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의 시대
빈야민 애펠바움 지음 | 부키
경제학자의 시대
빈야민 애펠바움 지음
부키 / 2022년 11월 / 752쪽 / 35,000원
들어가는 말2차 세계대전 후 25년 동안 이어지던 성장이 1970년대에 들어서 삐걱거리더니 멈춰 서 버렸다. 이때 경제학자들은 경제에서 정부가 담당한 역할을 줄이라고, 시장이 관료보다 더 나은 결과를 낳는다고 정치 지도자들을 설득했다. 1969년부터 2008년까지 40년에 걸친 이 시기를 나는 ‘경제학자의 시대(Economists’ Hour)’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 경제학자는 과세와 공공 지출을 제한하고, 규모가 큰 경제 부문에서 규제를 완화하고, 세계화를 향한 길을 마련해 나가는데 중심 역할을 했다. 또 닉슨 대통령을 설득해 징병제를 폐지했고, 연방 법원을 설득해 독점금지법을 적극 집행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또한 경제학자는 정책 입안자가 되었다. 1970년 경제학자 아서 F. 번스가 마틴에 이어 연준 의장이 되면서 볼커를 비롯한 경제학자가 중앙은행을 이끄는 시대가 열렸다. 그리고 2년 뒤인 1972년 조지 슐츠가 경제학자로는 최초로 재무장관이 되었다. 참고로 미국 정부가 임용한 경제학자 수가 1950년대 중반 2,000여 명에서 1970년대 말 6,000여 명 이상으로 크게 늘어났다.
미국은 지적 소요가 들끓는 진원지이자 발상을 정책으로 전환하기에 적합한 주요 실험장이었다. 하지만 경기 침체의 치유책으로 시장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었다. 미국은 1970년대 중반에 정부의 가격 통제 정책을 없애기 시작했다. 1970년대 말 즈음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역사상 처음으로 빵집 주인이 바게트 값을 정했다. 그리고 지구상에서 가장 큰 공산주의 국가도 이 변혁에 합류했는데, 1985년 9월 자오쯔양 부주석은 뛰어난 서구 경제학자 8명을 일주일간 양쯔강 유람선 여행에 초대했고 거듭된 토론은 중국의 새로운 정치 지도자 세대가 시장에 더욱 굳건한 믿음을 갖도록 했다. 그뿐 아니라 중국이 시장에 기반한 자신들만의 경제 체제를 구축해 나가는 데 촉매 작용을 했다.
이 책은 이 같은 변혁이 걸어온 일대기다. 주요 인물 몇몇은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당대 다른 어떤 경제학자보다 미국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밀턴 프리드먼이나 1974년 칵테일 냅킨에 곡선 하나를 그려 감세를 공화당 경제 정책의 기본 방침으로 정하는 데 일조한 아서 래퍼처럼 말이다.
그에 비해 다른 인물들은 덜 친숙할지도 모른다. 시각 장애인 경제학자로 아내와 조교에게 계산을 받아쓰게 하여 닉슨이 징병제를 폐지하도록 이끈 월터 오이나 항공 여행 규제를 완화하여 상업 비행기의 비좁고 빽빽한 객실을 성공의 증거라며 기뻐한 알프레드 칸이나 게임 이론가로 케네디 행정부가 크렘린과 긴급 직통 전화를 개설하도록 설득했을 뿐 아니라 인간 생명을 달러 가치로 환산하는 방법을 고안한 토머스 셸링 같은 경우가 그렇다. 이 책에서는 그 결과에 대한 평가도 살핀다.
아무튼 시장을 받아들이면서 전 세계 수십만 명이 비참한 가난에서 벗어났다. 상품과 돈과 사상이 흐르면서 여러 나라가 긴밀하게 묶였다. 지구상 77억 명 인구 대다수의 삶이 더욱 풍요롭고 건강하고 행복해졌다. 시장 덕분에 사람들은 저마다 원하는 바가 다름에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더 쉽게 얻는다. 이는 다양성과 선택의 자유를 소중하게 여기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특히 중요한 미덕이다.
무엇보다 경제학자는 시장을 이용하여 산성비를 줄이거나 이식용 신장 공급을 늘리는 일과 같은 긴요한 문제에 우아한 해결책을 내놓는다. 하지만 시장 혁명은 아직 갈 길이 멀다. 미국과 다른 여러 선진국에서는 경제적 평등과 건전한 자유 민주주의와 미래 세대를 희생하는 대가를 치렀다. 경제학자는 정책 입안자에게 수익 분배는 무시하고 성장 극대화에 집중하라고 촉구했다. 밥그릇 크기가 아니라 밥상 크기에 초점을 맞추라고 요구한 것이다. 하지만 이 처방약은 듣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이 책에서 다루는 반세기 동안 10년마다 성장 속도가 계속 느려졌다. 1960년대에는 연평균 3.13퍼센트였던 수치가 2000년대에는 인플레이션과 인구 조정을 거치면서 0.94퍼센트로 떨어졌다.
