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
장하준 지음 | 부키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
장하준 지음
부키 / 2023년 3월 / 376쪽 / 18,000원
머리말: 마늘한국인은 곧 마늘이다. 곰과 호랑이의 신화에서 보듯이 나의 조국 한국은 글자 그대로 마늘이라는 초석 위에 건국되었고, 여기저기에서 그 증거를 찾아볼 수 있다. 한국인은 2010년에서 2017년 사이 1년에 1인당 무려 7.5킬로그램의 마늘을 소비했다. 2013년에는 1인당 소비가 8.9킬로그램에 달했다. 2위인 이탈리아인(2013년 720그램)보다 10배 이상 많은 양이다. 물론 한국인이 7.5킬로그램의 마늘을 다 먹는 건 아니다. 많은 양의 마늘이 김치 국물에 섞여 버려지고, 양념에 든 다진 마늘을 다 먹지는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국인은 실로 엄청난 양의 마늘을 섭취한다.
영국인 최고의 적, 마늘: 1980년대의 영국 음식 문화를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보수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영국인은 익숙하지 않은 건 아무것도 입에 대질 않았다. 특히 모든 ‘외국’ 재료 중에서도 전 국민의 넘버원 적수는 마늘인 듯했다. 많은 영국인이 마늘 먹는 걸 야만스러운 행위 또는 적어도 주변 사람들을 수동적으로 공격하는 행위라고 여겼다.
나는 이런 음식 지옥을 탈출하기 위해 스스로 음식을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라면을 맛있게 끓이고, 의외로 괜찮은 샌드위치를 만들고, 냉장고와 찬장에 있는 재료를 써서 볶음밥을 만드는 수준은 되었지만 ‘요리’를 할 정도의 기초는 되지 못했다. 게다가 혼자 사는데 솔직히 나 혼자 먹자고 요리를 하는 건 별 재미가 없었다. 하지만 1993년 결혼을 한 후부터는 본격적으로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음식은 천국이 되었지만 경제학은 블랙홀로 빠져들고: 내가 요리하는 법을 익히는 사이 영국의 음식 혁명도 새롭고 결정적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1990년대 영국 사람들은 자기네 음식이 정말 형편없다는 사실을 집단적으로 인정하고 전 세계의 요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후 영국은 음식 천국이 되었다. 런던에는 모든 것이 다 있다. 새벽 1시에 거리에 세워진 밴에서 사 먹는 값싸면서도 훌륭한 튀르키예식 되네르 케밥에서부터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비싼 일본식 가이세키 요리에 이르기까지 상상하는 모든 것이 다 있다. 강렬하고 대담한 한국식에서부터 요란하지 않지만 배 속까지 뜨끈하게 데워 주는 폴란드식까지 맛도 무궁무진하게 다양하다.
물론 이 현상은 전 세계적인 트렌드다. 교역, 이민과 해외여행이 늘어남에 따라 사람들은 국적에 상관없이 외국 음식에 더 큰 호기심을 보이고 열린 마음으로 낯선 음식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지만 영국은 다르다. 정직한 자기 인식(음식에 한해서)을 한 순간부터 이 나라는 음식에 대한 경계심을 완전히 풀었다는 면에서 다른 나라와 매우 다른, 어쩌면 유일무이한 나라가 되었다.
이처럼 내 음식의 우주는 빛의 속도로 확장되고 있었지만 내가 속한 다른 우주인 경제학 분야는 슬프게도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1970년대까지만 경제학은 서로 다른 비전과 연구 방법을 자랑하는 다양한 학파에 속하는 학자들이 활동하는 분야였다. 고전학파, 마르크스주의, 신고전학파, 케인스학파, 오스트리아학파, 슘페터학파, 제도주의, 행동주의 등 다양했다. 이 수많은 학파의 경제학자들은 서로 공존했을 뿐 아니라 상호 교류했다. 1970년대까지의 경제학 분야는 서로 다른 장단점을 가진 수없이 다양한 음식 문화가 공존하며 경쟁을 벌이는 요즘의 영국 음식 분야와 닮은 데가 많았다. 모두 각자의 전통에 긍지를 가지고 있지만 서로 배우지 않을 수가 없고, 그 과정에서 의도하든 하지 않든 크고 작은 융합이 많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경제학 분야는 1990년대 이전의 영국 음식 문화처럼 되어 버렸다. 한 가지 학문적 전통, 다시 말해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메뉴의 전부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현재 대부분의 나라에서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주류 경제학으로 자리 잡았다. 이런 식의 지적 ‘단일 경작’은 이 분야의 지적 유전자 풀을 좁히는 결과를 낳았다.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들 중 다른 학파의 장점은 말할 것 없고, 심지어 다른 학파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이라도 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나마 다른 학파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들조차도 그 학파들이 신고전학파에 비해 열등하다고 말한다.
