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뮤얼슨 vs 프리드먼
니컬러스 웝숏 지음 | 부키
새뮤얼슨 vs 프리드먼
니컬러스 웝숏 지음
부키 / 2022년 6월 / 551쪽 / 30,000원
18년 논쟁의 시작
거부할 수 없는 제안《뉴스위크》 칼럼은 존슨의 무모한 정책을 비판하기에 딱 맞는 지면이었지만, 갤브레이스가 제안을 거절하면서 편집국장인 엘리엇은 새뮤얼슨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1948년 케인스 경제학 교과서의 결정판 『새뮤얼슨의 경제학』을 출간한 새뮤얼슨은 갤브레이스와 마찬가지로 학계를 넘어 대중적인 인지도를 가지고 있었다. 엘리엇은 연간 몇천 달러의 원고료가 그의 삶을 바꿔 놓을 리는 없지만,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이론 경제학자라는 자리를 굳힐 수 있을 거라며 그를 설득했고, 새뮤얼슨은 제안을 받아들였다. 엘리엇은 경제학자 3명이 번갈아 가며 연재하는 칼럼을 구상했지만, 당시 엘리엇이 손에 쥔 카드는 ‘진보 경제학자(새뮤얼슨) 한 명, 중도 경제학자(월릭) 한 명, 답답한 보수주의자(해즐릿) 한 명’뿐이었고, 엘리엇은 고루한 해즐릿을 대체할 젊은 보수 경제학자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아내의 말을 들어라1936년 케인스가 『고용, 이자, 화폐의 일반 이론』(이하 『일반 이론』)을 발표해 경제학계에 혁명을 일으킨 이후, 보수 경제학과 보수 경제학자의 영향력은 크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1960년대 미국에서 케인스 경제학은 혁신적 처방으로 대공황을 끝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계속 위상을 높여 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새뮤얼슨에 맞설 명석하고 젊은 보수 경제학자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때마침 보수 경제학의 보루 시카고대학교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교수 한 명이 엘리엇의 눈에 들어왔다. 바로 밀턴 프리드먼이었다. 1966년 엘리엇은 프리드먼에게 칼럼니스트 자리를 제안했지만, 프리드먼은 《뉴스위크》에 글을 쓰기에는 너무 바쁘다는 이유로 제안을 거절했다. 다행히 프리드먼의 아내 로즈가 진정 위대한 경제학자라면 시간을 들여 자신의 사상을 알려야 한다고 말하며 남편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프리드먼은 《뉴스위크》가 요구하는 분량과 어조에 맞춰 글을 쓸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루고 싶은 주제를 목록으로 만들고 샘플 칼럼을 두어 편 작성해 동료인 시카고학파 경제학자 조지 스티글러에게 보냈다. 칼럼을 읽은 스티글러는 소재가 떨어질 일은 없을 거라며 《뉴스위크》의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조언했다. 그럼에도 결정을 내리지 못한 프리드먼은 시카고대학교 시절 만난 친구 새뮤얼슨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날 새뮤얼슨은 긴 통화를 나눈 끝에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강력히 권했다. 여러 보수 경제학자 가운데 프리드먼이 자신의 가장 강력한 맞수임을 인정한 것이다.
세기의 대결 2막서로 성향이 다른 경제학자들로 팀을 꾸린 엘리엇의 ‘혁신적’ 기획은 큰 찬사를 받았고, 이듬해 엘리엇은 최고의 경제 언론인에게 수여하는 제럴드 뢰브 상을 받았다. 이로써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존 메이너드 케인스를 비판하는 논문을 학술지에 실으면서 시작된 1931년의 논쟁 이래 주류 경제학 사상 가장 끈질기고 치열한 대결이 될 설전의 무대가 마련되었다. 엘리엇도 새뮤얼슨도 프리드먼도 자신들이 이후 18년 동안이나 칼럼을 연재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 기간 케인스학파의 지적 패권은 큰 도전을 받게 된다. 이들의 칼럼은 대중이 경제를 이해하는 방식에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쳤다. 새뮤얼슨과 프리드먼이 서로에게 예의 바르지 않았다면 논쟁이 오랫동안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둘은 사상적으로는 적이었지만, 사적으로는 친구였다. 다만 사상의 차이를 반영하듯 사고방식이나 글 쓰는 스타일은 완전히 달랐다. 새뮤얼슨의 글은 그의 평소 성격과는 차이가 있었다. 글에서 그는 이미 명망이 높고 성공한 학자답게 때로는 상대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만큼 여유 있게 도전을 받아넘겼다. 반대로 프리드먼은 끄떡없는 상대방에 맞서 점수를 내기 위해 길거리 싸움꾼처럼 주먹을 날려 댔다. 또 프리드먼은 옹호나 비평을 통해 당대의 사건에 개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정치적 글을 쓴 반면, 새뮤얼슨은 한때의 논쟁에 일일이 개입하기보다는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글을 썼다. 참고로 프리드먼은 《뉴스위크》 칼럼이 성공한 원인으로 두 사람 사이의 애정과 존경심을 꼽았다.
