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흑역사
니컬러스 섁슨 지음 | 부키
부의 흑역사
니컬러스 색슨 지음
부키 / 2021년 9월 / 560쪽 / 22,000원
머리말 - 그 많은 부는 다 어디로 갔을까
기차표 예매 수수료의 기이한 여정온라인 기차표 판매처인 트레인라인에서 표를 사면 예매 수수료를 조금 낸다. 한 75페니 정도? 그런데 이 작은 예매 수수료가 은행 계좌를 떠난 뒤 지나는 여정은 놀랍기 그지없다. 트레인라인닷컴 유한회사라는 회사가 런던에 기반을 두고 이 사업을 운영하는데, 이 회사의 소유자는 다른 회사인 트레인라인홀딩스 유한회사다. 그리고 이 트레인라인홀딩스 유한회사는 또 다른 회사가 소유하고, 이 또 다른 회사는 또 다른 회사가 소유하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이렇게 트레인라인닷컴 위로 층층이 쌓인 다섯 회사를 거치고 나서 우리가 낸 작은 예매 수수료는 영국해협을 빠져나가 조세 도피처인 저지섬을 들러 다시 런던으로 돌아온다. 또 런던에서 다섯 회사를 더 거치고 저지섬에 한 번 더 휙 다녀온 다음, 유럽 본토로 넘어가 역시 조세 도피처인 룩셈부르크의 두 회사 계좌로 들어간다.
일단 룩셈부르크에 도착하면 작지만 용감한 우리 75페니는 금융 터널로 들어간다. 여기서부터는 추적하기가 좀 까다롭다. 하지만 곧 다시 모습을 쏙 드러낸다. 이번에는 카리브해 지역이다. 이곳에서 예매 수수료는 널뛰듯 위로 올라가면서 철옹성처럼 굳게 닫힌 비밀스러운 케이먼제도의 회사 서너 개를 거친다. 여기까지 이르면 은행 계좌를 떠난 뒤 이미 스무 개 정도 회사를 거치기 때문에, 우리 예매 수수료는 전 세계에서 흘러나오는 수많은 금융의 시내와 강물에 휩쓸려 둥둥 떠내려간다. 그러다 한데 합쳐 미국으로, 나락처럼 목구멍을 벌리고 있는 미국의 거대 투자회사 KKR로 흘러 들어간다.
도도한 돈의 강물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흘러 흘러 KKR 주주의 계좌로, 다시 말하면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큰 은행과 투자 펀드와 부유한 개인들의 계좌로 들어간다. KKR이 주로 돈을 벌어들이는 수법은 이익이 나도록 회사를 재편해서 매각해 버리는 것이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KKR은 실재하는 회사를 180개나 소유하고 있다. 내가 ‘실재’라고 말하는 까닭은 KKR이 실제로는 4000개가 훌쩍 넘는 법인체를 소유하거나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4000개 법인체 가운데 20개 이상이 저지섬에, 200개 이상이 룩셈부르크에, 800개 이상이 케이먼제도에 있으며 대개는 회계사가 설계한 가상현실 세계에서만 존재한다. KKR 제국의 바닥에 놓인, 부츠나 트레인라인 같은 실재 회사는 각각 자신 위에 우렁잇속 같은 기업 구조를 얹고서 여러 법인체와 뱀처럼 꼬불꼬불한 사슬로 이어져 있다.
