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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경영대전

홍하상 지음 | 바다출판사
이병철 경영대전

홍하상 지음

바다출판사/2004년 7월/432쪽/12,800원



프롤로그 - 끊임없이 다른 세상이 궁금하다

이병철의 집안은 대대로 진주시 북쪽에 있는 중교리의 대지주였다. 이병철은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제 합병되었던 1910년 아버지 이찬우(1984~1957)와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에 4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이병철의 집안은 경주 이씨로 조상 중 한 사람이 1600년대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이곳을 세거지지(대대로 사는 고장)로 삼음으로써 그 뿌리를 내렸다. 이병철의 조부 문산 이홍석(1838~1897)은 이 지방에서 알아주는 유학자였다. 이병철은 조부가 세운 서당인 문산정(文山亭)에서 10살 때까지 『천자문』『사서삼경』『논어』 등을 배우다 진주시 지수면에 있는 지수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이병철은 거기서 1년을 다니다가 다시 어머니의 친정이 있는 서울 종로의 수송보통학교로 전학하여 근대식 교육을 받게 된다. 수송보통학교를 다니는 동안 심한 경상도 사투리 때문에 서울 학생들과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아 공부에도 상당히 애를 먹었으나 중동중학의 속성과로 옮긴 후부터는 공부에 몰두하게 된다. 그리고 열일곱 살에 고향집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고 내려가 이듬해인 1928년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녕의 후손 박기동의 넷째 딸과 혼례를 올린다.

결혼식을 마치고 상경한 이병철은 학업에 열중하다 4학년 1학기를 마친 뒤 일본 유학을 결심한다. 이병철은 부모님이 자신의 일본 유학을 반대하자 옆 동네에 살던 조홍제(효성그룹의 창업주)를 찾아가 일본 유학 경비 500원을 빌려달라고 부탁했고 마침내 조홍제의 도움으로 그와 함께 일본 유학의 길에 오른다. 1930년 4월 스물 한 살의 이병철은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했다. 와세다 대학 유학 시절 이병철은 틈만 나면 곳곳의 공장을 방문해서 일본 공업의 실상을 자주 살펴보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는 기업가의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유학시절 이병철의 생활은 풍족한 편이었다. 고향집에서 매달 200원을 송금해왔는데 당시 일본 중류가정의 한달 생활비가 50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제법 큰 돈이었다. 유학시절 이병철은 공부에 열중하고 스스로 충실하게 생활했으나 언제부터인지 조금만 책을 읽어도 쉬 피로해지는 증상이 생계 2학년 1학기에 휴학계를 내고 온천을 찾아다니며 병을 치료하려 했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공부해서 무슨 벼슬을 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단지 도쿄의 신학문이 어떤 것인지 알았고 그 사람들의 생각도 알게 되었으니 유학생활을 더 하면 뭣하나 싶은 회의가 들었다.”며 이병철은 어느 가을날 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홀연히 고향집 대문을 들어섰다.

고향으로 돌아와 맑은 공기와 아늑한 환경에서 얼마간 지내자 이병철의 건강은 회복되었다. 대학시절 자기 집안의 노예를 해방시켜주었던 톨스토이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던 이병철은 건강이 회복되자 제일 먼저 집안의 머슴들에게 전별금까지 주어 모두 해방시켜주었다. 그후 고향에서 특별히 할 일 없이 무위도식하던 이병철은 친구들과 골패노름에 빠졌다. 밤새 노름에 빠져 달 그림자를 밟으며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고 이병철 스스로 술회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밤새 노름을 하다 집으로 돌아와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세 아이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는 악몽에서 깨어난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야말로 허송세월이었구나. 어서 빨리 뜻을 세워야 한다.” 회한과 두려움에 그날 밤을 꼬박 새운 이병철은 자신에게 맞는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사업을 하겠다고 결심을 굳힌 그는 며칠 후 부친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러자 부친은 선선히 사업자금을 내주었다. “마침 너의 몫으로 연수 300석의 재산을 나누어주려던 참이다. 스스로 납득이 가는 일이라면 결단을 내려보는 것도 좋다.”