다시 태어난 새뮤얼슨
경제학자의 탄생폴 앤서니 새뮤얼슨은 1915년 5월 15일 인디애나주 게리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수학에 재능을 보인 그는 16살에 시카고대학교에 조기 입학했다. 입학 날 첫 강의에서 그는 평생 자신을 사로잡을 주제를 만났는데, 바로 경제학이었다. 새뮤얼슨은 경제학 공부에 열중했고 프랭크 나이트, 제이컵 바이너, 헨리 사이먼스, 폴 더글러스 등 시카고학파의 거장들로부터 배웠다. 이후 1935년 새뮤얼슨은 3년 만에 학사를 졸업했고, 이듬해 석사 학위를 마쳤다. 한편 새뮤얼슨이 이론 경제학에 남긴 초기 업적 가운데 하나는 승수-가속도 모형을 개발한 것이다. 훗날 핸슨-새뮤얼슨 모형으로 이름 붙여진 이 모형은 시장 경제가 호황과 불황을 반복하며 일정한 사이클을 따라 순환하는 원인을 설명한다.
굿바이 시카고1935년 새뮤얼슨은 사회과학연구협의회 펠로십 대상자로 선정되었다. 미국 대학 경제학과 졸업생 중 가장 뛰어난 8명에게 주어지는 이 넉넉한 장학금은 새뮤얼슨의 삶에 예상치 못한 전환점이 되었다. 장학금을 받으려면 시카고를 떠나야 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시카고학파 경제학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느끼고 있었던 새뮤얼슨에게 시카고대학교를 떠난 것은 좋은 결정이었다.
새뮤얼슨은 하버드대학교를 선택했다. 하버드에서 새뮤얼슨은 나치의 폭정을 피해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망명한 저명한 학자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중에는 케인스의 1936년 대표작 『일반 이론』을 미국 경제학계에 소개해 ‘미국의 케인스’라는 별명을 얻은 앨빈 핸슨을 비롯해, 바실리 레온티예프, 조지프 슘페터, 고트프리트 하벌러가 있었다. 펠로십 기간을 채워야 해서 바로 박사 논문을 쓸 수 없었던 새뮤얼슨은 도서관에 틀어박혀 수리 경제학의 기초를 뒤흔들 논문을 연달아 써 내려갔다.
한편 새뮤얼슨은 1936년부터 박사 논문을 준비하기 시작했지만, 학위를 받은 것은 1941년이 되어서였다. 새뮤얼슨이 박사 논문 『경제 분석의 기초』에서 다룬 주제는 매우 난해해서 그가 논문 발표를 마치고 나자, 지도 교수 슘페터가 레온티예프를 향해 이런 농담을 던졌다고 한다. “바실리, 우리 통과한 걸까?” 훗날 새뮤얼슨은 박사 논문을 발전시켜 책 『경제 분석의 기초』(1947)를 출간했고, 이 책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경제학에 수학을 적용하는 방법에 관한 표준 지침서로 자리 잡았다.
공과대학의 경제학과 / 의심받는 베스트셀러 작가이후 뛰어난 실력을 입증한 새뮤얼슨은 졸업 후 하버드 경제학과에 강사 자리를 제안 받았고, 새뮤얼슨이 하버드 강사직을 수락한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MIT로부터 다시 조교수직을 제안 받아, 1940년 MIT 경제학과 조교수가 되었다. 이후 1945년 전쟁이 끝나면서 새뮤얼슨은 MIT 경제학과장 랠프 프리먼으로부터 이런 제안을 받았다. “폴, 두 학기 동안 선택 과목으로 경제학 입문을 듣게 되어 있는데, 학생들이 이 과목을 싫어해. 몇 달 동안 수업을 줄여 줄 테니 학생들이 좋아할 만한 재미있는 교과서를 써 보면 어떨까? 분량이 많을 필요는 없고 재미있기만 하면 돼.” 새뮤얼슨은 바로 동의했고, 4년 뒤 새뮤얼슨은 『새뮤얼슨의 경제학』을 출판했다. 이 책은 경제학 교육에 일대 혁신을 일으키며, 이후 수 세대 동안 케인스 경제학이 세계 경제학의 주류로 집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신고전파 종합 이론1951년 새뮤얼슨은 고전 경제학과 신(케인스)경제학을 융합한 독창적인 이론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자연적 경기 변동에 대응해 실업률을 최소화하려면 어떤 정책을 써야 하는지에 대해 다룬 논문 「현대 재정 정책의 원칙과 규칙: 신고전파 종합」에서 그는 뉴딜 시절 공공 일자리 프로그램의 효과가 과대평가된 반면, 감세 정책의 경기 부양 효과는 과소평가됐다고 주장했다. 경기 변동에 제대로 대응하려면 공공 지출 정책과 조세 정책을 적절히 조합해 써야 한다는 것이 새뮤얼슨의 결론이었다.
