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판 명저)황금의 지배
피터 L. 번스타인 지음 | 경영정신
황금의 지배
피터 L. 번스타인 지음
경영정신 / 2001년 5월 / 612쪽 / 18,000원
1부 권력과 부의 상징이집트인들은 기원전 4000년에 이미 금괴를 화폐로 사용했다. 각각의 금괴에는 파라오 메네스의 이름이 찍혀 있었는데 이집트인들은 심지어 금과 은 사이의 비율까지도 분명하게 규정해 놓고 있었다. 인류 역사상 대부분의 기간 동안 은의 가치는 금 가치의 5~8%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돈의 필요성이 증가할수록 돈을 더 효율적이고 편리한 것으로 만들려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아시리아인들과 바빌로니아인들은 이집트인들보다 훨씬 더 활발하게 교역을 했기 때문에, 더 정교하고 균일한 금괴를 만들어냈다. 그들은 무게가 약 30파운드 정도인 금괴에는 사자 모양을 찍고, 그것의 절반 정도인 작은 금괴에는 오리 모양을 찍었다.
주화는 금의 무게를 재고 순도를 확인하는 지겨운 작업을 피하기 위해 고안된 독창적인 발명품이었다. 그러나 주화는 금이 처음으로 화폐 역할을 하기 시작한 지 족히 2000년 후인 기원전 700년경에야 등장했다. 우리는 금 한 조각의 순도를 측정할 때 캐럿(carat)이라는 단위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24캐럿짜리 금의 순도는 100%이다.
리디아의 메롬나다이 왕조의 4대째 왕 알리아테스는 메롬나다이 왕조에서 금화를 발행한 최초의 왕이었다. 금화는 리디아에 많은 수입품을 안겨주는 수출 품목이 되었으며 수입품의 대금을 지불하는 데 사용했다. 알리아테스의 아들이자 5대째 왕인 크로이소스는 순은과 금이 섞인 새로운 주화를 만들어냈다. 이 화폐의 기본단위는 스타테르였는데, 스타테르는 다시 3분의 1, 6분의 1, 12분의 1이라는 작은 단위들로 쪼개졌다.
크로이소스의 독창적인 화폐제도로 인한 커다란 사회적 변화 가운데 사회 속에서 금의 역할과 관련해 이상한 피드백 현상이 나타났다. 금이 돈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금의 수요 또한 도저히 만족시킬 수 없을 만큼 늘어난 것이다. 우리 몸과 성물(聖物)들을 꾸미기 위한 금의 수요는 언젠가 한계에 도달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화폐로서의 금의 수요는 무한하다.
기원전 4세기 내내 로마인들은 재산을 유피테르 신전에 보관해두는 관습을 가졌다. 전설에 따르면, 기원전 390년에 신전 주위에 살고 있던 거위들이 꽥꽥거리는 소리로 로마인들에게 갈리아인들의 기습 공격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로마인들은 이처럼 위험이 닥친 것을 알려준 데 대해 너무나 감사한 나머지 경고의 여신에게 바치는 성소를 지었다. 그 여신의 이름은 모네타(Moneta)였는데, 이 이름이 ‘돈(money)’과 ‘조폐국(mint)’의 어원이 되었다.
금속을 돈으로 사용하는 사회는 항상 그 금속의 공급량에 의해 압력을 받게 마련이다. 주화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금속의 공급량이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할 때,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 로마인들은 통화를 타락시키는 모범을 세웠다.
통화의 타락에 흔히 사용되었던 방법은 액면가치는 그대로 둔 채 주화의 크기와 금속의 함유량을 줄임으로써 같은 양의 금속으로 더 많은 주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서기 260년, 갈리에누스가 황제가 되었을 때 은화에 함유된 양은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에 비하면 겨우 60%밖에 되지 않았다. 그는 은화에 함유된 은의 양을 4%까지 줄이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걷잡을 수 없는 가격 인플레이션이 일어난 것은 당연했다.
306년부터 재위한 콘스탄티누스는 솔리두스(solidus)라는 이름의 새 금화를 발행함으로써 비잔틴 화폐가 더 많이 존중받고 통용되도록 하는 작업에 즉시 착수했다. 솔리두스는 나중에 베잔트(bezant)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는데 처음 베잔트를 발행했을 때, 베잔트의 무게는 4.55그램이었다. 이는 당시 존재하던 다른 모든 금화보다 무거운 것이었다. 베잔트는 또한 98%의 순도를 가지고 있었다. 베잔트는 그 무게와 순도를 그대로 유지한 채 로마가 이방인들에 의해 멸망한 후에도 약 700년 동안 계속 생산되었다.
