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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은 왜 무너지는가

피터 헤더, 존 래플리 지음 | 동아시아


제국은 왜 무너지는가

피터 헤더, 존 래플리 지음

동아시아 / 2024년 7월 / 264쪽 / 18,000원





번영의 데자뷔 - 팍스 로마나와 21세기 이전의 서구



399년의 로마, 1999년의 워싱턴


1999년 워싱턴 D.C.:
20세기의 마지막 해에 들어설 즈음 미국은 현대 세계의 중심이었다. 실업률은 역사상 최저치로 떨어졌고 미국 경제는 미증유의 최대치 성장을 즐기고 있었다. 닷컴 붐을 타면서 주식을 소유한 미국인들은 나날이 더 부자가 되었으며, 경제가 치솟는 것을 의미하는 선순환 속에서 횡재한 재물을 소비했다. 미국뿐만 아니라 서구 전체(서유럽, 캐나다 및 아시아 등, 대부분 미국의 친구와 동맹국으로 구성된 부유하고 산업화한 경제)도 거인 같은 세계의 등에 올라탔다. 그 세계에서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자유 시장의 번영과 가치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삶의 실상이었다.

참고로 10년 전 동유럽 시위자들은 공산주의 통치자들을 끌어내렸다. 20세기를 대변하는 역사적 순간처럼 느껴지는 사건이었다. 그 후 2년 뒤에 소비에트 연방은 스스로 소멸했고, 미국 경제학자들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각 정부에 서구의 모양대로 경제와 정치 제도를 재편했을 때의 장점을 조언했다. 이에 중국 공산당조차도 시장을 수용했다. 독일은 재결합했고 유럽은 경기침체에서 빠져나왔으며 미국의 위상은 급상승했다. 그리고 1999년이 되자 세계 생산량 중 서구가 소비하는 비중은 역대 최고에 도달했다. 즉 지구 인구의 6분의 1이 전 세계 상품과 서비스 생산량의 5분의 4를 소비했다.

1999년 국정연설에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우리의 미래에 대한 약속은 한계가 없다’고 선언하며 이러한 좋은 시절이 절대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론을 물씬 풍겼다. 또 경제학자들이 그에게 끝없는 성장을 가져올 경제적 안정의 시대인 ‘대안정기(Great Moderation)’가 도래했다고 말하자, 그의 행정부는 정부 흑자가 곧 수조 달러에 달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클린턴이 의회에 이 막대한 자금 일부를 연금과 건강 관리에 쏟아부을 것을 촉구하자 그의 재무장관은 수십 년간 증가하던 적자가 끝나고 마침내 미국이 지난 2세기 동안 정부가 쌓아온 모든 부채를 갚기 시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일반 미국인의 주머니에 다시 더 많은 돈을 넣어주겠다는 뜻이었다. 한편 대서양 건너편에서 토니 블레어 총리의 신노동당 정부는 시대정신을 반영해 공공서비스를 야심차게 확장했다. 동시에 유럽연합은 침착한 자신감 속에 구소련 블록의 나라 대부분을 서구 민주주의 엘리트 클럽으로 환영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불과 몇 년 후, 낙관론은 증발했다. 2008년의 세계 금융위기는 빠르게 대불황과 대침체로 이어졌다. 1999년 최고점에 도달한 후 겨우 10년 만에 서구의 세계 총생산량(GGP) 지분은 세계 생산량의 80퍼센트에서 60퍼센트로 되면서 4분의 1이 줄어들었다. 정부와 중앙은행이 경제에 돈을 쏟아 부으며 붕괴가 불러오는 최악의 즉각적인 영향을 신속하게 억제했지만, 이후 서구 국가들은 예전의 성장률을 회복하지 못했다. 반면 개발도상국의 주요 지역은 성장률을 높게 유지했다. 결과적으로 서구의 GGP 점유율은 계속해서 하락했다. 그런데 서구가 급격히 입지를 잃은 곳은 경제 분야로 끝나지 않았다. 한때 빛나던 서구 ‘브랜드’는 그 후광이 바랬고, 민주주의는 심각하게 갈라진 우유부단한 이미지를 외부에 자주 보여줬으며, 점점 더 소수 위주로 혜택이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더불어 권위주의적 지도자와 일당(一黨)이 경제나 정치 방향을 결정짓는 체제가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했다. 일부 서구 평론가들은 로마의 몰락에 관한 기번의 진단이 이 문제에 해결책을 제시한다고 본다. 서구는 외국인, 특히 이슬람의 이주로 인해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으니 방어를 강화하고 핵심 문화적 가치를 재확인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로마처럼 제국의 아마겟돈으로 향하는 같은 길을 걷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21세기가 이해하는 로마 역사는 현대 서구에 놀라울 정도로 다른 교훈을 제공한다.

