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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엉뚱한 세금 이야기

오무라 오지로 지음 | 리드리드출판


세상을 바꾼 엉뚱한 세금 이야기

오무라 오지로 지음

리드리드출판 / 2022년 9월 / 224쪽 / 16,800원





PART 1 역사를 바꾼 ‘놀라운 세금’



고대 로마 공화정을 무너뜨린 ‘전쟁세’


고대 로마는 기원전 8세기부터 1,000여 년에 걸쳐 번성한 대제국이다. 지중해 세계 전역을 지배했으며 현재 유럽의 기반이 된 국가이기도 하다. 이탈리아반도의 도시 국가였던 고대 로마는 주변 국가를 차례차례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했다. 이때 전쟁에 필요한 군비를 조달하기 위해 도입한 세금 제도는 매우 훌륭했다.

공화정 시대(기원전 509년~기원전 27년)의 고대 로마에는 ‘전쟁세’가 있었다. 이는 재산세의 일종으로 시민이 신고한 전 재산에 대해 세금이 부과됐다. 전쟁세는 보유한 재산 종류에 따라 세율이 변동되는 구조였다. 보석이나 고가의 의상, 호화로운 마차와 같은 사치품에는 일반적인 세율부터 최대 10배에 달하는 세율이 적용되었다. 또 전쟁 중에는 부자에게 국가에 대한 융자 제공 의무도 부과했는데 이는 부유층의 세금 부담이 커지는 세금 제도였다.

로마 전쟁세의 특징은 환급제라는 점이다. 로마군이 전쟁에서 승리해 전리품을 손에 넣으면 납부한 세금에 따라 환급해 주었다. 요즈음의 국채나 주식 투자와 비슷한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로마군이 잇달아 승리하며 영토가 확대되자 전쟁세는 차츰 폐지되기 시작했다. 도시 국가 로마(공화정 로마)의 탄생으로부터 350년이 지난 기원전 150년 무렵에는 전쟁세가 완전히 폐지됐다. 전쟁세를 부과하지 않아도 전쟁 비용을 충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는 일단 정복한 토지를 자기 영토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식민지 주민들에게 세금을 부과했다. 각지에서 세금으로 낸 귀금속과 수확물 등이 모여들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스페인이 바친 금과 은은 특히나 로마의 국고를 풍족하게 만들었다. 기원전 206년부터 기원전 197년까지 10년간 약 1.8톤의 금과 약 60톤의 은이 로마에 헌납됐다. 이 금과 은 덕분에 로마는 화폐 제도를 정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착취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는 식민지도 생겨났다. 로마에 가장 큰 타격을 준 것은 튀르키예(터키) 지역의 미트리다테스 대왕이 일으킨 반란이었다. 미트리다테스 대왕은 독립이 아니라 세금의 경감을 바랐다. 기원전 88년 미트리다테스 대왕의 계략으로 대부분의 그리스 도시가 일제히 봉기했다. 봉기 첫날에만 로마의 세금 징수인 8만 명과 로마 상인 2만 명이 살해되는 참극이 일어났다. 이후 그리스 반란은 진압했지만 로마 정부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 타격으로 인해 공화정부는 혼란에 빠졌고 로마의 체제는 제정으로 전환됐다. 만약 뛰어난 세금 제도였던 전쟁세를 유지하면서 식민지에 세금을 조금만 부과했더라면 공화정 로마의 명맥은 보다 오래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영국을 번영시킨 ‘해적세’


영국은 근대 세계사의 주역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영국이 처음부터 강대한 나라는 아니었다. 중세 무렵까지만 해도 유럽의 변방 국가에 불과했다. 그랬던 영국이 16세기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에 거대한 변화를 맞이했다. 이 변화의 원동력은 사실 해적이었다. 해적과의 관계는 영국의 흑역사다. 따라서 역사에는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지만, 근대 영국의 발전은 해적을 빼놓고는 논할 수 없다.

엘리자베스 여왕 이전 시대의 영국은 독일 등에 모직물을 수출해서 재정을 꾸렸다. 하지만 대항해 시대를 맞이하며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그 계기는 콜럼버스의 대서양 횡단에 있다. 아메리카 대륙의 포토시 은산에서 은이 대량으로 생산됐기 때문이다. 그 결과 유럽의 은 가격이 폭락했고 은 수출이 주요 산업이었던 독일은 큰 타격을 받았다. 독일이 부진해지자 영국도 결국에는 재정난을 겪게 됐다. 그러자 엘리자베스 여왕은 고육지책으로 ‘해적 행위’에 나섰던 것이다.