1. 사업은 시작되었다

아버지로부터 300석의 자금을 받은 이병철은 사업장소로 마산을 선택했다. 그리고 당시 마산시의 도정 능력이 현저하게 부족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합천의 정현용과 박정원과 의기투합하여 1인당 1만 원씩 출자하여 총 3만원의 자본으로 정미소를 설립했다. 일본 정미업자들의 멸시와 식민지 국민으로서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이병철은 쌀의 흐름을 파악하고 50여 명의 직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분업 시스템을 도입하여 첫 사업에서부터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정미소가 잘 돌아가자 이병철은 마산에 운송수단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트럭을 20대 구입하여 새로운 사업으로 운수사업을 시작했다. 두 사업 모두 순항하자 지배인에게 경영을 맡겼고 이병철은 시간도 남아돌고 돈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나 그에게 허전한 무엇인가는 계속 존재했다. 그것은 일제 치하에서 한국인 사업가가 부딪히는 어쩔 수 없는 한계였다.

사업이 잘 되어 돈이 넘쳐나자 이병철은 새 사업에 착수한다. 당시 일제의 수탈정책으로 이농자가 속출하자 김해 인근의 농토가 매물로 쏟아져 나왔다. 숫자에 밝았던 이병철은 곰곰이 따져보았다. 논 한 마지기를 50원에 사서 소작을 주면 15원의 소작료가 들어오고 소작료에서 은행 이자 3원 50전을 빼고 세금 1원, 관리비 50전을 제해도 10원의 이익이 남는다. 그야말로 은행융자로 땅을 살 수만 있다면 가만히 앉아서 떼돈을 벌 수 있다는 계산인 것이다. 그는 평소 신용을 쌓아두었던 식산은행의 하라다 지점장에게 수지계산서를 첨부하여 융자를 신청했고 1년만에 연수 1만석, 200만평의 대지주가 되었다. 이병철은 약관 20대에 경남 최대의 대지주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937년 3월 일본의 중국 침략으로 마침내 중일전쟁이 터졌다. 전시체제로 돌입하자 일본 정부는 은행에 일체의 대출을 중단하고 기존의 대출도 모두 회수하도록 지시했다. 시장경제는 곧바로 얼어붙었고 전답의 시세는 폭락했다. 은행 대출금을 모두 상환해야만 했던 이병철은 값이 더 떨어지기 전에 전답을 서둘러 처분해야만 했다. 자신이 땅을 샀던 가격보다 싼 값에 팔아야만 했기 때문에 막대한 손실을 입자 할 수 없이 정미소와 운수회사도 모두 팔아 대출금을 갚고 나니 남은 것은 현금 2만 원과 전답 10만 평뿐이었다. 그나마 남은 것이 있어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하루아침에 몰락하고 만 것이다.

“3利가 있으면 3害가 있다” 이병철의 회고다. 세 가지 좋은 일이 있으면 세 가지 나쁜 일도 생긴다는 뜻이다. 짧은 기간에 대지주가 되어 부산, 대구 지역까지 농토를 사들이던 청년 이병철은 중일전쟁으로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병철은 그의 생애 첫 빅 게임에서 크게 실패했다. 그러나 그는 실패의 쓰라린 경험을 반추하면서 앞으로의 사업에 커다란 교훈으로 삼았다. “뜻하지 않은 좌절을 겪어본 기업가는 좌절을 모르고 성장한 기업가보다 훨씬 더 강인한 기업능력을 갖고 있다. 기업가는 항상 지난 날에 겪은 일들을 돌이켜 봐야 한다. 이런 마음가짐을 갖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경험을 쌓는다 하더라고 결코 살이 되고 피가 되지 않는다.”

그후 이병철의 사업은 무모한 과욕에서 비롯된 것이 거의 없다. 오늘날 삼성 그룹의 사업 중에서도 투기성 사업은 여간해서 찾아볼 수 없다. 이 때의 실패가 그의 평생 교훈이 되었던 것이다. 최초의 실패를 경험한 이병철은 심기일전하여 다시 새로운 사업을 구상한다.



2. 삼성이란 이름으로

1938년 스물아홉의 나이에 이병철은 긴 여행을 떠났다.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출발하여 평양을 거쳐 만주, 베이징을 지나 칭다오, 상하이로 내려갔다. 여행을 하면서 이병철이 눈여겨본 것은 시장이었다. 그리고 만주에는 사과나 건어물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귀국하여 국내의 과일 작황과 어황(漁況)을 치밀하게 조사한 뒤 무역업을 하기로 결심하고 그 해 3월 1일 교통의 요지인 대구에서 자본금 3만원으로 삼성상회를 설립한다. 이것이 오늘날 삼성그룹의 모체이다.