생산성 높이기
멸치
멸치의 놀라운 변신술, 피자 토핑에서 칵테일 소스까지: 멸치(anchovy)는 예로부터 잔챙이 생선의 상징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멸치는 세상에서 가장 큰 물고기다. 적어도 음식 문화에 끼친 영향 면에서는 그렇다. 한국, 일본, 말레이시아, 베트남, 태국, 인도,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모두에서 이렇게 많이,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소비되는 생선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아시아와 지중해 연안 지역이 아닌 곳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피자 토핑으로 멸치를 만날 것이다. 피자 위에 올라가는 멸치는 포를 떠서 소금을 뿌리고 숙성시켜 오일에 보존한 지중해 스타일이다. 아시아로 가 보면 멸치는 이보다 더 다양하게 이용된다.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서는 멸치를 주로 말려서 튀겨 먹는다. 코코넛 밀크와 판단 잎을 넣은 쌀 요리인 나시 르막에 곁들이는 재료 중 하나다. 한국인도 엄청난 양의 말린 멸치를 소비한다. 말린 멸치를 고추장에 찍어 먹기도 하고 말린 멸치를 간장과 설탕으로 볶아 반찬으로 즐기기도 한다.
페루의 번영을 이끈 작은 생선: 멸치는 풍부한 맛뿐 아니라 한때 풍부한 부를 가져다주는 고마운 생선이기도 했다. 이 작은 생선은 19세기 중반 페루가 누린 경제적 번영의 원인이었다. 페루가 멸치를 수출해서 돈을 번 건 아니었다. 당시 페루는 바닷새의 구아노(guano; 마른 새똥)를 수출해서 국가적 번영을 누렸다. 구아노는 질산염과 인이 풍부하고 냄새가 그다지 역겹지 않아서 인기 높은 비료였을 뿐 아니라 화약의 핵심 재료인 질산칼륨이 들어 있어서 화약 제조에도 사용되었다.
페루의 구아노는 태평양 연안의 섬들에 모여 사는 새들인 가마우지와 부비(booby; 얼가니새)의 배설물이다. 이 새들의 주된 양식은 생선, 특히 칠레 남쪽에서부터 페루 북쪽을 잇는 남아메리카 서쪽 해안의 영양소 풍부한 훔볼트 해류를 타고 이동하는 멸치들이다. 훔볼트 해류는 프로이센왕국의 과학자이자 탐험가인 알렉산더 폰 훔볼트의 이름을 딴 것이다. 훔볼트는 페루산 구아노의 장점을 최초로 유럽에 알린 사람들 중 하나다. 구아노가 페루 경제에서 너무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에 경제사를 다루는 사람들은 ‘구아노기’(1840년대~1880년대)라는 용어를 쓴다.
구아노가 중요한 역할을 한 나라는 페루만이 아니었다. 1856년 미국 의회는 ‘구아노 제도법’을 통과시켜서 아무도 살지 않고 다른 나라 정부의 관할 아래 있지 않다면 전 세계 어디에서나 구아노가 있는 섬은 미국 시민이 점유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법 덕분에 미국은 태평양과 카리브해의 100개가 넘는 섬을 점거해서 페루산 구아노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영국에 대항할 수 있게 되었다. 영국, 프랑스 등 다른 나라들도 구아노가 쌓인 섬들을 점거했다.