당시 영국이 이용한 해적선은 ‘사략선’이라 불렸다. 사략선이란 정부의 허가를 받아 적국의 선박을 노획하는 배를 가리킨다. 영국은 해적선의 약탈 행위를 승인하는 대신 노획품의 5분의 1을 국고에 바치도록 의무를 부과했다. 다시 말해 국가가 노획품의 5분의 1을 ‘해적세’로 납부한 이들의 약탈 행위를 눈감아 준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너나 할 거 없이 바다 사나이들은 모두 해적이 됐다.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도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탄생했다.

약탈 대상은 당시 영국과 관계가 복잡했던 스페인이었다. 중세 유럽에서는 각국 왕실 간에 혼인이 성사되는 일이 매우 흔했는데 이는 친척 관계로 동맹을 맺어 국가 간의 결속을 다지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함께 잘 먹고 잘살자.”라는 말은 겉치레에 불과하고 경쟁 관계가 되면 왕실이 서로 적대하기도 했다. 적대 관계일 때는 핏줄이 가까울수록 더욱 심하게 대립했다.

당시 강대국이던 스페인과 영국은 양국 간의 경쟁 외에도 또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다툼’이었다. 스페인은 엄격한 가톨릭 국가였으며 ‘가톨릭의 요새’라는 자부심이 강했다. 반면 영국에서는 프로테스탄트가 힘을 키우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여왕도 프로테스탄트 신자였다. 그렇다고 영국에서 가톨릭 신자들을 박해하지는 않았지만, 국정의 중심은 프로테스탄트였다. 이러한 종교 문제로 두 나라는 표면상의 우호 관계는 유지하면서도 뒤에서는 서로 반목했다. 그 영향으로 영국의 프로테스탄트 해적들이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의 선박을 자주 습격했다고 한다. 당시 국제 해운 업계에서는 공공연하게 해적 행위가 이루어졌다. 16세기 중반의 영국 해협에는 약 400여 척의 해적선이 있었다. 그중에는 프랑스를 비롯한 주변 국가의 해적선도 있었다. 영국만이 아니라 다른 국가들도 많든 적든 해적 행위에 가담했다는 뜻이다.

1587년에 엘리자베스 여왕의 주도로 진행됐던 드레이크의 해적 항해는 영국에 약 60만 파운드의 수익을 가져다주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중 약 30만 파운드를 가져갔다고 한다. 이는 당시 영국의 1년 치 국가 재정과 맞먹는 금액이었다. 이렇듯 해적세가 가져다준 막대한 세수는 영국을 크게 발전시키는 계기가 됐다.

미국으로 유럽인의 이주를 도운 ‘택스 헤이븐’


전 세계가 ‘택스 헤이븐(tax haven)’에 주목하고 있다. 택스 헤이븐이란 세금이 거의 부과되지 않는(혹은 매우 저렴한) 국가나 지역을 뜻하는데 많은 기업과 부유층이 택스 헤이븐으로 이주해서 세금을 회피하는 바람에 전 세계적인 문제로 부상하고 있다.

택스 헤이븐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이다. 현재 미국은 초강대국으로 군림하고 있으나 원래는 영국의 식민지였다. 과거 영국은 전 세계에 식민지를 보유했지만 거의 모든 지역에서 경제 활동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특정 무역 회사에 식민지의 독점적 권익을 제공했다. 이는 영국뿐 아니라 당시 모든 유럽 국가들이 실시한 식민지 정책이었다.

대표적으로 ‘동인도 회사’가 있다. 동인도 회사는 동인도 식민지의 무역을 독점했던 회사로 영국뿐만 아니라 네덜란드와 프랑스도 설립했다. 유럽 국가들은 식민지를 지배할 때 동인도 회사 같은 독점 기업을 설립해 수입품에 고액의 세금을 부과했다. 그러나 영국은 북아메리카 식민지에는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인정했다. 원칙적으로 누구든 자유롭게 사업을 할 수 있었으며 무역도 제한하지 않았다.

그럼 어째서 영국은 북아메리카 식민지에는 독점 기업을 설립하지 않았을까? 사실 당시 북아메리카는 그다지 중요한 지역이 아니었다. 현재의 미국은 자원 부국, 농업 대국이라 불리며 번영하고 있지만, 과거에는 금 등의 광맥도 거의 발견되지 않았고 향신료나 차도 재배할 수 없었다. 광대한 토지는 대부분 미개척지였다. 북아메리카의 골드러시나 석유 발견은 모두 독립 후에 일어난 일이다. 당시 북아메리카는 거대 금은 광맥이 있는 남미나 귀중한 향신료를 재배할 수 있는 동아시아에 비해 중요도가 낮은 지역이었다. 그렇기에 영국은 북아메리카의 세금을 없애 경제 활성화를 도모했던 것이다.