지상 4층, 지하 1층의 150평 정도의 목조건물에 자리잡은 삼성상회가 시작한 사업은 무역과 국수 판매였다. 무역은 대구 근처 농촌에서 나는 사과 등의 청과물과 포항의 건어물을 수집해서 만주와 북경 등지에 내다 파는 것이었고 국수 사업은 제분기와 제면기를 갖추고 국수를 직접 만들어 소매상들에게 팔았다. 삼성이 세 개의 별이라 국수의 이름도 ‘별표 국수’였다. 그의 예상대로 중국으로 보낸 청과물과 건어물은 잘 팔려나갔고 국수 또한 날개돋힌 듯이 팔렸다. 국수 공장은 늘 24시간 가동되었다. 그러나 이병철은 삼성상회 건물을 구입하기 위해 빌린 돈 1만원을 갚기 위해 거의 2년 동안을 그의 가족들과 함께 소음과 먼지, 밀가루 분진으로 가득한 국수공장 귀퉁이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지냈다.

다행히도 삼성상회의 두 사업은 계속 성장을 거듭해 종업원이 40여 명으로 늘어났고 사장, 지배인, 사무직, 생산직의 체계를 갖춘 근대적 기업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병철은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사업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자금에 여유가 생기자 새로운 사업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때마침 대구에서 가장 큰 양조장인 조선양조가 매물로 나오자 이병철은 즉각 인수했다. 중일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전시체제가 더욱 강화되어 경기는 더욱 나빠졌지만 양조사업만은 하루가 다르게 번창했다. 그러나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중일전쟁은 마침내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었고 경제 사정은 나날이 어려워져 심지어는 일본인 관료마저도 세끼 밥을 먹기 어려운 절박한 상황이 되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사업은 더 이상 불가능했고 식솔과 자신의 안위조차 위태로웠다. 마침내 이병철은 삼성상회와 양조장 운영을 지배인 이순근에게 맡기고 고향 중교리로 낙향한다. 그 후 3년 동안 이병철은 그야말로 칩거했다. 훗날 이병철은 『호암어록』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자고로 성공에는 세 가지 요체가 있다. 운(運), 둔(鈍), 근(根)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은 능력 하나만으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운을 잘 타야 하는 법이다. 때를 잘 만나야 하고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 그러나 운을 잘 타고 나가려면 역시 운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일종의 둔한 맛이 있어야 하고 운이 트일 때까지 버텨내는 끈기와 근성이 있어야 한다.”

1945년 8월 14일 저녁, 중교리 집으로 친구들이 찾아와 일본 순사들이 주재소에서 비밀문서 같은 서류를 태우고 있다고 전했다. 다음 날 정오, 라디오를 통해 일본 천황의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한국은 마침내 일제의 기나긴 지배 하에서 벗어났다.

3. 장사에도 우선은 사람이다

1945년 한국은 광복을 맞았다. 인구 2,000만 명에 국민소득 60 달러로 경제상황은 극도의 빈사상황에 놓여 있었다. 대구에서 삼성상회와 양조장으로 기반을 잡은 이병철은 광복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지만 모든 것이 어수선하여 무려 1년 반 동안이나 시장조사를 계속하며 사업 구상에 몰두했다. 그리고 당시는 물자가 부족했으므로 무역업이야말로 가장 타당성 있는 사업이라고 판단하고 1948년 조홍제 등과 함께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했다. 삼성물산공사는 주거래 대상국인 홍콩과 착실히 교역을 지속하여 불과 1년만에 중견무역업체로 올라섰고 하루가 다르게 급성장했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새벽 6시에 일어나 라디오를 켠 이병철은 충격에 휩싸였다. 북한 공산군이 남침했다는 뉴스였다. 이어진 공산 치하에서 이병철의 모든 재산은 몰수되었고 삼성물산 창고에 있던 설탕, 면사 등 물품 역시 모두 증발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병철은 거의 90일 동안을 다락방에서 숨어 지내야만 했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3개월만에 서울이 수복되자 이병철은 5대의 트럭을 구입하여 가족과 직원들을 싣고 사흘이나 걸려 대구로 피난을 갔다. 대구에 도착하자 이창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이병철은 서울 사업이 바빠 대구의 삼성상회와 조선양조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2년 동안 이창업은 대구에서 청주 월계관과 삼성 사이다를 출시해 막대한 이윤을 올렸고, 빈털터리로 내려온 이병철에게 그간 모아놓았던 3억 원이 담긴 궤짝을 내밀었다. 생각지도 못한 거액을 받아 든 이병철은 감격했다.

