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세계사
윌리엄 매그너슨 지음 | 한빛비즈
기업의 세계사
윌리엄 매그너슨 지음
한빛비즈 / 2024년 3월 / 400쪽 / 22,000원
한니발 전쟁의 숨은 공신, 고대 로마의 소치에타스기원전 215년, 지중해의 강력한 세력인 로마와 카르타고는 치열한 패권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전쟁은 수십 년간 지속되었으나 뛰어난 지략가인 한니발 장군의 지도력에 힘입어 카르타고가 거의 승리를 확정 지으려 하는 순간이었다. 참고로 기원전 218년, 중장갑 보병과 기병대 및 코끼리부대를 앞세운 한니발군은 위험을 무릅쓰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해서 저지하러 출동한 로마군을 연이어 격파했다. 트레비아 전투와 트라시메네 전투, 그리고 칸나에 전투에서 카르타고군은 거의 손실 없이 로마를 상대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승리를 거둔 한니발은 이탈리아 남부를 휩쓸고 다니며 국토를 유린했고 들에서는 곡물을, 도시에서는 남자들을 차출해갔다. 카르타고군이 승리하는 것을 보자 로마의 우방들은 떼를 지어 로마에 등을 돌렸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공화국이 위기에 빠진 것이다.
이후 로마가 이 패배를 극복하고 한니발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내 결국 카르타고를 대패시킨 이야기는 고대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알 것이다. 로마군은 그 유명한 파비우스 전략을 구사하여 과거에 로마군이 큰 피해를 보았던 대규모 전투를 피하고 오직 소규모 국지전으로 카르타고군을 계속 잡아두어 피곤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로마의 유능한 장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스페인에서 적을 무찌른 다음, 한니발군과 맞서지 않고 배를 타고 아프리카로 가 카르타고를 직접 공격했다. 그러자 한니발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카르타고로 돌아갔고 결국 자마 전투에서 대패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로마가 전쟁을 계속할 수 있게 한 숨은 공신인 자본가의 역할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한니발이 이탈리아 남부지역을 휩쓸고 다니던 기원전 215년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아버지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원로원에 나쁜 소식을 전했다. 보급품이 다 떨어져서 더 이상 군대를 먹이지 못하고 급료도 지불할 수 없다고 호소했고, 식량이 제때에 도착하지 못하면 병력을 모두 잃고 스페인에서도 후퇴해야 할 거라고 했다. 그러나 로마의 국고가 거의 비어 있었기 때문에 원로원은 그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 수단으로 원로원은 로마 시민들에게 스키피오의 군대에 의복과 식량 및 장비를 공급해주면, 나중에 국가재정에 여유가 생겼을 때 보상해주겠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총 19명으로 구성된 세 개의 회사, 라틴어로는 소치에타테스(societates)가 군을 돕겠다고 자원했다. 그런데 그 대가로 병역을 면제해줄 것과 해상 운송 중 태풍이나 적의 습격으로 화물을 분실할 경우 로마가 손실을 보전해줄 것을 요구했고, 원로원은 이를 승낙했다.
이 회사들은 끝까지 약속을 지켰다. 역사가 리비우스는 《로마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충분한 물량의 계약이 이루어지고 공급이 되어 보유물량이 풍부하므로 그 전과 마찬가지로 병사들에게 풍족하게 공급되었다.” 식량을 확보하자 스키피오 형제는 다시 공세를 강화했다. 여러 전투에서 한니발의 동생인 하스드루발의 군대를 물리치자 거의 모든 스페인 사람들이 카르타고가 아닌 로마의 편을 들었다. 리비우스는 사기업이 이익을 취하기 위한 저열한 욕망이 아니라, 국가에 대한 의무감에서 로마군에게 물자를 공급한 이 사건을 시민정신의 승리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로마 시민의 특징과는 별개로 이 사건은 당시 로마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인 경제와 사기업에 대해 알려준다. 단지 세 개의 회사가 스페인에 주둔한 스키피오 군대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이 회사가 상당한 규모였으며, 자본, 곡물, 의류, 선박, 선원 및 기타 필요한 물자를 조달할 능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로마 원로원이 공급 계약을 맺은 것으로 보아 이 회사들은 로마 사회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음에 틀림없고, 그들의 개입이 전쟁의 판세를 뒤집었다. 아무튼 이 사건은 로마의 역사에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붕괴 위기에 처한 정부가 일단의 강력한 기업에 의해 구제된 것이다. 결국 리비우스가 기록했듯 가장 위태로운 시기에 “로마 공화국이 민간기업의 지원으로 살아난” 것이다.