부족한 자원은 역설적으로 북아메리카에 많은 이주민을 불러들이는 결과를 낳았다. 세금이 부과되지 않자 저렴한 물가 덕분에 북아메리카가 살기 좋은 지역이 됐기 때문이다. 물론 땅을 직접 개척하느라 고생을 해야 했지만 유럽에서 종종 발생하던 기근을 피해 많은 이주민이 북아메리카로 건너갔다. 만약 북아메리카에서 일찍이 중요한 광산 등이 발견됐다면 어땠을까? 경제적인 자유는 주어지지 않고 다른 식민지와 마찬가지로 정부의 독점 기업이 지배했을지도 모른다.



PART 2 세계를 뒤흔든 ‘기막힌 세금’



영주와의 첫날밤 때문에 생긴 ‘초야세’


고대부터 중세에 걸쳐 유럽에는 ‘초야세’가 있었다. 황당하지만 영주는 영주민이 결혼하는 부인과 첫날밤에 동침할 수 있는 ‘초야권’이라는 권리를 가졌다. 결혼하려는 영주민이 영주의 초야권을 거부하려면 세금을 내야 했는데 이 세금이 바로 초야세다. 그런데 초야권과 초야세에 대한 명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그 존재를 부정하는 이들도 있다. “당시 모든 영주는 영주민을 가혹하게 대했다.”라는 인식에서 생겨난 후세 사람들의 상상에 불과하다는 의견이다.

하지만 초야세의 흔적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보자. 이 곡의 내용은 초야권의 부활을 노리는 백작과 영주민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린 작품이다. 초야권이 오페라로 만들어질 만큼 유럽에서는 보편적인 제도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말자 상속’ 관습이 초야권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말자 상속이란 집안의 막내가 상속자가 되는 제도다. 첫째 아이는 초야권으로 생긴 아이라 아버지가 불확실하니 아예 확실한 핏줄인 막내를 상속자로 삼는 것이다.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지만 이것도 초야권과 초야세의 정황 증거가 된다.

그리고 세계 곳곳에도 초야세와 비슷한 ‘결혼세’가 존재했다. 결혼세는 결혼하는 커플, 혹은 그 부모가 내는 세금이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함무라비 법전에 남아 있고, 중세 유럽에서도 각지에서 결혼세를 징수했다. 그 외에도 중세 영국에는 영주민의 딸이 결혼할 때 부모가 영주에게 양 한 마리를 바치는 관습이 있었다. 다만 관습이 세금이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 세계 각지에 존재하는 이러한 풍습은 아프리카 콩고에서도 확인된다.

창문의 개수대로 부과된 ‘창문세’


유럽의 거리를 걷다 보면 고풍스럽고 멋진 건물들이 많다. 마치 유럽의 거리 전체가 ‘놀이동산’처럼 느껴지는 듯하다. 100~300년 전에 지어진 건물도 흔하게 볼 수 있으며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들은 역사적인 경관을 소중히 여긴다. 무엇보다 건물 자체가 석조여서 매우 튼튼하다. 유럽의 거리가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는 이런 건물의 멋스러운 디자인이 살아 숨쉬기 때문이다.

유럽의 오래된 건물들 중에는 창문이 메꿔진 건물들이 있다. 창문은 많아도 대부분이 벽과 같은 소재로 막혀 있어 본연의 역할을 하는 창문은 일부에 불과하다. 왜 이런 건물이 남아 있을까? 여기에도 세금이 깊게 관련되어 있다. 1696년, 영국에서는 ‘창문세’가 만들어졌다. 난로세에 대한 저항에 시달리던 정부 당국이 새로 창문세를 신설한 것이다. 이전에 징수 관리인이 집안에 들어가 난로를 조사하는 바람에 거센 반발을 일으켰던 난로세의 대안이었다. 하지만 창문이라면 집안에 들어가지 않아도 밖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게다가 창문 수는 건물 크기에 비례하니 큰 집에 사는 부자는 세금을 많이 내고 작고 가난한 집은 그만큼 세금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 방식을 두고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도시의 비싼 집에 사는 사람보다 지방의 싸고 넓은 집에 사는 사람이 더 많은 세금을 내야만 하니 불공평하다.”라고 말했다. 영국인은 예로부터 “세금을 부과할 때는 가난한 자를 배려한다.”라는 방침을 중시하고 있었다.