내가 지금까지 서술한 내용은 불법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솔직히 사업이 점점 이런 양상을 띠고 있다. 그런데 예로 든 트레인라인의 기업 구조는 몇 가지 커다란 의문을 낳는다. 첫 번째 의문,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반드시 ‘금융화’를 이해해야 한다. 이 현상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1970년대였다. 이후 서서히 우리 곁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금융화는 금융과 보험과 부동산(FIRE) 부문이 규모도 세력도 급격히 성장한 배경과 맞물려 있으며, 금융과 관련한 시장과 기술, 동기와 사고방식이 우리 경제와 사회, 심지어 문화에까지 깊숙이 침투하는 현상을 낳았다. 트레인라인의 기업 구조는 금융화가 지닌 이 두 번째 측면을 보여주는 한 예시이기도 하다. 작은 장치나 톱니를 만들고 말라리아 치료법을 찾아내고 장난감이나 단체여행을 팔고 기차표를 편리하게 예매하는 플랫폼을 개발하여 경제 체제 안에서 진정한 부를 창출하는 회사 경영자에게, 생산성을 높이고 기업가정신을 북돋는 힘겨운 강행군에서 이제는 벗어나라고, 소유자에게 더 큰 이익을 안기는 방법을 연구해서 더욱 짭짤한 수익을 보장하는 금융 설계로 눈길을 돌려 그 달콤한 맛을 음미하라고 부추긴다.
두 번째 커다란 의문은 기업이 지닌 복잡성이다. 여러 회사로 이루어진 트레인라인 그룹이 2017년 영국 고객에게서 벌어들인 수익은 약 1억 4800만 파운드에 달한다. 이는 75페니짜리 예약 수수료가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의미다. 트레인라인은 유용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번거로움 없이 기차표를 끊을 수 있다. 그런데 2017년 영국에서 기차를 이용한 승객에게 이 서비스를 제공해 1억 4800만 파운드를 다 벌어들였을까? 비용을 절반으로 줄여도 그에 못지않게 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잖았을까? 이 1억 4800만 파운드에서 순부가가치는 얼마나 될까? 또 위험을 감수한 대가에 걸맞은 적절한 보상은 얼마쯤일까? 기차표 판매에서 우세한 지위를 누리는 이 회사가 부를 뽑아간다면 얼마가 적당할까?
이 질문들에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금융 배관이 대부분 저지섬과 룩셈부르크와 케이먼제도에 숨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하나의 사회로서 우리는 어디쯤에 선을 긋고 수익이 과도하다고 판단해야 하는가라는 철학적인 질문과도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사실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철도여행객이 트레인라인에 돈을 엄청 내고, KKR과 그 투자자들이 돈을 왕창 긁어 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금융화 시대에 기업의 경영자와 자문가, 그리고 금융 부문은 경제에 부를 창출하는 방향에서 멀어지고, 금융 기술을 이용해 경제에서 부를 수탈하는 방향으로 옮아갔다. 금융화는 회사 소유자와 경영자를 위한 이익 분출구를 열어 놓았다. 반면 토대를 이루는 경제가, 우리가 삶을 살고 일을 하는 터전이 무너져 갔다. 수익과 불경기는 부의 수탈이라는 한 동전의 양면이다. 이것이 내가 ‘금융의 저주’라고 일컫는 내용에서 중심을 이룬다. 금융의 저주라는 개념은 금융 부문이 확장하여 합당한 규모에서 벗어나 유용한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면, 이 금융 부문을 지탱하는 국가에 해를 끼친다는 것이다.
경쟁과 세금은 부의 적이다
괴짜 경제학자 베블런의 신랄한 통찰경제학자이자 사상가인 소스타인 베블런이 쓴 책 가운데 가장 유명한 『유한계급론』은 1899년에 출간되었다. 이 책이 예리하게 폭로하는 세계에서 생산력이 높은 노동자는 장시간 힘겹게 일하고, 기생충 같은 지배 계층은 이 노동이 내놓는 결실을 먹고 살았다. 부 역시 ‘과시 소비’와 ‘과시 여가’를 섬겼다. 이는 자신은 부자라서 일할 필요가 없다고 다른 이들에게 자랑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낭비 행위를 가리켰다. 베블런이 지적했다시피 부자는 항상 부와 권력을 더욱 탐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부자의 방종과 무절제가 점점 분노를 일으키는 게 아니라 숭배를 낳았다는 것이다! 억압받는 대중은 사회가 부자에게 베푸는 혜택을 타도하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따라하고 싶어 했다.