서기 399년 로마:
로마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관직이자 천년을 이어온 집정관의 취임식 날인 399년 1월 1일 로마 제국 대변인이 로마 원로원 앞에 서서 로마 세계의 서쪽 절반을 대상으로 연두 연설을 했다. 참고로 집정관은 자신의 이름을 따서 연도를 지정함으로써 영생을 보장받았는데, 올해의 불멸 후보자는 변호사이자 철학자로 행정 역량을 갖춘 플라비우스 만리우스 테오도루스였으며, 연설은 새로운 황금기의 시작을 알리는 승리에 관한 것이었다. 대변자인 클라우디안은 청중에게 짧게 고개를 숙여 비위를 맞춘 후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의 연설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주제가 있었다. 첫째, 테오도루스 같은 사람이 공직을 맡은 행정이 발하는 빛(“이런 황제 아래에 사는 것을 누가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노고가 이보다 더 풍성하게 보상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우리 황제만큼 신중함이나 용기를 보여준 시대가 있었습니까? 브루투스라고 해도 이러한 황제 아래 살게 되면 기뻐할 것입니다.”)이다. 둘째, 이제 제국으로 굳게 연결된 번영의 흐름(“현명한 사람에게는 영광의 길이 열려 있습니다. 여러분의 노고가 확실히 인정받고 산업은 적절한 보상을 받기 때문입니다.”)이다.

그런데 언뜻 보기에 이 연설은 역사 속에서 실패한 정권이 선호했던 최악의 자화자찬처럼 보인다. 당시 제국 서방 황제(이 책에서는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은 395년부터는 제국이 동서로 분할되었으므로 ‘서로마 제국’이라고 적었지만, 그 전까지는 사두정에 의한 황제의 분할 통치에 해당하므로 ‘서방’ 황제라고 칭함) 호노리우스는 15세의 소년이었고, 실질적 통치는 스틸리코라고 부르는 장군이 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10년도 되지 않아 로마는 야만족 전사에게 약탈당하게 된다. 이들은 최근 로마 세계로 들어온 이민자들로서 알라리크라는 고트족 왕이 이끌었다. 그 후 몇 세대 지나지 않아 호노리우스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졌다. 서로마는 여러 야만족 왕국으로 나뉘었다. 그렇다면 정말 그 집단의식에 참여했던 집정관이나 황제, 대변자와 원로원 의원이 모두 고의적인 자기 망상에 빠져 있었던 것일까?

기번은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는 로마가 2세기 안토니누스 황제의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황금기 이후로 오랫동안 쇠퇴했으며 399년이면 멸망이 코앞으로 다가온 때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후세대 역사가들은 기번의 이런 모델을 발전시켰고, 이는 20세기 중반 가장 명확한 이야기를 전달해 준 쇠퇴 점검표가 작성될 때까지 이어졌다. 이는 일부 선도적인 서구 보수 평론가들에게 인기가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국제 관계 분야에서 현대 사상의 영향력 있는 흐름을 형성한다. 그러나 생각은 변해야 한다. 지난 50년 동안, 다른 식의 로마 과거에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이다.

쟁기와 그릇:
그릇이 깨지면 두 가지 중요한 양상을 보여준다. 일단 부서지면 대개 쓸모가 없어진다. 그러나 개별 파편은 세월을 견뎌낸다. 그 결과, 깨진 그릇은 떨어뜨린 곳에 그대로 남는 경향이 있고, 목재가 썩고 진흙 벽돌이 먼지로 돌아간 후에도 오랫동안 원래 소유자의 집과 마을에 대한 지도를 제공한다. 그러나 툭하면 그릇을 떨어뜨리는 인간의 손 덕분에 로마 경제 발전의 거시적 역사가 완전히 밝혀지려면 두 가지 기술적 혁신이 필요했다. 첫째, 그릇 파편의 연대를 파악해야 했다. 둘째, 연구자들은 지표면 그릇 밀도가 어느 정도 돼야 고대 정착지가 지하에 숨겨져 있음을 나타내는지 알아야 했다. 그런데 1970년대에 두 가지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다. 먼저 하층토를 깊게 파는 최신 쟁기 덕분에 오래 묻혀 있던 물건을 표면으로 다시 끌어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다음 내용은 실제 고고학이 일반적으로 인디애나 존스보다 훨씬 재미가 덜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후 20년 동안 학생과 교사로 구성된 소규모 부대가 옛 로마 풍경을 가로질러 줄을 서, 자기 바로 앞에 놓인 1제곱미터 크기의 정사각형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각종 깨진 그릇 조각을 집어냈다. 그리고 찾은 것은 전부 라벨이 붙은 비닐봉지에 담았다. 그런 다음 줄을 1미터 전진시키고 그 과정을 반복했다. 목표 지역 전체 조사가 끝나거나 시즌이 끝날 때까지 이 과정을 하고 또 했다. 한편 겨울은 봉지의 내용을 분석하는 시간이었다. 놀랄 것도 없이 대규모 농촌 조사는 완료하는 데 10년 이상 걸리기도 했다.

