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부사와 에이이치 일본 자본주의의 설계자
신현암 지음 | 흐름출판
시부사와 에이이치 일본 자본주의의 설계자
신현암 지음
흐름출판 / 2024년 5월 / 268쪽 / 18,000원
주판을 든 사무라이
상인으로 태어나 무사를 꿈꾸다과거 일본은 조선보다 더한 신분제 사회였습니다. 사무라이 무사로 태어나면 사무라이로 살아야 했고, 농민으로 태어나면 농민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신분제 사회에서 시부사와는 농민이자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런 그가 메이지유신의 일원이 되기까지는 여러 선택의 순간들이 존재했고, 그런 순간에는 항상 ‘인연의 힘’이 작동했습니다. 흔히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에 ‘운칠기삼’(운이 7이고 노력이 3)이 작용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인연은 ‘운’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그 운명의 순간을 어떤 자세로 받아들이냐에 따라 이후의 결과가 좌우되기도 합니다.
시부사와는 1840년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족은 대대로 농사를 짓고, 누에를 기르고, 염료를 팔았습니다. 단순히 농사만 지었다면 상인의 교육은 필요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의 집안은 장사도 했습니다. 덧셈, 뺄셈을 비롯해 상인이 익혀야 할 기본적인 지식에 통달해야만 했지요. 또 상인의 소양만 배운 건 아닙니다. 5살 때부터 데라코야에 나갑니다. 데라코야는 우리로 치면 서당에 해당하는 사설 교육기관입니다. 7살 때부터는 사서오경과 일본 역사를 배웠습니다. 상인으로 살 거라면 굳이 이 정도까지 배우지 않아도 됩니다. 당시 무사 계급에도 유학은 필수 교육 과정 중 하나였습니다만, 무사 집안이라면 상인 교육은 받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시부사와 집안은 무사 집안이 아니었지요. 운이었든 운명이었든 그는 격변기에 상인과 무사의 교육을 모두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시대의 바람을 타고 / 타도 대상의 가신이 되다상인이자 무사(지식인)의 교육을 모두 받은 시부사와는 1867년 파리만국박람회에 일본 대표단으로 참가해 선진문물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됩니다. 그런데 부농 집안 출신이라고 하지만 일본 지배계급과는 거리가 있었던 그가 어떻게 만국박람회 대표단에 낄 수 있었을까요? 23살의 시부사와는 1863년 사촌 3명과 막부 타도 계획을 세우고, 70여 명을 규합하여 11월 23일을 거병 일자로 잡습니다. 그러나 그해 10월, 거병은 취소됩니다. 4인방 중 한 사람인 오다카 조시치로가 정보를 수집해보니 70여 명의 병력으로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결론이 나왔던 겁니다. 우국충정도 때가 있는 법. 때가 오기를 좀 더 기다리자는 오다카의 설득에 시부사와를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은 다들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렇게 하나둘씩 흩어져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이후 마음 놓고 지내던 것도 잠시, 1864년 2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습니다. 오다카가 에도로 가던 중 살인죄로 잡힌 겁니다. 공교롭게도 그의 품 안에서 시부사와와 주고받은 편지가 나옵니다. 거기에는 ‘막부 타도’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시부사와의 이름은 순식간에 범죄자 명단에 오릅니다. 이때 시부사와의 은인이 나타납니다. 바로 요시노부의 최측근인 히라오카 엔시로입니다. 히라오카는 시부사와에게 히도쓰바시 가문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지금 막부를 지휘하는 쇼군은 따로 있네. 하지만 히도쓰바시 가문을 이끄는 요시노부 님이 쇼군의 후견직을 맡고 있지. 아무리 막부라 해도 히도쓰바시 가문을 함부로 건드릴 순 없네. 자네 뜻만 분명하다면 요시노부 님을 알현할 기회를 만들어보지.” 시부사와는 ‘내가 막부 타도를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막부를 무너뜨리기 위해서인가? 아니다. 더 나은 천하를 만들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막부와 가까우면서도 먼, 그래서 오묘한 관계를 맺고 있는 히도쓰바시 가문에 들어가서도 막부를 타도할 수 있지 않을까? 막부의 대항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히도쓰바시 가문의 힘을 키운다면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라고 결론 내리고 히라오카의 충고를 받아들입니다. 이후 그의 주선으로 요시노부를 만나 그의 가신이 됩니다. 덕분에 그는 죽지 않고 살 수 있었고, 이후 파리만국박람회도 갈 수 있게 되었지요. 사람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운명은 누구에게 미소 짓는가은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
저 자신만의 매력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좋은 인간성일 수도 있고, 특출한 재능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상대방이 여러분을 매력적으로 보면 특별한 관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히라오카는 시부사와의 어떤 면을 매력적으로 봤을까요? 그는 대화를 통해 그의 비범함을 발견했을 겁니다. 대화의 매너도 중요하지만, 대화의 내용, 즉 콘텐츠가 더욱 중요합니다. 그 콘텐츠가 매력적으로 느껴져야 인연을 만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콘텐츠는 무엇인가요? 이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곰곰이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이번 장을 마무리하면서 막부의 실세, 히라오카를 사로잡은 시부사와의 매력은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정리하면 ‘주판을 든 사무라이’가 시부사와가 가진 매력이었습니다. 그는 20대에 가문의 양잠업을 이끌 만큼 숫자와 이문에 밝은 ‘상인의 감각’이 있었고 존왕양이를 꿈꾸며 봉기 계획을 세울 만큼 ‘무사의 기개와 실행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런 점을 높이 사서 히라오카는 그를 요시노부에게 천거하게 됩니다. 이후 시부사와는 요시노부의 가신이 되어 사람과 돈을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됩니다. 기업으로 치면 인사, 재무 업무를 한 것이죠. 그리고 이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날 기회를 얻게 됩니다.
