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종말의 허구
곽수종 지음 | 메이트북스
달러 종말의 허구
곽수종 지음
메이트북스 / 2025년 10월 / 328쪽 / 19,500원
들어가는 말21세기 문명 질서의 향방은 미국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 유지 여부에 달려 있었다. 역사적으로 문명의 전환은 거대한 격변과 함께 찾아왔으며, 달러의 위상 또한 영원하지 않을 수 있음을 시사했다. 경제 패권의 붕괴는 재건할 수 있지만, 정치 패권의 상실은 국가의 쇠멸을 의미하기에 그 무게가 달랐다. 최근 금융 시장은 트럼프 행정부의 예측 불가능한 정책으로 인해 달러 강세와 채권의 안전 신화가 동시에 흔들리는 전례 없는 혼란을 겪었다. 외국인 투자자들의 신뢰가 훼손되면서 달러가 누려온 ‘과도한 특권’은 위협받기 시작했고, BRICS 국가들을 중심으로 ‘탈달러화’가 중요한 금융 트렌드로 떠올랐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저자는 다섯 가지 핵심 질문을 던졌다. 첫째, 달러 가치의 몰락은 시작되었는가? 둘째, 도덕과 윤리의 몰락은 미국 예외주의와 민주주의의 붕괴를 시사하는가? 셋째, 미국의 기회·리더십·신뢰의 몰락은 시장경제의 쇠락을 의미하는가? 넷째, 새로운 강자는 누구이며, 중국이 미국의 리더십을 대체할 수 있는가? 다섯째, 달러를 대체할 자산으로서 금, 은, 암호화폐의 미래는 어떠한가? 이 책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 될 것이다.
CHAPTER 1 트럼프의 오독: 달러 패권이 불안하다
시대전환, 새 판이 짜인다21세기 세계질서의 향방을 결정할 핵심 질문,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는 유지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 앞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재등장은 미국 질서 전체를 흔드는 가장 크고 예측 불가능한 변수가 되었다. 그가 내세운 ‘보편관세’와 ‘상호관세’는 단순히 무역 불균형을 바로잡는 정책을 넘어,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라는 미국의 패권 근간을 위협하는 위험한 도박이었다. 수많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를 배출하며 세계 경제 담론을 주도해 온 국가의 수장이 글로벌 경제 질서를 부동산 사업가적 시각으로 재단하려는 시도는 그 자체로 깊은 모순을 드러냈다. 이는 기축통화국의 지위가 단순히 경제 권력을 넘어 산업, 기술, 군사안보는 물론 성숙한 시민의식과 투명한 제도까지 아우르는 총체적 역량임을 간과한 처사였다.
트럼프는 역사 속에서 유일하게 한 번의 임기를 건너뛰고 재임에 성공한 그로버 클리블랜드의 길을 따랐지만, 정작 그가 존경한다고 밝힌 인물은 강력한 관세 정책을 펼쳤던 윌리엄 매킨리였다. 하지만 그는 매킨리가 임기 말 관세 정책의 부정적 효과를 인정했던 역사적 교훈은 외면했다. 트럼프의 이러한 신념은 뿌리가 깊었다. 미국이 19세기 후반 이후 처음으로 무역 적자를 기록했던 1971년, 스물다섯 살의 트럼프는 이미 미국이 다른 나라들에게 ‘속고 있다’는 생각을 굳혔다. 1987년에는 사비 9만 4,801달러를 들여 《뉴욕타임스》 등에 전면 광고를 싣고, 일본과 사우디아라비아 등 동맹국들의 안보 무임승차를 비판하며 “우리 위대한 나라가 더 이상 조롱당하게 놔두지 맙시다”라고 주장할 만큼 그의 생각은 확고했다.
소련 붕괴 후 ‘골디락스 경제’의 풍요를 누리던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에는 그의 메시지가 큰 반향을 얻지 못했다. 당시 미국은 제조업이 중국으로 이전되더라도, 결국 중국이 서구식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받아들일 것이라는 낙관론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트럼프 2.0’ 시대의 첫 100일은 시장의 기대를 완전히 뒤엎었다. 그는 무려 140개가 넘는 행정명령을 쏟아내며 무역, 이민, 외교 정책을 급진적으로 전환했고, 심지어 일론 머스크 같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을 활용해 정부 개혁을 밀어붙였다. 시장은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1기 때와 달리 그의 공격적인 무역 정책은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 우려를 자극하며 투자 심리를 급격히 냉각시켰다.
