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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인도

아쇼카 모디 지음 | 생각의힘


두 개의 인도

아쇼카 모디 지음

생각의힘 / 2024년 9월 / 632쪽 / 32,000원



과거와 현재, 서론


“하던 대로”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인도와 국제 전문가들은 여전히 평상시의 테크노크라트적 접근 방식에 매달리고 있다. 그들은 더 많은 경제 “자유화”와 “거버넌스” 개혁을 제안한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경고하고 있으며, 이 책의 내러티브는 그 점을 강력하게 반복하고 있다. 정치 지도자들은 가치 있는 아이디어를 무시하고 대신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과 선거 승리에 기여하는 정책에 이끌린다.

인도의 진정한 문제는 나쁜 정책이나 진보를 위한 좋은 아이디어의 부재가 아니었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는 꾸준히 악화되는 공적 규범과 책임성이었다. 규범이 약화되고 책임 의식이 회복되지 않으며 인도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민주주의에서 책임 의식을 확보하는 것이 힘든 일이기 때문에 인도의 담론은 항상 “권위주의적 전환”의 유혹에 시달렸다. 즉 인도는 민주주의라는 “사치”를 감당할 수 없으며, “구원자”가 독재적 권력으로 먼저 지속적인 성장의 기반을 확립해야 한다는 견해다. 그러나 독재의 유혹은 심각한 위험을 수반한다. 현대의 구원자들은 자주 인도와 다른 곳에서 큰 피해를 입혔다.

인도는 도시와 지역 정부에 권한을 분권화하는 폭넓은 민주주의를 필요로 한다. 분권화된 거버넌스는 그 자체의 위험이 있다 해도 도덕적으로 안정된 정치적 책임 의식의 최선의, 아마도 유일한 가능성을 제공한다. 성공적인 분권화 사회에서 책임 의식은 시민 의식과 지방 자치 정부의 형식적 구조가 혼합되어 발생하며, 개인주의적인 “나-나-나” 문화는 신뢰와 협력을 밑에서부터 쌓아 올리는 “우리” 사회로 바뀐다. 거기에서 공공재에 대한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투자를 하려는 장기적인 헌신이 생겨난다.

인도는 덫에 걸려 있다. 지금의 인도 민주주의는 모두에게 혜택이 되는 경제 성장에 필요한 공공재를 제공하는 데 실패할 것이다. 그리고 좋은 일자리도 계속 부족할 것이다. 그리고 일자리 부족은 더 많은 사회적 분노를 낳을 것이고, 이는 가시적 재화를 신속하게 제공하려는 정치적 유인을 더욱 증가시키며, 일자리가 풍부한 장기적 미래를 위해 역할을 해야 하는 민주주의의 능력을 훼손할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네루에서 시작되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가짜 사회주의, 1947-1964



불확실한 시작


인도 국민회의의 규칙에 따르면, 발랍바이 파텔이 독립 당시 당 대표가 되었어야 했다. 그리고 만약 그랬다면 그는 인도의 첫 번째 총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1947년 8월, 파텔이 아닌 자와할랄 네루가 총리가 되었다. 참고로 파텔과 네루는 경제적, 사회적 철학과 정부의 권한 및 권력의 사용에 대한 생각이 크게 달랐다. 파텔은 독립 후 인도의 첫 3년만을 보고 난 후 세상을 떠났지만, 부총리이자 내무부 장관으로서 그는 지속적인 유산을 남겼다. 그 몇 년 동안에 그와 네루는 인도의 정치적, 경제적 미래의 우선순위를 두고 격렬하게 대립했다. 만약 파텔이 인도의 첫 번째 총리가 되었거나 네루의 부총리로 더 오래 살았다면, 독립 후 인도는 매우 다른 모습을 띠었을 것이다.

두 지도자 - 두 세계:
파텔은 1875년 10월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열심히 공부했고 돈을 모아 영국에서 훈련받은 변호사가 되었으며, 인도로 돌아와 성공적인 형사법 변호사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파텔은 1928년 상반기에 정치에서 처음으로 두각을 나타냈는데, 그는 현재 구자라트주의 행정 구역인 바르돌리에서 영국 정부의 과도한 토지 세금 요구에 맞서 싸우는 농민들을 이끌었다. 파텔이 이끌던 시위는 바르돌리 전투에서 승리했고, 이 승리로 바르돌리 사람들은 그에게 “사르다르”, 즉 우두머리 또는 장군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그 이후로 발랍바이 파텔은 사르다르 파텔로 알려져 왔다.