칼을 놓고 자본주의를 입다
파리만국박람회1866년 겨울, 도쿠가와 막부의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심복인 하라 이치노신을 부릅니다. “하라, 이번 파리만국박람회 초청 건 있지 않나!” “네, 주군.” “초청을 받았으니 참가단을 보내야겠지. 내가 자리를 비울 순 없고, 내 동생 아키타케를 보내려고 하네. 그런데 아키타케는 이제 겨우 13살이지 않은가. 아직 공부를 더 해야 할 나이지. 이번 파리 박람회에 참석하는 김에 프랑스에 유학을 보내려고 하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 “훌륭한 결정이십니다.” “그러려면 아키타케를 옆에서 보좌해줄 사람이 필요하겠지. 한데 함께 가는 일행 중에는 마땅한 사람이 없단 말이지. 그래서 시부사와를 보내려고 하네.” “알겠습니다. 제가 시부사와에게 그리 이르겠습니다.”
요시노부는 히라오카에게 믿음이 가니 시부사와 또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는 시부사와의 재능을 살려 가문의 사람과 돈을 관리하는 일을 맡겼습니다. 사람과 관련된 일인 인사와 돈을 관리하는 일인 재무를 일임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 2가지 업무는 오늘날 기업에서도 가장 내밀한 영역입니다. 이후 시부사와는 기대만큼 일을 잘했고, 그럴수록 신뢰가 쌓여갔습니다. 참고로 시부사와가 요시노부를 알현했을 때만 해도 요시노부는 ‘히도쓰바시 가문의 실력자’에 불과했습니다.
칼보다 강한 자본주의의 힘시부사와가 27살이던 1867년 2월, 파리만국박람회 참관단은 요코하마에서 출발해 나가사키에서 프랑스 상선을 타고 일본을 떠납니다. 이후 상하이, 홍콩, 호찌민 등을 거쳐 3월에 수에즈에 도착합니다. 당시에 수에즈운하는 한창 공사 중이었습니다. 1859년에 시작한 공사가 1869년에 끝났으니 10년이나 걸린 대공사였지요. 그 엄청난 규모를 직접 본 시부사와가 깜짝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시부사와는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이 정도 공사를 하려면 돈이 엄청나게 필요할 텐데, 대체 누가 그 비용을 댄 것일까? 저러다가 공사가 지연되거나 망하면 그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이때의 의문을 바탕으로 시부사와는 유학 중에 ‘주식회사’ 제도를 비롯한 서양의 경영 체제를 배우게 됩니다.
당시 수에즈운하는 주식 40만 주를 발행해 공사 자금을 조달했습니다. 수에즈운하 주식을 구매한 사람들은 투자한 만큼만 책임지면 됩니다. 만약 회사가 망하더라도 투자한 만큼만 피해를 볼 뿐, 나의 다른 재산엔 피해가 가지 않습니다. 당연한 소리를 왜 하느냐고 할 수 있지만, 이 시대에 주식회사는 당연한 제도가 아니었습니다. 당시에는 사업이 망하면 전 재산을 팔아서라도 빚을 갚아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영국, 네덜란드 등이 남아시아에서 실어 오던 향신료 무역의 리스크를 줄일 방편으로 주식회사 제도가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회사가 바로 동인도회사입니다. 주식회사가 인기를 끌면서 단일 국가나 개인이라면 수행할 수 없는 대규모 투자와 개발 붐이 일어납니다.