그 결과는 처참했다. 트럼프 2.0 출범 100일 동안 S&P 500 지수는 7.9% 하락하며, 1973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 2기 이후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이는 바이든 행정부 출범 초기의 11% 상승이나 트럼프 1기 때의 5% 상승과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특히 2025년 4월 ‘상호 관세’ 정책이 발표되자 S&P 500 지수는 단 이틀 만에 10% 폭락하며 약세장에 진입했다. 시장을 지배한 핵심 키워드는 ‘불확실성’이었고, 행정부의 불명확한 소통은 투자자들을 공황 상태로 몰아넣었다. 결국 ‘관세를 통한 위협’은 미국 경제를 넘어 세계 경제 전체에 심각한 경기 침체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불안한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중국의 세기’로 본격 진입하다21세기 세계 질서의 최대 변수인 ‘중국의 부상’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트럼프 행정부의 등장은 역설적으로 그 흐름을 가속화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워싱턴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오랫동안 예견되어 온 ‘중국의 세기’는 단순한 예측을 넘어, 세계 권력의 중심축이 베이징으로 이동하는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과의 무역 분쟁에서 부분적인 합의를 이끌어내고 이를 ‘승리’로 선언했지만, 이는 본질을 외면한 근시안적인 태도였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미국은 중국과의 경쟁에서 패배를 거듭하고 있었음에도, 그는 무역 충돌과 같은 지엽적인 문제에만 매달렸다. 이러한 그의 정책은 미국의 글로벌 공급망 접근성을 위협하고, 대학과 공공 연구 자금을 대폭 삭감하며, 유능한 인재의 해외 유출 가능성을 높이는 등 미국의 구조적 문제를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마치 철거용 해머로 자국의 권력과 혁신의 기둥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자해 행위와 같았으며, 훗날 역사가들이 미·중 패권 경쟁의 결정적인 전환점으로 기록할 가능성이 매우 컸다.
억만장자 투자자 레이 달리오가 저서 『세계질서의 변화』에서 지적했듯, 제국의 쇠락 초기에 나타나는 ‘제조업 부활’이라는 공허한 외침과 실제 첨단 기술 프로그램 축소라는 모순적 행태는 트럼프 행정부에서 정확히 나타나고 있었다. ‘산업과 상업이 떠난 자리에 자본만 남는다’는 사실이 제국의 종말을 알리는 징후임을 그는 깨닫지 못하는 듯했다. 그 사이 중국은 무서운 속도로 미래 산업을 장악해나가고 있었다. 이미 철강, 알루미늄, 조선, 배터리, 태양광, 전기차, 5G 장비 등 핵심 제조업 분야에서 세계 생산을 선도했으며, 2030년에는 전 세계 제조업의 45%를 차지할 것으로 전망되었다. 베이징은 2025년 3월, 양자컴퓨팅과 로보틱스 등 최첨단 기술에 장기 투자하는 1,380억 달러 규모의 국가 벤처캐피털 펀드를 발표하는 등 ‘맨해튼 프로젝트’에 버금가는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러한 중국의 전략은 가시적인 성과로 이어지며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중국 스타트업 딥시크(DeepSeek)가 2025년 1월 출시한 AI 챗봇은 미국인들에게 중국의 AI 기술력을 실감케 하는 ‘스푸트니크 모멘트’가 되었다. 한때 트럼프의 정치적 동맹인 일론 머스크가 공개적으로 비웃었던 중국 전기차 업체 BYD는 2024년에 테슬라를 제치고 글로벌 판매 1위를 차지했으며, 시가총액은 포드, GM, 폭스바겐을 합친 것보다 높아졌다. 또한 중국은 신약 개발, 산업용 로봇 설치 등에서도 세계를 압도했고, 오랜 약점으로 꼽혔던 반도체 분야마저 화웨이의 기술 돌파를 기점으로 자립적 공급망을 구축하며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거대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도 트럼프는 여전히 중국이 제기하는 위협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관세에만 집착했다. 그는 고율 관세로 매장이 텅 빌 것이라는 우려에 “아이들에게 인형을 좀 덜 사주면 된다”고 답할 정도로 중국을 여전히 ‘값싼 상품만 만드는 공장’으로 치부하는 시대착오적 인식을 드러냈다. 그의 관세 정책은 중국의 국가 주도 전략을 꺾기는커녕, 오히려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 재편을 가속화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미국이 관세 장벽 뒤에 스스로를 가두고 세계 무대에서 위축될 위험에 처한 사이, 중국은 부동산 침체와 고령화라는 심각한 내부 도전에도 불구하고 패권 경쟁의 주도권을 잡아나가고 있었다. 암울한 시나리오를 피하기 위한 미국의 정책적 선택이 시급했지만, 진로를 수정할 수 있는 시간은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관세 변수와 세계 경제 성장 시나리오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은 단순한 무역 장벽을 넘어 글로벌 공급망과 국가 간 신뢰를 근본적으로 뒤흔들며, 세계 경제를 다섯 갈래의 갈림길 위에 세웠다. 2025년 4월 2일의 갑작스러운 고율 관세 발표는 기존의 글로벌 무역 질서에 대한 미국의 근본적인 불만을 드러내며 시장에 즉각적인 충격을 주었다. 주가와 국채 시장이 요동치고 소비자 신뢰가 급락하는 등, 트럼프가 촉발한 역풍은 지난 2년간 견조한 성장을 이어온 미국 경제마저 위협하는 수준이었다.