베블런이 다음으로 쓴 중요한 저서는 1904년에 출간한 『기업론』으로, 덜 알려졌지만 더 급진적이고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금융의 저주를 살짝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 베블런은 산업화와 ‘기계 처리 과정’, 즉 팔을 걷어붙이고 유용한 일을 척척 해치우는 능력 있는 공학자와 사업가를 소위 수익을 창출하는 ‘사업’과 대조해 놓았다. 신용, 대출, 소유권, 투기, 시장으로 이루어진 금융 상부구조가 생산 토대 위에서 지배하고 착취했다. 마르크스가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긴장에 주목했다면, 베블런은 이와 언뜻 달라 보이지만 관련 있는 투쟁에 집중한다. 부의 ‘창출자’와 부의 ‘수탈자’, 만드는 자와 빼앗는 자, 생산자와 약탈자 사이의 싸움이다. 중산모를 쓴 무리를 상상해 보자. 히스 로빈슨이 그리는 기계처럼 얽히고설킨 가느다란 배관 장치를 경제 체제 위에 놓고 조작하면서 저 아래에서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나 소비자의 주머니에서 동전과 지혜와 차용증서를 마구 빨아들이고 있는 모습을.
여러 세대에 걸쳐 경제사상가는 이 간극을 인지하고 있었는데, 적어도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출간한 1776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주된 문제는 누가 부의 창출자인지를 두고 서로 의견이 달랐다는 점이다. 보수적인 전통에 따르면 이들은 부자들이었다. 돈과 자본을 소유한 이들이 공장을 세우고 정부에 세금을 내면 정부는 가난한 보조금 수령자에게 이 부를 재분배했다. 이런 역사관에 비추어 보면 가난한 사회적 약자는 자본가에 달라붙어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베블런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부유한 부의 수탈자를 자기 배만 불리는 두꺼비에 비유했다. 이 두꺼비는 “파리와 거미가 수없이 오가는 혼잡한 길을 따라 자신만의 지정석을 이미 찾아 놓았다”고 주장했다. 이리하여 베블런은 더욱 격렬한 논란이 벌어지는 영역으로 한 걸음 성큼 걸어 들어가며 논지를 펴 나갔다. 사업가는 대개 지나가는 파리나 잡아먹는 게으른 두꺼비처럼 수탈을 통해서 뿐 아니라 적극적인 사보타주를 통해서, 다시 말해 베블런 특유의 가시 돋친 언어를 그대로 옮기자면 “효율성을 양심적으로 반납”해서, 부자가 된다. 이들 사업가는 결실을 낳는 일정한 흐름 중간에 개입해 나무를 흔들고는 별 힘 들이지 않고 열매를 주워 도망가 버린다.
비판자들은 헛소리라며 비웃었다. 누가 그런 바보 같은 몹쓸 짓을 하느냐고 하지만, 누구나 그렇게 한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베블런은 자본주의의 공공연하면서도 중요한 비밀 하나를 폭로했다. 거대 자본가는 효율적인 경쟁을 반기지 않으며 자유 시장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입으로는’ 그렇다고 말하지만, 경쟁다운 경쟁이 일어나면 가격이 내려가고 임금이 올라가서 결국 수익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자본가가 진정 좋아하는 것은 자기 입맛대로 요리할 수 있는 시장이다. 노동자에게 불리하고 소비자에게 유해하고 납세자에게 잔인한 시장, 바로 이런 곳에서 노다지를 캘 수 있다. 베블런은 이렇게 쓰고 있다. “부재 소유자들은 지금 패배만 안겨줄 뿐인 경쟁을 서로 벌이느니 그 경쟁의 노력을 오롯이 소비자를 대상으로 퍼붓고 있다. 따라서 사업계 내부에서 벌어지는 경쟁이 아니라 사업계 전체와 나머지 공동체 사이에 벌어지는 경쟁이 되었다.” 이 갈등이 금융의 저주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
석유왕 록펠러보다 막강한 금융왕 J.P.모건『기업론』은 당시에도 탁월했고 지금도 탁월한 탐사보도의 위업을 이어받은 결과물이었다. 존 D. 록펠러가 세운 스탠더드 오일 독점기업의 진면목을 폭로한 이 보도 기사에서 언론인 아이다 타벨은 그때까지 세상이 결코 알지 못한 음모와 담합을 파헤쳤다. 아이다가 들추어낸 바에 따르면, 록펠러는 베블런이 말한 사보타주의 달인이었다. 원유와 경유의 생산과 유통 시장을 조종하고 인정사정없이 때로는 폭력까지 휘두르며 경쟁사를 사들이거나 몰아내서 미국 전역을 망라하는 독점기업을 세웠다.