고대 로마의 사례는 기업이 무엇이고 어떤 목적으로 존재하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우선 두 번째 질문인 기업의 존재 이유를 생각해보자. 로마의 기업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겨났다. 로마는 너무 빠른 속도로 멀리까지 팽창했는데, 정복사업은 잘했지만 이제 행정도 잘할 필요가 생겼다. 그런데 관료가 너무 적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서비스를 제공하기 힘들었다. 누가 로마의 시민들에게 빵과 원형극장을 제공할 것인가? 다리와 도로는 또 누가 건설할 것인가? 군대의 보급품은 누가 공급할 것인가? 세금은 또 누가 징수할 것인가? 바로 소치에타테스 푸블리카노룸이 문제를 해결했다.
공화국이 갑자기 행정조직을 만드느니 개인 자본가들이 이미 보유하고 있는 자본, 인력, 기술을 활용해서 국가의 주요 기능을 대신하도록 했다. 국가의 지원이 없었다면 기업이 이런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둘은 서로 윈윈하는 관계였다. 이는 매우 창의적인 해결책이었다. 기업은 인간의 능력을 조직화해서 집중적으로 투입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어 곧바로 국가의 기간 조직으로 자리를 잡았다. 달리 말해 기업은 로마 공화국의 선을 추구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첫 번째 질문, 즉 기업이란 무엇인가로 돌아가 보자. 다시 말하지만 국가의 필요에 의해 기업이 작동하는 방식이 결정되었는데, 그들의 서비스에 대한 보답으로 이들에게는 다른 분야에서는 보기 힘든 특별한 권한이 주어졌다. 즉 계속성이 주어져 소유주가 사망하더라도 계속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또한 매매 가능한 주식이 있어서 주식의 소유주는 유한책임하에서 이익을 향유할 수 있었다. 기업활동과 거래에 있어 별도의 인격으로 대우받았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런 특징들이 발달하게 된 이유를 알 수 있다. 가장 필요할 때 사라지는 단명 기업보다는 장수 기업이 보다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유한책임과 주식거래제도로 인해 기업은 쉽게 자금을 모을 수 있었고 이 돈으로 정부로부터 세금징수권을 살 수 있었다. 기업을 인격체로 대우하면서 모든 면에서 사업하기가 더 간단해졌다. 고소, 피고소, 거래체결 등 모든 행위가 여러 사람일 때보다 한 사람일 때 더 쉬워졌던 것이다.
한마디로 기업은 하나의 전제 위에 성립한다. 즉 개인을 통합하여 단지 관념적인 단계를 넘어 법적으로 하나의 독립체로 만들면 혼자 기업행위를 할 때보다 훨씬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 이 전제는 기업이 왜 존재하는지 그리고 기업이란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기업은 국가의 선을 추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협동하면 좋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기업이 오늘날과 같은 형태를 띠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의 기업은 우리에게 충고도 준다. 이들은 결국 로마 공화국의 멸망에 일조했다. 이익만 추구하다 보니 소치에타스는 속주의 시민들을 억압하고 새로운 정복전쟁을 요구했다. 그리고 지나치게 위험부담을 무릅쓴 투자를 하면서 로마의 재무상태가 어려워졌고 기업의 탐욕이 정치를 타락시켰다. 국가의 영광을 위해 민간기업을 고용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로마는 깨달았다. 로마 제국하에 정부조직에 대규모 수술이 이루어지면서 소치에타스는 중요성이 줄어들고 결국 완전히 사라졌다.
그럼에도 기업이라는 존재는 결코 없어지지 않았다. 그 뒤로 한참 동안 로마법이 영향을 미친 것처럼 로마 시대 기업의 특징은 전 유럽에 걸쳐 나타났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기업은 약 1,000년 뒤 로마에서 북쪽으로 200~3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재탄생한다. 이번에는 더욱 강력한 형태로 돌아왔다. 돈을 벌기보다 만들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투기의 시대를 연 것이다.