그리고 새뮤얼슨은 1995년 『새뮤얼슨의 경제학』 개정판을 통해 자신의 ‘신고전파 종합’ 이론을 더 많은 사람에게 소개했다. 새뮤얼슨은 자유 시장의 힘에 의해 결국 균형이 달성된다는 케인스 이전의 경제학과 케인스 경제학을 통합한 이 이론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요즘 미국 경제학자 가운데 90%는 케인스주의자도 반케인스주의자도 아니다. 이들은 편을 나누는 대신 현대 케인스학파의 국민 소득 이론과 고전 경제학의 가치 있는 이론을 융합하고 있다. 그 융합의 결과물인 소위 신고전파 경제학은 5%의 극좌와 5%의 극우 논객을 제외한 모두에게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때 새뮤얼슨은 케인스학파와 보수 경제학자들 사이의 구분이 사라졌다고 선언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케인스주의 경제학자와 보수 자유 시장 경제학자 사이의 골은 너무 깊고 넓었다.
케네디의 제안을 거절하다새뮤얼슨이 경제학을 쉽게 설명하기로 정평이 나면서, 매사추세츠주 상원 의원 케네디는 MIT에 있는 새뮤얼슨에게 1960년 대통령 선거 캠프의 경제 자문을 부탁했다. 하지만 새뮤얼슨은 첫 만남에서 케네디의 마음에 들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민주당의 거물급 국회 의원이자 1959년 당시 세 번째 대선을 준비하고 있던 애들레이 스티븐슨과 애버렐 해리먼으로부터 경제 자문 요청을 받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새뮤얼슨은 케네디를 돕기로 했다. 무엇보다도 다른 경제학자들이 못 미더웠기 때문이었다. 케네디는 하버드 시절 1년 동안 경제학 수업을 들었지만, 새뮤얼슨은 그를 처음부터 다시 가르쳤다. 나중에 새뮤얼슨은 미국 경제를 진단하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정리해 「케네디 대통령 당선인에게 보내는 미국 경제 현황에 관한 새뮤얼슨 보고서」로 엮었다.
새뮤얼슨이 케네디 행정부에서 한자리를 맡을 거라는 소리가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새뮤얼슨은 정부 관료가 되거나 워싱턴 D.C.의 배타적인 사회에 발을 들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는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달라는 케네디 행정부의 제안을 거절했다. 개인 생활을 포기하거나 MIT에서의 생산적인 업무 리듬을 깨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편 《뉴스위크》에 칼럼을 써 달라는 엘리엇의 부탁은 새뮤얼슨에게는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여러 업무로 바쁜 상황이었지만, 새뮤얼슨은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한 경제 칼럼을 쓰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에 《뉴스위크》의 제안에 끌렸다. 또 프리드먼과 번갈아 가며 칼럼을 연재한다는 사실도 그의 흥미를 자극했다.
프리드먼의 고군분투
평생의 인연을 만나다밀턴 프리드먼은 1912년 7월 31일 브루클린에서 태어났고, 이후 럿거스대학교 수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수학을 좋아했던 그의 원래 꿈은 보험 계리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대학을 졸업한 1932년에 미국 경제는 대공황으로 가는 깊은 침체기에 돌입했고, 경제가 위기에 빠지면서 정치에 관심이 많은 사람과 학생들 사이에서 경제학은 인기 있는 토론 주제가 되었다. 언제나 논쟁을 즐겼던 프리드먼은 1929년 주식 시장 붕괴가 누구의 책임인지, 경기 침체가 지속되는 이유는 무엇인지, 막 선출된 민주당 루스벨트 행정부가 경기 회복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논쟁에 푹 빠져들었고, 경제학에 열정을 느낀 프리드먼은 보험 계리사라는 꿈을 접고 경제학을 공부하기로 했다.