록펠러가 사업 활동을 벌이던 초창기에는 기업이 주 경계선을 넘어 사업할 수 없었다. 하지만 틈새를 찾아냈다. 여러 주에 흩어져 있던 기업을 한데 합쳐 하나의 트러스트(독점적 기업결합) 소유 아래 두었다. 트러스트는 유연하고 강력한 중앙통제 체계를 통해 전국 단위로 비밀스럽게 활동할 수 있었다(이런 이유로 이후 독점금지법과 조치가 반트러스트법으로도 알려짐). 이 트러스트 체제를 이용해 록펠러는 미국 정유 사업의 90퍼센트를 지배하며 소비자에게서 막대한 돈을 뽑아내고 분수처럼 솟구치는 수익을 올렸다. 그리고 이 수익은 핵심 사업을 넘어 철도와 은행, 철강과 구리, 그 외 여러 분야로 콸콸 쏟아져 들어갔다. 이 모습에 오늘날의 아마존을 떠올렸다면 제대로 방향을 잡은 셈이다.
한편 1913년 베블런이 『기업론』을 출간하고 10년 가까이 지나서 미 하원 위원회가 지금은 유명한 「자금 트러스트 조사 보고」를 내놓았는데, 이 보고서는 미국의 사업 지도자들이 나라 경제의 절반을 조종하려는 어마무시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폭로했다. 록펠러가 연루되었다고 의심을 받았지만, 이는 록펠러나 스탠더드오일보다 규모가 더 컸다. 자금 트러스트는 적어도 18개 주요 금융기업의 300개 이상 임원직과 지시 계통을 가로지르며 바둑판처럼 맞물려 있는, 미국 산업계 대부분을 지휘하고 금융어음교환소와 뉴욕 증권거래소마저 조종하는 어마어마한 조직이었다. 교활하게도 ‘은행윤리’라고 알려진 불한당들의 비밀 선언에 기반을 두었는데, 여기서 이들은 서로 경쟁하지 말자고 합의했다. 이 조직 꼭대기에 앉아 있던 사람이 은행가 존 피어폰트 모건이었다.
이 보고서가 내놓은 경고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산업계의 독점보다 더 위험한 세력이 존재했으며 이들이 산업계와 경제 전반에 신용을 배분하는 수단을 독점 지배하는 경우 훨씬 위험했기 때문이다. 보고서는 신용을 지배하면 경제를 지배한다고 경고했다. 베블런 시절 가장 유명한 변호사인 루이스 브랜다이스는 이 보고서의 조사 결과를 이렇게 요약했다. “이제까지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가장 귀한 재산이라고 여겨 왔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더 큰 수익을 누릴 수 있다. 다른 사람이 키우는 거위가 황금알을 낳으면 이 알을 빼앗을 특권이 있으면 된다. 투자은행은 지금 그런 특권을 누리고 있다. … 금융 과두 체제에서 중요한 인자는 투자 금융 전문가다.”