최초의 대형 은행, 르네상스 메디치 은행은행의 대두는 기업의 역사에서 중요 분기점이 되는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기업의 권한이 증가했지만 동시에 위험도 커졌으며, 연결된 기업이 국가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알게 되었다. 은행은 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발판 역할을 했지만, 은행이 바로 기업인 경우도 많았다. 메디치 은행이 대표적인 사례다. 메디치 가문은 은행 가문이었다. 이들은 은행을 매개체로 교황, 왕족, 귀족들과 관계를 맺었고, 은행을 이용해 각 대륙에 전초기지를 설립해 유럽의 신흥시장과 연결했고 은행을 통해서 부를 축적했고, 이를 바탕으로 미술가와 건축가를 후원해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탄생시켰다.
1397년 로마에서 은행 매니저로 일하고 있던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는 처와 두 아이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의 은행을 세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증조부는 피렌체에서 곤팔로니에르라는 고위 공직을 지냈고 조부는 베네치아 대사를 했지만, 그는 별로 물려받은 유산이 없어 자수성가해야 했다. 비아 라르가 지역에 집을 구하자마자 피렌체 은행 길드에 자신의 신설 은행을 등록하러 나섰다.
마침 피렌체에는 바르디 가문과 페루치 가문에서 운영하던 은행이 문을 닫았기 때문에 타이밍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이 두 집안은 14세기에 최대의 전성기를 누렸지만, 백년전쟁에서 자금이 필요했던 영국의 에드워드 3세에게 거액을 빌려주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왕은 1345년에 채무불이행을 선언했고 그 결과 두 은행은 파산했다. 이로 인해 피렌체의 은행산업에는 공백이 생겼고 조반니는 그 틈을 이용하려 했다.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경쟁자는 있었다. 은행 길드 자료에 의하면 1399년 피렌체에는 모두 71개의 은행이 있었으며 메디치 은행의 최대 전성기였던 1460년대에도 여전히 33개의 은행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경쟁이 매우 심한 시장이었다. 그러나 조반니는 경쟁자들을 물리칠 수만 있다면 엄청난 이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피렌체는 금융업의 성지로 유럽에 명성을 떨치고 있었고, 또 그곳의 은행은 대형거래를 잘 처리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조반니는 로마에 있을 때 고리대금업과 관련된 교회법에 정통하게 되었고 자신의 은행을 설립할 때 그때 배운 지식을 활용했다. 사실 교회법과 충돌을 피하기 위해 정교한 여러 방법을 고안한 덕분에 메디치 은행이 국제적인 은행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중 가장 뛰어난 묘안은 환어음이었다. 참고로 당시 바티칸은 최초 빌린 돈의 액수보다 더 많은 금액을 돌려주는 모든 대출을 고리대금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조반니는 이 조항이 대출에만 해당된다는 점을 간파했다. 따라서 대출의 형태만 아니면 고리대금이 아니었고 그는 이 허점을 잘 이용할 줄 알았다. 방법은 돈을 대출해주고 나중에 이자를 붙여 갚으라고 하지 않고, 돈을 빌려주고 다른 곳에서 다른 화폐로 돌려받는 방식을 취했다. 이렇게 되면 이 거래는 대출이 아니고 환전이 된다. 돌려받는 날짜와 두 화폐 간의 환율을 조정하면 적정 수준의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또한 대출이 아니었으므로 수수료를 받는 것도 가능했다.
그런데 메디치 은행이 이용한 이 환어음 방식은 완전한 사기도 아니고 새로운 것도 아니었다. 사실 이 방식은 갓 태어난 유럽의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외교관, 성직자, 순례자들이 유럽 다른 지역의 시장이나 교회 또는 목적지로 이동할 때 은행에 이런 방식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의 여행자들은 당연히 벨트나 안장주머니에 많은 돈을 담고 언제 변할지 모르는 유럽의 국경을 넘는 걸 꺼렸고, 메디치 은행의 환어음은 이들에게 좋은 대안이었다. 돈을 들고 다니는 대신 메디치 은행으로부터 교환각서를 받아놓으면 목적지에 도착해서 현지 화폐로 돌려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환어음, 건식환전, 재량예금, 환율변동, 지점인출 등 여러 거래에는 말할 것도 없이 꼼꼼한 기록이 필수다. 메디치 은행은 사업을 확장하고 계속해서 교회법을 피하기 위해서는 장기간에 걸쳐 국경을 초월해서 자산과 부채를 추적해야 했는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오늘날까지도 널리 사용 중인 장부기입방식인 복식부기를 도입했다. 이 방식에서는 개별 거래를 장부의 차변과 대변에 각각 기입한다. 따라서 차변과 대변의 합계금액이 맞지 않으면 오류가 발생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으므로 기록의 정확성이 보장된다. 메디치 은행이 복식부기를 만든 것은 아니지만 이를 완성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메디치 은행의 주요 고객은 교회 이외에 왕과 군주, 귀족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들은 르네상스 기간에 전쟁자금을 조달하고 성을 건축하며 귀중품을 사느라 항상 돈이 모자랐고 메디치 은행은 이들의 전주 역할을 했다. 그러나 통치자에 대한 대출에는 위험이 따르게 마련이다. 일반인과 달리 통치자가 상환을 거절해도 은행에서 별로 대응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반니는 이러한 디폴트 가능성을 예방하기 위해 귀중품으로 담보를 제공해달라고 요청했다.