정책 입안자는 효율성을 추구하면서 생산자로서 미국인의 이익을 소비자로서 미국인의 이익에 종속시키며 고임금 일자리를 저가 전자제품과 맞바꾸었다. 그 결과 사회의 구조가 흔들리고 지방 정부의 생존력이 약화되었다. 지역 사회는 개인의 실직이 미치는 여파를 잠재운다. 따라서 대량 해고가 고통스러운 이유는 종종 지역 사회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 우리는 성장에 역점을 두면서 그 대가로 미래를 내주었다. 감세로 잠깐 달콤한 번영을 작은 폭죽처럼 터뜨리면서 교육과 사회 기반 시설에 지출을 줄였다. 환경 규제에 제한을 두어 기업 수익을 지켰지만 환경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하지만 경제 정책의 실패를 드러내는 가장 섬뜩한 척도는 부의 불평등이 건강의 불평등으로 차츰 이어지면서, 미국의 평균 기대 수명이 낮아지고 있다는 점이 아닐까. 1980년에서 2010년 사이 미국인 부유층의 상위 20퍼센트에서는 기대 수명이 올라갔다. 그런데 같은 기간 미국인 빈곤층 하위 20퍼센트에서는 내려갔다. 특히 같은 기간 부유한 미국인 여성과 빈곤한 미국인 여성 사이에 기대 수명의 차이가 3.9년에서 13.6년으로 벌어졌다는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다.
미국 경제학자는 때때로 두 진영으로 나뉜다. 하나는 시카고에 본거지를 두고 매사 시장 편에 선다고들 말한다. 반면에 다른 하나는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 본거지를 두고 정부의 강력한 개입을 선호한다고들 말한다. 이런 차이를 낳는 요소는 무수하다. 하지만 두 진영을 이끄는 주요 인물들은 이 책에 나오는 여러 중요한 변화를 반겼다. 자연은 점점 엔트로피로 나아가는 경향을 보일지라도 두 진영 모두 경제는 균형으로 나아간다고 확신했다. 또 경제 정책의 주된 목적은 국가 경제 산출량에서 달러 가치를 높이는 것이라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그리고 두 진영 다 불평등을 줄이기 위한 노력에는 인내심을 발휘하지 않았다. 두 진영의 차이는 정도의 문제일 뿐이었다.
시장은 어디에나 존재한다1966년 말 자유시장주의 성향을 지닌 콜롬비아 대학 경제학 교수 마틴 앤더슨이 한 만찬회에서 리처드 닉슨 법률 회사에서 온 어떤 변호사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 변호사는 닉슨을 좋아하지 않았고, 만찬이 끝날 무렵이 되자 앤더슨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서 앤더슨은 닉슨의 법률 회사 동업자이자 측근인 레너드 가먼트에게 전화를 한 통 받았다. 가먼트는 요상한 소리를 하는 콜롬비아 대학 교수가 있다고 들었다면서 한번 만나자고 앤더슨을 초대했다. 앤더슨은 곧 1968년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서 닉슨의 정치적 재기를 모의하는 소모임과 정기적으로 회합을 가졌다.
1967년 3월 회합에서 닉슨의 소모임은 징병제로 관심을 돌렸다. 그동안 미국은 징집으로 주요 전쟁에 보낼 군인을 뽑아 왔다. 그런데 징병에 대한 대중적 지지는 1960년대에 이르러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베트남에서 전투가 치열해지자 군에 입대하는, 아니 어쩌면 죽으러 가는 남성을 뽑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공평하다는 항의 역시 거세졌다. 개혁자는 지역 징병위원회를 국가 추첨 방식으로 대체하자거나 남성이면 모두 군사 훈련을 받게 하자는 등과 같은 의견을 내놓았지만 그런 안으로는 불공정한 요소를 해소하지 못했다. 그 회합에서 앤더슨이 닉슨 보좌진에게 말했다.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앤더슨은 시카고 대학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 쓴 글을 막 읽고 난 뒤였다. 프리드먼은 정부가 징병제를 폐지하고 대신에 지원병제인 모병제를 실시하여 경쟁력 있는 임금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상은 변화하지만 그 이유를 딱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다. 미국이 1973년에 징병제를 폐지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미국인이 1950년대에 아이를 많이 가졌기 때문이고, 린든 B. 존슨이라는 사람이 승산 없는 싸움을 밀어붙였기 때문이고, 새로운 군사 기술 작동법을 신병에게 가르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고, 투표 연령이 18세로 낮아졌기 때문이고, 번영하는 나라에서 젊은이가 참전을 기피했기 때문이다. 이 모두가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미국이 징병제를 없앤 이유는 밀턴 프리드먼이 앤더슨을 설득하고, 앤더슨이 닉슨을 설득하고, 닉슨이 1968년 대선에서 이겼기 때문이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프리드먼은 독보적인 학자로 1976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이라는 영예를 안았다. 하지만 그는 20세기에 가장 영향력이 큰 이데올로그로, 미국인뿐 아니라 전 세계인의 삶을 바꾸어 놓은 보수주의적 반혁명의 강고한 선지자로 기억될 만하다. 징병제를 폐지하는 과정에서 프리드먼은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처음으로 자신의 신념이 쫓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꾸었다. 더 빛나는 승리가 이어졌지만 프리드먼은 삶의 막바지에 이르러 이 첫 경험이 가장 자랑스럽게 기억에 남는다고 고백했다.