그리고 자와할랄 네루는 1889년 11월 인도의 가장 저명한 가문 중 하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모틸랄 네루는 부유한 변호사이자 국민회의의 고위 지도자였다. 자와할랄은 영국의 명문 학교인 해로우에서 공부한 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진학했으며, 이후 그는 법정에 거의 들어가지 않았지만, 영국에서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한편 1942년 8월, 간디가 인도 철수 운동을 시작한 후, 영국인들은 모든 인도 지도자들을 감옥에 가두었는데, 아메드나가르 요새에 수감된 네루는 장미 정원을 가꾸고 다른 수감자들과 배드민턴을 쳤다. 그리고 1944년 4월부터 9월까지 5개월 동안 네루는 그의 웅장한 역사서인 《인도의 발견》을 썼다. 이처럼 네루가 역사학자이자 철학자였던 만큼이나 파텔은 행동가였다.

간디, 네루를 선택하다:
1945년 말과 1946년 초, 인도의 영국 통치자들은 권력 이양을 준비하면서 중앙 및 지방 의회 선거를 실시했는데, 국민회의는 파텔이 모금한 선거 자금의 도움을 받아 이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1946년 4월 말, 국민회의는 차기 당 대표 선출 대회에서 국민회의의 15개 주의 당 위원회 가운데 12개가 파텔을 지지했고 나머지는 기권했다.

그런데 주 당 위원회가 파텔을 인도의 첫 번째 총리로 지지한 것까지는 아니었다. 그들은 네루가 인도 대중에게 인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파텔의 리더십 자질과 국민회의에 대한 그의 공헌을 인정했다. 그런데 간디는 규칙 위에 있었고, 누가 당 대표가 될 것인지는 그가 결정했다. 간디는 네루를 선택했는데, 간디는 그가 파텔보다 국제 무대에서 인도를 더 효과적으로 대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네루는 파텔보다 인도의 무슬림 공동체와 더 강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네루는 56세였고 76세의 간디에게 아들과 같았다. 간디가 동생처럼 여겼던 파텔은 71세였고 건강이 좋지 않았다.

황소들이 서로 떨어지다:
네루 총리와 파텔 부총리 겸 내무부 장관은 폭풍우 같은 관계 속에서 독립 직후의 시기를 시작했다. 그들은 당시 인도를 규정하는 가장 중대한 문제들을 놓고 대립했는데, 그 문제들은 오늘날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파키스탄이 이슬람 국가로 분리되면서, 사람들의 마음에 떠오른 질문은 인도에서 무슬림의 역할과 위치는 무엇이 될 것인가였다. 그 광범위한 맥락 안에서, 인도와 파키스탄 모두에서 분리 이후에도 종교적 증오의 긴장이 계속되면서 즉각적인 문제가 발생했고, 힌두-무슬림 간 긴장이 감도는 인도 지역에서는 정부가 작동하지 않거나 격렬하게 파벌화되었다.

그런데 내무부 장관인 파텔이 힌두교도는 보호하고 도와주지만 무슬림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런데 그 소문의 근거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네루는 그 소문을 믿는 것 같았다. 반면에 파텔은 파키스탄 측의 폭력을 억제하기 위해 반쪽짜리 노력만 하고 있는 파키스탄 지도자들에 대한 네루의 유화적 접근에 조바심을 느꼈다. 그래서 파텔은 이 폭력의 소식이 인도의 힌두교도와 시크교도들 사이에 분개와 분노라는 “대중 심리”를 촉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무튼 네루와 파텔은 인도의 힌두-무슬림 문제를 다루는 최선의 방법을 두고 의견 차이를 결코 해소하지 못했다.

그들은 또한 카슈미르에 대해서도 다투었다. 1947년 10월 22일, 파키스탄으로부터 약 5,000명의 무장 부족민들이 카슈미르로 몰려들었다. 참고로 카슈미르의 마하라자(산스크리트어로 군주라는 뜻) 하리 싱은 힌두교도였지만, 카슈미르 계곡은 무슬림이 다수였다. 아무튼 파키스탄과 인도 사이에서 선택을 피해왔던 하리 싱은 10월 24일, 절박하게 인도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고, 10월 26일 아침 그는 인도에 가입하는 문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인도 보병 대대가 카슈미르에 진입하여 부족민들을 저지했다. 파키스탄 당국은 인도군이 부족민들을 저지한 서쪽 지역에 “아자드 카슈미르(자유 카슈미르)”라는 이름을 붙였고, 인도인들은 그 지역을 “파키스탄이 점령한 카슈미르”라고 불렀다.