창문세는 한 건물당 창문 6개까지는 면세됐다. 7~9개는 2실링, 10~19개는 6실링, 20개 이상은 8실링을 냈다. 창문세는 150년 넘게 부과됐으며 1851년이 돼서야 폐지됐다. 따라서 17세기 말부터 19세기 중반에 세워진 건물은 창문이 막혀 있는 것이 많다. 창문을 줄여서 세금을 피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후 프랑스 등 다른 유럽 국가들도 영국을 본떠 창문세를 도입했다.



PART 3 일본의 ‘황당한 세금’



전투에서 지켜 줄게 ‘전쟁 회피세’


전국 시대 패자 오다 노부나가는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전쟁 회피세’라는 세금을 부과했다. 당시 전투에서는 무사들이 사방에 진을 쳤기 때문에 근처 주민들은 피난을 가야 했다. 전투가 시작되면 무사들은 마을에 불을 지르거나 건물을 무너뜨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지역 주민들에게 전투는 굉장한 민폐였다. 이에 주민들은 전투가 일어날 기미가 보이면 일정한 금액을 지불하고 ‘방어어례(防御御?)’라는 패를 받았다. 이 패가 있는 곳은 군대가 진을 칠 수 없고 행패를 부릴 수 없었다.

노부나가도 이 방어어례를 발행했다. 1568년,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해 교토에 입성했을 당시, 나라에서는 1천 관에 달하는 ‘판전’을 징수했다.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도 “주요 사원이나 사카이 같은 큰 동네에서는 ‘주인(朱印)’이라 불리는 노부나가의 윤허장이 없으면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판전’이란 방어어례를 얻기 위해 치르는 금전을 가리키고, ‘주인’은 방어어례의 별칭이라 추측된다.

노부나가의 ‘방어어례’는 다른 무장들과는 조금 달랐다. 동네 주민들이나 마을 사람들에게 매우 유리한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다른 무장의 방어어례는 현장의 부대가 자유롭게 발행했기 때문에 정확한 발행처를 알 수 없었다. 또 부대마다 방어어례가 필요했기 때문에 각 부대에서 이중 삼중으로 야센(전쟁세)을 징수하기도 했다. 그러나 노부나가가 발행하는 ‘방어어례’는 한 번 받으면 현장 부대에 세금을 낼 필요가 없었다. 노부나가의 방어어례가 붙어 있는 장소에서는 부대가 야센을 걷는 행위가 엄격하게 금지됐기 때문이다. 또한 노부나가는 병사들이 마을 사람들에게 행패를 부리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관리했다.

이런 엄격한 군율 덕분에 지역 주민들도 ‘노부나가의 방어어례를 받으면 안심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게 됐다. 노부나가는 이런 ‘친절한 태도’로 영지민들의 민심을 얻었고, 그 덕분에 천하를 두고 경쟁할 때 다른 무장들보다 앞설 수 있었다.

일본의 쇠퇴가 한눈에 보인다 ‘소비세’


소비세는 일본 세수의 기둥이다. 유럽 국가들은 일본보다 비싼 간접세를 부과하는 곳이 많아서 ‘일본의 소비세는 저렴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또 ‘소비할 때마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부과되니 소비세는 좋은 세금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전 세계를 돌아보면 일본의 소비세가 상당히 결함이 많은 비상식적인 세금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소비세는 누구에게도 같은 비율로 부과되기에 언뜻 보면 공평해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소득이 낮은 사람일수록 부담 비율이 증가하는 ‘역진세’다. 소비세 계산은 ‘지출×소비세율(현재 일본은 10%)=소비세’이다. 소비세가 전체 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계산하면 같은 돈을 소비했을 때 소득이 많은 사람일수록 소비세가 전체 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줄어든다. 예를 들어 연봉이 1억 엔인 사람이 3천만 엔을 소비하고 남은 7천만 엔은 금융 자산으로 보관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 사람의 수입에 대한 소비세 부담 비율은 3%가 된다(3천만×10%=3백만, 1억 엔 중 3백만 엔이 차지하는 비율=3%). 한편 연봉 2백만 엔인 사람은 벌어들인 돈 대부분을 소비한다면 이 사람의 수입에 대한 소비세 부담 비율은 10%에 가까워진다(2백만×10%=2십만, 2백만 엔 중 2십만 엔이 차지하는 비율=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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