 삼성전자의 부회장이면서 삼성전자의 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윤종용과 이윤우 반도체 총괄사장, 진대제 디지털 미디어 총괄사장, 한용외 디지털 어플라이언스 사장, 삼성의 휴대전화인 애니콜을 책임지고 있는 정보통신 총괄본부의 이기태 사장 등이다. 또 이건희 회장을 대신해 삼성그룹의 내부 지휘를 담당하고 있는 구조조정본부의 이학수 사장 등도 빼놓을 수 없는 공로자다. 그러나 가장 큰 공로자는 역시 이건희 회장이다.

이건희 회장의 비서진은 드디어 삼성전자가 소니를 이겼으며, 아울러 삼성전자 임직원 모두 매우 기뻐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건희 회장은 냉담하고 굳은 표정을 지었다. 아직 소니와 기술격차가 큰데 교만에 빠질까 우려해서였다. 얼마 후 그룹 차원에서 다음과 같은 5계명이 하달되었다. 첫째, 회사 자랑하지 마라. 둘째, 거래처에게 골프 향응을 받지 마라. 셋째, 무리하게 상을 받으려 하지 마라. 넷째, 과대 선전하지 마라. 다섯째, 모임에서 말을 많이 하지 마라. 이는 잘 나갈 때일수록 자만에 빠지지 말라는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위한 지침이었다.



삼성을 물려받은 지 16년, 이제 그의 경영능력은 누가 뭐래도 한국에서는 최고의 위치에 와 있으며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단계에 올라선 것이다. 삼성그룹이 온통 축제 분위기였을 때 이건희 회장은 긴급회의 소집을 지시했다. 2002년 4월 19일 오후, 삼성전자의 최고위 수뇌부들이 용인에 있는 삼성인력개발원에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창조관'에서 저녁 회의가 시작됐다. 삼성전자가 워낙 잘 나가고 있을 때여서 자축 파티라도 벌어지는가 싶었는데 사정은 영 딴판이었다.



회의에 앞서 우선 세계 1위 상품과 삼성제품의 비교 품평회가 열렸다. 이어 삼성의 수뇌부는 회의에 들어갔다. 총사령탑인 이건희 회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얘기는 무려 4시간이나 이어졌다. 그 동안 열심히 일한 사장단에 대한 칭찬만 해도 시간이 모자랄 자리였지만, 칭찬은커녕 사장단에 대한 따끔한 질타와 지시가 이어졌다.



그 핵심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경영성과가 좋다고 자만하지 말고 위기의식을 지녀야 거센 도전을 이겨낼 수 있다. 즉 미리미리 앞날에 대비하는 '준비경영'을 해야 한다. 둘째, 5∼10년 뒤 우리가 세계 1등을 할 수 있는 분야가 무엇인지, 시장점유율은 어떻게 가져가야 하는지 대비해야 한다. 셋째, 전자제품 수명이 갈수록 단축되는 빠른 시장변화에 맞서려면 사업부문 간 협동을 통해 첨단기술과 우수인력을 하루 빨리 확보해야만 한다. 넷째, 반도체를 포함한 핵심부품과 홈시어터, 모바일, 오피스 네트워크 등 4대 전략사업에서 1위 제품을 중심으로 사업구조를 재구축하고, 중복ㆍ한계 사업은 교통정리 한다. 다섯째, 반도체를 비롯해 휴대전화 등 삼성 제품의 수출 비중이 커짐에 따라 국민기업으로서 역할과 사명을 다해야 한다."



기조연설이 있고 나서 이건희 회장과 사장단은 새벽 2시까지 마라톤 회의를 가졌다. 그리고 4시간 동안 수면을 취한 후 다시 오전 6시에 일어나 세면과 운동, 식사를 한 후 오전 8시부터 회의를 계속했다. 회의는 이튿날 오후 6시에 이르러 비로소 끝이 났다. 무려 50시간에 걸친 길고 긴 회의였다. 하지만 분위기는 시종일관 진지했고 긴장감이 감돌았다. 50시간에 걸쳐 진행된 수뇌부 회의를 통해 삼성은 2010년까지 전자업계 분야의 '세계 3강'에 진입한다는 중장기 전략을 수립했다.