한편 프랑스 정부는 아키타케 일행을 도와줄 사람으로 은행가 폴 플루리 에라르를 소개하고, 시부사와는 그에게 서구의 재정 및 경제 제도에 대해 배웁니다. 주식회사에 관한 지식도 이 사람에게 배웁니다. 이런 인연으로 에라르는 1873년 일본 정부에 초빙되어 금융 시스템 개혁에 기여하고, 제일국립은행 설립에 참여하는 등 일본 근대화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또 일행은 만국박람회장에서 서구의 진보된 기술과 산업화된 사회 구조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특히 증기기관, 철도, 전신, 인쇄 기술 등 당시 최첨단으로 간주되던 기술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부사와는 일본에 돌아간 후 철도 건설과 기업 설립에 매진하게 됩니다. 참고로 시부사와는 파리 유학을 계기로 사무라이 복식을 버립니다. 머리를 기르고 양복을 입었지요. 박람회를 찾은 서양인들의 모습을 보며 ‘유럽만큼 일본을 발전시키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나부터 유럽을 따라야 한다.’고 결심한 것 아닐까요.
좌절의 순간에도 성장할 수 있다
대정봉환(大政奉還)에서 메이지유신까지1867년 11월 9일, 깜짝 놀랄 만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쇼군이 통치권을 천황에게 반납하겠다고 선언한 겁니다. 이를 대정봉환이라고 합니다. 도쿠가와 정권, 즉 도쿠가와 막부가 수립될 무렵, 쇼군은 천황으로부터 국가통치권을 위임받았습니다. 이를 ‘대정위임론(大政委任論)’이라고 하는데요, 이때 위임받은 권력을 다시 돌려주겠다는 의미로 ‘대정봉환’이란 표현을 쓴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1866년 있었던 조슈번 평정은 사쓰마와 조슈의 동맹(삿초 동맹)과 다른 번들의 외면 속에서 막부의 패배로 끝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도쿠가와 가문은 막부 체제가 지휘하는 일본이 아니라, 그들 가문이 주도적으로 지휘하는 일본으로 체제를 바꾸고자 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국가를 운영하는 국무회의를 만듭니다. 조슈의 리더도, 사쓰마의 리더도, 그리고 요시노부를 믿고 따르는 지역의 리더도 모두 국무위원이 됩니다. 그리고 요시노부가 이들을 이끄는 리더가 되는 겁니다. 비록 막부라는 체제는 사라지더라도 도쿠가와 가문이 힘을 갖는 구조를 상정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선제적으로 대정봉환을 추진하게 됩니다. 나름대로 마지막 필살기였던 셈이죠. 막부 측이 어떤 계산을 하고 있었든 막부가 정권을 반납하겠다고 했으니, 천황이 있는 조정에서도 뭔가 의사표시를 해야 했습니다. 물론 이러기도 저러기도 쉽지 않습니다. 실제로 정권을 반납하겠다는 건지, 아니면 조정을 떠보는 건지 의심스러웠을 겁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1868년 1월 3일, 조정은 마침내 권력을 받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막부 체제를 폐지하고 천황 중심의 신정부를 구성해 국가 근대화를 추진하겠다는 ‘왕정복고 대호령’이 발표됩니다. 이어 쇼군의 사직서가 수리되고 막부가 폐지됩니다. 여기까지는 요시노부가 예상했던 전개였습니다. 그런데 요시노부가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발생합니다. 바로 신정부 구성에서 정작 요시노부가 제외된 것입니다. 참고로 이 일을 막후에서 꾸민 사람이 이와쿠라 도모미입니다.
요동치는 정국이었지요. 사쓰마와 조슈는 천황을 등에 업고 막부를 공격하려 했습니다. 막부는 인내했습니다. 천황과 대적하는 것은 명분상 지고 들어가는 싸움입니다. 일본 전체와 싸우겠다는 의미이거든요. 믿는 구석도 있었습니다. 사쓰마와 조슈를 싫어하는 번들이 꽤 있었습니다. 요시노부는 ‘시간이 흐르면 세상은 결국 내 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도쿠가와 막부를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된 심정으로 때를 기다리기로 합니다. 반면 사쓰마와 조슈는 마음이 급했습니다.