졸업 후 프리드먼은 시카고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시카고 경제학과 교수 겸 변호사 애런 디렉터의 누이이자 경제학과생 로즈 디렉터를 만났고, 6년 뒤 결혼했다. 로즈는 프리드먼에게 도움을 주는 동료이자, 책의 공저자, 좋은 비평가, 든든한 옹호자였다. 비슷한 시기 프리드먼은 중요한 인물을 또 한 명 만났다. 1932년 가을, 시카고대학교의 사회 과학 연구소 건물에서 자신보다 세 살 어리지만 조숙한 학부 2학년생 폴 새뮤얼슨을 만난 것이다.
뉴딜 정책의 수혜자프리드먼은 시카고에서 1년 만에 석사 학위를 마친 뒤, 1933년부터 컬럼비아대학교의 해럴드 호텔링 밑에서 펠로십을 하며 통계학과 수리 경제학을 공부했다. 이 기간 그는 호텔링 외에도 웨슬리 C. 미첼, 존 M. 클라크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지만, 시카고가 더 잘 맞는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는 컬럼비아에서 펠로십을 마친 뒤, 시카고대학교로 돌아와 계량 경제학의 창시자 중 한 명인 헨리 슐츠의 연구실에서 연구 조교로 일했다. 한편 1934년, 프리드먼은 당대 가장 유명한 경제학자였던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처음이자 마지막 접점을 가졌다. 슐츠의 원고를 검토하던 중 프리드먼은 아서 피구의 수요 탄력성 이론을 비판하는 글을 영국 왕립 《경제학 저널》 편집자를 맡고 있던 케인스에게 보냈다.
케인스는 이 논문을 피구에게 보여 주었지만, 프리드먼의 주장이 틀렸다는 대답을 받고 논문을 싣지 않기로 했다. 프리드먼은 좌절하지 않고 하버드대학교 경제학과의 《계간 경제학 저널》 편집자 프랭크 타우시그에게 논문을 보냈다. 1935년 11월, 타우시그는 바실리 레온티예프의 추천을 받아 프리드먼의 논문을 실었다. 이에 피구는 프리드먼의 논리에 반박하는 글을 레온티예프에게 보냈고, 다시 프리드먼의 반박이 이어졌다. 이 설전을 통해 프리드먼은 치열한 학문적 결투의 장에 첫발을 들였다.
다시 만날 뻔한 두 사람1946년 프리드먼은 쿠즈네츠와 함께 쓴 「전문 자영업자의 소득」을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박사 논문으로 제출했다. 같은 해, 바이너가 시카고에서 프린스턴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프리드먼은 시카고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임용되어 마음의 고향 시카고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그는 마음 맞는 동료들과 함께 시카고대학교를 하버드를 중심으로 한 주류 케인스주의 경제학에 맞서는 시장 경제학의 산실로 키워 나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프리드먼의 귀환은 힘들이지 않고 계속 성과를 쏟아 내는 새뮤얼슨에게 가려 빛을 잃었다. ‘계량 경제학의 아버지’ 제이컵 마샥은 프리드먼과 새뮤얼슨이 둘 다 있으면 시카고대학교가 케임브리지, 하버드, 스톡홀름을 뛰어넘는 경제학의 수도가 될 것이라면서 총장 로버트 허친스에게 새뮤얼슨을 영입할 것을 제안했다. 새뮤얼슨은 처음에는 거절했다가 받아들이고 다시 거절하며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였다. 새뮤얼슨이 망설인 이유 중 하나는 시카고대학교 경제학과의 보수주의자들이 케인스주의에 적대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즈음 프리드먼은 전미경제연구소의 안나 슈워츠와 함께 미국 경제학의 역사에 통화가 미친 영향을 조사하는 연구를 시작했는데, 이 연구는 프리드먼이 평생을 바친 화폐 연구의 대표작이 되었다. 1960년, 프리드먼과 슈워츠는 연구 결과를 『미국 화폐사』라는 책으로 펴냈다. 프리드먼과 슈워츠는 기존에 정설로 여겨지던 경기 과열과 주식 시장 거품이 대공황을 초래했다는 케인스식 설명을 부정하고, 연준이 경제에 충분한 돈을 공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공황이 발생했다는 새로운 이론을 주장했다.
케임브리지 서커스(Cambridge Circus)와 맞서다1954~1955학년도에 프리드먼은 풀브라이트 방문 연구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케임브리지대학교 곤빌 앤드 카이우스 칼리지에서 한 학기를 지내게 되었다. 당시 케인스주의자들은 프리드먼 같은 ‘고전’ 경제학자를 시대에 뒤떨어져 밀려난 사람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그에게 케인스 사상의 세계 수도인 케임브리지에 가는 것은 사자 굴에 들어가는 것만큼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