그러나 구아노로 인한 페루의 경제 호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호황이 시작된 지 30여 년쯤 지나자 과다 채취로 인해 구아노 수출이 사양길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1870년 페루에서 대규모 칠레 초석(질산나트륨) 매장지가 발견되면서 구아노 수출의 쇠락으로 인한 영향이 한동안 상쇄되었다. 초석은 비료, 화약 제조에 사용될 뿐 아니라 육류 보존에까지 쓰이는 질산염이 풍부한 광물질이다. 그러나 페루의 번영은 초석전쟁(Saltpetre War)이라고도 부르는 남아메리카 태평양전쟁(1879~1883년. 칠레, 페루, 볼리비아가 아타카마사막의 초석 지대를 놓고 벌인 전쟁)과 함께 끝이 났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칠레는 볼리비아의 해안 지역 전부와 페루 남부 해안 지역의 절반가량을 점령했다. 그 지역에는 대량의 초석이 매장되어 있고 구아노도 많아서 칠레는 엄청나게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 또한 오래가지 않았다. 1909년 독일의 과학자 프리츠 하버가 공기 중에서 질소를 분리하는 기술을 발명했다. 고압 전류를 사용해 암모니아를 만들고 거기서 인공 비료를 만드는 기술이었다. 말하자면 하버가 허공에서 인공 비료를 만들어 내는 방법을 개발한 것이다. 그 덕에 그는 1918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하버가 발명한 기술은 또 다른 독일의 과학자 카를 보슈에 의해 상용화되었다. 보슈가 일하던 ‘바스프(BASF)’는 하버가 개발한 기술을 사들인 회사다. ‘하버-보슈법’이라 부르는 이 기술은 인공비료의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해서 구아노를 비료계의 황제 자리에서 축출하고 말았다. 구아노보다 더 중요한 질산염의 공급원인 초석 또한 가치가 없어졌다. 구아노와 초석에서 추출한 칠레의 천연 질산염 생산량은 1925년 250만 톤이었던 것이 1934년에는 불과 80만 톤으로 줄어들었다.
고도의 기술력이 천연자원의 한계를 극복한다: 19세기에 진행된 기술 혁신으로 원자재 수출길이 막힌 사례는 이 외에도 여러 건 있다. 영국과 독일에서 인공 염료가 발명되면서 전 세계 천연염료 산업이 완전히 파괴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알리자린 같은 빨간색 인공 염료는 과테말라의 돈벌이 수단을 앗아갔다. 당시 과테말라의 경제는 가톨릭 추기경들의 옷을 염색하는 데 사용되는 귀한 진홍색 물감의 원료인 코치닐(cochineal)의 수출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코치닐은 연지벌레에서 추출하는 염료다.
콜타르에서 알리자린을 생산하는 기술을 개발한 바스프는 가장 귀하게 여겨지는 붉은색 염료를 검은 석탄에서 뽑아냈다. 바스프는 1897년 또 다른 귀한 염료인 남색을 인공으로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 인해 천연 남색 염료를 수출하던 인도의 인디고(indigo) 산업이 완전히 무너져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인디고 플랜테이션 지주들뿐 아니라 수많은 인도 노동자들의 생계를 파국으로 몰아넣었다. 한참 후인 1970년대에는 독일, 러시아, 미국의 과학자들이 다양한 형태의 인공 고무를 개발해 당시 전 세계 천연고무의 절반을 생산하던 말레이시아에 커다란 경제적 타격을 입혔다.
이처럼 천연자원을 대체할 인공 물질 제조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경제 체제는 기존 시장을 완전히 파괴하고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갖추는 것과 다름없다.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고도의 기술력을 갖추면 자연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구아노 퇴적층이나 연지벌레 또는 인디고 식물이 없었던 독일인은 화학적 대체품을 만들어 냄으로써 이런 결여를 극복했다.
이처럼 산업화를 통해 생산 능력을 더 높이면 자연이 우리에게 가하는 제약을 ‘마법처럼’ 극복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칠흑처럼 새까만 석탄에서 선명하기 그지없는 새빨간 염료를 뽑아내고, 허공에서 비료를 만들어 내는 것이 마법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거기에 더해 이런 능력을 갖추고 나면 오랜 기간 동안 높은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 초석과 같은 재생 불가능한 광물 천연자원, 또는 멸치를 먹고 사는 새들의 분비물로 만들어진 페루의 구아노처럼 재생 가능하지만 과잉 채취로 결국 바닥이 나고야 마는 천연자원과는 달리 한번 습득한 기술이나 능력은 고갈되지 않기 때문이다.
전 세계가 더 잘살기
소고기
축구도 잘하고 소도 잘 키우는 나라는?: 세계에서 축구를 제일 잘하는 나라는? 정답은 우루과이다. 우루과이는 인구가 350만 명밖에 되지 않지만 월드컵 우승을 2번이나 했다. 우루과이가 세계 선두를 달리는 또 다른 분야는 소고기 산업 부문이다. 현재 이 나라는 1인당 소의 숫자가 가장 많다. 양뿐 아니라 질에서도 뛰어나다. 우루과이는 모든 소를 한 마리도 빠짐없이 추적 가능하도록 한 세계 최초의 국가다(2004년). 우루과이는 소고기 추출물(extract)을 세계에서 처음으로 대량 생산했다. 초기에 판매된 소고기 추출물은 육수를 진해질 때까지 졸여 만든 농축액 형태여서 ‘액체 소고기(liquid beef)’라고 알려졌지만 후에는 옥소(Oxo)라는 브랜드명으로 잘 알려진 고체형 소고기 추출물로 변신했다.