보수주의적 반혁명의 선지자, 프리드먼밀턴 프리드먼은 궤도에서 풀려난 전자처럼 20세기를 종횡무진 누비고 다니며 세상을 자신의 생각에 맞춰 바꾸어 놓았다. 프리드먼의 호쾌한 이론은 단순하면서도 어디에나 통했다. 열린 시장은 인간의 통치 방식에서 가능한 최고의 시스템이었다. 분명히 전통적인 정부 형태보다 훨씬 더 나았고, 따라서 정부는 절대 최소한도로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80년 PBS는 <선택할 자유>라는 다큐멘터리를 내보내며 프리드먼의 이론을 소개했는데, 이때 이 경제학자는 노란색 연필을 한 자루 들고 생산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수천 명에 달하는 사람이 서로 협력하여 이 연필을 만듭니다.” 그러고는 나무와 흑연, 노란색과 검은색 페인트, 고무지우개, 금속 띠를 생산한 노동자를 죽 열거했다. “그들은 말하는 언어도 다르고 믿는 종교도 다르고 마주쳤다면 서로 원수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다음 뾰족한 연필 끝을 톡톡 두드리며 질문을 했다. “무엇이 이들을 한데 묶었을까요? 가격 체계가 부린 마법입니다.”
한편 프리드먼은 경제학자로 경력을 쌓아 나가던 전반기에 특별히 의미 있는 학술 연구 대부분을 내놓았고, 후반기에는 “당대 가장 창의력이 뛰어난 사회 정치 사상가”로 두각을 나타냈다. 하버드 대학 경제학자로 클린턴 행정부와 오바마 행정부에서 고위 관리를 지낸 로렌스 서머스는 2006년에 자신이 젊었을 때에는 프리드먼이 “악마 같은 인물”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래도 크나큰 존경심으로 우러러보았다고 쓰며 이렇게 덧붙였다. “프리드먼은 오늘날 전 세계에서 시행하는 경제 정책에 어느 현대 인물보다 막강한 영향력을 미쳤다.” 그리고 하버드 대학 동료인 안드레이 슐라이퍼는 2009년에 1980년에서 2005년 사이 이 시기는 “밀턴 프리드먼의 시대”였다고 썼다.
프리드먼 vs 케인스
문제는 통화량프리드먼은 1940년대 말 케인스의 유령과 티격태격 싸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미국 경제가 탄탄하게 성장해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논쟁 주제가 성장을 높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안은 무엇인가가 아니었다. 이때의 논쟁 주제는 같은 동전의 다른 면, 즉 인플레이션을 줄이는 방안이었다. 케인스주의자는 인플레이션이 많은 잠재적 원인과 숱한 잠재력 해결책을 지닌 복잡한 현상이라고 보았다. 정부 지출이 지나쳤기 때문일 수도 있고, 석유 공급이 급작스럽게 감소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노조가 임금을 더 인상하라고 압박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각 원인마다 그 나름의 해결책이 있었다.
이와 달리 프리드먼이 바라보는 관점은 아주 단순했다. 정부가 통화를 지나치게 많이 발행하여 인플레이션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유통되는 통화량 증가 속도가 경제 성장 속도보다 빨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통화 발행을 줄여 인플레이션을 낮출 수 있다. 1948년 프리드먼은 시카고 대학의 다른 경제학 교수 7명과 함께 《뉴욕타임스》에 서한을 싣고 물가 상승의 “주된 원인”은 미국 내에서 유통되는 통화량이 1939년에서 1948년 사이 약 3배 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는데, 이 관점은 이후 통화주의(monetarism)라고 알려졌다. 프리드먼은 훗날 이 이론을 다음과 같은 유명한 표현으로 요약했다. “인플레이션은 언제 어디서나 통화 현상이다.”
