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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리밍 이후의 세계

데이드 헤이스, 돈 흐미엘레프스키 지음 | 알키


스트리밍 이후의 세계

데이드 헤이스, 돈 흐미엘레프스키 지음

알키 / 2023년 12월 / 516쪽 / 25,000원





새로운 기준이 된 넷플릭스



꿀벌들 가운데 텔레비전의 발견


독립 영화 제작자 데이비드 블레어는 그동안 관람 문화가 훌륭한 수많은 영화제 및 대학 캠퍼스에서 자신의 영화를 선보여 왔다. 그런데 1993년 4월의 어느 날, 맨해튼의 제너럴모터스 건물에 들어섰을 때 데이비드 블레어는 이날의 상영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형태로 진행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새롭게 선보이는 실험작 〈밀랍, 혹은 꿀벌들 가운데 텔레비전의 발견〉이 장편영화로는 최초로 온라인 개봉하면서 관객들이 컴퓨터로 작품을 관람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때 대형 컴퓨터가 방에 가득했을 것으로 보이는 사무실에 모여앉아 플라스틱 컵으로 음료를 마시고 있던 관객들은 작품이 담긴 VHS 카세트를 들고 들어오는 블레어를 맞이했다. 벽에는 단열재가 그대로 노출돼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VHS 비디오 플레이어, 그리고 T1 전용 전화선으로 영상과 음성을 실시간 전송하는 인터넷 멀티캐스트 백본 또는 M본에 연결된 실리콘그래픽스의 기계가 놓여 있었다.

이 스트리밍 실험은 사무실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는 동료를 물끄러미 지켜보는 것보다 훨씬 대담한 활동으로 기록될 예정이었다. 이번 시연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관객들의 컴퓨터 자원을 최대한으로 동원해야 했는데, 대학 및 연구기관의 과학자들이 소위 월드와이드웹이라 부르는 컴퓨터 네트워크를 통해 정보를 공유하는 방법을 과학자 팀 버너스 리가 고안한 지 불과 4년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

한편 당시 블레어는 자신이 직접 대본을 쓰고 연출까지 한 영화를 배급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영화는 제이콥 메이커라는 무기 유도 시스템 제작자가 벌에게 지배당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죽은 자들이 환생한 영혼이 들어 있는 벌들은 메이커를 조정하기 위해 그의 머릿속에 크리스털 TV를 삽입한다. 그리고 메이커를 일종의 유도 미사일로 활용해 사막의 이라크 특공대를 공격한다. 참고로 블레어는 주로 통신 해킹에 대한 정보를 다뤘던 온라인 뉴스레터 〈프랙〉의 전자 메일링 목록을 활용해 작품 홍보에 나섰다. 그리고 여기에 흥미를 느낀 유명 컴퓨터 과학자 데이브 파버가 구체적인 내용을 자신이 “재미있는 사람들”로 분류한 이메일 이용자들과 공유했다.

이렇게 테크노라트들 사이에 떠돌던 소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디지털 문화를 소개하는 신규 잡지 〈와이어드〉 창립자들의 귀까지 들어갔는데, 잡지는 “가장 섹시한 ‘전자 시네마’ 작품 중 하나”라고 영화를 극찬했고 블레어는 〈와이어드〉 론칭 파티에까지 초대받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좀 더 거물급의 위험한 녀석들”과 마주쳤는데, 그중 두 군데서 “영화를 인터넷으로 상영하자”는 제안을 받았고 곧장 수락했다. 이후 독립 영화라는 변두리 세계는 이내 전례 없는 관객층을 확보하게 된다.