한편 국무장관 역할을 수행하던 파텔은 카슈미르 작전을 지휘했다. 그러나 1947년 12월 초, 그는 놀랍게도 총리인 네루가 인도의 카슈미르 정책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파텔은 자신이 속았다고 불평했고, 두 사람은 신랄한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렇게 네루와 파텔이 공개적으로 대립하자, 간디는 12월 말 파텔에게 최후통첩을 다음과 같이 전달했다. “당신이나 자와할랄 둘 중 하나가 처리해야 한다.” 파텔은 대답했다. “나는 힘이 없습니다. 그는 더 젊습니다. 그가 일을 하게 하십시오. 나는 밖에서 할 수 있는 만큼 그를 도울 것입니다.”

파텔과 네루를 오랫동안 함께 지켜온 간디는 파텔이 물러날 때가 되었다는 데 동의했지만, 그 문제에 대해 더 생각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운명이 개입했다. 1948년 1월 30일, 나투람 고드세라는 힌두 민족주의자가 간디를 총으로 쏴 죽였다. 간디의 죽음 이후, 슬픔을 함께 나누는 순간에 임박한 분열에 대한 소용돌이치는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네루와 파텔은 뭉쳤다. 3월 3일, 네루는 파텔에게 위기가 그들이 “친구이자 동료”로서 함께 일할 것을 요구한다고 편지를 썼다. 그는 우아하게 끝맺었다. “이 편지는 나의 우정과 애정을 담고 있습니다.” 파텔은 동등한 우아함으로 답했다. “저는 깊이 감동받았습니다. 압도된 느낌입니다. 우리는 평생 친구이자 공통의 대의를 위한 동지였습니다.” 이후 파텔의 퇴진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잊혔고, 역사의 굴곡은 계속되었다. 1948년 3월 8일, 파텔은 딸과 함께 점심을 먹다가 심각한 심장마비를 겪었다.

파텔이 주들을 통합하다:
파텔은 심장마비 후 빠르게 업무에 복귀했고, 그가 시작했지만 끝내지 못한 임무에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그 임무는 토후국들을 통합된 인도로 규합하는 것이었다. 참고로 영국이 인도를 떠났을 때, 뉴델리의 인도 정부는 오늘날 인도로 알려진 전 영토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전국에 산재해 있는 500개 이상의 토후국이 세습 토후들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그들은 1857년 영국군 내 인도 병사들의 반란 이후 식민지 당국이 새로운 영토 병합을 중단했기 때문에 토후로 살아남았다.

영국은 더 많은 병합이 또 다른 반란을 촉발할 것을 우려했다. 대신 영국 왕실은 최고 통치권 원칙을 수립하여 식민지 당국에 토후국의 대외 정책, 국방, 통신에 대한 통제권을 부여하고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토후국의 통치는 토후들에게 맡겼다. 그런데 1947년 11월, 토후국 하나를 “인도 연방”으로 통합할 기회가 생겼다. 오리사의 작은 토후국 닐기리의 토후는 그가 다룰 수 없는 반란에 직면하자 인도 정부에 토후로서의 자신의 권리와 권력을 재빨리 내놓았다. 파텔은 닐기리의 인도 연방으로의 동화에 힌트를 얻어 12월 중순부터 위협과 유인책을 활발히 결합하여 다른 토후국들을 인도의 품으로 끌어들였다. 파텔은 토후들과 그 후계자들이 조용히 권한을 넘기면, 관대한 비과세 혜택을 부여하는 “사적 지갑(연금)”과 개인 재산에 대한 지속적인 소유권을 약속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그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 작업은 파텔이 1948년 3월 심장마비를 일으켰을 때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1948년 중반이 되자 “통합 인도의 탄생과 시작”이 눈앞에 다가왔다.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던 자는 하이데라바드의 니잠(통치자)이었다. 9월 13일 새벽 인도 군대가 하이데라바드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고, 9월 18일 하이데라바드 사령관이 항복했다. 드문 경축의 순간인 1948년 10월 15일, 파텔은 모든 인도 주의 수상(1950년 1월 인도가 공화국이 된 후 ‘주 수상’으로 개명됨)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파텔은 수상들에게 토후국의 인도 연방 통합이 1947년 12월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하이데라바드의 곪은 상처”가 제거되면서 끝났다고 상기시켰다. 또 파텔은 인도가 “지난 수 세기 동안 달성하지 못했던 통합의 정도”를 달성했다고 썼는데, 그것은 인도에 남긴 파텔의 헤아릴 수 없는 유산이었다.