그해 말 프리드먼은 자신의 주장을 증명할 초대를 받아들였다. 참고로 아서 F. 번스가 전미경제연구소를 이어받았는데, 이 연구소 기금 가운데 상당 부분을 제공했던 록펠러 재단은 경기 순환에서 은행 대출이 하는 역할을 연구하여 고찰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이는 통화의 양이 아니라 통화의 이동이 중요하다는 케인스주의 시각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런데 번스는 프리드먼에게 당시 콜롬비아 대학 대학원생으로 자료 수집 기술이 신기에 가깝다는 평판을 얻고 있던 안나 슈워츠와 함께 이 연구 계획에 어깃장을 놓아 달라고 부탁했다. 프리드먼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출사표를 다시 썼다.
그는 1949년 1월 록펠러 재단 이사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양이 속도보다 더 중요하고 따라서 통화 정책이 막중하다는 자신의 견해를 설명했다. 반면에 케인스주의식 재정 정책은 그렇지 않다고 덧붙였다. 프리드먼은 연준이 경제에 통화를 충분히 투입하지 않아서 일반적인 경기 둔화가 대공황으로 확대된다는 이론에 대해 처음으로 밑그림을 그렸다. 그는 연구가 여덟 달 정도 걸릴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실제로는 14년이 걸렸다. 프리드먼은 증거를 찾는 한편으로 계속해서 자신의 결론을 널리 알려 나갔다.
1952년 3월 의회에서 “통화 기관의 임무는 통화 비축량을 조정하여 경제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언명했다. 이듬해 프리드먼은 1940년대 초에 썼던 인플레이션에 대한 소론을 수정하여 다시 발표했다. 첫 소론에서는 인플레이션을 케인스주의 용어를 써서 지나친 정부 지출의 결과라고 표현했는데, 수정한 소론에서는 인플레이션의 근본 원인은 통화 공급이 과도하게 늘어난 데 있다고 강조했고, 변명처럼 주석을 달았다. “새로운 논거가 명백하다고 믿기 때문에 앞선 소론에서 통화 효과를 누락한 점은 심각한 실수라고 본다. 어쩌면 당시 만연하던 케인스주의의 풍조 탓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프리드먼이 지닌 전문가로서의 위상은 통화 정책에 대한 자신의 견해에 기꺼이 지지를 보낼 청중을 끌어모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전향하는 자가 많지 않았다. 왜냐하면 케인스 경제학이 대세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리드먼은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설득시키려 애쓰면서 차세대 경제학자를 교육해 나가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시카고 대학에서 통화와 금융을 주제로 ‘연수회’를 개최했는데, 이 연수회에는 프리드먼 지도 아래 통화 문제를 연구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참여했다. 이후 곧 다른 경제학 교수진도 채택한 이 아이디어는 실험실 모델이 과학적 연구를 위해 제공한 형식을 따라 하려는 시도였다. 그렇게 프리드먼은 25년 동안 연수회를 운영하며 통화주의자 군대를 양성했다.
어둠을 헤치고 나아가는 법1963년에 프리드먼과 슈워츠는 거듭해 온 연구를 대중에게 선보였다. 『미국 화폐사 1867~1960』가 출간된 것이다. 중앙은행의 무능력은 2차 세계대전을 치르는 내내 연방 정책이 지닌 문제였다. 연준은 재무부 감독 아래 운영되며 통화를 발행하는 권한을 지니고 있어서 정부가 낮은 이자율로 돈을 빌릴 수 있었다. 그런데 1951년 연준은 의회의 지지로 운영의 독립성을 확보했다. 그사이 10년 동안 연준은 경제 상황을 조율하는 능력을 입증하기 시작했다. 케인스주의자는 이런 역학에 대한 프리드먼의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들이 보기에 연준은 통화 공급을 조정해서가 아니라 이자율을 낮추거나 높여 경제를 북돋거나 가라앉혔다. 하지만 통화 정책이 중요하다는 점은 기꺼이 인정했다.
하지만 프리드먼이 쟁취한 승리는 완전하지 않았다. 2가지 중요한 차이가 남아 있었다. 첫 번째는 케인스주의자는 통화 정책의 중요성을 차츰 인정했지만 재정 정책의 무력성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리 모두 통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제는 통화가 중요한가 아닌가가 아니라 통화만이 중요한가 아닌가다.”라고 월터 헬러가 지적했다. 두 번째 논쟁 주제는 통화 정책이 지닌 한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