이 과정은 따분했지만, 결과는 훌륭했다. 결과가 나왔을 때 로마 세계의 거의 모든 농촌 정착지가 정치적 붕괴 바로 직전인 4세기에 정점을 찍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농촌 인구밀도, 그리고 결과적으로 전체 농업 생산량은 제국 말기에 최대 수준에 도달했었다. 또 로마는 압도적인 농업 경제국이었으므로, 제국 총생산(로마 세계의 경제 총생산량)이 로마 역사를 통틀어 이전 어느 시점보다 4세기에 더 높은 정점에 도달했다는 것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것은 엄청난 발견이다. 기번이 틀렸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은 2세기 황금기부터 5세기에 몰락이 불가피해질 때까지 길고도 느린 쇠퇴를 겪은 것이 아니라 제국은 붕괴 바로 직전까지도 번영의 정점에 있었다. 서기 399년의 대변자는 자신과 자신을 고용한 정부 모두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며 새로운 황금기를 선포할 때, 어리석지도, 악의적으로 이중적이지도 않았다. 4세기 말까지 유명한 팍스 로마나(Pax Romana)는 거의 500년 동안 지속하며 제국의 속주들이 수 세기 동안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거시경제적 조건을 조성했다.

이와 대조적인 1990년대의 사치스러운 서구의 승리주의와 현재의 암울한 파멸의 분위기를 고려한다면, 로마 제국 말기를 이해하는 이러한 혁명은 중대한 의미가 있다. 로마 역사의 첫 번째 교훈, 즉 제국의 붕괴가 반드시 장기적인 경제 쇠퇴를 따라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로마 제국은 서부 유라시아 역사상 가장 크고 가장 오래간 국가였지만, 그중 절반은 경제의 정점 이후 수십 년 이내에 무너져 내리며 사라졌다. 그 자체로는 임의적인 우연의 일치일 수 있다. 그러나 로마와 현대 서구의 역사를 장기적으로 더 깊게 탐구해 보면 그것이 절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종말에서 변화로 - 제국 체제 너머의 새로운 세계 질서



무너지는 세계


제국 체계는 온갖 이유로 해체된다. 어떤 제국은 정복당한다. 몽골인들은 유라시아 대초원을 휩쓸며 50년간의 잔인한 원정 끝에 송나라의 중국 지배를 종식했다. 일부는 내부의 구조적 약점으로 무너진다. 카롤링거 제국은 기본적으로 잠깐의 군사적 이점을 기반으로 한 3세대에 걸친 팽창 움직임을 보였지만, 등장하자마자 붕괴했다. 그런데 서로마 제국의 종말은 이러한 단순한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국경 너머에서 온 무장한 외부인(로마인들이 관례적으로 ‘야만족’이라고 일축했던 사람들)이 이 일과 관련이 있었다. 서기 500년 무렵 옛 서구 제국 영토는 대부분 이전 세기에 국경을 넘은 군사화한 야만족 집단의 지배를 받았다. 영국 중부와 남부는 북해 건너편에서 온 앵글로색슨 전투연합 지도자들이 나누어 가졌다. 북부 갈리아는 메로빙거 프랑크 왕조가 통치했고, 갈리아 남동부는 부르고뉴 왕이 지배했다. 서고트족 군주는 갈리아 남서부와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을 통치했고, 그 대응 격인 동고트족 군주는 이탈리아, 시칠리아, 달마티아 해안을 통치했다. 위대한 도시 카르타고와 북아프리카의 가장 부유한 지역은 반달족과 알란족 전사들의 연합을 이끄는 하스딩기 왕조가 차지했다. 그러나 이들 새 왕국 중 다수는 단순하게 정복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중 두 곳(서고트 왕국과 반달/앨런 왕국)을 뒷받침하는 외국 군사력은 이미 410년에 서로마 제국의 땅에 자리 잡았지만, 서로마 제국 왕좌의 마지막 주장자가 무너지는 일은 그 후로도 70년이 지나야 일어난다. 비슷하게 430년대에 부르고뉴인들을 로마 땅에 정착시킨 것도 원래 서로마 정부 자체였지만, 프랑크 왕국과 동고트 왕국은 모두 476년 9월에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마지막 서로마 황제로 간주한다)가 폐위된 후에야 나타난다. 결국, 서로마 제국은 야만족 왕조의 손에 넘어갔지만, 이것은 몽골의 정복 같은 식이 아니었다.