서민들의 식탁을 책임진 소고기 큐브와 콘비프 통조림: 1847년 독일의 과학자 유스투스 폰 리비히가 소고기 추출물을 발명했다. 리비히는 소고기 추출물이 진짜 고기를 먹을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영양소를 공급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원자재 가격이 너무 비싸서 대부분의 사람이 구매할 수 있을 정도로 가격을 낮추기가 불가능했고, 그래서 그 후 15년가량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음식 재료로 소량 생산되었다.
그러던 중 1862년 우루과이에서 일하던 젊은 독일 철도 엔지니어 게오르그 크리스티안 기베르트가 리비히의 발명 소식을 접했다. 기베르트는 리비히의 추출물을 우루과이에서 생산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우루과이에서는 소고기가 가죽 산업의 부산물에 불과했기에 엄청 쌌다. 당시에는 유럽과 북아메리카 등으로 소고기를 수출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냉동선은 1870년대에 발명되었지만 20세기에 들어선 후에야 대량으로 운행되기 시작했다.
1865년 리비히스 익스트랙트 오브 미트 컴퍼니(Liebig's Extract of Meat Company, LEMCO)가 설립되었다. 렘코(LEMCO)가 첫 소고기 추출물 제품에 붙인 이름은 ‘렘코(Lemco)’였다. 이 제품은 전 세계적으로 크게 히트를 쳤다. 소고기 추출물은 1908년 사용이 더 편리해진 완전 건조한 고체 큐브 모양으로 제작되었고 ‘옥소’라는 이름이 붙었다. 소고기 추출물로 크게 성공한 렘코는 또 하나의 세계적인 히트 상품을 내놓았다. 바로 1873년부터 생산하기 시작한 콘비프(corn beef) 통조림이다.
소고기를 소금에 절여 보존한 콘비프는 유럽에서 적어도 수백 년 동안 먹어 오던 식품이었다. 그러나 렘코는 값싼 재료와 보존 기술을 결합해서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이 음식을 사 먹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저렴한 우루과이 소고기 중에서도 원래 ‘정식’ 레시피에서 사용하는 양지머리 대신 더 싼 부위의 고기를 갈아서 만들었기 때문에 생산비가 더 싸졌다. 렘코는 통조림 제조 방식을 사용해 원래의 소금 절임(염장) 방식보다 소고기를 훨씬 더 오래 보존해 더 먼 곳까지 수출할 수 있게 되었다.
옥소 큐브와 콘비프 통조림은 이제 유럽 전역의 노동자 계급에 없어서는 안 될 주된 식료품이 되었다. 이 두 제품은 보어전쟁에 참전한 영국군, 그리고 1차 세계대전 중 영국과 독일 양 진영 군인들 모두에게 저렴하고 오래가고 수송과 휴대가 간편한 음식이 되어 주었다. 그 후 2차 세계대전 동안 콘비프는 영국군뿐 아니라 민간인에게도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 역할을 했다.
소고기에 대한 인간의 그칠 줄 모르는 식욕과 보존 기술(추출, 통조림, 냉장) 덕분에 소고기는 지난 한 세기 반에 걸쳐 전 세계를 정복했다. 환경과학자 바츨라프 스밀은 이토록 대단한 소고기의 위력 덕분에 지구는 ‘소를 위한 행성’이 되었다고 말한다. 소고기 산업은 온실가스, 삼림 파괴, 엄청난 물 사용 등으로 막대한 환경 부담이 되고 있고, 소고기는 인간 식생활에서 너무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래서 인류 사회와 경제에서 육류가 차지하는 역할을 이야기할 때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소고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그와 함께 등장한 자유 시장, 자유 무역 경제학 이데올로기가 힘을 얻으면서 ‘자유’는 우리가 사회와 경제를 생각하는 방법의 틀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개념이 되었다. ‘자유’라는 단어가 들어 있는 생각은 모두 좋은 것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이것들에 반하는 건 무엇이든 원시적이고 억압적이며 구시대적인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