이처럼 관세라는 변수는 각국의 정책적 대응과 맞물려 향후 세계 경제의 성장 경로를 결정할 핵심적인 분기점이 되었다. 과거의 영광이나 실패에 얽매이기보다, 이제 세계는 생산과 소비의 새로운 균형점을 찾고 ‘글로벌 사우스’를 포용하며 지속 가능한 성장 동력을 확보해야 하는 중대한 과제에 직면했다. 경제 회복력과 국가 안보 사이의 균형을 맞추고,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무역·안보·환경 협력체계를 재구축하는 길만이 모두가 번영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다.
이러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가장 근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시스템’과 ‘시민의식’이다. 법보다 앞서 자유와 공정성, 생산과 소비의 균형을 추구하는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하며, 이를 뒷받침하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사회 전반에 뿌리내려야 진정한 리더십이 발휘될 수 있다. 경제 성장에서 ‘균형’은 외부적으로 건전한 무역 관계를, 내부적으로는 지속 가능한 재정 정책을 의미하며, 나아가 국가의 회복력과 안보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충분조건은 바로 ‘신뢰’다. 신뢰는 거래 비용을 낮추고 혁신을 촉진하며, 궁극적으로 국가의 성장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이러한 ‘균형’과 ‘신뢰’라는 두 축을 기준으로, 2025년 이후 세계 경제는 다섯 가지 시나리오로 전개될 수 있다. 가장 긍정적인 두 경로는 ‘생산성 가속화’와 ‘미국 재정 리셋’이다. ‘생산성 가속화’ 시나리오는 미·중이 관세 인하로 무역 긴장을 완화하고 각국이 재정 건전성을 회복하며, 생산성 향상이 소득 증대와 신뢰 회복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그려 2028년 이후 3.5%의 높은 성장률을 달성하는 길이다. ‘미국 재정 리셋’은 차기 행정부가 강력한 지출 삭감과 세제 개혁을 통해 재정 균형을 회복하여 단기적인 침체를 겪더라도 2028년 이후 3%의 안정적인 성장 기반을 마련하는 시나리오다.
반면, 제한적인 성장에 머무는 두 가지 ‘연착륙’ 시나리오도 존재한다. ‘실질적 변화 없음’ 시나리오는 관세 충격이 예상보다 적어 세계 경제가 큰 조정 없이 2.5% 수준의 저성장을 유지하는 경우이며, ‘중앙은행 긴축’ 시나리오는 관세발 인플레이션으로 각국 중앙은행이 금리를 인상하면서 성장률이 2%대로 더욱 둔화되는 경우다. 마지막 최악의 시나리오는 ‘지정학적 격화’다. 미·중이 극단적인 보복관세를 주고받으며 무역 장벽이 고착화되고 국제적 신뢰가 붕괴하여, 세계 경제가 1.6%대의 장기 침체에 빠지는 암울한 미래다. 결국 세계 경제가 어떤 경로로 나아갈지는 무역 마찰의 완화, 인플레이션 통제, 소비 및 투자 심리 회복, 그리고 금융시장의 안정성이라는 다섯 가지 핵심 지표를 통해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외교와 국익 사이, 괴리는 더욱 심화된다트럼프 2.0 시대의 미국 외교는 러시아, 중국, 이란이라는 3대 적성국을 상대로 동시적인 대화를 시도하는 대담한 행보로 시작되었다. 이는 냉전 종식 이후 군사력과 경제력에 의존하며 다자주의라는 이상주의적 틀에 갇혀 있던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하고, 외교를 국익 중심의 냉철한 전략적 도구로 되살리려는 시도였다. 더 이상 미국은 모든 적을 동시에 상대할 군사력도, 제재만으로 강대국을 굴복시킬 경제력도 갖추지 못했다는 현실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강대국 간의 전쟁 가능성이 다시 현실적 위협으로 떠오른 지금, 미국은 고대 스파르타의 노왕 아르키다모스가 전쟁을 앞두고 시간을 벌기 위해 외교를 활용했던 지혜를 되살려야 할 필요성에 직면했다. 즉, ‘전쟁도 굴복도 암시하지 않는’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며 적과의 대화에 나서고, 그렇게 확보한 시간으로 동맹을 재정비하고 국력을 강화해 보다 유리한 위치에서 힘의 균형을 재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전적 외교’로의 회귀는 세 가지 방향으로 구체화된다. 첫째, 적과의 적극적인 대화다. 