역사에서 패권을 영원히 유지한 나라는 없다. 콘스탄티노플이 1204년 십자군에게 함락된 후 베잔트는 질이 떨어지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널리 통용되지도 않게 되었다. 50년 후 피렌체, 제노바,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의 신흥 무역 강국들이 금화를 발행하기 시작했고, 이 금화들은 전성기의 베잔트 금화만큼 높은 명성을 얻었다. 14세기 중반 무렵에는 비잔티움 시민들조차도 베네치아의 두카토 금화로 세금을 납부할 정도였다.
아랍인들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엄청난 양의 금을 축적했다. 그들은 전쟁에서 패배한 적들을 약탈했고, 무역을 할 때는 경쟁자들보다 한 수 위였으며, 수백 년 동안 금이 조금밖에 생산되지 않던 곳을 개발해서 대규모의 공급원을 확보했다. 아랍의 선박들은 이윤을 찾아 아프리카의 동쪽 해안과 태양 너머의 인도와 중국을 정기적으로 오갔다.
마호메트가 죽은 후 칼리프인 이브드 엘-멜릭이 자신들의 금화 디나르를 발행하여 선보임으로써 과거의 위대한 통치자들을 흉내 냈다. 대량으로 주조된 순금 97%의 이 금화는 점차 베잔트를 제치고 중요한 국제 통화로 자리를 잡았으며, 아랍의 영토 전역은 물론 유럽 전역에서도 통용되었다.
서기 1000년 무렵 잉글랜드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70곳 이상의 조폐국에서 화폐를 만들어내고 있었으며, 잉글랜드의 화폐제도는 유럽에서 가장 앞선 것이었다. 오퍼의 혁신이 이루어진 지 500년 후인 13세기 말경까지 페니는 가장 중요한 지불수단이었다. 페니가 너무나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으므로 1066년 노르만족이 무대에 등장했을 때 정복자 윌리엄은 영국의 화폐를 타락시키는 정책을 거부했다.
사람들이 서기 1000년의 도래를 맞이한 뒤로 300년 동안 유럽 전역에서 대성당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건축된 것은 유럽인들의 삶이 얼마나 밝아졌는지를 보여주는 극적인 증거이다. 이 시기의 낙관주의와 활기는 중세시대의 대모험인 십자군 운동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1095년부터 1450년경까지 수많은 유럽인들이 기독교 세계의 성지를 되찾겠다고 공언하면서 도보로 가거나 배를 이용해서 콘스탄티노플과 소아시아로 갔다. 사람들은 독실한 신앙심 때문에 이러한 환경에 동참했지만 사실은 소도시나 시골 생활의 지루함에서 도망치기 위해 영광과 재산과 보물을 안고 돌아오리라는 금의환향의 꿈에 부풀어 길을 나서는 경우가 많았다.
1252년에 유럽의 금 가격이 은 가격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낮아지자 제노바는 제노인이라는 이름의 24캐럿짜리 금화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 주화의 무게는 약 3.5그램으로 콘스탄티누스가 처음에 만들었던 베잔트보다 1그램이 모자랐지만 24캐럿이라는 순도는 상당한 매력으로 작용해서 상류계급과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상인들 사이에 통용되었다.
제노인이 등장하고 나서 몇 달 만에 피렌체도 플로리노 도로(florino d’oro) 혹은 플로린이라고 불렸던 금화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 금화의 이름은 한쪽 면에 붓꽃이 새겨져 있었던 데서 유래한 것이었다. 13세기에 태어난 금화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성공적이었던 베네치아의 두카토는 1284년에 등장했다. 두카토는 유럽 전역에서 가치의 기준 역할을 했으며 1797년에 베네치아 공화국이 나폴레옹에게 점령당할 때까지 금의 함량을 유지했다. 새로운 금화가 이탈리아에서만 발행된 것은 아니었다. 영국의 에드워드 3세도 1344년에 금화를 발행했다.
역사상 14세기만큼 기근이나, 흑사병, 사회적 혼란, 전쟁 등이 무자비하게 연속적으로 발생했던 시기는 없었다. 1314년의 여름은 유럽의 여름치고는 드물게 춥고 습했다. 곡식들은 썩어갔고 추수가 지연되었다. 그러나 1314년의 끔찍한 기후는 연달아 일어난 재앙의 시작에 불과했다. 그 이듬해인 1315년과 1316년 연속적인 기후 이상은 유럽에 끔찍한 재앙을 초래했다. 큰비와 홍수, 제방의 붕괴로 마을이 도처에서 파괴되고 격렬한 폭풍이 해안지방을 강타했다.