이를 위해 앞으로 삼성의 전기ㆍ전자사업 부문은 홈시어터, 모바일, 오피스 네트워크, 반도체 등 4대 전략사업군으로 나누고, 그 중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제품을 중심으로 사업구조를 재구축하기로 결론지었다. 아울러 우수한 인재를 확보, 5∼10년 후의 미래 사업 아이템을 모색함으로써 디지털 융합을 주도하자는 결의를 다졌다. 말하자면 앞으로 갈 길이 먼데, 벌써 승리에 들떠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삼성은 일찌감치 5∼10년 후의 사업 아이템을 모색해왔고, 인재 확보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지만 축제 분위기로 어수선한 사내 분위기를 정리하고, 긴장감을 재고시키며 그룹 경영자로서 정확한 지침을 내리기 위해 사장단 연수회의가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새로운 카리스마를 가진 후계자이건희 회장은 1942년 1월 9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이건희의 어머니 박두을 여사는 3남인 이건희가 젖을 떼자마자 의령의 시어머니 댁으로 보냈다. 의령의 친가로 보내진 이건희는 갓난아기 때부터 친할머니를 어머니라 부르며 유모의 손에서 컸다. 네 살 무렵 그는 대구의 어머니에게 다시 보내졌다. 그는 대구에서 유치원을, 서울에서 혜화초등학교를 다녔다. 혜화초등학교 2학년에 다닐 때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1950년에 마산에서 그리고 나서 대구에서, 다시 부산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한국에서만 무려 다섯 군데의 초등학교를 다녔던 것이다.



어린 시절의 이건희는 말이 별로 없고, 혼자서 골똘히 생각에 빠지거나 장난감을 뜯어보는 것을 좋아하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그는 부산사범부속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53년,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선진국을 보고 배우라."는 아버지의 지시 때문이었다. 이건희는 둘째형과 일본인 가정부와 함께 살면서 도쿄의 초등학교를 다니게 된다. 중 1때 그는 집에서 페키니스라는 개를 기르기 시작했다. 그 후 지금까지 개는 그의 평생 친구다. 유난히 개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그는 "거짓말 안 하고 배신할 줄 모르는 충직함" 때문이라고 훗날 술회했지만, 외로운 유학 시절 친구 삼아 데리고 놀 수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그는 일본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일찌감치 골프를 배우게 된다. 이병철 회장은 아들 이건희에게 일본의 일류 골프 선수를 붙여 직접 배우게 했고, 골프채나 장구의 지원에도 돈을 아끼지 않았다. 왜냐하면 '골프를 이해하게 되면 세상의 이치를 알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일본 유학 시절에 있어 특기할 만한 것 중 하나는 1,200∼1,300편에 이르는 영화를 보았다는 것이다.

초등학교를 마친 후 일본에서 중학교에 진학했다. 초등학교 2년과 중학교 1년을 합쳐 모두 3년간 일본에 머물면서 그가 영화 외에 또 하나 관심을 가진 것은 레슬링이었다. 중학교 1학년을 마치고 귀국하여 서울사대부중에 편입하고, 졸업 후엔 서울사대부고를 다녔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그는 레슬링부에 들어가 2학년 말까지 계속했으며, 웰터급 선수로 전국대회에 나가 입상을 하기도 했다. IOC 위원이 되고 싶다는 꿈이 이 때부터 싹텄다. 그 꿈은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때 비로소 이루어졌다. 그의 레슬링부 생활은 2년 만에 막을 내렸다. 연습 도중 눈썹 근처가 찢어지는 바람에 가족들이 더 이상 운동을 하지 못하도록 말렸기 때문이다.



그 후 이건희 회장은 국내에서 대학 진학을 하지 않고 일본 와세다 대학 서캠퍼스의 상학부에서 공부했다. 와세다 유학 시절의 특기할 만한 사실은 스포츠와 영화에 대한 관심이다. 그는 또한 와세다 시절 골프부에 가입했다. 그가 골프에서 중시하는 것은 실력보다 에티켓이다. 그가 존경하는 골퍼 중에 바비 존스가 있다. 존스는 전 세계 골퍼로부터 구성(求聖)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또 와세다 대학 시절, 일류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어느 분야에서나 최고에게는 뭔가가 있게 마련이므로 연구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나름대로의 결론도 내렸다. 일류란 자신이나 일에 대해 철저한 사람들이고, 인간미가 넘치며, 벌을 줄 때는 사정없이 벌을 주고, 상을 줄 때는 깜짝 놀랄 정도로 준다는 것이다.



와세다 유학이 끝나자 이번엔 미국의 조지워싱턴 경영대학원에서 경제학과 부전공으로 매스컴학을 공부한다. 미국 유학시절, 그는 자동차에 심취했다. 서너 달 차를 타고 다니면서 차의 구조와 특성을 파악하고는 깨끗이 분해ㆍ청소한 후 얼마를 남기고 팔았다. 그런 식으로 1년 반 동안 차를 여섯 번이나 바꿨다. 돈도 600∼700달러쯤 벌었다. 그러는 사이 자동차의 구조에 관해 점점 전문가가 되어갔다.



이건희가 귀국한 것은 그의 나이 25세에 이른 1966년이었다. 미국에 유학 중이던 이건희는 멕시코로 관광여행을 갔다가 비자가 만료되어 미국 입국을 거절당했다. 공부를 더 할 것인지, 아니면 이참에 아예 귀국할 것인지를 망설이다가 그는 일단 도쿄로 돌아왔다. 그 때 일본으로 연락이 왔다. 맞선을 보라는 것이었다. 당시 중앙일보 홍진기 회장의 장녀인 홍라희는 서울대학 응용미술과에 재학 중이던 학생이었다. 두 사람은 연애시절을 거쳐 그 이듬해에 결혼했다.