한편 이 기술 시연은 공학적으로는 어느 모로 보나 엉성하기 짝이 없는 시도였다. 블레어가 VCR에 영화 테이프를 넣고 컴퓨터로 플레이하면 컴퓨터가 영상을 인터넷으로 송출하는 식이었다. 디지털 시사회가 진행되는 도중 영상이 깜빡이기라도 하면 마운틴뷰에 위치한 썬마이크로시스템즈의 엔지니어팀이 대형 컴퓨터 워크스테이션에서 조정했다. 당시 썬마이크로시스템즈의 엔지니어링 책임자였던 토머스 케슬러는 멀티캐스트라고 불리던 전송 시스템에서 데이터를 수신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참고로 인터넷으로 송출된 스트리밍 영상은 스탠포드대, 서던캘리포니아대와 로렌스버클리연구소에서 수행한 비디오 압축 연구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당시 인터넷 트래픽의 대부분은 연구 및 정부 기관에서 발생했던 터라 월드컴이나 AT&T 같은 통신사들은 보다 강력한 비즈니스용 네트워크를 창조하는 데 혈안이었다. “그 영화는 네트워크의 완전한 국제화를 위한 최초의 시도였어요.” 케슬러가 회상했다. “블레어 감독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싶어 했어요. 일종의 컬트 영화였는데 어떻게든 대중에 노출되길 원했던 거죠. 우리도 마침 흥미로운 실험거리를 찾고 있었던 터라 흔쾌히 수락했어요.”

당시 영상의 화질은 흐릿했다. 초당 15프레임, 즉, 표준 프레임의 절반에 불과한 속도로 송출되었고 소리 역시 “질 나쁜 통화음”처럼 들렸다. 그럼에도 스트리밍이 널리 보급된 시점보다 20년을 앞선 이 시도는 디지털 비디오의 탄생을 알린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의외로 블레어는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는 역사적인 그 순간이 전혀 신나지 않았다고 한다. “앉을 데도 없고 있는 거라고는 VHS 기계뿐이었어요. 해상도도 최악이고 영화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죠. 비디오를 삽입하고 키보드 버튼을 눌러서 영화를 그냥 틀어놓은 것뿐이었어요.” 누가 봐도 명백한 성공까진 아니었지만 역사적인 상영이었던 것만큼은 분명했다. 게다가 이것은 기계를 통해 그림을 움직이려는 선구적 시도를 잇는 일이었다.

명성에 부응하는 넷플릭스


대체 뭘 보지? 넷플릭스는 DVD를 대여해 주던 사업 초창기부터 소비자들의 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에 해답을 제공해 왔다.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콘텐츠를 제공하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하고 개별 소비자의 취향을 이해하기 위해 다각도로 접근함으로써 넷플릭스는 할리우드의 라이벌 제작사들과 차별화되는 데에 성공했다. 엔터테인먼트 기업들은 지금까지 소비자들이 특정 시간에 채널을 고정하고, 특정 요일에 극장을 찾도록 설득하는 데 주력했다. 반면 넷플릭스는 자신의 역할을 호객꾼이 아닌 중매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2000년 2월 최초의 추천 엔진인 ‘시네매치’ 서비스를 도입해 구독자들이 혼자 살펴보기엔 너무 방대한 5,000편의 영화 라이브러리를 탐색할 수 있도록 도왔다.

6년 후에는 추천 정확도를 10% 높이기 위한 경연 대회를 열었다. 넷플릭스는 100만 달러의 상금을 내걸었지만 괴짜들을 유인한 진짜 미끼는 48만 189명의 고객이 1만 7,700편의 영화에 대해 매긴 1억 개가 넘는 평가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이었다. 이후 2009년 ‘벨코어의 실용적 혼돈’이라는 팀명을 가진 AT&T 연구 개발팀이 우승을 차지했는데, 넷플릭스는 좀 더 간편하고 계산 부담이 적은 형태로 소비자 취향을 예측하는 알고리즘을 구현했다. 하지만 더 큰 결실이 있었다. 넷플릭스가 기술 커뮤니티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전산 문제를 다루는 기업이란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후 핵심 사업을 DVD에서 스트리밍으로 바꾸면서 넷플릭스의 추천 방식 역시 진화했다. DVD 때는 고객 평가에 기반해 추론했다면, 스트리밍으로 넘어와서는 고객들이 어떤 영화나 TV 프로그램을 찾아 맛보고 또 몰아보기를 하는지 실시간 데이터를 살펴볼 수 있었다. 게다가 넷플릭스가 우편 주문 시스템으로 빛을 못 보던 당시 영입한 인재들이 엔터테인먼트 업계를 혁신할 기술적 역량을 선사했다.