3년 동안의 기후 악화는 유럽 역사상 최악의 기근을 초래하여 사람들은 고양이와 쥐, 벌레, 동물의 배설물 등을 먹었고 나중에는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어지자 공동묘지에서 시체들을 파냈다. 전염병과 흉악한 범죄가 널리 퍼져나갔다. 그러나 이 대기근도 그 다음에 찾아온 대재앙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1347년 제노바인들은 극동에서 출발, 거대한 러시아를 횡단해 치고 내려온 타타르인들의 포위공격에 맞서 크림반도의 식민지 카파를 방어하고 있었다. 타타르인들은 자신들의 포위공격이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내지 못하자 기이한 물체를 성벽 너머로 발사해서 카파의 중심부에 떨어뜨리기로 결정했다.
이 기이한 물체란 전염병이 만연하면서 목숨을 잃은 타타르인들의 시체였다. 제노바인들은 공포에 질렸고, 곧 그 시체들에 전염되어 카파를 떠났다. 그들은 갤리선을 타고 이탈리아를 향해 도망쳤다. 이 갤리선들 중 한 척이 시칠리아의 팔레르모에 도착했을 때 이 배에서 나온 벼룩과 쥐, 그리고 죽어가던 인간들에 의해 흑사병(Black Death)이라는 무서운 전염병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 후 2년에 걸쳐 이 무시무시한 질병은 유럽 전 지역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고 이로 인해 인도에서 아이슬란드에 이르기까지 유럽 전체에 걸쳐 전인구의 3분의 1 즉, 적어도 2,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유럽의 인구는 16세기 중반까지 1300년의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다.
이 모든 죽음과 파괴, 특히 흑사병으로 인한 떼죽음이 경제에 미친 영향은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것이었다. 인간의 몸은 사라졌지만 그들의 소유물과 돈은 남았으며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죽은 사람들의 물건을 소유하게 된 이 비극적인 과정을 통해 재앙이 일어나기 전보다 훨씬 더 부자가 되었다. 또한 인구가 너무 많이 감소했기 때문에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수가 줄어들면서 식량의 공급량이 감소된 폭보다 식량의 수요가 감소한 폭이 훨씬 더 커서 신분이 가장 낮은 계급의 사람들 사이에서도 고기, 버터, 생선, 포도주, 이국적인 향료 등의 소비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수입품 및 사치품에 대한 과도한 욕망이 덧붙여지면서 금과 은의 수요가 갑작스럽게 늘어났으나 유럽에서 산출된 금은 당시에는 수요에 비해 그 어느 때보다도 부족했다. 1400년에 유럽 내부의 금 산출량은 4톤을 넘지 않았다. 이처럼 공급량이 적었다는 것은 소량의 금을 발견하거나 이동시키기만 해도 금시장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의미했다.
14세기의 끝없는 고통을 이기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시대의 어둠이 절대로 걷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끔찍한 세기가 마침내 끝을 맺고 새로운 세기가 밝아옴에 따라 유럽의 상황은 나아지기 시작했다.
1469년 아라곤의 황제 페르난도와 카스티야의 왕녀 이사벨의 결혼은 스페인을 통일시켰다. 한편 작은 나라인 포르투갈 역시 들썩이고 있었다. 그들은 위대한 선원들이었다. 15세기에 이룩된 발전 중 가장 혁명적이었던 것은 신항로 개척 그리고 신대륙의 발견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신대륙에 파견된 스페인의 원정대를 이끌었던 피사로 형제는 1532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잉카인들과 처음으로 접촉했다. 한쪽으로는 깎아지를 듯한 수천 미터의 절벽이 심연을 향하고 있고, 말 한 마리도 제대로 지나갈 수 없을 만큼 험준한 안데스산맥을 기어오른 200명의 스페인 사람들은 적어도 350만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제국의 저항을 총과 대포로 잠재우고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피사로 형제가 약탈한 페루의 금은 거의 5톤에 가까운 양이었다. 이는 당시 유럽 내에서 1년 동안 생산되는 금의 총량보다 더 많은 것이었으며 페루의 금광들에서 20년 동안 생산되는 양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한편 그동안 스페인뿐만 아니라 유럽 전 지역에서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쟁과 종교적 혼란으로 인한 파괴 행위가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뒤에서는 예술과 과학 분야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온 르네상스가 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다빈치, 틴토레토, 라파엘로, 팔라디오, 첼리니, 미켈란젤로, 티치아노, 뒤러, 세르반테스, 엘 그레코 등이 모두 1500년대에 활동했다.