요시노부가 공격해 올 줄 알았는데 가만히 있었거든요. 결국 사쓰마의 급진파가 에도 이곳저곳에 불을 지르는 사건을 일으킵니다. 이 사건 이후 막부의 강경파는 쇼군에게 건의합니다. 이런 짓을 저지른 사쓰마를 그냥 두면 안 된다, 권위를 세워야 한다고요. 그러나 요시노부는 방화 사건을 싸움을 벌이기 위한 사쓰마의 술책이라고 봤습니다.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이 사쓰마 토벌을 선언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더 기다려보자고 했다가는 쇼군의 영이 서지 않을 게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막부 군과 사쓰마 군의 첫 교전은 교토 근처에서 일어납니다. 1868년 1월, 무진(戊辰)년입니다. 무진은 일본어로 보신(Boshin)이라고 읽지요. 그래서 이 전쟁을 ‘보신전쟁’이라고 합니다. 동원된 병력 수는 막부 군이 많았지만, 사쓰마 군은 신식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천황의 후원을 등에 업고 있었지요. 그래서 막부 군에 이탈자가 빈번히 발생하는 등 사기가 바닥에 떨어집니다. 전쟁 초반에 사쓰마가 우위를 보이자 관망하고 있던 다른 번들은 사쓰마 편에 섭니다. 정예 육군 병력을 보유한 조슈는 처음부터 같은 편이었습니다. 결국 보신전쟁이 일어난 해 여름, 사쓰마를 위시한 반막부 군이 에도에 무혈입성합니다. 전쟁은 다음 해 6월까지 계속되지만, 이때 이미 승부가 났다고 봐도 됩니다. 이후 요시노부는 근신 처분을 받고 정치와는 거리를 둔 생활을 하게 됩니다.
“돈을 벌고 싶습니다”그사이 유럽에 있던 시부사와 일행은 대정봉환 소식을 한 달 뒤에야 듣게 됩니다. 일본을 떠날 때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된 것이지요. 일행은 대부분 귀국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시부사와는 프랑스에 남기로 합니다. ‘아키타케를 교육시켜라’라는 요시노부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였죠. 그러나 새로 구성된 정부가 자금을 지원할 리 없습니다. 시부사와는 어떻게 했을까요? 놀랍게도 남은 여비를 주식에 투자합니다! 다행히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그 돈으로 아키타케의 유학 자금과 생활비를 조달합니다. 시부사와는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훗날 도쿄주식거래소를 만듭니다.
그리고 몇 달이 흐릅니다. 신정부는 아키타케의 귀국을 요구했습니다. 가문을 상속하기 위해 일본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결국 시부사와는 아키타케를 따라 귀국길에 오릅니다. 시부사와는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근신 중인 요시노부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요시노부에게서 “이제부터는 네 길을 가라”라는 말을 듣습니다. 섭섭했을까요? 그러지 않았습니다. 시부사와는 요시노부의 마음을 읽었다고 합니다. 날개 잃은 독수리,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인 자기 주변에 있어 봐야 별 볼 일 없으니 떠나라고 한 겁니다. 그렇다고 떠날 시부사와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요시노부가 근신하고 있던 슨푸 성은 지금의 시즈오카 지역입니다. 시부사와는 시즈오카에 자리를 잡습니다.
한편 막부를 물리치고 탄생한 신정부는 돈이 없었습니다. 보신전쟁을 치르느라 막대한 비용을 썼기 때문입니다. 신정부의 당면 과제 중 ‘산업 진흥’이 있었는데, 이를 위해서는 막대한 자본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태정관찰’이라는 새로운 화폐를 발행합니다. 이제 막 세워진 정부였지요. 갚아야 할 빚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돈이랍시고 종이에다가 글자 몇 자 쓰고는 유통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라면 이 돈에 어느 정도 가치를 두겠습니까? 당연히 큰 가치를 두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신정부는 각 번에 태정관찰을 강제로 할당합니다. 물론 번의 재정 규모에 따라 차등을 두었습니다.
시즈오카에는 58만 량이 할당되었습니다. 대부분의 번에선 ‘신정부가 돈을 뜯어가려고 별짓을 다 하는구나. 힘 있는 놈이 달라는데 그냥 뜯겨야지’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시부사와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는 프랑스에서 알게 된 주식회사를 떠올렸습니다. 시부사와는 곧바로 시즈오카의 고위 관료를 만납니다. “지금 신정부로부터 돈을 받았습니다. 가치가 있건 없건 정부가 보증하는 돈입니다. 적은 돈도 아닙니다. 이를 자본으로 삼아 이런저런 일을 하는 조직을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그 수익으로 신정부에 빌린 돈을 갚으면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런저런 일이란 상품을 담보로 한 대부업, 정기성 당좌예금, 비료·미곡 등의 매입과 판매 등을 가리킵니다. 오늘날 은행과 종합상사가 혼합된 형태라고 보면 됩니다. 조직의 이름은 시즈오카 상법회소라고 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