예상컨대 수학자 헤이스팅스는 회사 설립 당시부터 이 순간을 준비해 온 것으로 보인다. 초기 투자자이자 이사회 일원인 리처드 바턴은 2000년 초 헤이스팅스와 식사를 하던 일화를 다음과 같이 기억해냈다. “저는 ‘DVD라는 형태의 매체는 이제 사라질 게 분명해요. 시간문제란 게 명백해요. 결국 당신 회사도 막다른 골목에 부딪혀 끝장나고 말 거예요’라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헤이스팅스가 그러더군요. ‘나는 이걸 우편 DVD-플릭스(플릭스는 영화를 의미)라고 하지 않았어요. 넷플릭스라고 했죠.’ 그는 아주 멀리 볼 줄 알고, 상당히 큰 흐름까지 파악할 수 있는 보기 드문 능력의 소유자 중 한 명이에요. 미래로 가는 과정에 어떤 결정들이 따르게 될지는 몰라도 목적지만큼은 확실히 알아요.”

넷플릭스는 이후 1년간 DVD 우편 배송 사업을 본 딴 서비스 구축에 매달렸다. 구독자들이 온라인에서 영화를 주문한 뒤 대역폭이 넉넉한 야간 동안 파일을 다운받아 가정 내 디스크에 저장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유튜브의 부상으로 소비자들이 당장 영상을 볼 수 있는 스트리밍을 더 선호한다는 사실이 입증되면서 보류되었다. 스트리밍 시대라는 밝은 미래로 향하기 위해선 섬세한 외교력이 필요했다. 넷플릭스는 궁극의 교란자로 엔터테인먼트 시장에 등장했지만 한편으로는 어엿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기를 갈망했다. 한 발은 실리콘밸리에, 다른 한 발은 할리우드에 담그고 있는 상황에서 그 간극을 좁히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인터넷 불법 복제로 음악 업계가 만신창이가 되는 모습을 공포에 떨며 지켜본 제작사 경영진은 온라인 전송이 지닌 위험성에 극도로 민감했다.

저작권자들은 처음엔 기술적으로 불가능하거나, 구현하기에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사항을 요구했다. 또 고객에게 들이밀기 난감한 걸 요구하기도 했다. 가령 헌트의 증언에 따르면, 넷플릭스가 서비스를 배급하는 지역의 소비자들이 실제로 그곳에 거주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그들의 운전면허증을 스캔해 제출해야 한다는 요구도 있었다. 그중 기술적인 부분은 헌트 담당으로 넘어왔지만, 대부분은 콘텐츠 조달, 구매 및 저작권 계약을 처리하는 팀에 넘어가면서 업무 분담이 확실하게 이뤄졌다.

우여곡절 끝에 넷플릭스가 2007년 1월 출시한 서비스 왓치나우(Watch Now)는 엉성하기 그지없었다. 인터넷 성능을 한계까지 밀어붙였기 때문에 화질이 좋을 리 없었다. 게다가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미디어플레이어가 설치된 컴퓨터에서만 시청이 가능했다. 하지만 기술이 더 발전할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헌트는 말했다. “기술적 도약에 뒤따르는 문제 중 하나는 처음엔 대중이 흡족할 만큼 매끄럽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흐름에 뛰어들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당신의 사업을 훔쳐가 버릴 수 있어요. 기술은 2년마다 곱절로 발전하니까요. 그러다 그 흐름이 대중을 휩쓸어 버리는 시점이 되면 이미 게임은 끝난 거고요.”