결혼 후 이건희는 삼성 비서실에서 견습사원으로 근무했다. 1968년 12월, 그는 비로소 공식적으로 첫 직장 중앙일보, 즉 동양방송에 입사한다. 이는 대학원에서 그의 부전공이 매스컴학이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당시 직책은 동양방송, 중앙일보의 이사였다. 그는 신생 TV 방송국인 동양방송을 하루 빨리 궤도에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TV의 시청률은 드라마가 좌우하며, 드라마가 살기 위해서는 주연보다 조연이 절대적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TBC 시절의 그는 좋은 조연배우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의 판단대로 조연들은 연기를 잘 해주어, 1970년대의 TBC는 타 방송사에 비해 시청률 면에서 앞서갈 수 있었다. 그밖에 그는 월간지 「여성중앙」과 주간지 「주간 중앙」의 창간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약 10년 간 TBC와 중앙일보 이사로 일하던 이건희는 1970년대 중반에 새로운 분야인 반도체 사업을 추진했다. 1974년 그는 TBC 이사의 자격으로 이병철 회장에게 반도체 산업에 진출할 것을 건의했으나 이병철 회장은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자신의 건의가 무산되자 이건희는 사재 4억 원을 털어 부천의 한국 반도체라는 작은 회사를 스스로 인수한다. 그 후 불과 10년이 채 안 된 1983년, 삼성은 본격적으로 반도체 개발에 나서게 된다. 아울러 삼성의 반도체 산업은 한국을 먹여살리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하는 업종으로 발전한다.



1979년 2월 27일, 이건희는 중앙일보 이사에서 그룹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삼성본관 28층의 이병철 회장 집무실 옆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본격적인 경영수업이 시작된 것이다. 그가 삼성 부회장으로 첫 출근하던 날, 이병철 회장은 그를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 그리고 붓을 들어 직접 '경청(傾聽)'이라는 휘호를 그에게 써주었다. 경청, 즉 남의 말을 잘 듣는 것이야말로 대기업을 이끄는 총수로서의 금과옥조임을 강조한 것이다. 이병철 회장은 아들 이건희 부회장에게 계열사를 둘러볼 때마다 항상 수행하도록 지시함으로써 현장 경험을 쌓게 했다. 또한 계열사 사장들로부터 업무 보고를 받을 때 늘 이건희를 배석시켰다. 이건희는 1978년부터 이병철 회장이 타계한 1987년에 이르기까지 약 10년간 이 같은 철학에 바탕한 경영수업을 받았다.



이병철 회장이 이건희에게 물려준 교훈 중에 '목계(木鷄)'가 있다. 목계는 글자 그대로 나무 닭을 의미한다. 이병철 회장은 거실에 목계를 걸어놓고 늘 자신을 경계했다. 이건희도 그런 부친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을 경계해왔다. 목계란 무엇인가. 목계는 『장자』의 「달생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장자가 여기에서 얘기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세파에 대한 초연함이다. 평소 과묵하고 자기 자신에게 엄격했던 이병철 회장도 기업을 50년간 경영해오면서 많은 세파에 시달렸다. 그 세파에서 자기 자신을 달래고, 그것을 의연하게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상징물이 바로 목계였다. 이병철 회장이 이건희에게 가르쳐준 교훈은 '경청'과 '목계'였다.



삼성그룹의 부회장이 된 이건희는 '해외사업추진위원회' 위원장도 겸임했다. 그는 중화학과 에너지 사업 부문을 맡았다. 이것이 이건희가 사실상 재계에 입문하면서 첫 선을 보인 사업이다. 2차 오일 쇼크가 터지면서 그도 원유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해외사업추진위원회의 목표도 원유 확보 쪽으로 급선회했다. 그 결과 1년 만에 멕시코 원유가 한국에 도입될 수 있었다. 멕시코 원유 확보에 성공한 그는, 이어 한국과 가까운 말레이시아로 날아가 다시 원유협상에 들어갔다. 끈질긴 노력 끝에 결국 석 달 만에 말레이시아 원유의 확보에도 성공했다.



때마침 걸프오일이 유공에서 철수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이건희는 유공을 인수하기 위해 뛰었다. 멕시코나 말레이시아의 원유 확보도 유공 인수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1980년 12월, 유공의 새 주인으로 결정된 것은 선경그룹이었다. 국내 최대의 에너지 회사 인수에 실패한 이건희는 다시 에너지 확보를 위한 해외자원 개발에 눈을 돌렸다. 그러나 2차 오일 쇼크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원유가는 안정되기 시작했다. 그가 집념을 가지고 추진했던 사업들은 원유가의 하락에 따라 점점 빛을 잃었다. 이건희의 최초 실패였다.



1980년대 초ㆍ중반, 이건희에겐 방랑의 세월이 있었다. 유공 인수의 실패, 원유가 하락에 따른 에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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