갈등이 재개되다:
네루와 파텔의 갈등은 1950년 초 동파키스탄에서 유입된 대규모 힌두 난민으로 인해 재개되었다. 파텔은 다시 한 번 힌두교도를 보호하기 위해 파키스탄을 압박하지 않은 네루에게 화가 났다. 파텔은 분노하며 파키스탄이 밀어낸 모든 개별 힌두교도에 대해 인도에서 무슬림 10명을 추방하는 “눈 1개에 눈 10개”라는 인도 정책을 요구했다. 네루는 이런 눈에는 눈(tit-for-tat) 전략을 거부했는데, 그는 인도가 시민에 대한 평등과 공정한 대우의 기준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동시에 인도 경제 계획의 목표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다. 파텔은 기획위원회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았으나 선출된 국민 대표들의 역할을 찬탈할 수 있는 테크노크라트적 위원회에 반대했다. 갈등의 이념적 지점은 국민회의 결의안 초안에서 기획위원회가 “경제 활동에서 개인적 영리 행위의 동기를 제거”하려 할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불거졌다. 우리는 이 문구의 저자를 알지 못하지만, 그 말은 1936년 러크나우에서 열린 국민회의 회기(전당대회)에서 네루가 연설하며 사용한 언어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당시 간디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네루의 언어가 당의 결의안에 스며들지 않도록 했다. 이제 그 언어가 다시 등장하자 파텔과 같은 “우파”는 문제의 문단을 삭제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진정한 격돌은 세 번째 전선에서 벌어졌다. 1950년 국민회의 대표 선거였다. 파텔은 푸르숏탐다스 탄돈을 지지했다. 네루는 아차르야 크리팔라니를 지지했다. 탄돈-크리팔라니 대결은 파텔-네루의 재대결이었다. 파텔은 탄돈을 위해 로비했고, 1950년 9월 그가 대표직을 차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나, 탄돈의 당선은 파텔의 마지막 승리였다. 파텔은 12월 15일 아침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거인이 마침내 일어서다:
탄돈을 지지할 파텔이 없어진 상황에서 탄돈은 1951년 8월 국민회의 대표직에서 사임했다. 이후 네루는 1954년까지 그 자리를 지켰고, 그 후 그가 직접 고른 대표가 지나치게 독단적이지 않도록 했다. 파텔이 사라지고 다른 경쟁자들이 무력화되자, 네루는 혼란스러운 국민회의와 마주했다. 1951년 6월, 인도 최초의 총선거를 불과 몇 달 앞두고, 《타임》은 당의 분열과 그 속으로 스며든 부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당은 통일된 목적이 결여된 거대한 복합체가 되었고, 비대해지고 게을러졌다. 당은 많은 기회주의적 관리들과 악명 높은 암시장 상인들을 품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대지주와 농촌 유지로 구성된 파벌 지도자들은 그들을 위해 일하는 농민들과 카스트 동료로 구성된 귀중한 “표 은행”을 가지고 왔다. 그런데 네루는 국민회의에 구조와 규율을 확립하는 것을 꺼렸다. 대신 그는 인도 국민들과의 연결에 의지했다. 그를 우상화하는 군중들에게 진부한 말을 남발하며 끊임없이 선거운동을 했다. 예를 들어 1951년 11월, 투표가 진행 중일 때, 만화가 R. K. 락스만은 네루가 선거운동 마차를 타고 당원들과 인도 대중 모두 위에 우뚝 서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참고로 1951년 10월부터 1952년 2월 사이에 실시된 선거는 인도 민주주의의 첫 번째 시험대였다. 1억 7,500만 명의 등록 유권자 중 1억 800만 명이 투표하여 62%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이는 당시 선진 민주주의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투표율보다는 낮았지만, 인도 인구의 약 17%만이 읽고 쓸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성과였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투표 중 무효표로 선언된 것이 2% 미만이었다는 것이다. 거대한 선거 기구가 놀라울 정도로 잘 작동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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