앞으로 대세가 될 맞춤형 서비스(On-Demand)에 비전을 품은 기업은 넷플릭스뿐만이 아니었다. 아마존 역시 DVD 구매가 급증하는 추세를 파악하고 온라인 배송으로의 피할 수 없는 전환에 대비해 2004년 팀을 꾸리기 시작했는데, 초반에 팀장으로 고용한 이가 할리우드 전통에 흠뻑 젖어 자란 로이 프라이스였다. 2006년 9월 7일, 그 결실로 언박스라는 이름의 다운로드 사이트가 출시되었는데, 불과 며칠 후 애플이 디즈니, 픽사와 미라맥스 영화, 그리고 ABC의 인기 TV 프로그램을 아이튠즈 스토어를 통해 다운로드할 수 있도록 판매한다고 발표하면서 세간의 관심을 빼앗기고 말았다. 넷플릭스는 DVD 구독자들에게 스트리밍을 사실상 무료로 제공해 막강한 경쟁사들과 차별화를 꾀했다. 초기 스트리밍 서비스는 단출했다. 제공되는 영화와 TV 프로그램이 모두 합쳐 1,000여 편으로 굉장히 적었다.

한편 2009년 넷플릭스는 일면 스트리밍 덕분에 구독자가 300만 명 가까이 늘었다. 소비자들이 소니 플레이스테이션3, 마이크로소프트 엑스박스, 닌텐도 위 등의 인터넷 게임기, 그리고 애플TV 같은 장치를 통해 거실 소파에서 영화와 TV 프로그램을 시청할 수 있게 되면서 구독자가 63%나 급증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넷플릭스는 파라마운트픽처스, 메트로-골드윈-메이어스튜디오와 라이온스게이트의 영화들로 스트리밍 콘텐츠를 강화하고 프리미엄 케이블 채널 에픽스(Epix)와 10억 달러(1조 3,000억 원) 규모의 5년 전속 계약까지 체결하면서 빠른 성장세를 이어갔다.

이 신생 스트리밍 서비스는 할리우드를 발판 삼아 성장했다. 헤이스팅스와 넷플릭스는 경영진이 매출 목표를 달성하면 고액의 보너스를 지급하는 제작사들의 보상 구조를 교묘하게 이용했다. 엄청난 자금력을 은근히 과시해 당장 수익을 내는 것에 급급한 이들을 홀렸다. 일부 제작사의 경영진은 풋내기의 주머니를 터는 데 성공했다고 떠벌리고 다녔다. 하지만 몇 년 후, 넷플릭스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우위를 확보하면서 관성에 빠진 엔터테인먼트 업계가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됐는지가 분명해진다.

“스타즈가 수억 달러씩 지급하는 모든 콘텐츠에 넷플릭스가 접근할 수 있게 됐어요.” 2008년 운명적으로 넷플릭스와 계약했다 이후 갱신을 거부하고 스타즈로 이적한 알브레히트가 말했다. “덕분에 넷플릭스는 횡재했고 스타즈는 곤경에 빠졌죠. 다른 기업들은 거액에 사들이는 콘텐츠를 스타즈가 넷플릭스한테는 푼돈에 넘겼다고 모든 유료 TV 사업자들이 분노했거든요.” 업계가 넷플릭스를 과소평가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10년 넘게 NBC유니버설의 고위 간부로 재직하며 브라보 같은 서비스를 궤도에 안착시킨 로렌 잘라즈닉은 업계에서 내부적으로 논의하는 방식이 시장 교란자를 파악할 수 없는 형태였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쟁자를 중심으로 논의가 이루어지도록 치밀하게 짜여 있어서 넷플릭스 같은 기업은 아예 배제됐어요. 인지조차 못 했던 거예요.” 한편 닐 헌트는 당시 넷플릭스는 기존 DVD 구독자들에게 무료로 제공하고 있었던 스트리밍 서비스를 위해 갈수록 더 많은 자금과 설비 자원을 투입해야 했기에 스트리밍에 요금을 부과할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넷플릭스 역사상 최대의 실수는 이 시기에 일어났다. 즉 2011년 DVD 대여 사업을 퀵스터라는 별도의 서비스로 분리하기로 결정하고 실제로 추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비평가들은 이 아이디어를 쓰레기 취급했고 헤이스팅스 역시 자신의 착오를 사과하는 유튜브 동영상을 올렸다가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에서 패러디되는 등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이 사태로 넷플릭스는 수백만 명의 구독자를 잃고 주가는 75% 이상 폭락하는 등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옳은 전략이었지만 고객인 소비자의 의견을 듣지 않고 리스크도 파악하지 않은 채 너무 빨리 시행한 게 패인이었죠.” 퀵스터 사건 당시 넷플릭스에서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한 스티브 스와시가 말했다.