“사람을 썼으면 실수가 드러나기 전까지는 무조건 믿고 맡긴다.” 이러한 평소 자신의 경영철학에 가장 큰 득을 본 사람은 바로 이병철 자신이었다. 이병철은 부산으로 내려가 그 3억 원으로 다시 새로운 사업인 고철 수집 사업을 시작한다. 전쟁 중이어서 지천으로 널려 있는 포탄 껍데기, 폭격 맞은 공장기계 등 고철들을 수집하여 쇠가 부족한 일본에 수출하는 사업은 그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이병철은 일본에서 벌어들인 달러로 설탕과 비료를 수입했고 물자가 부족하던 시절이라 수입된 물품은 눈 깜짝할 사이에 팔려나갔다. 게다가 운좋게도 전쟁 전에 홍콩에 수출했던 면실박 대금 3만 달러가 거래선으로부터 도착하여 그 자금으로 더욱 많은 설탕과 비료를 수입하여 불과 1년만에 그의 재산은 60억 원으로 늘어났다. 그에게 다시금 큰 사업을 벌일 수 있는 자금이 모인 것이다. 60억 원으로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



4. 의심스러우면 시작하지 마라

이병철은 설탕이나 비료를 수입하여 이익을 붙여 되파는 자신이 과연 사업가인가 자문했다. 사업가란 국민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생산해서 판매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비로소 사업다운 사업, 즉 제조업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렇다면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 이병철은 다시 조사에 착수한다. 사전조사와 타당성 검토는 이병철의 주특기이자 또한 오늘날 삼성그룹의 장점이기도 하다. 신목여전(神目如電), “사업에 대한 귀신 같은 안목이 마치 번갯불과 같다”하여 어느 명리학의 대가가 이병철을 그렇게 평했다. 정보분석과 평가에 관해서는 대한민국에서 이병철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치밀한 조사 끝에 1953년 4월 그는 마침내 설탕을 제조하기로 하고 결정하고 구영회(LG그룹 창업주 구인회의 동생) 등과 함께 ‘제일제당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당초 8개월로 예정되었던 공장 건설을 6개월만에 마치고 1953년 11월 5일 하루 25만톤 생산 규모의 공장에서 하얀 설탕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국산이라 반신반의하던 소비자들이 먹어보니 외국산과 별 차이도 없고 값은 3분의 1밖에 되지 않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고 보름도 채 지나지 않아 날개 돋힌 듯 팔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설탕의 자급자족을 통해 소중한 외화를 절약할 수 있었다.

수요가 날로 늘어나고 품질이 더욱 좋아졌지만 제일제당의 설탕 값은 외국산에 비해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러자 중역들은 이병철에게 설탕 값을 올리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병철은 상도의상 폭리를 취하면 안 되거니와 그간 삼성물산에서 번 돈으로 제조업에 투자하여 국민경제에 이바지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며, 중역들의 제안을 일축했다. 훗날 제일제당은 일일 생산량 1,200톤으로 세계 1위가 된다.

제당공장이 잘 돌아가자 이병철은 또 다시 새 사업에 착수했다. 당시 서울에서 내로라하는 신사는 모두 마카오에서 밀수입된 영국산 모직으로 양복을 해 입고 다녀 이른바 마카오 신사가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이병철은 미국과 일본 모두에서 성공한 순모 사업을 국산화하면 마카오산의 20% 가격으로 공급할 수 있어 성공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모직은 면방에 비해 공정이 훨씬 복잡하고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이병철이 모직공장을 설립한다고 하자 선진국의 모직 전문가들은 그를 비웃었다. 영국은 모직 기술을 축적하는 데 150년이 걸렸고 영국의 기술을 전수받은 미국도 수십 년이 걸려서야 제대로 된 모직 기지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1954년 9월 이병철은 제일모직을 설립하고 공장 건설에 착수했다. 이 때 중역들은 우선 자그마하게 시작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건의했다. 하지만 이병철의 생각은 달랐다. ‘어떤 사업이건 실패의 위험은 따른다. 가장 위험한 것은 처음부터 실패의 여지가 있다는 불안을 안고 착수하는 것이다. 100%의 자신감이 없으면 애초에 착수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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