월스트리트가 세운 나라, 파나마독점이 사보타주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큰 수단이지만, 베블런 시절에는 이 외에도 갖가지 수법이 존재했다. 「자금 트러스트 조사 보고」에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가장 규모가 큰 형태 역시 모건의 은행과 관련이 있었다. 이 대하소설은 1899년 모건의 법률고문인 윌리엄 크롬웰이 미국 파나마운하회사라는 새 회사를 설립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파나마는 콜롬비아의 한 주였는데, 수익을 꽤 낳는 철도가 남북 아메리카를 잇는 좁은 지협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J. P. 모건과 작당하여 분리주의자를 무장시키고 지원했다. 분리주의자들은 파나마를 콜롬비아에서 빼앗아 수익성이 좋은 열차 환전 수수료를 손에 넣고 싶어 했다. 더구나 운하를 만들면 수익도 더 크게 늘어날 터였다.
결론만 말하자면, 파나마는 콜롬비아에서 독립했지만 사실상 미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 나라에 처음으로 파견한 공식 재무대리인이 J. P. 모건이었고, 파나마운하는 1914년에 개통했다. “파나마의 독립은 월스트리트가 기획하고 자금을 대고 완성했다.” 이는 모건의 변호사였던 오비디오 디아스 에스파노가 『월스트리트는 어떻게 국가를 세웠는가』라는 책에서 이 사건을 다루며 요약한 말이다. 이 일로 “콜롬비아 정부가 물러나고 새 공화국이 들어섰으며 워싱턴 내의 정치 토대가 부패로 흔들리고 라틴아메리카에 미 제국주의가 들어섰다.” 요지는, 월스트리트 일파가 정부의 군사자원을 이용해 교역의 중추 역할을 하는 세계적 요충지에 거대한 요금소를 세우고 사업을 벌였다는 것이다.
베블런은 이를 애국으로 포장한 “사보타주 운하”라고 덧붙였다. 국가대표가 세계무대에서 ‘경쟁하려면’ 일반 시민이 짐을 짊어져야만 한다. 국가대표라는 개념은 경제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제다. 페이스북을 설립한 마크 저커버그가 2018년 4월 사생활 침해 때문에 미국 상원에서 호된 추궁을 당할 때 미리 준비해 온 쪽지가 사진에 찍혔다. 쪽지에는 이런 짤막한 글이 씌어 있었다. “미국 기술회사는 미국에 매우 귀중한 자산이다. 날로 강해지는 중국 회사를 무찔러야 한다.” 이 헛소리를, 이 독점회사가 계속 큰 수확을 거두어들이고 국가 안전보장을 위해 미국 사용자의 소중하고 민감한 정보를 팔겠다고 요구하는 태도를 베블런은 이렇게 정리했다. 육군과 해군을 동원하여 “특정 지역에서 특정 수법으로 거저먹으려 드는 특정 기득권 무리의 실무적인 권리를 강화하거나 옹호했다. 일반 시민은 그 비용을 감당하고 자부심으로 의기양양해했다.” 베블런은 그때나 지금이나 국제 금융이나 경영에서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심하게 착각하는 주제가 무엇인지 정확히 간파했다. 바로 국가 ‘경쟁력’이다.
그런데 사보타주는 독점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파나마는 선박등기소를 세우자 때맞춰 조세 도피처 설립을 향해 첫 발자국을 떼었다. 조세 도피처는 두루두루 이용되는 또 하나의 현대적 사보타주 도구다. 조세 도피처가 무엇인지 일반적인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개념은 간단히 ‘다른 곳으로’와 ‘피한다’가 핵심을 이룬다. 돈과 사업을 다른 곳으로, 예컨대 역외로 빼돌려 달갑지 않은 국내 규제와 법을 피한다. 이 법은 대개 세금과 기업공개, 금융규제와 노동규제, 선적 조건 등등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조세 도피처’라는 단어는 적절하지 못하다. 그저 세금만 피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