다행히 헤이스팅스와 그의 팀이 창조 중인 미래에 업계 최대의 기업들이 눈독을 들이기까지는 몇 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덕분에 넷플릭스는 실수를 만회할 수 있었다. 디즈니는 심지어 디즈니, 픽사, 마블의 영화와 2016년 시작될 〈스타워즈〉 시리즈, 라이브러리 작품들을 스트리밍 서비스에 더 빨리 제공하기로 하면서 넷플릭스를 굴욕의 늪에서 꺼내주었다. 디즈니가 몇 년 후 선보이게 되는 디즈니플러스의 핵심 작품들은 넷플릭스 구독자들에게 먼저 제공되었고 단숨에 최고 인기작으로 등극했다.

알브레히트는 스타즈 CEO로서 디즈니의 밥 아이거에게 유료 TV 네트워크와의 라이선스 계약을 갱신해 줄 것을 호소했다. 하지만 디즈니가 넷플릭스와 맺은 계약 때문에 모든 것이 여의치 않았다. 아무튼 이 계약으로 넷플릭스의 주머니는 두둑해졌다. 한 분석가는 덕분에 넷플릭스가 2017년에만 4억 5,000만 달러의 수익을 확보했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보다 더 큰 수확은 7,600만 명의 구독자, 그리고 수십억 달러로 치솟은 시장 가치였다. 참고로 계약 사실이 발표되던 당시 주당 12.38달러였던 넷플릭스의 주가는 아이거가 디즈니 영화들을 넷플릭스에서 회수해 직접 스트리밍하겠다고 발표한 2017년 8월, 178.36달러까지 올랐다. 이후 할리우드가 정신을 차리기 시작할 무렵, 넷플릭스는 오리지널 시리즈에 투자하고 있었다. 서랜도스와 신디 홀랜드 덕분에 넷플릭스는 많은 작품을 선보이는 ‘제작사’ 중 한 곳으로 탈바꿈했고, 넷플릭스는 구독자가 늘어난 건 물론, 명성 또한 높아졌다.

자체 프로그램 제작을 통해 기득권 업체들과 대결 구도를 형성한 넷플릭스는 다음으로 세계 전역의 업체들을 상대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헤이스팅스는 2016년 1월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소비자가전박람회(ces)의 기조연설을 통해 이 같은 야망을 그대로 드러냈다. 호리호리한 체형에 수염이 덥수룩한 간부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무대에 등장하기 전부터 넷플릭스는 이미 기념비적인 작품을 자신들의 라이브러리에 구축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상 최초로 시즌 전 회차를 한꺼번에 공개해 몰아보기의 시대를 열었고, 프로그램을 세계 각국에 같은 날 공개함으로써 아르헨티나부터 핀란드까지 분포해 있는 시청자들이 하나의 이야기를 정확히 동시에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방송사 편성표대로 시청하는 대신 개인의 선택에 따라 자유롭게 볼 수 있는 맞춤형 서비스를 도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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