한편 조반니의 천재성은 신중한 방법으로 고리대금업의 굴레를 벗어나 고관대작 같은 고객을 발굴한 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창의적 영감으로 메디치 은행의 조직을 법률적, 정치적 통찰력의 결정체로 만들었다. 공식적으로 메디치 은행은 왕가 및 그 일족들과 파트너 관계였다. 그러나 유럽의 가장 부유한 가문 중의 하나로서 메디치가는 복수의 칼을 가는 군주나 상인들의 손쉬운 목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므로 가문을 보호하기 위해 오늘날의 금융지주회사와 유사한 구조를 만들어 메디치 은행에 적용했다. 이 구조에서는 메디치 은행을 정점으로 가족들은 단독 혹은 공동으로 파트너 신분을 유지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유럽 전역에 퍼져 있는 아홉 개의 지점은 이들과 별개의 파트너로 존재했다. 최종적으로는 메디치 은행이 유한책임회사라는 구조의 덕을 보도록 설계되어 한 지점에 문제가 생겨도 그 지점의 자산만 압수가 되고 전체 메디치 은행의 자산은 보호되었다.
우리가 메디치 은행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흥미로운 교훈은 아무런 기반 없이 정교하고 현대적인 금융 시스템을 구축한 방식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는 정부 체제가 분열되고 격변했던 시기로 전쟁과 질병 그리고 여러 음모가 난무했고 법률에 의한 지배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은행업은 심각한 죄악으로 간주되었지만, 메디치가는 단순한 은행이 아니라 유럽 대륙을 아우르는 최고의 조직을 만들어 평등한 조건하에서 파트너와 사업을 크게 벌였다(때로는 평등하지 않은 경우도 있기는 했다). 이 결과 은행은 100년 가까이 살아남아 설립자에게 엄청난 부를 가져다주고 피렌체를 위해서 비교하기 어려운 수준의 아름다움을 창조했다. 은행이 필요한 시기에 메디치가가 화답한 것이다.
메디치 은행은 또한 기업의 구조에 대한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기도 했다. 피렌체 소재의 단일 법인이 소유하고 운영하는 구조가 아니라 금융지주회사 구조를 갖추어 피렌체에 본점이 있고 별도의 법인이 유럽의 다른 지역에 존재하는 구조였다. 이들 개별 법인들은 회사명과 대표자가 달랐고 회계 결산도 분리했지만 정기적으로 피렌체에 있는 지주회사에 실적을 보고했다. 이런 구조로 인해 지점장이 지점의 소유권을 일부 가지므로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한 지점의 위기 때문에 다른 지점이 영향을 받는 일이 없으므로 전체 은행이 안전하게 보호될 수 있었다.
그러나 메디치 은행의 실패 사례는 우리에게 금융의 위험성에 대한 교훈을 준다. 사람들은 금융기관이 어떤 결정을 내릴 때는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가장 필요한 사람에게 대출하여 가장 효율적으로 자본이 배분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정은 은행이 아닌 사람이 한다. 사람은 친절하고 관대한 행동을 할 수도 있지만, 잔인하고 무능력하며 나태한 행동을 할 때도 있다. 때로는 로렌초 데 메디치처럼 이 모든 행동을 동시에 하기도 한다. 그 결과 은행이 항상 이성적으로 행동하지는 않는다. 편견에 사로잡히거나 실수도 하며 위험한 결정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비효율적인 행동은 은행 자체뿐 아니라 사회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오늘날 아무도 월스트리트가 잘못했다고 해서 교황이 군대를 보내 정부를 전복시킬까 우려하지 않는다. 하지만 금융 시스템이 내부적으로 제대로 돌아간다고 마음 놓고 있을 수만도 없다. 시장의 효율성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