2부 승리로 이어진 길16세기에는 계속해서 의미심장한 경제적 혁신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전통적인 제도였던 무역박람회가 이때에야 비로소 경제적 의미에서 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하면서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금의 역할 변화를 야기했던 것이다.
중세에 시작된 무역박람회는 사업에 필수적인 제도로 발전했다. 물건을 전시하고 구매하고 판매하는 곳이 되어준 것이다. 특히, 박람회에 설치된 많은 부스를 차지한 것은 환전상들이었다. 스페인의 메디나 델 캄포에서 열린 박람회에서는 다른 나라의 화폐로 작성된 지불 약속증서를 교환하는 활동만이 이루어졌다. 이런 약속증서의 교환을 환어음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화폐가 다양한 형태로 다양하게 사용될 수 있는 놀라운 금융 혁신이었다. 중심지에 집중된 박람회에서 점점 더 많은 금융거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상회들은 더욱 다양화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신성로마제국의 푸거 가문이나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같은 대규모의 가족회사로 변모했다.
돈의 개념 역시 변화하고 있었다. 18세기 영국의 화폐제도는 환어음의 발달과 더불어 금화를 직접 가지고 다니는 대신 금화를 금세공인에게 맡기고 금세공인으로부터 금을 받았다는 영수증을 받아 이 영수증이 지불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이 영수증은 언제라도 금으로 바꿀 수 있었기 때문에 환어음과 더불어 일종의 지폐가 되었다. 18세기 내내 빠르게 성장한 은행들은 고객에 대한 대출금을 약속어음으로 지불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고, 다양한 화폐단위로 표시되고, 위조를 막기 위해 투명 무늬가 새겨져서 화폐로써 사람들 사이에 유통되었다.
또한 1694년에 잉글랜드 은행이 설립되어 첫 대출로 정부에 120만 파운드를 빌려주었을 때, 이 금액의 일부는 이미 은행권 형태로 정부에 지불되었으며 정부는 이 은행권을 이용해서 전쟁의 보급품을 조달했다. 다양한 형태의 개인 지폐들 - 환어음, 금 세공인의 영수증, 은행권들 - 은 언제나 잉글랜드 은행의 은행권과 교환될 수 있었으며, 잉글랜드 은행의 은행권은 언제나 금, 즉 정화로 교환될 수 있었다.
1797년 2월 22일 프랑스 해군의 프리깃함 세척이 웨일스의 남서 해안에 있는 작은 어촌 피시가드로 들어와 약 1,200명의 무장병사들을 상륙시켰다. 이 사건은 곧 수습되었으나 이 사건이 있기 전에 프랑스의 침략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이미 몇 달 동안 돌고 있었으므로 이 일로 인해 금을 인출하려고 사람들이 은행에 몰려드는 사태가 발생했다. 겁에 질린 시민들은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태환지폐를 현금으로 바꾸려 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태환지폐는 대부분 잉글랜드 은행과 그보다 규모가 작은 은행들이 발행한 은행권이었다.
일시에 몰려드는 금의 인출 소동으로 인해 잉글랜드 은행은 자신들이 발행한 은행권을 금으로 바꿔주는 것을 거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고 정부는 이에 대하여 긴급 칙령을 발표하고 제한법을 제정하여 잉글랜드 은행을 태환지폐의 현금(금을 말함)으로의 지불 거절의 책임에서 보호해주었다.
이 법은 또 은행권으로 지불하는 것이 곧 ‘현금을 지불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간주되어야 함’을 공식화했다. 이 조치는 영국의 의회가 24년 후인 1821년 은행권의 태환성을 회복시킬 때까지 수많은 혼란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캘리포니아, 오스트레일리아, 클론다이크,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19세기 골드러시는 금의 생산량을 엄청나게 늘려 1859년에는 전 세계의 금 생산량이 연간 275톤에 이르렀다. 이는 18세기 연평균 생산량의 10배가 넘는 것이었다.
19세기에는 사람들이 지나칠 정도로 금을 숭배했기 때문에 은의 특권이 계속해서 감소되었으며, 결국 은화의 화폐로서의 유통성도 줄어들었다. 일단 금본위제가 자리를 잡고 나자 태환지폐와 은행예금은 물론 정부가 보유하고 있던 외환도 ‘진짜 돈’의 편리한 대용품 정도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진짜 돈이란 순전히 금으로 교환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유통성을 확보하고 있는 자산을 가리키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