중국과는 군사 충돌을 피하기 위한 경제 규칙을 설정하고, 러시아와는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과 유럽 안보 질서 재편을, 이란과는 핵 문제 해결을 위해 직접 협상에 나서야 한다. 둘째, 동맹의 재정의다. 더 이상 ‘세계의 경찰’ 역할을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NATO와 아시아 동맹국들에게 더 많은 책임을 요구하며 역할 분담을 통해 미국의 개입 비용을 최소화해야 한다. 셋째, 힘의 효율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외교를 통해 시간과 공간 속에서 힘을 재배열함으로써, 감당할 수 없는 군사적 충돌을 피하고 국익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전환은 ‘미국이 중국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지난 30년간의 거대한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을 전제로 한다. WTO 가입 등을 통해 중국을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편입시키려던 미국의 ‘퍼주기 외교’는 오히려 중국에 막대한 부를 안겨주며 오늘날 미국의 패권을 위협하는 강력한 경쟁자를 키워내는 결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의 최우선 과제는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중국에 집중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약한 러시아와의 긴장을 완화하는 것이다. 닉슨과 키신저가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소련을 압박했듯, 미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약화된 러시아의 상황을 활용해 모스크바와의 데탕트를 추진함으로써 중국을 외교적으로 고립시켜야 한다. 또한, 중동에서는 이스라엘-사우디 관계 정상화를 중심으로 한 아브라함 협정을 확장하여 이란을 억제하고, 아시아에서는 인도를 핵심축으로 일본, 필리핀 등과의 연대를 강화해 중국의 군사적 팽창을 견제하는 다층적인 외교망을 구축해야 한다.
결국 트럼프 2.0 외교의 성패는 ‘전략적 혁신을 위한 혼란’을 만들어낼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단순히 예측 불가능한 혼란만 야기하는 ‘자살골 외교’가 아니라, 국내 경제 기반을 재건하고 동맹을 재정비하여 확보한 힘을 바탕으로 중국과 유리한 공존의 균형점을 찾아내는 것. 이것이야말로 외교와 국익의 괴리를 메우고, 다가오는 거대한 도전을 헤쳐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CHAPTER 2 달러의 매력과 균열: 기축통화의 힘과 한계
달러의 시작, 미국의 시작미국 달러의 역사는 건국의 아버지들이 식민지 시대의 불안정한 통화 시스템을 극복하고 통일된 국가 경제를 건설하려는 열망에서 시작되었다. 1690년 매사추세츠 식민지의 군자금 마련을 위한 지폐 발행에서부터 1785년 달러 기호($) 채택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독자적인 화폐 체계를 향한 길을 꾸준히 걸어왔다. 그러나 진정한 전환점은 1913년 연방준비제도법 제정과 함께 찾아왔다. 개별 은행이 난립하던 불안정한 시스템을 대체하고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은행이 설립되면서, 비로소 현대적인 미국 달러가 탄생할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달러가 세계 무대의 중심으로 도약한 결정적인 계기는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전쟁으로 막대한 군사비가 필요해진 유럽 국가들이 줄줄이 금본위제를 포기하면서 기존의 파운드 중심 국제금융 질서는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영국마저 재정난으로 금본위제를 포기한 반면,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은 미국은 연합국에 대한 ‘대출국’으로 부상하며 달러의 위상을 급격히 높여나갔다. 이어진 제2차 세계대전은 이러한 흐름에 쐐기를 박았다. 연합국의 병참기지 역할을 하며 막대한 양의 금을 축적한 미국은, 전쟁이 끝날 무렵 전 세계 금 보유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압도적인 경제 대국으로 올라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