더욱이 서로마 제국의 몰락은 제국 해체의 두 단계 과정 중 첫 번째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서기 500년에도 로마 국가의 동부 절반(소아시아,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에 주요 수입 생산원을 두고 있다)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여전히 서로마 제국 시대 이후 서부 지역에 패권을 행사했다. 부르고뉴 왕국은 (자신들의 목적에 부합한다면) 6세기 초반 콘스탄티노플 통치자들의 추상적인 우월성을 일관되게 인정했다. 그리고 530년대 초부터 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527~565년)는 반달족 알란 왕국과 동고트 왕국을 멸망시킬 수 있었고, 심지어 550년대 초에는 남부 이베리아 해안선 일부를 합병하기도 했다. 그러나 100년이 더 지나면 로마 제국의 동쪽 절반도 최후에 접어든다.

동로마 제국의 붕괴는 7세기 초 대적 페르시아와 벌인 25년간의 소모적인 세계대전으로 시작했다. 그 결과 7세기 중반에, 두 제국의 파산은 최근 이슬람화한 아라비아 군대가 대규모로 확장되기에 적절한 상황을 불러왔고, 이 때문에 페르시아 제국이 완전히 무너지고 콘스탄티노플의 가장 부유한 지역 대부분이 약탈당했다. 630년대에는 아랍의 팽창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집어삼켰다.

650년대에는 이집트를 정복했고, 이전에 풍요로웠던 소아시아의 해안선(에페수스와 사르디스 같은 가장 유명한 고대 도시들이 있던 곳)은 황폐한 전쟁터로 변했다. 이곳은 더는 풍요의 땅이 아니라 요새와 외딴 마을의 땅이 되었다. 앞으로 더 많은 정복이 이루어지겠지만, 이미 이 시점에 실질적인 피해가 발생했다(북아프리카는 690년대에 멸망했다). 콘스탄티노플 자체는 정복되지 않고 살아남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7세기에 로마 제국의 동부 절반이 사실상 종말을 맞았다는 사실을 때로 간과한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 통치자들은 이슬람 정복으로 수입의 4분의 3을 빼앗겼고, 제국은 진정한 세계 강국에서 지중해 동쪽 끝의 지역 세력으로 강등 당했다. 실상, 새로운 비잔틴 제국은 다른 서유럽의 왕국과 마찬가지로 로마 제국의 계승 국가 중 하나인 셈이었다. 비잔틴 제국은 이슬람 세계의 내키지 않은 위성 국가로서, 이후에 자신보다 강력한 이웃 국가가 내부 혼란에 빠졌을 때는 조금씩 확장될 수 있었지만, 이슬람 통일이 다시 이루어질 때마다 쇠퇴를 거듭해야 했다.

250년에 걸쳐 진행한 로마 제국 체제의 완전한 붕괴에는 수많은 이질적인 요소들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이 관계했다. 이것이 로마의 멸망에 대해 여러 해에 걸쳐 매우 다양한 설명이 제시된 이유다. 또한, 현대의 서구 제국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고, 조만간 무너지지도 않을 것이며, 사실 고대의 전임 제국과 같은 방식으로 무너질 리도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로마의 경제는 근본적으로 평형 상태이자 농업 경제였다. 이 때문에 최고 수준의 부와 권력은 제로섬 게임으로 바뀌었다. 정치적 승자가 있으려면 패자가 있어야 했다. 권력은 어느 정도 안정적인 농업 자산의 비축에 기초하고 있어서, 체제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할 때 승자의 수를 늘려 그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막대한 양의 새로운 부를 간단히 창출할 수는 없었다. 이 문제는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수 세기에 걸친 기하급수적 경제 성장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 서구 국가를 상대로는 아주 확실히 다른 상황이다. 그렇지만, 현대 서구의 제국 수명 주기가 적어도 중요한 전환점에 도달했다고 가정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서구 제국이 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년도 채 되지 않아 4분의 1 이상 감소했는데, 이는 분명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맥락이나 정확한 세부 사항에 차이가 크게 나긴 해도, 이러한 배경에 기대 로마 체제의 붕괴와 계속 비교하는 것은 여전히 커다란 설명 능력이 있다(고 이 책은 논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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